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묵유거(禪墨幽居)

소소한 일상적 삶을 사유의 장독에서 삭혀낸 낭만적인 글과 이야기

고경명의 유서석록(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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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2019. 1. 3.

필자주

본 글은 옮겨온 자료다

인근 마을의 추앙받는 갈천선생께서 광주목사로 계실 때 뜻있는 선비들과 광주의 서석산(무등산)을 산행했는데 생생한 기록으로 남긴 분이 고경명이다

이 유람에 나의 직계선조인 정용 의사도 동행을 했다

그런데 본 유람에 동행한 선비 중 서너분이 선무원종공신이라는 점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1574년 고경명, <유서석록>(遊瑞石錄)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유서석록(遊瑞石錄)>)

 

산행 기간 : 1574년 4월 20일~24일

 

산행 경로 : 증심사 → 사인암(舍人巖) → 증각사(證覺寺) → 중령(中嶺) → 냉천정(冷泉亭) → 입석대(立石臺) → 불사의암(不思議庵) → 염불암(念佛庵) → 상원등(上元燈) → 정상삼봉(頂上三峯) → 서석대(瑞石臺) → 삼일암(三日庵)의 월대(月臺)→ 금탑사(金塔寺) → 은적사(隱迹寺) → 석문사(石門寺) → 금석사(金石寺) → 대자사(大慈寺)의 옛터 → 규봉암(圭峯庵) → 광석대(廣石臺) → 문수암(文殊庵) → 풍혈대(風穴臺) → 장추대(藏秋臺) → 은신대(隱身臺) → 청학대(靑鶴臺), 법화대(法華臺) → 문수암(文殊庵) → 송하대(送下臺) → 영신동(靈神洞) → 방석보(方石洑) → 장불천(長佛川) → 노루목 고개 → 창랑(滄浪) → 적벽(赤壁) → 소쇄원(瀟灑園) → 식영정(息影亭) → 서하당(栖霞堂)

 

 

[서석(瑞石)은 산 이름인데 곧 무등산(無等山)이니, 광주(光州)에 있다.]

 

4월 20일

 

만력(萬曆, 명 신종 연호 1573~1619) 갑술년(1574) 초여름에 광주목사 갈천 임선생(葛川林先生, 임훈)께서 틈을 내어 여러 손님들과 서석산을 유람하자고 서신으로써 나를 초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어른과 기약하고 뒤늦게 갈 수 없으므로 4월 20일 갑자에 등산장비를 갖추어 먼저 증심사(證心寺)에 가서 기다렸으니, 서석산은 곧 우리 고장의 산이다. 어려서부터 장성하기까지 여러 번을 올라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그윽한 산골 물과 깊은 숲을 두루 구경하여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범연히 보기만하고 요령을 얻지 못한다면 초동, 목동의 보는 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혼자 올라 상심만 한다면 또한 유의조(柳儀曺)의 시에 보인 남간(南澗)의 슬픔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니, 산의 경치를 소상히 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산의 참뜻과 참맛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다행히 선생의 뒤를 좇아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되어 황홀히 표륜(飇輪)과 우개(羽盖)로서 낭풍(閬風)과 현포(玄圃))의 위에 노는 듯했으니,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뛰어난 흥취가 나는 듯이 일어 소매를 드날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해가 정오가 되기 전에 벌써 골짜기에 다다랐다. 누교(樓橋)를 거쳐 올라가니 수목은 더욱 울창하고, 바위는 더욱 수척하면서도 굳건하며 시냇물 소리는 구슬이 구르는 듯했으니 점점 아름다운 지경에 들어감을 깨달았다. 내가 이에 말에서 내려 옷을 벗고 맑은 물에 발을 씻으며 태고적 창랑의 가사를 외우고 소산(小山)9)과 초은(招隱)의 곡조를 읊으니, 서늘한 기운이 살갗에 스며들고 번잡한 마음이 몸에서 떠나 씻은 듯 속세에서 벗어난 감상이 있었다. 해가 장차 저물매 지팡이를 짚고, 신을 끌며,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절 앞에 조그만 다리가 시내에 걸쳤으며 좌우에는 고목이 서로 그림자를 비추었다. 그 그윽한 경치를 사랑하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절의 스님은 내가 그곳에 올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드디어 취백루(翠栢樓)에 올라 난간에 의지하여 잠깐 휴식을 취하였는데 취백루라고 이름붙인 것은 ‘잣나무가 뜰 앞에 푸르다(栢樹庭前翠)’라는 글귀에서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벽 위에는 권흥(權興) 등 여러 사람의 시판이 걸려 있는데 대개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1368~1398) 연간에 쓴 것이다. 그런데 김극기(金克己)의 시만이 유실되었으니, 이 어찌 후인의 한탄할 바가 아니겠는가?

 

잠시 후 조선(祖禪)이 와서 비로소 방을 쓸고 자리를 깔아주었다. 나는 피곤하여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저녁노을은 서산에 너울거리고 붉은 노을은 하늘을 뒤덮었는데, 놀란 사슴은 죽림으로 달아나고 지친 새는 수풀을 찾아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시름을 자아내게 하였다. 옛 사람의 이른바 명승지에 임하면 마음이 저절로 슬퍼진다는 것은 믿을 만한 말이었다. 조선이 송화로 빚은 술과 산나물로 나를 접대하고 이야기가 소재(蘇齋)의 옛 놀이에 미쳤는데 자못 조리가 있어 들을 만하였다. 조선의 말로 인하여 비로소 누교의 시내 위에 최송암[(崔松巖, 자는 응용(應龍)]이 바위에 새긴 시가 있음을 알았는데, 새긴 글자가 얇고 이끼가 끼어 처음에는 알아볼 수 없었으니 애석하다.

