미술시평

펜보이 2010. 7. 16. 11:12

 

     이임호 작 

 

실내작업과 현장작업 그리고 사진작업

 

 

신항섭(미술평론가)

 

자연주의 또는 인상주의 회화는 실재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다. 자연경치 및 자연에 존재하는 물상의 아름다움을 조형언어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보고 느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실제와 마주함으로써 비롯되는 미적 감흥은 그림으로 재현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미적 감흥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감동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옮겨놓아서는 감정이입이 이루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 대량생산되는 상화에서 미적인 감동을 느낄 수 없는 것은 기계적인 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화가들은 아름다운 자연경치를 찾아 나선다. 산과 물은 물론이요, 꽃이나 나무 그리고 바위를 보면서 신묘한 형태 및 색깔에 현혹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직접 마주함으로써 미적감흥 및 표현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러한 감정은 자연미에 감응함으로써 일어나는 미적흥취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장작업의 경우 화가 자신이 자연 속에서 느끼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포함하여 싱그러운 공기와 온갖 물상이 발산하는 냄새, 그리고 온몸으로 느끼는 촉감 등이 그림 속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자연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이처럼 실제를 체험하고 그 느낌을 작업에 그대로 반영하기 위해서이다.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거드는 물상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형태 및 색채 그리고 생존방식을 보면 어느 것 하나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그 경이로움에 대한 화가 자신의 소견 및 감정이 그림에 반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처럼 현장작업은 거짓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직 생생한 현실이고 그 현실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인 것이다. 어쩌면 사실주의 회화는 자연미를 능가할 수 없다는 인간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지 모른다. 즉, 자연의 모방만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적인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시각이다.

예술이 모방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어떤 형태든 결과적으로 자연미를 흉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에 기인한다. 실제로 자연은 조형의 원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설령 추상적인 이미지일지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자연과의 연관성을 뿌리칠 수 없다. 자연에는 사실성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성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묘사력이 출중하고, 미적인 감수성이 풍부하며, 창의성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자연미를 능가하는 작품은 가능하지 않다. 제아무리 세련된 조형언어를 구사할지라도 결코 자연미를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산과 물과 들과 하늘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자연의 조화는 화가의 욕구를 부단히 자극한다. 자연미 그대로를 옮겨놓더라도 충분히 아름답기에 구태여 자의적인 해석을 곁들일 필요조차 없다. 어쩌면 자연주의 화가들이 재현적인 묘사기법에서 전념하는 것도 보이는 현실 그 자체에서 더 이상 가감할 것이 없다는 판단인지 모른다. 아름다운 자연미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낄 수 있기에 그렇다.

따라서 자연주의 및 인상주의 화가들이 아름다운 자연경치를 찾아나서는 것은 순전히 자연이 만들어낸 절묘한 조화 및 생명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저마다 다른 형태 및 색채를 뽐내며 아름다운 자연미를 거드는 갖가지 물상들의 그 질서를 보면 신묘하기 이를 데 없다. 무질서하고 복잡한 듯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풀 한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그루, 바위 하나의 모양새를 보면 흠잡을 데 없다. 잡풀끼리 뒤엉켜 혼잡스러운 듯싶어도 가까이 다가가 보면 결코 무실서하지 않다. 전체적인 조화에서 결코 위배되는 일이 없다.

어쩌면 화가들이 캔버스와 이젤을 메고 스케치를 나가는 것도 다름 아닌, 자연의 속내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까닭이리라. 멀리 펼쳐지는 풍경화를 그릴지라도 바로 눈앞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지어내는 생명의 신비와 그 조화로운 관계를 관찰하는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자연의 속내를 탐색함으로써 조형의 본질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관심과 관찰은 자연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가능할 따름이다. 멀리 떨어져 그 전모만을 바라보면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은 허상을 꿈꾸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뜨카첸코 작 (러시아) 

 

스케치를 한다는 것은 대자연의 섭리를 탐색하기 위한 필수적인 절차이다. 실상을 스케치한다는 것은 자연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문 앞에 서는 일이다. 스케치를 통해 실제의 자연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체득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실상이 존재하는 현실적인 공간감, 즉 입체적인 형태파악이다. 단순히 자연미나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조형의 원본으로서의 구조를 익히고 체득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풀 한포기일지라도 실제의 자연에서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지 공간과의 관계를 통해 면밀히 탐색함으로써 자연이 만들어낸 형상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이처럼 자연의 본질, 즉 형상의 법칙 및 그 구조를 면밀히 파악하고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모방이 가능하게 된다. 모방이란 존재하는 물상에 대한 완벽한 형태모사를 의미한다. 자연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모사한다는 것은 그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조물주의 조형의 비밀, 그 신비를 절반쯤은 훔쳐내는 것이 된다. 자연의 섭리와 형태적인 구조 및 법칙을 이해했을 때 실제의 작업에서 감상자의 눈을 속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적인 형태묘사의 경우 단순히 사물의 외양을 피상적으로 읽는데 그쳐서는 자연성, 즉 생동감을 이끌어낼 수 없다. 물상이 존재하는 그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단순한 눈의 심부름만으로 끝나고 만다.

사진이 일상생활에서 보편화된 이후 화가들은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로부터 미적감흥을 맛보려는 욕구를 잃고 말았다. 간편하게 사진을 찍어다가 그대로 복사하듯이 묘사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 소수를 제외하면 현장에서 스케치하고 채색작업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문 풍속이 되고 말았다. 구태여 오랜 시간 땡볕 아래서 작업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물론 사생회와 같은 단체에 속해 현장작업을 고수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체적으로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정서를 중요시하지 않는 경향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자연미를 추구하는 풍경화 작가들 가운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생동감의 표현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어차피 현장작업이나 사진작업이나 그게 그러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자연과 마주하면서 그 실상에서 풍기는 대기의 존재성, 즉 생동감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을 이용하는 작업은 실재하는 풍경 또는 물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면 된다. 사진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기계적인 정확함으로 인해 시지각이 놓칠 수 있는 부분도 명확히 드러내준다. 그러기에 사진이 포착한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써 충분하다. 사진의 이미지를 확대하여 비례만 정확히 맞추어주면 실재하는 자연의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생각처럼 좋게 나타나지 않는다.

