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묵유거(禪墨幽居)

소소한 일상적 삶을 사유의 장독에서 삭혀낸 낭만적인 글과 이야기

정유명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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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2019. 1. 5.

옮겨온 글

진양정씨 농산 입향조 휘 순 선조의 따님이 초계정씨 정숙과 혼인을 하여 정유명을 낳고 손자인 동계 정온의 할머니가 됨

본 자료에는 정유명이 어마니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는 기록이 담겨짐

 

 

신도비 및 묘갈7- 장,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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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계]정유명[鄭惟明]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김유(金瑬)

작성자雲影(禹顯)|작성시간16.11.28|조회수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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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명[鄭惟明]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김유(金瑬)

 

지난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흉악한 자들이 화를 부채질하여 열화(烈火)처럼 치성하니, 경사대부(卿士大夫)들이 마치 개나 돼지가 포주(庖廚)를 보고 머리를 숙이듯이 하였다. 그런데 지금 부제학(副提學) 정공(鄭公, 정온(鄭蘊)을 지칭함)만 혼자 몸을 던져 큰 절개를 수립하였다. 매양 정공이 올린 소(疏)를 읽고 그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머리털이 쭈뼛쭈뼛 곤두서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이어 말하기를, “도리를 분명하게 보고 칼날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지 않았다면 정말로 이 일을 해낼 수 없었으니, 대저 어찌 힘써 억지로 취한 것이겠는가?”라고 하였었는데, 이제 그 선친(先親)의 행장(行狀)을 보건대, 가정의 교훈을 받아 익힌 것이었으니, 정말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행장을 살펴보니, 공(公)의 휘(諱)는 유명(惟明)이고, 자(字)는 극윤(克允)이며, 관향(貫鄕)은 초계(草溪)이고, 호(號)는 역양(嶧陽)이다. 고려조에 정배걸(鄭倍傑)이란 분이 시중(侍中)으로 광유후(光儒侯)가 되었고 홍문공(弘文公)의 시호를 받아 정씨(鄭氏)가 크게 드러났다. 그의 아들 정문(鄭文)은 벼슬이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고 그 뒤 대대로 저명한 인물이 있었다. 정승(鄭丞)ㆍ정방주(鄭邦柱)ㆍ정굉연(鄭宏衍) 3대는 연이어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고, 정굉연의 아들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정습인(鄭習仁)은 정직하기로 이름이 나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전(傳)을 썼으며, 상시(常侍)의 아들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 정전(鄭悛)은 팔계 선생(八溪先生)으로 불리었고 문장과 덕행이 세상의 모범이 되었는데, 이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高祖) 정제안(鄭齊安)은 성균 생원(成均生員)이고, 증조(曾祖) 정종아(鄭從雅)는 행충주 목사(行忠州牧使)이며, 할아버지 정옥견(鄭玉堅)은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지내고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정숙(鄭淑)은 진용 교위(進勇校尉)를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진주 정씨(晉州鄭氏) 부사용(副司勇) 정순(鄭純)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고려 판도 판서(版圖判書) 정인득(鄭仁得)의 6대손으로 이분이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조용하여 놀이를 즐기지 않고 희롱을 좋아하지 않아 거동이 보통아이들과 달랐다. 조금 장성하여 갈천(葛川) 임훈(林薰)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그 도를 얻으니, 여러 문인들이 추대하여 영수(領袖)로 삼았다.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에 승지공(承旨公)이 세상을 떠나자 공이 예절에 지나칠 정도로 야위었고 눈물을 흘리며 죽만 먹다가 2년이 되자 시력을 거의 다 잃어버렸는데, 대부인(大夫人)이 밥을 먹도록 강권한 끝에 비로소 밥을 먹었으므로 오래 지나서야 시력이 다시 회복되었다.