 

 

절 옆에 죽림이 있어 산과 연달았으니, 비록 위천(渭川)에 있는 천 이랑의 죽림에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하였다. 갑인년(1554) 봄에 내가 이 절에 왔을 때에는 그 마디의 길이가 일척이 넘고 둘레는 서까래 같은 대가 즐비했었는데, 이제는 조릿대만 쓸쓸하여 다시 옛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조선이 법당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법당은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초엽에 이름난 장인이 지었다고 하는데 이제 장차 근 천년이 되었으나 동우(棟宇, 마룻대와 추녀 끝)와 계단과 초석이 조금도 기울지 않았습니다. 좌우의 작은 집은 무릇 몇 번을 개수하였는지 알지 못하는데 이 법당만 남아있습니다. 절에 옛날에는 대장경 판본이 있었고, 또 불경도 몇 상자가 있어 한 전당에 간직하였으나 이제 전당만 남고 경서는 모두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날 저녁에 이만인(李萬仁)과 김형(金逈)이 함께 이르러 밤에 한 자리에서 유숙하였다. 노승이 촛불을 켜고 경쇠를 울려 예배를 드린 후 단정하게 앉아 말하기를, “산중에 옛날 향반(香盤)을 설치하였다가 연루(蓮漏)로 대체하였는데 시각마다 종을 울려 손님의 잠자리에 방해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소. 우리들이 세속에서 몸을 벗어나 잠깐 선경에 머물었으니 맑은 밤에 깨어 있어 절로 잠을 잊은 것이오. 그런데 작은 종소리가 맑게 울리니 실로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닌지라, 이를 들으매 족히 깊이 살피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얼마 후 세 사람이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노승의 코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으니, 참으로 우스웠다. 새벽녘에 남풍이 급히 몰아치니 내가 비올 조짐이 아닌가 염려하여 조선을 깨워 물으니 조선이 말하기를, 제가 오랫동안 이 산에 깃들어 비구름을 익히 아는데 비록 남풍이 불더라도 비올 조짐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21일 을축

 

일기가 쾌청하였는데 늦은 아침에 선생(갈천 임훈)의 행차가 당도했다. 신형(愼衡)·이억인(李億仁)·김성원(金成遠)·정용(鄭庸)·박천정(朴天挺)·이진(李傎)·안극지(安克智) 등이 뒤를 따랐다. 나는 취백루에 올라가 선생을 뵈었다. 누대의 앞에는 해묵은 잣나무 두 그루가 있어 장대하게 높이 솟은 모습이 완상할 만했으니, 비록 고려시대의 유물은 아니었으나 누대의 이름에 어긋나지 않았다.

 

술이 몇 순배 돈 후에 선생이 식사를 재촉하여 먹고 등산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부를 물리치고 종들을 간단히 거느려 야복(野服)을 입은 채, 대로 엮은 가마를 타고 사승(寺僧) 조선으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여 증각사(證覺寺)로 향하였다. 중도에 선생이 우거진 나무 그늘에 앉아 짐꾼들을 쉬게 하였다. 응수(應須, 박천정)가 서쪽으로 한 봉우리를 가리켜 말하였다. “이는 사인암(舍人巖)인데 옛날 그 정상에 올라가 본 즉 바위가 구름에 닿았고 절벽이 허공에 솟았으며 매가 깃든 둥지를 굽어 볼 수 있었다.”

 

 

정오에 증각사에 당도했는데, 이날 뿌연 기운과 흙비가 내려 멀리 바라볼 수는 없었으나, 대나무 정자와 넓은 벌판과 비단결 같은 시냇물을 역력히 볼 수 있었으니, 높은 데 오를수록 보는 바가 더욱 넓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증각사의 북쪽에는 분죽(粉竹)과 오죽(烏竹) 두 가지 대가 있는데, 분죽은 불에 쪼여 진을 빼고 지팡이를 만들면 매우 윤기가 있다. 차를 마신 후에 곧 길을 떠나 이정(梨亭)을 거쳐 중령(中嶺)으로 향하니 험준한 길이 위로 곧게 뻗어있어 드높기가 천계와 같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물고기를 꿰미에 엮듯, 개미가 기어가듯 하여 겨우 한 자 전진하면 열 자를 뒤로 물러서야 했다. 길이 다한 곳에 이르니 앞이 툭 트여 넓게 활짝 열렸으니 쾌활하기가 차양을 걷고 해를 보는 듯하였다. 중령에서부터 산세를 따라 왼편으로 접어드니 수풀이 울창하여 구름과 햇발이 새어 들어오지 못했으며 높고 험한 비탈길이 허공에 걸쳐 있는 듯하여 한 움큼의 흙도 밟을 수 없었는데, 다만 날다람쥐가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고 바위의 이끼가 푸르게 바람을 맞고 있음을 볼 뿐이었다. 지팡이를 끌고 걸어가며 시를 읊으니 등산의 수고로움을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중령에 오를 때의 일을 돌아보니 가벼운 수레를 타고 넓고 평탄한 길을 달리는 듯하였다. 선생이 먼저 냉천정(冷泉亭)에 이르러 뒤에 오는 자들을 기다렸다. 샘이 나무 아래에 있어 바위 틈에서 솟아났으니, 그 차가운 것은 도솔사(兜率寺)의 샘물에 조금 미치지 못했으나 달콤한 맛은 월등하였다. [도솔사는 규봉(圭峯)의 동북방에 있는데 이제 헐려버렸고, 그곳에 있는 샘물이 지극히 차가워 그 빛깔이 푸른 쪽빛과 같다고 하였다.] 이때에 여러 사람들이 바야흐로 갈증이 심하여 그 물에 콩가루를 타서 다투어 마셨으니, 비록 금장옥례(金漿玉醴)도 그 시원함을 비길 수 없었다.

