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현장

펜보이 2010. 10. 28. 16:56

 

 

 

박대조의 작품세계

 

자연의 순수성으로 환원하는 세상의 창

 

신항섭(미술평론가)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눈은 세상과 소통하는 신체적인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눈은 사물을 인지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거기에 즉각 반응한다. 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인식한 사물의 정보에 대해 감정이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다시 말해 눈은 세상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받아들인 인상을 거꾸로 세상을 향해 내보낸다. 인간의 마음 또는 감정이나 의식세계가 눈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눈은 인터랙티브, 즉 세상과 인간이 소통하는, 양방향의 정보 전달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인터랙티브한 표현방식을 추구하는 디지털아트의 원조는 다름 아닌 눈이 아닌가싶다. 보는 창으로서 뿐만 아니라 보여주는 창으로서의 기능을 지닌 눈이야말로 디스플레이를 매개로 하는 현대 전자기술의 원천이자 디지털아트의 원조인지 모른다.

박대조의 작업은 이렇듯이 인간의 눈을 매개로 세상과의 새로운 소통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인간의 눈을 매개로 하는 세상과의 소통방식은 그의 작업에서 이미 훌륭히 기능하고 있다. 많은 미술전문가들과 미술애호가들이 그의 작업에 관심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이들의 표정을 스냅형식으로 포착하는 그의 사진 작업의 초점은 눈동자에 집중된다. 맑은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발산하는 강렬한 시각적인 인상과 그 안에 교묘히 은폐된 메시지는 강도 높은 감동을 유발한다.

 

 

그의 작업에서 아이들의 눈동자는 세상을 비추는 창이다. 그런가 하면 힘겨운 삶 속에 던져진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담긴 내면의 창이기도 하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내면을 드러내는 창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어린아이들의 눈은 그의 조형적인 사상 및 철학을 은유한다. 아이들의 눈을 세상에 대한 그 자신의 작가적인 관점을 투영시킬 수 있는 캔버스로 설정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예술을 통해 수행할 수 있는 작가적인 시각, 즉 유미주의를 뛰어넘는 시각적인 긴장과 의미내용을 작업 속에 투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의 눈은 그 자신의 작가적인 관점을 반영하는 캔버스이자 의식의 창이 된다.

그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고정관념이나 선입관이 형성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 본성을 미적 가치로 상정하려는데 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히말라야산맥의 장엄한 자연풍경과 그 자연을 바라보며 사는 아이들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원시적인 자연 그대로의 풍경에서 감동을 받듯 원죄가 없는 아이들의 표정에서도 감동을 받는다. 해맑은 표정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이 깨끗해지는 듯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과 아이들의 표정은 감동과 더불어 정화기능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언어는 다름 아닌 순수성이다. 인위적으로 가공하지 않은 상태, 즉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순수성이야말로 가장 호소력이 강한 소통의 수단일 수 있다. 감동을 유도하는 순수성을 아이들에게서 찾아낸 셈이다. 실제로 그가 포착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가을하늘을 비추는 호수처럼 맑고 또한 깊다. 특히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는 맑은 눈동자는 신선한 산소에 목마른 우리의 갈증을 일거에 해소시킨다. 그렇다. 그는 아이들의 순수한 표정과 눈동자가 얼마나 감동적인 소통의 언어로 기능하는가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작품 가운데 <Boom, Boom>은 검은 마스크를 쓴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의미심장하다. 검은 마스크는 숨겨진 얼굴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부정하는 용도로 쓰이는 검은 마스크를 쓴 아이의 눈동자 또한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반감을 나타내는 표정이 역력하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아이의 순수한 눈동자와는 사뭇 다른 표정인 것이다. 세상에 대한 적대적인 표정에 가까운 이미지일 수도 있다. 세상에 대한 공격적인 감정이 없는 순수한 눈동자일 경우에도 검은 마스크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아이의 눈동자에 버섯구름, 즉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임이 명백하다. 이렇듯이 그는 세상읽기에 남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은유적이고 암시적이면 상징적인 이미지 표현방식으로 접근한다. 직설적인 언어보다는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가의식이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근거는 없다. 오히려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미래를 지향하고 있기에 그렇다. 최근 작업에서는 마스크 대신에 히말라야 설산풍경이나 장엄한 산맥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자연을 앞에 두고 그 뒤에서 세상을 응시하는 반짝이는 아이의 눈동자는 인류가 염원하는 구원의 상징임을 선명히 보여준다.

아무튼 그의 작업은 전체적으로 세상사에 오염되지 않은 순진하고 맑은 아이들의 눈동자에 세상 풍경 또는 얘기를 담는다. 사진 이미지 또는 직접 묘사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 아이들 본래의 눈동자에다 풍경이나 사건 또는 인물의 이미지를 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동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빛나는 눈동자로 착각하거나 눈동자에 비친 이미지로 인식할 뿐이다. 그렇지만 눈동자에 들어앉은 이미지를 보면 그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의도를 읽기 어렵지 않다.

 

 

그는 아이들의 눈을 빌려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 즉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자각을 통해 일어나는 작가의식이 작업에 투영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 또는 아이들의 마음이 현현하는 창을 통해 세상과 삶의 의미를 인식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자기완성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즉, 자연을 닮은 아이들의 순수성 위에 세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얹어 예술가적인 견고한 성채를 쌓으려는 것이다. 얼굴 가운데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 아이들의 해맑은 눈동자에 담는 그의 메시지는 호소력이 강하다. 아이들의 맑은 눈이 가지고 있는 강한 흡인력은 그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집중시키는 까닭이다.

