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베드로 2010. 10. 23. 13:06

심심해 볼 권리
[사람 사는 이야기-홍승표]

 

나는 바쁜 것보다는 심심한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들이 ‘바쁘죠?’라고 물으면 거의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좀 바쁜 일이 있어도 여간해선 바쁘다고 쉽게 수긍을 잘 안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심심한 시간을 가지며 살아야 잘 사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믿으며, 바쁜 척이라도 해야 뒤처진 삶이 아니라고 자위하며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선 더욱 심심한 시간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공방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아내는 공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와 아들 사린이는 작은 도서관 <지혜의 등대>에서 시간을 보낸다. 사실은 말만 공방과 도서관이지 두 공간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일곱 살 먹은 아들 사린이는 공방과 도서관을 수시로 왔다갔다 한다.

   
▲ 공방에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 중에 김인국 신부도 있다.공방과 도서관이 한 공간 안에 있으니 놀면서 책도 볼 수 있다.(사진/한상봉 기자)

사린이는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으니 시간이 많다. 심심하면 책을 읽다가 책에 나온 과학실험을 하자고 조르면 나는 나중에 하자고 미루고 미루다 함께 실험을 하기도 한다. 그리곤 또 심심해지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다고 한다. 안 된다고 거절하다가 30분 정도씩 오전 오후 두 번을 허락한다. 30분이 지나서 컴퓨터를 끝내면 또 심심하다. 그러면 또 책을 찾아본다. 그러다 요즘은 나하고 장기를 둔다.

문구점에 들른 어느 날 다른 장난감보다 나을 것 같아 내가 장기를 권했더니 좋다고 휴대용 자석 장기를 사왔다. 처음에 길을 일러주고 장기를 두는데 영 길도 잘 못 찾고 헤매더니 이제는 내 장기 알 가운데 포 두 개를 떼고 두니 제법 겨뤄볼 만하다. 오후 3시경 검도관에 검도하러 다니는 한 시간을 빼면 나머지는 이렇게 나하고 시간을 보낸다. 어떤 때는 잘 놀다가 어떤 때는 다투기도 하고 때론 심심해하면서 지낸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하루가 저문다.

한 번은 우리가 사는 건물 2층집 아이 엄마가 자기 집 아이에게 단소를 가르쳐줄 수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가르쳐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초등학교 1학년이면 단소를 불기에는 숨결이 아직 약해서 힘들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아이 엄마는 그냥 함께 놀아주기만 해도 고맙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아이는 부모가 맞벌이를 해서 너무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학교 갔다 와서 여러 학원과 태권도 도장까지 끝나고 집에 오면 거의 저녁때가 되었다. 그런데 그 때 나에게 단소를 하러 오는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단소를 불면서 즐거움과 재미를 맛보게 해 주고 싶었는데 결국은 아이의 여린 어깨에 짐 하나를 더 얹어준 꼴이었다. 다행히 단소가 아직 어려웠던지 시나브로 그만 두고 말았다.

맞벌이 부모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를 그렇게 꽉 차게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돌려서는 아이에게 심심한 시간을 맛보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심심한 시간을 지내보지 않고서는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하루는 라디오를 듣다가 가수 김창완 님이 교육 얘기를 하는 걸 들었다. 아이들이 꽉 차여진 시간표에 맞춰 공부할 때 쑥쑥 클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들이 심심해 할 때 부쩍부쩍 자란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아이들에게는 심심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린이는 책을 즐겨 읽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자기 아이는 책을 잘 안 읽는데 어떻게 해야 아이가 책을 잘 읽을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는 속내를 털어놓는 엄마들이 가끔 있다. 그 답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마리는 아이를 심심하게 하는데 있다고 본다. <기적의 도서관학습법>이란 책을 쓴 이현 선생은 아이가 책을 안 읽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책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책은 심심할 때, 할 일이 없을 때,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집어드는 최후의 어떤 것이라는 말이다. 어른들은 심심하지 않아도 필요에 따라 시간을 쪼개 읽기도 하지만 책읽기의 필요성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책은 최후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를 책읽는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가 심심하게 내버려둬야 한다. 아이들이 ‘책읽기 싫어!’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이 말은 속으로 ‘나 피곤해!’라고 말하는 것이라는 걸 들을 수 있어야 아이들을 행복한 책읽기의 세계로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심심하게 지내는 아들 사린이가 때론 안쓰럽지만 그렇게 심심하게 지내는 것이 잘 커가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숨을 가다듬고 곁에서 지켜본다.

홍승표 /목사, 길벗교회, 청주에서 아내와 함께 천연비누 만드는 공방을 하면서 작은도서관 '지혜의 등대> 지킴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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