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펜보이 2010. 7. 30. 10:14

 

한국화, 그 쓸쓸한 뒤태

 

신항섭(미술평론가)

 

‘더 이상 전통회화는 없다.’ 전통회화 작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자조적인 심경을 그대로 토로하는 이 한마디는 스스로의 가슴에 비수를 꼽는 고통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화 가 당면하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전통회화 작가들이 붓을 꺾거나 전시회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절망적인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붓을 들고 종이와 씨름한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미술시장 상황을 보면 전통회화 작가들의 입에서 왜 이런 절망적인 말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다. 가장 현실적인 미술시장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대형 아트페어에서 전통회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현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통회화는 전래의 화목 및 기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수묵화와 채색화를 말한다. 이들 전통회화가 아트페어에서 종적을 감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2000년대로 들어서기 이전부터 미술시장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전통회화가 미술시장으로부터 밀려나기 시작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시대흐름 또는 시대감각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전통회화는 요지부동, 전통적인 습속에서 좀처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스승의 화법을 그대로 따르는데 만족하는 것인지, 아니면 옛 작가들의 작품을 참고로 하는 것으로도 그림이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른다. 한마디로 자기혁신이라는 창작의 윤리성을 외면한 채 현상에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길 없다. 자기정체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회화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1980년대 난데없이 들이닥친 한국화 구매열풍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당시 한국화 작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국화 구입 붐에 편승 그야말로 꿈같은 시절을 보냈다. 일부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선금을 지불하고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어느 중진 작가의 작품은 장미꽃 숫자에 따라 가격이 달라졌다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그 만큼 한국화는 전대미문의 호황을 누렸다. 그 덕택에 일부 작가들은 그림을 팔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몇 년간 호황을 누리던 한국화 시장도 마침내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그야말로 백일몽 같은 한 시절이 끝난 것이다. 그로부터 10여년 후인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다시 한 번 미술시장이 불붙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한국화가 아닌 양화 차례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치솟던 한국화의 인기는 한순간에 곤두박질치고 그 빈자리를 양화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화가 때 아닌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부동산 투기바람으로 목돈을 쥔 강남 아줌마들이 동양화에 투자를 하게 된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일테면 투기자본이 미술시장에 유입되었고 그 대상이 한국화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양화가 득세하면서 상대적으로 한국화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게 된다. 양화작가들이 시장 주도권을 쥐게 되자 한국화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고 가격은 급락하기에 이르렀다. 가격하락보다는 미술애호가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물론 이러한 미술시장의 급격한 상황변화는 한국화가 유행할 당시 작품이 지나치게 남발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비슷한 작품이 너무 많다보니 가격을 지탱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처럼 미술시장에서 한국화가 투자대상으로서 매력을 상실하게 된 이후 전통회화 전체의 침체로 이어지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현대수묵화 운동이 일어나 현대미학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는 듯싶었으나 그마저도 오래 지탱하지 못했다. 또한 1990년대 후반에는 진경산수 붐이 일어 실경산수가 유행하는 듯했지만 양화 및 현대미술의 위세에 눌리고 만다. 문제는 한국화에 대한 미술시장에서 반응이 저조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여기에는 미술애호가들의 구매욕을 자극할 만한 참신하고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이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원색적인 색채로 현대적인 조형언어 및 어법을 구사하는 작가들이 출현하면서 양화 중심의 미술시장으로 자연스럽게 편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는 전통성을 강조하지 않음은 물론 서구적인 조형개념을 받아들이는 파격적인 변신을 감행함으로써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가운데서도 일단 미술시장에 진입하는 데는 성공한다. 즉, 전통적인 재료에 집착하지 않고 아크릴과 같은 서구적인 재료를 과감히 도입함으로써 현대인의 미적 감각 및 취향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부합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한국화의 변신을 두고 한국화 작가들 사이에서도 서구재료를 사용하는데 대해 갑론을박했지만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부 서구재료를 사용하는 작가들은 스스로 한국화 작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장르가 해체되는 시대에 한국화 서양화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강변한다. 한국화를 전공했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화의 틀 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한국화를 하든지 서양화를 하든지, 조각을 하든지 자신의 신념과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세상이 변하면 작가도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얘기다.

한국화가 처한 현실은 이렇다.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들조차 전통회화의 미학이 큰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료를 바꾸고 현대미학을 도입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다만 전통미학에서 벗어남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조형세계를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식의 논쟁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물론 전통회화에서도 일부 작가들은 재료와 화법을 견지하는 가운데서도 자기만의 조형언어 및 어법을 강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 전통회화가 미술애호가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한들 그에 개의치 않고 전통회화의 조형개념에 충실하다. 그림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고 보면, 시대의 흐름을 좇기보다는 자신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독자적인 형식을 만들어내려는 의지야말로 전통회화가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창의적인 발상으로 개별적인 형식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은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시대상을 작품에 반영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즉 치열한 삶의 공간을 주시한다. 즉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응하면서 느끼는 개인적인 소견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전래의 화목이나 화법에서 벗어나 그림의 내용에 맞는 기법을 개발하는데 주저치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의 감각과 조형적인 사고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이런 작가들은 대체로 인물을 제재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처럼 현실감각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자칫 전통성을 간과하기 쉽다.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표현, 그리고 방법론을 중시하다가 보면 현대미학의 바다에 빠져 헤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슨 재료를 쓰든지 개의치 않고 어떤 식으로든지 독자적인 형식만 찾아내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고착되기 십상이기에 그렇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적지 않다. 전통회화인지, 현대회화인지 또는 한국화인지 양화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아무리 서구미학이 대세일지라도 전통적인 회화가 가지고 있는 미적 가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전통회화의 조형개념 또는 미학을 견지하면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현상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미약하고, 새로운 조형세계에 대한 탐색이 부족하며, 현실적인 감각을 외면하고 있기에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미적가치 또는 예술적인 가치는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표현양식이나 형식만이 예술적인 가치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전통회화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조형언어 및 어법을 통해 새로운 형식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면 저절로 눈이 열리게 될 것이다.

 

<미술신문 제439호(2010년6월10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