 

 

해가 저물 무렵 입석암에 당도했으니, 양사기(楊士奇)의 시에 이른바 “열여섯 봉우리가 절을 감싸주었네(十六峯藏寺)”라는 구절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었다. 암자의 뒤에는 기암이 뾰쪽뾰쪽 솟아 울밀한 것은 봄 죽순이 다투어 나오는 듯하였고 희고 깨끗함은 연꽃이 처음 피는 듯하였으며, 멀리 바라보면 의관을 정제한 선비가 홀을 들고 읍하는 것 같았고 가까이 보면 겹겹이 막힌 요새와 철옹성(鐵甕城)에 무장한 병사 일만 명을 나열한 듯하였다. 그 한 봉우리는 홀로 드높이 서서 형세가 외로이 빼어났으니 세속에서 초월한 선비가 군중을 떠나 홀로 가는 듯하였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네 귀퉁이가 옥을 깎아 세운 듯 층계가 첩첩하여 먹줄로 친 것 같았으니, 생각건대 천지가 개벽할 초두에 아무런 뜻이 없이 결합되어 우연히 기이한 모습을 이룩한 것인가. 아니면 신공(神工)과 귀장(鬼匠)이 바람과 우레를 불러 이 교묘한 솜씨를 부린 것인가? 아! 누가 이를 만들었으며 누가 이를 다듬었던가? 아미산(峨眉山)의 옥으로 된 문이 땅 속에서 솟아나온 것이 아닌지, 성도(成都, 사천성 도읍)의 석순(石筍)이 해안(海眼)을 둘러 진압한 것이 아닌가? 알 수가 없었다. 그 바위의 형세를 보니 들쭉날쭉 떨기로 뽑힌 듯하기도 하고, 무리지어 나온 듯도 해서 비록 재주껏 헤아려 보지만 능히 그 수를 셀 수 없으니, 그 열여섯 봉우리라고 하는 것은 특히 그 볼만한 것을 근거 삼아 대략만을 말한 것이었다. 그 형세가 굽이쳐 날개를 편 듯 뻗어내려 사람이 두 팔을 벌린 듯하였는데 암자가 그 한 가운데 있었다. 우러러보니 위태로운 바위가 장차 굴러 떨어질 듯했으니, 모골이 송연하여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었다. 바위 아래에는 두 샘이 있어 하나는 암자의 동쪽에 있고 하나는 암자의 서쪽에 있었는데 비록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으니, 또한 신기한 일이다.

 

 

암자를 떠나 약간 북쪽으로 입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불사의암(不思議庵)으로 들어갔는데 방장(方丈)이 매우 협소하여 좌선(坐禪)이 아니면 거처할 도리가 없었다. 방장의 남쪽에는 평탄한 석대가 있어 몇 사람이 앉을 만했으며 옆에는 큰 나무가 있어 석대 위에 그늘이 펼쳐져 있었다. 입석암은 여러 사찰 가운데에서 지세가 가장 높아 산과 바다의 그윽하고 기이한 풍경을 다 볼 수 있었는데, 다만 바람이 거세게 불어 찾아온 자가 오래 견딜 수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다함께 석문을 걸어 나와 배회하며 자주 돌아보니, 옛 친구와 이별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석암에서 동쪽으로는 길이 험준하지 않고 도처에 반석이 있어 자리를 평평하게 곁에 펼쳐 놓은 듯하였다. 지팡이 소리는 맑게 울리고 나무 그늘은 하늘거려 혹은 쉬기도 하고 혹은 걷기도 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가니 이에 낭선(浪仙)의 시에 이른바 “나무 그늘 가에서 자주 쉬어 가는 몸이로세(數憩樹邊身)”라는 구절이 정경을 그려내는 데 공교로워 천 년이 지난 뒤에도 눈앞에 완연히 보이는 듯함을 알겠다. 해가 저물어 염불암(念佛庵)에 투숙하였는데 일원(一元, 이만인)이 피곤하여 숨을 매우 급하게 쉬자, 강숙(剛叔, 김성원)이 묻기를, “오늘 험준한 길을 멀리 걸어 너무 피로한 것 아닌가?”라고 한즉 일원이 눈을 감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그렇지 않다.”고 하니, 일행들이 한바탕 웃었다.