사진을 이용하는 작업의 가장 큰 약점은 생동감 및 공간감의 결여이다. 사진기술은 실제를 가감 없이 그대로 재현하지만 일안렌즈라는 특성상 입체감을 나타낼 수 없다. 다시 말해 카메라 프레임에 들어오는 물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적인 거리감을 포착할 수 없다. 눈이 둘인 인간과 달리 카메라는 눈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간적인 지각능력이 없는 것이다.

사생, 즉 현장작업은 카메라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히 포착하기는 어려울지라도 공간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앞에 있는 물상과 물상 사이에 공기층으로 존재하는 입체적인 공간에 대한 지각능력을 통해 심도를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사진을 이용하는 작업에서도 현실적인 공간지각능력을 통해 실제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다. 이는 현실에 대한 경험과 묘사기법, 즉 명암기법 및 원근법으로 입체감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장작업과 사진을 이용한 작업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공간적인 표현, 즉 심도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 어렵지 않다. 기억 및 묘사기법에 의존하는 것과 실제 현장에서 보고 지각하는 공간감은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적인 묘사가 아닌, 인상주의 회화와 같은 보다 자유로운 형식의 작업은 엄격한 공간감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간감보다는 보다 발랄한 색채이미지와 빛의 효과를 중시하는 경향이다. 인상파 이전까지 화가들은 사실주의 회화일 경우에도 컴컴한 실내에서 작업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동감보다는 회화적인 이상주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눈으로 직접 보고 그릴 경우에도 현장감보다는 회화적인 아름다움, 즉 품격 높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키는데 집중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림이란 그 자신의 내부에서 발단하는 사상 및 철학의 조형적인 해석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희미한 불빛 아래서 작업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인상주의 미학이 출현하면서 비로소 화가들은 화실을 박차고 나와 밝은 신선한 공기와 밝은 햇빛으로 넘치는 실외작업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인상주의 회화가 발랄하고 경쾌하며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은 빛과 색채가 뿜어내는 생명의 광휘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상주의 회화는 자연의 색깔보다 과장되고 있다. 이는 순색의 아름다움을 통해 빛과 생명의 광휘를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거기에는 신선한 공기, 즉 오염되지 않은 싱그러운 대기가 존재한다.

 

      이호중 작

 

인상주의 이전 사실주의 회화에서 놓치고 있던 생명의 광휘를 찾아낸 것이다. 이는 순전히 실제의 자연과 마주함으로써 일어난 조형의 혁명이었다. 실내에서 박차고 나옴으로써 비로소 눈부신 햇살이 남김없이 들추어내는 자연의 속살, 즉 생명체의 환희로 가득한 자연의 진면목을 보게 된 셈이다. 사실주의 회화와는 또 다른 관점으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게 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렇듯이 새로운 방식으로 현장작업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실내작업은 실외작업과는 다른 장점이 있다. 비록 현장감은 감소할지언정 사유의 깊이가 이를 상쇄시킨다. 시선을 현혹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오직 캔버스와 마주함으로써 자연히 사유의 시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각적인 이해를 넘는 사유의 전개를 통해 사상 및 철학적인 세계가 깃들이게 된다. 그것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은연중에 그림의 정서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인상주의 이전의 사실주의 회화에서는 숭고미가 존재했었다. 현실과 다른 이상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설령 눈에 보이는 현실을 재현하는 형식을 취했을지라도 실내작업을 통해 사유를 전개함으로써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깊이에 이를 수 있었다. 눈으로만 이해되는 그림이 아니라,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소양을 필요로 하는 그림이었다. 심미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이러한 제작태도는 실내작업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컴컴한 불빛 아래에서 모든 감각은 캔버스에 집중되고, 그 과정에서 인간 삶에 대해 고뇌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이에 반해 사진을 이용하여 그대로 재현하는 그림에서는 사유의 흔적이 미약하다. 조형적으로 고민할 필요 없이 사진의 이미지를 충실히 옮겨놓음으로써 완성되기에 그렇다. 사진을 이용하는 작업은 화가 자신의 사유가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평면적인 공간만을 제공하고 있기에 그렇다. 사진촬영을 하는 순간의 체험에 의해 사진의 공간을 이해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분명하기 마련이다. 공간지각 능력이란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점차 불명확하게 된다. 점차 기억의 감각이 흐릿해지는 것이다.

사진을 이용하는 작업과 현장작업에는 엄연한 시각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무엇보다 공간적인 심도의 차이가 뚜렷하다. 이러한 시각적인 차이는 심미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사진을 이용하는 작업은 심도가 낮기 마련이어서 작품의 깊이에도 영향을 미친다. 현장작업은 사진과 같이 정밀하게 묘사하지 않더라도 구조적인 견고함을 통해 작품적인 깊이를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차이를 시각적으로 인지하기는 쉽지 않으나, 작품성을 놓고 볼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회화 방식이었던 실내작업은 현장작업과는 달리 작가의 내면세계를 심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사유의 세계를 지닌다. 똑 같은 현실적인 정경인데도 그 방법의 차이에 따라 이처럼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이상적인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왜냐하면 미적 가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묘사방식도 이처럼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서울아트코리아" 2010년 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