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펜보이 2010. 8. 15. 14:35

 

가모이 레이 

 

 

인물화, 그 궁극의 표현

 

신항섭(미술평론가)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신에 비유한다.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신과 동격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신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이 동일하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신의 존재를 본 일이 없는 인간으로서는 스스로 우월한 존재로 확신하는 인간의 형상에다 신성을 부여함으로써 초월적인 존재로 부각시킨다. 신은 인간과 동일한 형상이지만 인간과 다른 점은 무소불위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형체는 동일하되 인간보다 우월적인 존재로서의 신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간 형상과 동일시하는 것은 인간의 잠재된 욕망의 표현이다.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존재에 대한 꿈과 욕망을 인간 스스로의 형상으로 현시하는 셈이다.

어쩌면 인간 스스로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이자 창조적인 존재로서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강구해낸 것이 예술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 예술이란 인간 스스로 창조적인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세상만물을 형용하는 신의 능력에 필적할 수 있는 숭고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수단인지 모른다. 그렇다. 인간으로서의 능력 가운데 가장 숭고한 인격체로서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이 다름 아닌 예술이다.

서구미술에서 신과 인간의 형상을 제외하고서는 예술을 논할 수 없다. 초기 미술은 신격에 대한 봉헌의 의미로 시작되었다. 신은 인간과 동일 형상을 하고 있으나 신성불가침의 절대적인 존재로서 위치한다. 단순히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대상으로서의 신격을 뛰어넘는 숭고한 존재로서 인간 자신의 영원한 구원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그러기에 신을 제재로 하는 일련의 미술은 존엄한 신격체가 지니는 숭고미를 이상으로 한다. 물론 창조주로서의 신은 인간과 같은 현실공간에 존재한다. 현실공간에 존재하는 신의 형상을 통해 거기에 필적하는 인격의 완성, 즉 신격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으리라는 꿈과 용기를 갖게 된다.

서양미술에서 인물화는 이처럼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의 존재를 이상화하는데 모아진다. 서양미술에서 인물소묘를 중시하는 것도 이상적인 존재로서의 완벽한 신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체적인 구조와 그를 완벽히 재현해내기 위한 손의 기술을 갖추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인체의 외형묘사는 물론이려니와 얼굴 및 신체동작을 통해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데는 섬세한 묘사력과 함께 철학적인 이해가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격체로서의 인간형상은 인체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를 통한 치밀한 세부묘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모이 레이

 

한국화단의 실정을 보면 인물화에 대한 선호도가 극히 낮다. 인물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타 장르에 비해 현저히 낮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가운데 판매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두드러진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린 그림을 집안에 걸어놓을 수 없다는 기이한 이유 때문이다. 이는 인물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기인한다. 회화 속의 인물을 그 자신의 현실적인 삶과 연계시키는 독특한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낯선 사람을 집안에 들여놓을 수 없다는 배타적인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예술작품속의 가공의 현실과 실제의 현실을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특히 사실적인 인물화의 경우 선호도는 현격히 떨어진다. 이처럼 차가운 미술시장의 반응이 인물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그러기에 인물화를 전문적으로 하는 작가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체로 풍경화나 정물화를 겸하고 있다. 그러나 시각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할지라도 인물화는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다. 화가가 되기 위한 소묘공부는 다름 아닌 인체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화 작가 숫자가 적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한국의 미술대학에서는 인체소묘를 가르치지 않는 데도 원인이 있다. 즉 인물화에 필요한 기초적인 기술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근대미술관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인물화를 보고 익힐 곳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양화에 인물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설령 정통아카데미즘에 충실한 인물화는 아닐지언정 1-2세대 양화작가들이 남긴 인물화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근대미술관이 존재치 않음으로써 이들의 작품을 걸어놓고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전시하는 장소가 없다. 어쩌면 한국현대회화에서 인물화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근대미술관이 존재치 않음으로써 그 가치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체소묘는 화가로서 필요한 기초기술 습득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대학에 가기 위한 입시공부 차원에서 석고인물상만을 그릴 따름이다. 대학입시를 위해 석고데생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정물을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석고데생은 인체에 대한 숙지 및 기술습득이 아니라 정물화를 위한 명암기법을 익히는 기능교육일 따름이다. 인물묘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셈이다. 수학공식을 익히는 것처럼 반복해서 그리다보면 입시평가기준에 필요한 기술적인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가모이 레이

 

이에 반해 실제 모델을 대상으로 하는 인물소묘는 석고데생에서 요구되는 명암기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물의 외향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골격과 근육 그리고 얼굴표정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저마다 골력과 근육 그리고 성격이 다르다. 그러기에 해부학적인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카데미교육방식에서 해부학이 필수적인 것은 실제에 육박하는 인물묘사를 위해서는 외면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얼굴표정이 분노에서 슬픔으로 바뀌는 것은 단지 얼굴에만 국한된 문제만이 아니다. 얼굴의 근육은 물론 신체 전체의 근육이 동시에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신체에는 신경조직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고 신경조직에 의해 근육이 움직이는 까닭이다. 이와 같은 인체의 메커니즘은 인체해부학을 익히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국화단의 인물화는 대체로 인체해부학에 따른 정확한 소묘를 익히지 않은 탓에 그저 작가 개개인의 눈과 타고난 재능에 의탁하는 정도이다. 그러기에 인물화에서 단지 그 외형만을 닮게 묘사하는데 그치고 만다. 두상만 하더라도 골격을 포함하여 근육이나 혈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오직 그 전체적인 이미지만을 재현하는데 머문다. 따라서 인물의 표정이 죽어 있거나 굳어 있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신체적인 반응이 얼굴 표정에 반영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가모이 레이

 

                                                                              

                                                               가모이 레이  

 

인간은 이성적이자 감정의 동물이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언어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얼굴표정은 내면세계인 감정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눈을 가리켜 마음의 거울이라고 했듯이 눈을 통해 아주 미묘한 감정의 변화조차 읽어낼 수 있다. 적어도 바른 인물화라면 이와 같은 신체적인 메커니즘이 만들어내는 표정의 변화를 포착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감동을 줄 수 있다. 살아 있는 표정, 즉 마음의 움직임에 의한 신체적인 반응을 반영하지 못하는 인물화는 감동을 줄 수 없다.