 

판관(判官) 안언룡(安彦龍)과 찰방(察訪) 이원정(李元禎)이 청첩을 받고 먼저 화순(和順)에 있다가 만연산(萬淵山)으로부터 향로봉(香爐峯)을 돌아나와 장불사(長佛寺)를 거쳐 황혼에 이 암자로 찾아왔다. 이 암자는 원래 강월(江月)이 창건한 바로서 중간에 폐허가 된 지 오래였는데 정덕(正德, 명 무종 연호, 1505~1521) 을해년(1515)에 일웅(一雄)이 중창하였고 융경(隆慶, 명 목종 연호, 1567~1572) 임신년(1572)에 보은(報恩)이 중수했으며 옆에 조그만 원우(院宇)를 설치했으니, 이는 하안거 할 때 참선하는 곳이었다. 일찍이 눌재(訥齋)가 일웅을 위하여 중창기를 지었는데 글자가 깎이거나 사라진 곳이 많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암자의 동쪽에 돌더미 쌓인 것이 바라보였는데 지공너덜[指空礫]이라고 이름했으며 어지러운 돌이 서로 버티어 산과 같이 첩첩하였고 그 가운데는 텅 비어 밑이 없는 듯하였다. 어느 사람이 나무하는 도끼를 잘못 빠뜨리고 귀를 기울여 들은 즉 굴러가는 소리가 한식경 후에 바야흐로 그쳤다고 한다. 이 산 가운데에 너덜[礫]이라고 명칭하는 곳이 둘인데 증각사(證覺寺)의 동북방에 있는 것을 덕산너덜[德山礫]이라고 이름하였다. 매양 소나기가 새로 개면 잠복하였던 이무기가 나와 햇볕을 쪼이는데 몸을 서리서리 도사리고 있어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산승(山僧)이 일찍이 목격한 이야기인데 노루 한마리가 그곳을 지나니 한 괴물이 물고 굴속으로 들어가는데 눈의 광채가 번쩍거려 참으로 두려웠다고 하였다. 그런데 유독 이 지공너덜은 뱀이나 독충의 종류가 없고 가을에 낙엽이 산에 가득할 때에도 항상 말끔하여 한 잎새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승도들의 전설에 의하면 지공선사(指空禪師)가 그 신도들과 더불어 설법한 곳이라고 하였다.

 

22일 병인

 

일기가 쾌청하였다. 아침에 판관(判官)과 찰방(察訪)이 지름길로 입석암(立石庵)을 찾아갔다. 어제 날이 어두워 미처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선생의 뒤를 따라 곧장 상원등(上元燈, 사찰이름)으로 올라갔다. 조그만 암자를 새로 지었는데 얕고 누추하여 휴식하기에 적합하지 못했다. 선생이 암자의 서쪽 단상에 앉았는데 그 서편에 전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있고 그 아래에는 바위가 있어 발을 들여 놓을 만하였다. 조금 후에 판관과 찰방이 뒤쫓아 당도하여 악공들로 하여금 천왕봉(天王峰)과 비로봉(毗盧峰)에 올라 젓대 몇 곡조를 불게 하니 그 음운이 어렴풋하여 생황(笙篁)과 옥퉁소의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마침 한 승도가 있어 절조에 맞추어 손뼉 치며 춤을 추니, 족히 한바탕 웃는 즐거움이 되었다.

 

 

상봉(上峰)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셋이 있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천왕봉이요, 가운데 있는 것은 비로봉인데, 그 사이가 백여 척이 된다. 평지에 서서 바라보면 대궐문과 비슷한 것이 이것이요, 서쪽에 있는 것은 반야봉(般若峰)인데 비로봉과 더불어 두 정상의 거리가 거의 포목 한 필의 길이가 되고 그 아래는 겨우 일척 남짓 됐으니 평지에서 바라보면 화살촉과 같은 것이 이것이었다. 정상에는 잡목이 없고 다만 진달래 철쭉이 바위틈에서 소복하게 나와 길이는 일척가량 되고 가지는 모두 남쪽으로 쏠려 깃발과 비슷했다. 그 지형이 높고 기후가 차갑기 때문에 풍설에 시달려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때에 산살구와 진달래는 반쯤 떨어지고 철쭉이 비로소 피었는데 나뭇잎도 무성하지 못했으며, 정상에서 평지까지의 거리가 대략 40리가 되기 때문에 그 기후의 차이가 이와 같았다. 반야봉의 서쪽은 지형이 매우 평탄했는데 봉우리의 형세가 갑자기 끊어져 천척의 낭떠러지가 땅에서 까마득하였고 멀리서 나무의 꼭대기를 바라보면 냉이와 비슷했다. 진실로 남산(南山)의 시에 이른바 “삼나무와 대나무 숲이 무성함 탄식했네(杉篁吒蒲蘇)”라는 구절은 이를 지적한 것이었다. 절벽에 열 지어 앉아 술잔을 들어가며 질탕히 마셨으니 표연히 공중에 날아 신선이 되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절벽의 서쪽에 총석(叢石)이 즐비하게 섰는데 높이가 모두 백 척이 넘었다. 이른바 서석(瑞石)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날은 뿌연 흙비가 약간 개어 어제의 심했던 것보다는 나아서, 비록 멀리 사방을 조망할 수는 없었으나 가까운 산과 큰 시냇물은 대략 분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멀고 넓은 바다를 보고 한라산(漢拏山) 등 여러 섬을 역력히 헤아려 큰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 가는 뜻을 끝내 위로 할 수 없었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이에 다시 전에 오던 길을 되찾아 반야봉과 비로봉의 아래를 돌아 상원등의 동쪽으로 나와 삼일암(三日庵)의 월대(月臺)를 지나니, 선바위가 심히 기이하였으며 그윽하고 상쾌한 풍경이 여러 암자 가운데에서 가장 특출하였다. 선사의 말에 “이 암자에서 삼일을 머무르면 도를 깨달을 수 있으므로 금탑(金塔)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삼일암의 동쪽에 수십 척 되는 바위가 있어 홀로 허공에 드높이 솟았으니, 세속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가운데에 아홉 등급의 상륜(相輪)을 간직하였기 때문에 사찰의 이름을 이에서 취한 것이라고 하였다.

