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건축 한국 역사

화상 2017. 2. 26. 17:18


기와지붕,북촌한옥마을,종로구,서울(2005) artist: P.S. Lee



서울 시대공간

근대도시에 지어진 한옥

도성안의 관아터 또는 세력가들의 집터였던 대형필지는 주택경영회사들에 의하여 소형 필지들로 분할되면서 도시한옥주거지로 개발되었다. 이 한옥들은 전통 한옥이 갖고 있는 유형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근대적인 도시조직에 적응하여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진화한 도시한옥이다.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였기에 소위 ‘개량한옥’이라고도 불려졌다. 도성 동쪽으로는 안암지구와 용두지구에, 도성 서쪽으로는 대현지구에도 도시한옥주거지가 건설되었다. 구릉지와 논밭이 주거지로 바뀌면서 1930년대 서울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관아터에 지어진 도시한옥

조선시대의 한양은 가히 궁궐도시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도성안에 궁궐과 별궁, 사직단과 종묘와 같은 묘제건축, 그리고 수없이 많은 관아가 있었다. 나라가 망한 뒤 대부분 시설들은 그 위엄과 기능은 무참히 훼손된다. 창덕궁과 종묘 정도가 그 명맥을 유지할 뿐, 경복궁은 만국박람회장으로, 창경궁은 동물원으로, 경희궁은 경성중학교와 관사단지등으로 바뀌게된다. 크고 작은 별궁이나 관아 역시 학교나 경찰서, 병원과 같은 근대시설로 전환된다. 더러는 민간인의 손으로 넘어가 주거지로 개발되는데, 북촌에 위치한 몇몇 관아자리에는 도시한옥주거지가 건설되었다.
충훈부는 국가에 공훈이 있는 공신들을 포상하고, 공적을 보존하고, 그 자손들을 대우하는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충훈부가 있던 관훈동118번지는 1934년에 두 필지로 분할되고 그 중 동쪽 필지는 십여개의 필지로 분할되면서 도시한옥이 건설되었다. 한편 서쪽 필지는 한국전쟁 이후 1955년에 열한개의 필지로 분할되면서 도시한옥이 건설되었다. 현재 안국동오거리에 면해있는 이 도시한옥주거지는 한정식집으로 사용되면서 한옥의 모습을 이어가고있다.

대갓집터에 지어진 도시한옥

(송인호, 도시한옥과 다세대주택, 월간건축문화, 2002. 11)
도성안, 특히 북촌에 있던 대형필지는 1930년대에 소형 필지들로 분할되면서 도시한옥주거지로 개발된다. 이 대형필지는 조선시대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전반부까지 이어진 세력가들의 집터로, 경운동66번지의 김좌근 집터와 경운동64번지의 민병휘 집터, 가회동31번지의 민대식집터, 가회동11번지의 한창수 집터가 대표적이다. 이 중 가회동 11번지와 31번지는 1935년경에, 경운동66번지는 1940년경에 분할되어 도시한옥주거지가 건설되었다.
북촌에 건설된 도시한옥주거지는 주택경영회사들에 의하여 1930년대에 건설된 주거지이다. 현재 한옥들이 밀집되어있는 가회동 11번지와 31,33번지, 삼청동35번, 계동135번지의 도시한옥주거지들은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였기에 소위 ‘개량한옥’이라고도 불려졌다. 또한 이 한옥들을 도시한옥이라 부르는데, 전통적인 한옥이 갖고 있는 유형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근대적인 도시조직에 적응하여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진화했다는 점을 주목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한옥들 하나하나는 문화재급 한옥에 비하여 그 격이 떨어지지만, 이십세기 초반 서울의 도시주거형태와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 근대적인 주거지구조와 전통적인 주거유형이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잘 보존된 다른 전통마을에 못지않은 독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른 문화재도 그렇지만 북촌의 도시한옥주거지는 주거유형과 주거지가 함께 보존될 때,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한옥 자체 뿐 아니라 한옥과 한옥이 이루고 있는 관계가 중요하다. 비슷한 형태의 한옥지붕들이 놓여지는 필지의 조건에 따라 조금씩 모양과 방향을 달리하면서, 집합되어 이루고 있는 경관이 아름답고 독특하다.
현재 북촌에 약 구백여 호의 한옥이 남아있다. 천구백구십년 한옥보존지구가 해제된 후 약 육백여 채의 한옥이 다세대주택으로 바뀌고, 이제 삼분지 일이 조금 넘는 정도가 남겨진 셈이다. 그 중에서 가회31·33도시한옥주거지는 한옥들이 모여서 전통적인 도시경관을 이루고 있으면서, 그런대로 골목길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거의 비슷한 크기와 비슷한 모양을 가진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정형의 필지위에 ㄷ자형 또는 ㅁ자형한옥들이 반복되고 있다.
이 가회31·33도시한옥주거지는 1930년대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개발되었다. 가회동33번지가 1933년에서 1934년의 시기에 대표적인 건설업체였던 건양사에 의하여 먼저 개발되었다. 그리고 가회동31번지가 이보다 조금 늦게 1936년에서 1939년에 걸쳐 역시 건양사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건양사를 경영하던 정세권은 청부업자와 달리 직접 자기 자본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집을 짓고, 와서 사가도록 했던’, 근대적인 분양방식으로 주택을 공급했었다.
그 당시 북촌의 상황과 주택건설방식은 정세권이 1935년 11월 [삼천리]라는 잡지에 기고한 “폭등하는 토지, 건물시세, 천재일우인 전쟁호경기래! 어떻게 하면 이판에 돈 버을까”라는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시 ‘경성부가 호경기를 맞이하여 1933년과 1934년 사이에 육칠천호의 주택이 신축되었으며, 특히 1935년 봄 이래로 서울의 북촌산 일대는 어느 한곳 빈틈이라고는 없이 한옥이 지어지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경기가 좋아진 덕분에 ‘한번에 여하이 많이 지어 놓으래도, 채 전부 완성되기 전에 「예약제()」로 반분()이상이 결정되고, 전부 완성되면 곳 자리가 드러메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물론 1920년대 후반에 이미 ‘방매가()’라는 제목으로 주택매매광고가 나오지만, 천구백삼십년대의 급속한 도시화과정과 함께 이른바 ‘건설과 분양방식’은 새로운 주택공급방식이 자리 잡게 된다. 가회동31번지와 33번지는 이러한 방식으로 건설되고 분양된 전형적인 천구백삼십년대의 도시한옥주거지이다.