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늙은 대부인을 생각하여 태학(太學)에 가 유학하지 않은 채 날마다 탕제(湯劑)로 봉양하면서 온화한 안색으로 어머니 뜻을 순종하고 무릎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사모하였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불안한 기색이 있으면 얼굴에 우려의 빛이 드러나 스스로 지탱하지 못할 것 같았다. 대부인이 항상 말하기를, “나의 밥 한 숟가락의 다소에 따라 네가 걱정하고 기뻐하니, 내가 비록 밥을 먹기 괴롭지만 너를 위해 억지로 먹는다.”고 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대부인의 병환이 위독하자 공이 허리띠를 풀지 않고 밤낮으로 간호하며 백방으로 치료하고 기도하였으나 결국 나이가 많아 치료가 소용이 없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공이 한 잔의 물도 마시지 않고 여러 번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력으로 일어나 한결같이 상례(喪禮)에 따라 하였다. 그때 마침 큰 흉년이 들어 장사를 치를 수 없었으나 친구들의 도움에 힘입어 봉분을 만들고 더욱더 힘을 써서 제전(祭奠)을 갖추었다. 일을 끝마치자 묘소 곁에다 여막(廬幕)을 지어놓고 거상(居喪)하면서 아버지 상(喪) 때처럼 채소와 과실은 먹지 않고 죽만 마시었다. 그리고 아침과 저녁이면 묘소에 가서 반드시 곡하여 슬픔을 다하였고 상복(喪服)을 잠시도 벗어놓지 않았다. 이해에 마을에 돌림병이 치성하여 여막 부근 수십 보까지 전염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공을 걱정하여 피하라고 권하였다. 공이 향화(香火)를 지키고 떠나지 않았으나 끝내 전염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공의 효성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향리의 대부(大夫)와 부로(父老)들이 공의 효행을 기술하여 현령(縣令)에게 보고하니, 현령은 방백(方伯)에게 상신하고 방백은 조정에 보고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조정에서 몇 개의 조목을 하달하였는데, 그 조목에 공이 맨 첫 번째로 해당되었다. 이윽고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이 남도(南道)에 체찰사(體察使)로 내려와 공의 행실을 높이 여겨 그 사실을 뽑아 아뢰었으나 조정에서 지원해 준 사람이 없어서 모두 중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공은 평생 가업을 경영하지 않아 나물밥도 근근이 먹었으나 개의하지 않았다. 손님이 찾아오면 더러 아무 것도 없이 서로 보면서 온종일 앉아 있어도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하지 않았고, 사람이 초청하면 번번이 가서 유유하게 사람들과 더불어 즐겁게 마시고 해학하며 웃었다. 거처하는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집안이 소연(蕭然)하였는데, 정원에 다른 화훼(花卉)는 심지 않고 매화와 대만 심어놓고 날마다 마주 보며 즐거워하였다. 본래 산수를 좋아하여 덕유산(德裕山)과 지리산(智異山)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마음대로 감상하여 남강(南康) 여악(廬嶽)의 흥취1)를 의탁하였다. 또 두서너 동지들과 의논하여 역계(嶧溪)의 가에다 집을 지어놓고 공부하는 장소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완성하지 못하였다. 공이 비록 병을 깊이 앓고 있었으나 하루도 세수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평소에 반드시 단정히 앉아 곁으로 기댄 적이 없었으며, 오직 술은 한량이 없었으나 또한 법도를 잃은 데 이르지 않았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적이 쳐들어옴을 만나 여러 고을이 지레 겁을 먹고 무너지자 왜적의 흉측한 칼날이 곧바로 서울로 향하였으므로, 공이 목놓아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이 왜적을 우리 임금에게 보낸단 말인가?” 하고, 눈물을 훔치고 혈안(血眼)으로 보면서 맹세코 왜적과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향리의 자제들의 앞에 서서 의병(義兵)을 모아 의병장(義兵將) 김면(金沔)과 호응하여 오고가며 전략을 세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비록 초야에 있었으나 이처럼 일심으로 임금을 생각하였다. 전란이 끝난 뒤에 또 기근(饑饉)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죽음에서 구제해야 할 때에 작서(雀鼠)가 밭두둑에서 이삭을 잘라가는 것을 보고는 사람들이 문득 남겨두지 않고 다 베어버렸는데, 공이 그 말을 듣고 매우 책망하기를, “이때가 어느 때인가? 사람도 서로 잡아먹으려 하고 있으니, 한 되, 한 말은 잠시 동안 연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찌 사수(死數)를 엿보기만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백성은 하늘의 백성이니, 어찌 차마 내 손으로 하늘의 백성을 죽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굶주린 사람을 보면 밥을 나누어주고 식량을 떼어주어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으니, 공의 자상하고 측은한 마음은 천성이 본래 그러하였다.