 

 

은적사(隱迹寺)는 금탑사의 동쪽에 있는데 바로 옹성(瓮城, 적벽의 동북방에 있음)과 마주 대했으며 샘이 바위틈에서 나와 경인년(중종25, 1530)의 가뭄에 이 산 가운데 샘이 모두 고갈되었으나 홀로 이 샘만은 도도히 흘러 마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석문사(石門寺)는 금탑사의 서쪽 80보쯤에 있는데 동서에 각각 기이한 바위가 쌍으로 서있어 여기를 거쳐 출입한다고 한다. 금석사(錦石寺)는 석문사의 동남방에 있으니,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른바 “고개 마루 흰 구름 산문을 가렸구나(門仗嶺雲封)”라는 구절은 곧 이곳을 지적한 것이다. 암자의 뒤에는 수십 개의 기이한 바위가 무더기로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샘이 있는데 매우 차가왔다. 대자사(大慈寺)의 옛터는 금탑사의 아래에 있는데 옛 우물이 심히 맑아 이끼가 끼지 않았으며 뜰 위에는 산단화(山丹花)가 활짝 피어있었다. 길가에 석실이 있어 비바람을 가릴 만하니, 세속사람들이 ‘소은굴(小隱窟)’이라 칭한다.

 

 

이날은 내가 상봉에서 이미 술에 만취하여 차분하게 두루 살펴보지 못하고 명승을 유람함에 있어 마치 말을 달려 비단을 구경하듯 눈에 언뜻 스쳐 지내어 한갓 그 휘황하고 찬란한 풍경만 보았을 뿐이요, 그 문채와 격조의 현묘함은 알지 못한 것과 같다. 원대한 이상을 좇아 유람하여 그 대략만을 이와 같이 기록했으니, 가을이 되면 사령운(謝靈運)처럼 나막신을 준비하여 오늘의 아쉬움을 달래볼까 한다.

 

 

금석사를 경유하여 산기슭을 돌아 동쪽으로 나온 즉 여기가 곧 규봉암(奎峰庵)이다.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괴석은 비단을 오려내 장식하였고, 봉우리는 백옥을 다듬어 이루었네(石形裁錦出, 峰勢琢圭成)’라는 구절은 참으로 빈말이 아니었다. 바위의 기괴함은 입석암과 더불어 비등한데 그 위치의 훤칠함과 형상의 특출함은 또한 입석암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 소상함은 권극화(權克和)의 기문에 나와 있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렸으므로 여기에 생략하는 바이며,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신라시대 김생(金生)이 이 암자의 편액 삼대자(三大字)를 써서 걸었는데 그 후에 도둑이 훔쳐갔다고 하였다. 광석대(廣石臺)는 암자의 서쪽에 있는데 바위 모습이 깎은 듯했으며 넓고 평탄하여 둘러앉으면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었다. 당초에는 서남방의 귀퉁이가 약간 낮았던 것을 승도들이 인부를 데리고 낮은 부분을 들어 올려 큰 바위로 밑을 괴어 반듯하게 바로잡았다 하는데, 그 웅장하게 서리어 견고한 모습을 보면 인력으로 된 것은 아닌 듯하였다. 이른바 삼존석(三尊石)은 바로 광석대의 남쪽에 있는데 그 높이가 나무숲 위에 나와 창연히 솟아있으니, 광석대의 장엄함을 더하고 기세를 더욱 도와주었다. 열 아름이나 되는 고목이 하늘고목이 하늘을 가리듯 광석대 위에 비스듬히 서 있어 나뭇잎이 우거지고 그늘이 짙어 서늘한 바람이 스스로 이르러 비록 삼복더위에도 홑옷을 입은 자는 오래 앉아있을 수 없었다. 천관(天冠), 팔전(八巓), 조계(曺溪), 모후(母后)의 여러 산들이 모두 눈 아래에 나열되었으니 규봉암(圭峰庵)의 승경이 이미 서석산에 있는 여러 사찰의 으뜸이 되었고, 이 광석대의 풍치는 또 규봉암에 속한 십대(十臺)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비록 남중(南中)의 제 일경이라 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최학사(崔學士)같이 난새와 학을 타고 이 사이에서 휘파람을 불며 자암(紫巖)의 정상에서 한 번 취묵(醉墨)을 휘둘러, 진주(晉州)의 쌍계(雙溪)와 합천(陜川)의 홍류(紅流)에서처럼 할 자가 없는 것이었다.

