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묵유거(禪墨幽居)

소소한 일상적 삶을 사유의 장독에서 삭혀낸 낭만적인 글과 이야기

정용 의사의 장인 장필무 장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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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2016. 12. 12.

명종조(明宗朝) 이후 으뜸가는 청백리(淸白吏)

  

장필무는 비록 무인이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는 평소에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지방에서 학덕이 높았던 남명 조식(南冥 曺植)을 존경했다. 그리하여 양산군수로 있을 때, 조식이 산해정(山海亭)에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번에 달려가서 교류를 돈독히 하였으며 스스로 <자경편(自警篇)>이라는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그의 큰 칼에 오직 나라에 대한 보은의 마음이 있을 뿐, 집안을 걱정하는 마음 조금도 없네. 날로 새롭고 새로워라[유존보국지심(惟存報國之心) 영절우가지념(永絶憂家之念)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라는 명문을 새겨 그의 뜻을 나타냈다.

 

 

  

 

장필무는 지나칠 정도로 결백했다. 그는 부정한 사람과 자리를 같이 하면 마치 자기가 오염되는 것처럼 싫어했다. 그리하여 탐욕스럽거나 불결한 관원을 보면 비록 관직이 높은 사람이라도 이를 철저히 멸시하였다.

 

그리고 부하와 백성 중에 패륜을 저지르거나 관물을 도적질하는 사람이 있으면 열화같이 분노하여 벼락처럼 다스려서 보는 사람이 두려움에 사지를 떨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격한 성품과 높은 긍지 때문에 그는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 자신은 언제나 가난에 시달렸다.

  

선조는 그의 지조를 높이 평가하여 죽은 다음에 청백리로 추록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사관들은 그를 무인으로서는 명종조 이후 으뜸가는 염결인(廉潔人)으로 꼽았다. 그는 뒤에 병조판서에 추서되었으며 영동(永同)의 화엄서원(華嚴書院)과 무주(茂朱) 죽계서원(竹溪書院)에 배향(配享; 신주를 모심)되었다.

 

 

참고문헌 : 宣祖修正實錄, 國朝人物考, 國朝名臣錄

 

 

 

백야 장필무는 조성 명종에서 선조조를 통틀어 가장 청렴결백한 무인으로 기록되는 사람이다. 그는 늦은 나이인 마흔 네 살 나이로 무과에 합격했고, 부산진 첨절제사, 만포진 첨절제사, 의주부윤등을 역임하면서 국토의 남쪽끝에서 서쪽끝으로 뛰어다니며 국경지대의 군사들을 잘 통솔했던 장수였다.

  

조선 중종때 압록강변까지 도적떼가 엄습해와 조정에서는 강계무사 장필무에게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도적을 치도록 했다. 장필무는 병사 1백여명을 직접 거느리고 한밤중에 압록강을 건너 두목의 소굴을 일거에 쳐 3백여 명을 사로잡아 명나라에 보냈던 일이 있다. 이에 명나라 황제는 은 3근을 녹여 장필무의 이름 석자를 새겨 내보냈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황제 세종은 그때 많은 비단과 은덩이를 따로 장필무에게 상급으로 보냈었는데

 

 

 

이에 장필무는 전 군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게 하고는

"이놈들아 너희만 가지냐?"

"아닙니다. 장군몫으로는....."

"얼마나 떼어 놓았냐?"

"열사람 몫입니다."

"아니다. 나도 한 몫이면 된다."

자기도 군졸들과 똑같이 한 몫만 받더니 그것조차 함께 출전했다고 목숨을 잃은 부하 군졸의 어머니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백야 장필무는 장수로서 용감했을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모습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군졸들과 백성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정용 의사는 임진왜란 당시 50대 중반의 고령으로 의병으로 활약하다

두 조카와 함께 진주성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여러 번의 전공을 인정받아 문경군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었다.

의사공이 아들은 순절한 아버지의 공로로 부역을 면제 받았으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개인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당시의 사회적 풍토에서

이런 지나칠 만큼의 순수한 애국심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의사공의 장인인 장필무 장군의 청백리 기록을 살펴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백야 장필무 장군은 조선 중기의 가장 대표적인 청백리이자

임진왜란에서 전공을 세운 두 아들과 함께 충신으로서

역사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분이다.

 

관련 기록을 옮겨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