아이들의 눈동자에 담는 메시지는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지극히 현실적인 사건 및 상황이다. 사소한 개인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인류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들까지 그가 보고 느끼는 세상의 문제들이 아이들의 눈동자에 담긴 이미지로 표현된다. 가까이 다가서야 알 수 있는 아주 적은 이미지이지만 그 내용과 파장은 결코 적지 않다. 환경문제에서부터 폭력을 상징하는 원자탄 그리고 아이들의 작은 소망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세상에 어떻게 대응하고 대처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발단한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눈동자에 비친 세상의 문제, 즉 그 자신의 외연에 존재하고 전개되는 일들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작가적인 입장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임과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운명적인 선택에 대한 응분의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인격체로서의 확고한 주체성과 더불어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는 기능을 지닌 작품을 통해 예술적인 자아를 완성해간다는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사진작업은 그 자신의 사상 및 철학을 표현하는 데 아주 긴요한 수단이다. 사진을 이용하는 것도 사실성보다 더 직접적인 표현은 없기에 그렇다. 그는 애매모호하고 유려한 수사학을 거부한다. 단지 눈에 보이는 사실로서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모든 의문의 여지를 없앤다. 그 스스로가 직접 보고 느낀 체험적인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사진이야말로 사실주의 정신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라는 시각이다.

현대미술의 다양한 성과 가운데 쌍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세상과의 소통방식은 이제까지 작가중심의 일방적인 공급체계를 타파하는 혁명적인 표현방법이다. 돌이켜 보면 회화 및 사진작업이 작가 개인의 기술적이고 정신적인 각고의 산물이었기에 일방적인 공급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감상자가 그 작품에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작품에 감상자가 능동적으로 반응하면서 작가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쌍방향의 소통방식은 감상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구체화한다.

 

 

2차원적인 평면공간에서 탈피하여 이중 또는 삼중의 다층적이며 복합적인 이미지 구현을 통해 공간 확장을 모색하는 그의 작업이 하나의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방법은 기술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 현대적인 테크놀로지를 이용함으로써 새로운 표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특히 아이들의 눈을 소통의 창으로 설정하는 표현방식은 감상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여기에다 입체렌즈를 이용하는 근래의 작업은 보다 명확한 참여를 유도한다. 작품 앞에서 좌우로 이동함으로써 그 안에 은폐된 여러 이미지를 읽을 수 있는 방식이기에 그렇다.

그의 작업에서 최근에 집중되고 있는 다중의 이미지, 즉 하나의 인물이 동일 평면공간에서 여러 가지 표정으로 자리하는 다면구조는 복잡한 현대인의 심리를 반영한다. 하나의 이미지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면세계를 다중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렌티큘러 수법을 이용하는데, 이와 같은 입체렌즈를 통해 두세 장 또는 그 이상의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감상자가 작품 앞에서 좌우로 이동함으로써 숨겨진 이미지를 찾아내는 방식이다. 최근 작업은 이처럼 다중노출 기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감상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그의 사진작업은 은염방식의 인화 대신에 돌 위에 이미지를 새기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감광필름을 얇게 가공된 대리석 위에 붙이고 샌딩 기법으로 표면을 쪼아내 음각으로 새겨 넣는다. 그러기에 일반적인 사진과는 달리 대리석 위에 음각으로 새겨지는 무늬는 자연의 이미지에 부합한다. 사진이 어느새 손으로 쪼아낸 조각의 이미지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로써 대리석이라는 자연적인 재료에다 인공의 빛, 즉 LED를 조사함으로써 대리석의 고유의 무늬가 오버랩되면서 은염사진과는 전혀 다른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보탠다. 다시 말해 자연의 표정이 첨가되는 것이다. 자연물질인 대리석을 이용하는 것은 그의 작업이 무위자연을 이상으로 여기는 노장사상에 합당한 선택이다. 본시 그대로의 것, 즉 자연성이야말로 순수한 영혼의 상징인 아이들의 눈동자와 등가의 위치에 있기에 그렇다.

최근 작업 가운데는 대리석 판으로 된 사진 이미지 위에 3cm 크기의 투명아크릴 큐빅을 부착하여 입체적인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이때 큐빅은 들쭉날쭉하게 붙임으로써 표면에 변화를 준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색의 LED 조명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변해 정지되고 정적인 사진의 이미지에 비해 생동하는 사진으로서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여기에다 LED 조명을 이용하는 라이트박스 방식으로 제작됨으로써 설치작업의 효과를 나타낸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새로운 제작기법은 전통적인 인화지와는 다른 다면체와 유사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인화지 대신에 대리석 판을 이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평면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얇은 종이가 가지고 있는 평면성, 즉 평면공간을 벗어나 입체공간으로 진입하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질량과 양감을 지닌 대리석이라는 자연물질과 사진이 의기투합하여 새로운 조형세계를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리석 표면을 쪼아내는 방식의 음각기법은 확실히 새로운 제안이다.

 

 

그는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그 자신만의 방법으로 재해석하고 가공하여 사진의 영역을 뛰어넘는 표현방법을 강구해냈다. 입체렌즈를 이용하는 방법도 그렇고, 대리석 판 위에 이미지를 새겨 넣는 방법도 그렇다.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시도는 창작의 윤리성에 충실한 결과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무언가 새로운 표현을 위해 강구하는 그의 작업실에는 불이 꺼질 날이 없을 것이다. 늘 감동적인 표현을 모의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는 단순히 시각적인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 투철한 작가의식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삶의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그의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은 완곡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에도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을 놓치는 일이 없다는 사실도 이에 연유한다. 예술의 참다운 가치와 힘은 교훈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전파에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박대조초대전은 2010년 11월3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M'(02-735-9500)에서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