 

 

광석대의 서쪽에 바위가 길을 막아 문설주와 비슷했는데 그곳을 넘어 조금 걸어가니 곧 문수암(文殊庵)이었다. 암자의 동쪽에 오목하게 파인 바위가 있고 그 중앙에서는 샘이 솟아 나왔으며 그 둘레에는 석창포(石菖蒲)가 수북하게 자라났는데, 앞에는 몇 길 높이 되는 대가 있었고 너비도 높이도 그만큼 되었다. 광석대에서 서북방으로 접어들어 비탈길을 몇 굽이 지나 자월암(慈月庵)에 당도했는데 암자의 동쪽에는 풍혈대(風穴臺)가 있었고 바위 밑에 구멍이 있었으니, 풀을 그 구멍에 스치면 약간 팔랑거림을 느꼈다. 암자의 서쪽에 입석이 있는데 병풍과 같고, 돌들이 펼쳐져 깔린 땅이 있어 그 위에 늙은 소나무가 있었으니 이는 곧 장추대(藏秋臺)이며 그 아래 깊은 골짜기를 굽어보매 모골이 송연하였다. 장추대에서 서쪽으로부터 비탈길을 따라 남으로 접어드니 오솔길의 너비가 일척이 넘지 않았고 길이 패인 곳은 돌로 덮여 있었다. 발로 밟으니 딸가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래로 절벽을 굽어보니 칠흑같이 컴컴하여 비록 위태로운 바위를 밟기를 백혼무인(伯昏無人)처럼 하더라도 발꿈치를 안정되게 하고 설 수는 없을 것이다. 비탈길이 다하고 오목한 곳에 당도하여 원숭이처럼 잡고서 올라가니, 그 남쪽에 은신대(隱身臺)가 있었다. 오종종한 소나무 네댓 그루와 철쭉 몇 무더기가 있었는데, 모두 드러누운 듯 자라나 있었다. 은신대의 서쪽에는 바둑판같이 네모진 바위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좌선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 북쪽에는 청학대(靑鶴臺), 법화대(法華臺) 등이 있었는데 도처에 바위 구멍이 뚫려있어 배와 등을 땅에 대고 엉금엉금 기어 절정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손으로 땅을 짚고 팽조(彭祖)가 우물을 굽어보듯 하였다. 한 식경 후에 다시 비탈길을 타고 내려와 밤에 선생을 모시고 문수암에서 유숙하였다.

 

23일 정묘

 

일기가 청명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흰 구름이 뭉게뭉게 올라와 모든 골짜기에 평평하게 깔렸고 푸른 봉우리들은 아득한 운해 가운데에 점점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만경 바다 위에 파도는 고요한데 여러 섬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과 같았다. 조금 후에 운무가 바람을 따라 몰려 들어와서 두 언덕을 분별할 수 없었으며 아침 햇발이 비치는 곳에 가닥가닥 흩어져 붉은 상서의 기운이 혹은 서리고 혹은 나부껴 잠깐 사이에 만 가지 형태로 변했다. 한유의 시에 이른바 ‘비낀 구름 때로는 평평하게 어렸네(橫雲時平凝)’라는 구절도 족히 그 기묘함을 형용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선생이 머리에 복건(幅巾)을 두르고 처마 앞에 앉아 사방을 돌아보며 이 광경을 기이하게 여겨 절구 한 수를 지었다. 해가 서너 발 올라오니 구름의 형세가 점점 엷어지다가 잠깐 사이에 홀연히 흩어져 환하게 홍몽(鴻濛)이 열려 천지가 비로소 정해진 듯했으니 참으로 일대장관이었다. 선생이 광석대로 자리를 옮길 것을 분부하고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시를 화답하게 하였으며 시를 이루지 못하는 자는 벌주 한 잔을 마시기로 하고 말씀대로 시를 지었다.

 

 

서석산의 대략은 이미 매일의 일기에 실렸으니 더 논평할 것은 없을 듯한데 서봉사(瑞峰寺)의 풍수동(風水洞)과 향적사(香積寺)의 고목과 불영암(佛影庵)의 기암과 보리암(菩提庵)의 석굴도 그 그윽한 풍경이 금석사(錦石寺) 등 여러 사찰만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저것은 활달하고 이것은 아늑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날 선생이 장차 적벽(赤壁)에 유람하려 했으나 탐승의 겨를이 없어 산천초목으로 하여금 돌아보며 아름다움을 감상함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다만 우리의 유감만 되겠는가? 또한 이 산의 불우함일 것이다.

 

 

광석대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니 여기가 송하대(送下臺)이며 이로부터 동으로 향하여 산등성이를 따라 영신동(靈神洞)에 다다른 즉 오솔길이 가느다란 선과 같이 굽이굽이 얽혀있었다. 참으로 동파(東坡)의 시에 이른바 ‘길은 산허리를 감아 삼백 굽이쳐 돌았구나(路轉山腰三百曲)’라는 구절은 이 같은 곳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영신동으로부터 방석보(方石洑)에 당도하니 그 사이의 마을은 모두 시냇물을 끼고 있었고 돌밭과 띠집의 풍경은 소슬하며 닭이나 개소리도 서로 잊었으니 비록 무릉(武陵)의 주진촌(朱陳村)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다.