북산구릉에 지어진 도시한옥

근대도시 서울의 모습은 1926년 조선총독부청사신축과 1936년 경성부시가지경계확장을 계기로 급속하게 진행된다. 이러한 변화는 1940년대 초반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지체제로 전환되기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동안 주택 수요가 급등하고, 기존 도시주거지가 다시 개발되었다. 삼청동 35번지, 가회동 1번지, 원서동 4번지 일대 등 기존 주거지 주변 구릉지가 주택개발업자들에 의해 택지로 조성되고, 그 위에 중소규모 한옥들이 집단적으로 건설되었다. (송인호, 도시한옥과 다세대주택, 월간건축문화, 2002. 11)
특히 삼청동 35번지는 가회 31, 33번지와 인접한 도시조직이다. 한양의 옛 지도에 ‘맹현()’이라는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삼청동천(중학천)을 따라 바위와 소나무가 절경을 이루던 한양의 아름다운 경승 중 한 곳이었다고 한다. 송인호, 근대도시의 집합한옥, 공간, 2003. 9 다른 대형 필지들의 개발에 비해 규모가 크고 필지의 수도 200개가 넘는 대규모 도시한옥주거지이다. 북촌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시기적으로 북촌에서 개발된 마지막 대규모 필지로 1928년 경성도시계획조사서(調)에 실린 항공사진과 토지구대장을 보면 큰집 한 채가 있는 필지 외에는 모두 임야지목으로 되어있었다. 14년(1925) 국가소유의 임야로 있던 것을 정희찬()이 불하를 받아 지목을 대지로 바꾸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하여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새로운 도시한옥주거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정대규가 이어받아 완성하였다. 서사면의 경사지를 축대로 정리하면서, 블록단위로 필지가 분할되어있으며, 중규모의 도시한옥들이 건설되었다.

도성주변의 도시한옥주거지

(김영수, 돈암지구(1940~1960) 도시한옥 주거지의 도시조직, 서울학연구 22, 2004. 3)
도성외곽지역에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새로운 주거지가 조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도성 동쪽으로는 안암지구와 용두지구에, 도성 서쪽으로는 대현지구에 조선인을 위한 도시한옥주거지가 건설되었다. 구릉지와 논밭이 주거지로 바뀌면서 1930년대 서울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도성 동쪽 성곽에 인접한 돈암지구는 청계천의 지류인 안암천과 보문로를 중심으로 주변이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한성부 시대 숭신방으로 불렸던 지역으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기 직전인 1936년 당시에는 행정구역상으로는 돈암정, 안암정, 신설정의 일부지역으로 교차로 부근을 제외하고는 거의 건물이 들어서지 않았다. 이렇듯 주거지로 기능이 미약했던 지역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불과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대규모로 필지가 공급되었고 공급된 격자형 필지 위에 도시한옥이 빠르게 들어서면서 대규모 주거단지로 변하게 되었다.
돈암지구에는 한옥주택과 한옥상가, 두 종류의 도시한옥이 있다. 대로변(보문로)에 한옥상가가 위치하고, 그 안쪽으로 주거지가 형성되어있다. 상가는 규모에 따라 이층한옥상가와 단층한옥상가로, 주거는 옆집과의 관계에 따라 연립한옥과 단독한옥으로 분류된다.
돈암지구의 이층한옥상가는 ‘ㄷ’자형 도시한옥의 변형이다. 안쪽에 ‘ㄱ’자형 살림채가 있고 도로변에 위치한 ‘ㅡ’자형 상가와 안채는 분리되어 별도의 출입구를 갖는다. 단층한옥상가 역시 대로변에 면한 이층한옥상가와 마찬가지로 ‘ㅡ’자형 상가와 ‘ㄱ’자형 안채가 결합하여 ‘ㄷ’자형의 도시한옥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도시한옥은 안채가 위계상 문간채보다 높으나 대로변 단층상가의 경우 ‘ㅡ’자형 상가는 기둥의 간격이나 지붕의 높이가 안채보다 더 넓고 높다. 안채로의 진입은 문간채를 통해 이루어지며 상가로 쓰이는 문간채의 폭이 두껍기 때문에 필지의 가로길이 역시 일반적인 도시한옥이 폭보다 넓다.
대로변 상가의 안쪽에는 주거한옥이 만들어지고 대로변 안쪽의 주거유형으로는 연립한옥(‘ㄱ’자형 연립한옥)과 단독한옥이 있다. 부정형의 블록을 동서롸 잘게 잘라 한 필지 열로 만든 후 그 필지 위에 ‘ㄱ’자형 연립한옥을 지었다. 큰 필지가 한 사람에 의해 개발된 뒤 나뉜 것으로 판단되며, 진입은 담장의 대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돈암지구에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도시한옥은 ‘ㄷ’자형으로 동서가로에 면한 필지에서 여러 유형의 ‘ㄷ’자형 도시한옥이 발견된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근대공간),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66085&cid=49351&categoryId=49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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