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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보이 2010. 12. 17. 07:51

미술신문 칼럼

 

전통회화의 서글픈 가격

 

신항섭(미술평론가)

 

 

교통 및 통신의 발달로 지구는 점차 작아지고 있다. 이틀이면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현대인은 모두 축지법을 쓰고 있는 셈이다. 현대인은 시간과 공간을 압축함으로써 과거의 몇 배를 더 사는 셈이 됐다. 어디 그 뿐이랴. 컴퓨터가 만들어 놓은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상을 현실화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경험하는 가상의 공간은 타임머신과 다름없다. 과거와 미래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타임머신으로서의 인터넷은 모든 형태의 경계와 장벽을 극복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인터넷에는 국경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소통이 있을 따름이다. 그 자유로운 소통의 기능이 지구를 아주 작은 촌락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적어도 인터넷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오직 인터넷이 국가이고 민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개념이 형성되고 있다. 거기에서는 군림하는 자, 권력을 지닌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세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 어떤 형태의 권력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전통과 현대의 개념도 무의미하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세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오늘 우리의 전통문화, 전통예술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애착을 느끼는 분위기가 아니다. 일부에서는 전통문화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가령 북촌 일대에 남아 있는 전통적인 가옥과 골목길이 새삼스럽게 각광을 받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 그 가치에 대한 참다운 관심과 정당한 가치 평가라기보다는 마치 유행처럼 느껴진다. 물론 어떤 식으로 접근하든지 간에 새삼 전통적인 문화의 가치를 알게 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 식의 조그만 관심이 전체적인 관심과 애정의 문제로 확산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과 달리 최근 미술계 상황을 보면 전통회화는 암울하기 그지없다. 미술시장에서 전통회화는 그야말로 헐값으로 거래되고 있기에 그렇다. 특히 근대 및 현대를 대표하는 한국화 작가들의 작품 가격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곳까지 떨어졌다. 가격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거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고작가들의 작품 가격을 보면 그야말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안중식, 조석진, 이도영, 고희동, 노수현, 허백련, 김은호, 최우석, 이유태 등 근현대를 걸쳐 한국화 화단의 명맥을 이어온 작가들의 작품 한 점에 수 백 만원에 불과하다. 가격이 이처럼 낮은 데도 거래조차 되지 않는다. 같은 크기의 작품을 현대작가들과 비교해보아도 형편없이 낮은 것이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예술적인 가치가 낮아서인가. 아니면 전통회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일인가.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좀처럼 답을 얻을 수 없다.

최근에 들은 기막힌 이야기 한 토막. 서화를 좋아하는 어느 분이 용돈을 아껴 틈틈이 서화를 구입해서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년퇴직을 하고 한동안 미국에 있다가 돌아와 보니 집안에 걸려 있던 서화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현대회화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몹시 놀랐다. 혹시 자신이 없는 동안 처분한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실제로는 전통회화에 관심이 없는 자식이 벽에서 떼어내 차고에다 처박아 두었던 것이었다. 오랜 동안 차고에 방치된 서화는 물에 젖고 곰팡이가 슬어 그만 못쓰게 되고 말았다. 고리타분한 전통회화가 집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싶어 현대회화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평소 혼자 즐기는데 그쳤을 뿐, 자식에게 전통미술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가르쳐 주지 못한 때늦은 후회를 하며 스스로를 책하고 말았다는 얘기다.

이런 일이 어디 한 둘이랴. 전통회화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는 어쩌면 시대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모든 생활패턴이 서구화로 가고 있는 현실과 관련해 볼 때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정신적인 가치를 구현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온 전통회화는 불리한 입장인 것만은 분명하다. 눈에 삼빡하게 들어오는 원색적인 이미지와 자유로운 표현에 익숙해진 현대 젊은이들의 감각으로는 그저 칙칙한 느낌의 수묵화는 물론이요, 어쩐지 경직돼 보이는 채색화와는 친숙해질 수 없는지 모른다. 더구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전통회화는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기에 그렇다.

자기중심적인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으로 삶을 영위한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좋고 싫음이 명확하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싫어한다. 어쩌면 수묵화라든지 어딘가 너무 틀에 박힌 듯싶은 채색화를 선호하지 않는 것도 현대인들의 감각에는 맞지 않을 수 도 있다. 세상이 그렇게 변하고 사람들의 조형감각이나 취향도 그렇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결코 정상적이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현대미술이 반드시 현대인의 정서에 맞는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저마다 취향이 다르고 미적 감각이 다르기에 전통회화에 정서적인 공감을 느끼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교육과정이나 일상생활을 통해 전통회화에 대한 감상 및 이해가 부족한 나머지 고리타분해 보이고 그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즉, 조형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수준 높은 전통회화를 볼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갖추어지지 않은데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감각이 바뀔지라도 현대인은 어떤 식으로든지 삶의 공간에서 미술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 현대인의 삶은 어느 면에서는 과거보다도 미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또 친숙해질 수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기에 그렇다. 지방자치가 실시된 이후 각 지역 시 단위 및 군 단위에 이르기까지 공공미술관과 사설미술관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이제는 미술작품은 돈 있고 배운 소수의 호사 또는 사치품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미술작품을 보고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회화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런 역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통회화에 대한 교육의 부재, 기회의 부족 탓이다. 다시 말해 전통회화에 대한 중요성 및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없는데 그 원인이 있다. 무엇보다도 전통회화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전시해 놓은 미술관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그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표현양식은 물론 시대 및 작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연구 정리하여 전시를 해놓은 미술관이 있으면 지금처럼 전통회화가 푸대접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망라할 수 있는 근대미술관 건립이 시급하다. 근대미술관은 대략 조선말부터 6.25 이전까지 활약한 작가들과 산업화가 시작된 시기, 즉 1970년대 이전까지의 미술을 아우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들의 작품만을 전시하는 근대미술관이야말로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 시기의 한국화 및 양화 그리고 조각은 물론이려니와 사진, 도예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부 수용하고 있으나, 그 수량도 적을뿐더러 미술사적인 정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한마디로 무관심 속에서 잊히고 사라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저 현대미술이나 열심히 지원하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세계 10위권에 육박하는 경제 강국으로서의 이미지가 무색하리만치 근대미술의 공백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런데도 근대미술관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직 현대미술만이 관심사일 뿐, 근대미술에 대한 중요성 및 가치 평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나서지 않고 있다.

흔히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무덤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의 생활기물이나 작고한 예술가들의 작품만을 모아 놓았다는 데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리라.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현대미술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구의 경우 미술관에 현역작가들의 작품이 걸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창의적이고도 예술적인 가치가 뛰어날지라도 이미 미술사적으로나 예술적인 가치가 충분히 검증된 작고 작가들의 작품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미술관이 존재하지 않아 이런 기본적인 최소한의 절차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일부 근대작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기는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단편적으로만 이루어져 근대미술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양화의 경우에도 서양미술이 들어오기 시작한 이래 그 전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근대미술 전시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일부 전시되고 있으나 그저 일부 유명작가들의 작품에만 한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전통회화로서의 한국화가 오늘 이 지경에 처한 것도 그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고 보면 미술정책의 무관심과 푸대접에 있다. 극히 일부의 미술전문가가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는 전통회화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기막힌 환경을 만들어 놓은 정부의 몽매한 문화정책은 물론이려니와 미술계의 자각과 자성 없이는 전통회화의 서글픈 가격은 결코 회복할 수 없으려니와 또한 우리의 삶으로부터 영원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미술신문 제443호(2010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