 

 

동구에서 나와 시냇물을 따라 남으로 약 오백 궁(弓)을 달리니 중첩한 봉우리가 옷의 주름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것 같았는데 늙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그 꼭대기를 덮었으며 석벽 사이로 한 가닥 길이 겨우 통하여 주민들이 이 길을 경유하여 오르내리고 있었다. 장불천(長佛川)이 그 아래를 감돌아 깊은 연못을 이루어 밑을 측량할 수 없었으며 띠집과 흰 용마루가 푸른 수풀 밖으로 은은히 보였으니, 완연히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그 마을의 이름이 몽교(夢橋)이니 명칭도 또한 매우 좋아 시의 자료가 될 수 있었다. 시냇물을 건너 동쪽을 바라본 즉 푸른 석벽이 수백 보를 연달아 채색병풍을 끝없이 펼친 듯했다. 그 위에 한 가닥 조그만 길이 있었는데, 이른바 노루목 고개였다. 험한 고갯길을 넘어 남으로 접어들매 푸른 단풍나무와 늙은 소나무가 석벽에 비껴 늘어져 그림자가 거꾸로 연못에 잠겨있었다. 옛날 남장보(南張甫)가 이곳을 지나다가 ‘창랑’이라 명칭하였다. 남령(藍嶺)과 장불(長佛) 두 시냇물이 이곳에서 합류되는데, 장불천은 태철(汰鐵)하는 이들 때문에 때로는 물빛이 흐리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었다. 층암으로 된 언덕이 급하게 연못 가운데로 뻗어 들어가 층계를 이루었고 한 떼의 큰 물고기들이 그 아래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을 뚫고 바위 위에 그림자가 일렁거리자 비단결같이 찬란했으며 은어 수십 마리가 또한 활발하게 뛰고 놀았다. 내가 비록 물고기는 아니었으나 또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적벽에 당도하니 현령 신응항(申應亢)이 먼저 이르러 장막을 치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이 보건대 옹성(瓮城)의 산은 순전히 바위로 되어 첩첩한 봉우리가 혹은 낮고 혹은 높아 형세가 마치 진마(陣馬)가 나란히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이 절벽이 된 듯 우뚝 높이 솟았다. 그리하여 몇 리를 뻗어내려 종횡으로 뒤얽힌 형세가 위로는 푸른 하늘에 닿았고 아래로는 티끌세상을 진압했으니, 만약 조화의 원기가 뭉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장엄할 수 있겠는가? 그 높은 곳은 덩굴이 이어져 대략 어림잡아 보니 거의 70장(丈)이 되며 창랑의 물이 굽이쳐 돌아 깊고도 물빛이 검푸르니 마음에 두려워 굽어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 ‘이 적벽은 가운데가 텅 비어 속삭이는 말과 조그만 소리도 메아리친다’고 하였다. 동복현감(同福縣監)이 사람을 시켜 높은 곳에서 퉁소를 불게 하고 또 돌을 굴러 내리게 하니 서로 맞부딪쳐 진동이 심한 바람이 일어나고 물결이 일렁거려 노기가 치솟아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적벽은 고을과 거리가 10여 리 떨어져 땅이 궁벽지고 사람의 자취가 드물어 이리와 호랑이가 들끓고 족제비와 박쥐가 우글거리니 다만 산골 늙은이가 밭을 일구며 그 사이에서 세상을 흘겨보며 누추하게 살고 있었다. 장원(長源)이 한 번 자취를 끊은 후에 뒤를 이은 자가 없으니, 풍류와 회포를 알아 줄 이가 없게 된 지 거의 수백 년이 되었다. 그러다 사인(舍人) 최신재(崔新齋)가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이 고을로 유배되었는데, 하루는 손님과 동반하여 달천(達川)에서부터 물의 원류를 더듬어 이 명승을 찾게 되었다. 이에 남방 사람들이 비로소 적벽을 알게 되어 시인 묵객의 노는 자취가 잇달게 되었으니 임석천(林石川)이 명(銘)을 짓고 김하서(金河西)가 시를 지어 드디어 남국의 명승지가 되었다. 아! 무창(武昌)의 적벽은 황강(黃岡) 만리 밖에 있어 남만지대(南蠻地帶)의 안개가 자욱한 곳이었으나 다행히 소동파(蘇東坡)의 전후 적벽부에 힘입어 마침내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시운에는 통하고 막힘이 있고, 지리에도 드러나고 숨음이 있으니 이치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

 

 

적벽의 동쪽에 오봉사(五峰寺)가 있는데 선생을 모시고 따르는 사람 중에 희경(希慶)이라는 자가 있어서 시 짓는데 조예가 깊고 명구가 많았다. 오후에 동복현감과 작별하고 침현(砧峴)을 넘어 이점(耳岾)을 지나니 시내 위에 조그만 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는 마을 사람 정필(鄭㢸)이 세웠고 민응소(閔應韶)가 수령으로 있을 때에 이구암(李龜巖)과 더불어 감상했는데 지금도 시판이 벽상에 걸려있다고 하였다. 이날 찰방(察訪)은 용무가 있어 동복으로 향하고 해가 저물어 창랑의 유정[柳亭, 진사 정암수(丁嵓壽)의 별장임]과 무염(無鹽)의 석탄[石灘, 현감 송정순(宋庭筍)이 이곳에 서재를 세웠음]을 관상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이번 유람길의 한 가지 아쉬움이었다.