인물화와 마주하면 누구나 그 얼굴과 눈으로 시선이 집중하기 마련이다. 복잡한 심리세계를 반영하는 눈을 통해 그 인물의 실상, 즉 진실한 면모를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을 통해 내면세계를 드러낸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물론이려니와 심리의 영역까지 이해하지 않으면 눈의 표정에다 내면세계를 투영시킬 수 없다. 눈의 표정은 눈동자의 움직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눈의 움직임은 의식 및 감정에 이끌리지만 신체적인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면 다른 근육 및 골격 그리고 신경조직까지 눈의 움직임과 연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체적인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단지 눈의 정확성에만 의탁하는 인물화는 내면적인 울림을 끌어내지 못해 죽은 표정이 되고 만다.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릴 때 그 모델이 처한 복잡한 심리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감동적인 작품이 될 수 없다. 렘브란트의 인물화가 시각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깊은 철학적인 접근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탐구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물을 그릴 때 인체 안에 기거하는 영혼의 존재성을 암시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감동적인 인물화를 그릴 수 없다. 어쩌면 한국작가 가운데 인물화로 성가를 높인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도 이처럼 인간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부족한데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정확한 소묘, 즉 기술적인 완성도는 차치하고라도 희로애락의 감정을 명료하게 반영한 인물화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외형묘사에 치중함으로써 단지 시각적인 이해의 차원에서 머무는 인물화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임호 "화가의 아내" <이임호는 한국인 최초로 러시아 레핀미술아카데미에서 실기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물론 좋은 인물화가 사실주의 화풍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상주의 화풍 또는 표현주의 화풍으로도 감동적인 인물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인물화는 비록 사실주의 회화처럼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는 아닐지언정,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부족하지 않다. 어느 면에서는 거친 터치를 통해 더욱 선명히 내면세계를 표출할 수 있다. 고흐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투박하고 격정적인 터치가 지어내는 감정표현은 오히려 사실주의 인물화보다 직접적이어서 시각적인 호소력이 강하다.

인물화 작가는 변화무쌍한 얼굴표정이나 몸짓으로 노출되는 인간의 내적 감정세계를 간파하는 감지능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밀한 관찰과 지적 소양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감각이 요구된다. 또한 인간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철학적인 이해 및 사색이 필요하다. 그 하나의 방법은 문학서적을 통한 간접체험과 전문서적, 그리고 사색이다. 회화가 시각예술이라고 해서 단순히 시각적인 이해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회화 또한 문학과 마찬가지로 심오한 인간세계 그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만 한다. 달리 말해 예술에 철학이 결핍되어서는 결코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없기에 그렇다.

일본작가 가모이 레이(1928-1985 鴨居 玲)는 인물화에서 일가를 이룬 작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데생의 궁극이 어디인지 알고 싶다’는 원을 세운 뒤 인물소묘에 집중했다. 그 결과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독자적인 형식의 소묘를 완성한다. 초기에는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인물의 신체적인 구조를 숙지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이후에는 외형묘사에 치중하기보다는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치열한 대결이 전개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거칠면서도 힘차고 두터운 느낌의 생동감 넘치는 선을 갖게 된다.

그는 마치 현란한 춤사위를 연상케 하는, 즉 난비하는 듯싶은 분방함 및 속도감이 느껴지는 선으로 인간의 내면세계 깊숙이 침투하는데 성공한다. 연필 또는 목탄이나 크레파스로 그려지는 소묘는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치열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섬세하지는 않으나 수없이 반복되는 선이 축적되면서 덩어리를 형성하고 그 덩어리 속에서 내면세계가 마치 연꽃처럼 선명히 피어오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묘를 기반으로 하는 그의 인물화는 일찍이 경직된 초상화 형식에서 탈피, 피가 끓어오르는 듯싶은 격정적인 인간 감정을 파헤친다. 거기에는 심오한 인생철학이 수반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의 인물화와 마주하면 인간의 의식의 그림자까지도 현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싶다. 이미 인간 삶을 꿰뚫은 철학자적인 면모가 읽혀지는 것이다. 정물화와 풍경화도 있지만 사물의 형태묘사보다는 그 정서 표현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어느 소재 및 제재든지 삶의 진면목과 마주하려는 긴박감과 처절함이 묻어난다. 렘브란트 이후 그처럼 심오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갈파한 화가가 그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다.

인물화는 결과적으로 인간 삶, 즉 인생에 대한 철학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물과 같이 죽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즉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인체를 소우주라고 말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는 가운데, 창의적인 발상과 도구를 다루는 뛰어난 손의 재능으로 스스로를 창조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다. 회화라는 예술양식은 어쩌면 신의 능력을 흉내는 일에 다름 아닌지 모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조물주처럼 예술이라는 표현양식을 통해 창조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서울아트코리아 2010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