 

 

저녁 무렵 소쇄원(瀟灑園)에 당도했다. 이는 양산인(梁山人)의 옛 별장이었다. 시냇물이 집의 동쪽으로부터 흘러왔는데 담장을 뚫고 끌어들여 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뜰 아래로 흘러간다. 그 위에는 조그만 다리가 놓여있었고 다리 아래에는 바위가 오목하게 생겨 ‘조담(槽潭)’이라고 하는데 그 물이 조그만 폭포가 되어 쏟아 내리니 그 소리가 영롱하여 거문고를 울리는 듯하였다. 조담의 위에는 노송이 굽어서 쓰러지듯 덮어 연못을 걸쳐 비껴있다. 조그만 폭포의 서쪽에는 아담한 서재가 있었으니 완연히 화방(畵舫)과 비슷하였다. 그 남쪽에는 돌을 높게 쌓아 날개를 편 듯 조그만 정자를 세웠는데 형상이 일산(日傘)과 같았다. 처마 앞에는 벽오동이 서 있는데 고목이 되어 가지가 반쯤 썩어 있다. 정자 아래에는 조그만 연못을 파고 나무 홈통으로 시냇물을 이끌어 댔다. 연못의 서쪽에는 죽림이 있어 큰 대 백여 그루가 옥과 같이 서 있어 완상할 만하였다. 죽림의 서쪽에는 연지가 있는데 둘레를 돌로 쌓고 시냇물을 이끌어 조그만 연못을 이루었다. 죽림 아래를 거쳐 연지(蓮池)의 북쪽을 지나니 또 물방아가 있어 보는 것마다 소쇄하지 않음이 없었다. 김하서(金河西)의 48영(詠)에 그 아름다운 풍치가 모두 그려져 있다. 주인 양군(梁君)이 선생을 위하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날 저녁에 비로소 식영정(息影亭)에 당도했으니 곧 강숙(剛叔, 김성원)의 별장이다. 선생이 난간에 의지하여 한가로이 감상했는데 자못 지극히 편안하였다. 밤에는 서하당(棲霞堂)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즐겁게 놀다가 흥이 다하자 자리를 파했으니 이 또한 한때의 매우 즐거운 일이다. 식영정과 서하당의 두 편액은 모두 박공(朴公)이 쓴 것으로 정자는 팔분체(八分體)고 당은 전자(篆字)로 되어 있다. 무릇 식영정과 서하당의 아름다운 풍치는 이미 석천(石川, 임억령)의 기문에 소상히 실려 20영과 8영 가운데 섞여 나왔으니 이제 어찌 새삼스레 말을 더할 필요가 있겠는가? 당의 뒤편에는 돌로 몇 계단을 쌓아 모란, 작약, 월계화, 일동(日東), 철쭉 등을 심었는데, 모두 뛰어난 품종으로서 번화하지 않고 아름다워 자연의 미를 갖추어 있었다. 서하당의 북쪽 모퉁이의 네모진 연못이 반묘(半畝)쯤 되는데 백련 네댓 줄기를 심었고 대홈통으로 샘물을 이끌어 뜰아래를 거쳐 연못에 댔다. 연못의 남쪽에는 벽도(碧桃) 한 그루가 있고 그 서쪽에는 석류 몇 그루가 담장 위로 뻗어 있었다. 식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날아갈 듯한 정자가 있고 그 앞에는 큰 반석이 시냇물을 가로 막았으며 아래에는 맑은 연못이 있다. 이는 곧 사문(斯文) 김윤제(金允悌)의 고택으로서 신영천(申靈川)이 편액을 환벽당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24일 무진

 

일기가 청명하였다. 아침에 창평현령(昌平縣令) 이공(李公)이 찾아와 선생을 뵙고 인하여 서하당에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일원(一元, 이만인)이 소쇄원으로부터 나중에 오게 되어 벌주로 큰 술잔에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한창일 때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여러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판관(判官)이 가장 나중에 일어나거늘 나와 강숙(剛叔, 김성원)이 그를 만류하고 식영정에 올라가 다시 술자리를 열매 술잔이 오가며 환담과 해학이 벌어졌으니, 장자(莊子)가 말한 ‘불을 지피는 자는 아궁이를 다투고 함께 묵은 나그네는 자리를 다툰다.’는 말이 과연 맞는 말이었다. 내가 만취하여 소나무 아래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가 문득 깨어나 보니, 이에 남가일몽이었다. 빈산은 쓸쓸하고 솔바람 소리는 그윽한데 우두커니 서 있으니 허전한 느낌이 있었으며 상봉을 돌아보매 드높은 푸른 봉우리는 본래 모습 그대로였다. 명승을 유람한 일을 미루어 생각하건대 이미 옛 자취가 되어 다시 알 수 없었다.

 

이에 유람의 전말을 대략 서술하여 기행문을 삼는다. 다른 날 선생을 사모하나 기러기와 땅속의 벌레처럼 감응할 인연이 없을 때 이 기행문을 펼쳐본다면 바로 옆에서 선생의 목소리와 모습을 받드는 듯할 것이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산이요 만났다가 헤어지기 쉬운 것은 사람이다. 육십 성상이 번개같이 지나 뵈올 날이 많지 않을 것이니, 이 산에 올라 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찌 금할 길 있겠는가? 조만간 마땅히 짚신과 무명버선으로 선생을 갈천의 고택(현 경남 거창에 위치)으로 찾아가 뵈옵고 물러나와 여정(汝正, 이진) 등 제군과 더불어 수송(愁送, 거창 수승대의 옛 이름)의 높은 대를 잡고 지우(智雨, 거창 기백산의 옛 이름)의 붉은 사다리를 밟아 올라가 맑은 폭포수에 머리를 씻고서 내 뜻한 바를 모두 이루어볼까 하는 마음이다.

선조 7년(1574) 갑술 5월 초일에 장택산인(長澤散人) 고경명(高敬命)은 기록하다.

 

출처 : 호남기록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