 

공은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 겨울에 병환이 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병환이 위독하자 아들 정율(鄭)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생 동한 한 일이 하나도 볼 것이 없었다만, 선조(先祖)를 받드는 일만큼은 네가 준수하여 실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가례(家禮)≫를 가르쳐주어 인도(人道)의 요점을 알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병이 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하고 가사(家事)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공이 세상을 떠난 날 원근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너나없이 애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선인(善人)이 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향리의 선비들이 대부분 흰 의관의 차림으로 곡하여 마치 친척의 상(喪)을 당한 것처럼 하였다. 공은 가정(嘉靖) 기해년(己亥年, 1539년 중종 34년) 3월 4일에 태어나 만력(萬曆)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 12월 9일에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나 안음(安陰) 성산(城山) 아래의 문주동(文胄洞)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묏자리에 묻히었는데, 선영의 아래였다.

 

공은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행실이 단상(端詳)하였다.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독실하고 신중하며 화평하고 느슨하여 급박하지 않았다. 흉금이 평탄하여 성부(城府, 속마음을 터놓지 않는 일)를 세우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자리라고 하여 자신을 자랑하여 꾸미거나 혼자 있다고 하여 해이하지 않았다. 남의 선은 드러내고 남의 악은 덮어주었으며 다른 사람이 나를 헐뜯으면 받아들이고 따지지 않았다. 향리의 선한 사람을 사랑하자 선하지 않은 사람이 교화되었다. 평소 여러 사람들과 있을 때 신실하여 가부가 없는 것 같았지만 의리에 처하거나 사람의 잘못을 책망할 적에는 칼로 자르듯이 분명하여 범할 수 없었다.

 

형제가 모두 일찍 죽고 제매(弟妹)만 있었는데, 사랑이 독실하고 지극하여 다른 사람들이 갈라놓을 수 없었다. 제매(弟妹) 중에 일찍 죽은 자가 있었는데, 그의 자식을 거두어 아들로 삼아 양육하고 가르치는 것을 친자식처럼 하였다. 벗과 사귈 적에 오래 될수록 더욱더 공경하여 시종 변하지 않았다. 일가붙이를 좋아하고 친척들에게 베풀었다. 급한 일이 있어 요청하면 모두 다 팔아서 도와주었고 사상(死喪)이 생기면 반드시 스스로 처리하였다. 집에서 생활할 때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한 다음 가묘(家廟)를 알현하였으며, 외출할 적에는 반드시 가는 곳을 고하고 돌아와서도 그렇게 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였다. 제사가 있으면 제수(祭需)를 반드시 몸소 점검하였고 비록 혹독한 추위를 만나도 깨끗이 씻었으며 재계하는 날에는 글도 보지 않았다.

 

손수 ‘성경(誠敬)’ 두 글자와 ‘스스로 속이지 말 것’, ‘혼자 있을 때 삼간다.’는 등의 말을 써서 벽에다 붙여놓고 스스로 보고 살피었다. 독서(讀書)할 때 사서(四書)를 근본으로 삼았고 성리(性理) 등등의 여러 글도 어느 하나 깊이 연구하고 익히 강론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먼 곳에서 임 선생(林先生, 갈천(葛川) 임훈(林薰))을 찾아와 유학하는 선비들 중에 더러 먼저 공에게 찾아와 질문하기도 하였다. 글을 지을 때 간곡하고 명쾌하여 사정에 매우 가깝게 접근하였으므로 임 선생이 자주 칭찬하기를, “정 아무개의 글은 나도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이 일찍부터 갈천의 문하에서 유학하였고 또 옥계(玉溪) 노 선생(盧先生, 노진(盧禛))을 스승으로 섬긴 지 가장 오래 되었는데, 옥계 또한 매우 중하게 여기었다. 공은 과거 공부를 탐탁지 않게 여기었으나 집은 가난한데다 늙은 어버이가 계시어 괴로웠으므로 30여 년간 과장(科場)에 출입하였다. 그런데도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끝내 화난 기색이 없었고 더욱더 부지런히 후학을 가르치고 자제를 가르치는 것을 일로 삼았다. 일찍이 고인(古人)의 중요한 말을 작은 책에다 기록해놓고 두 아들로 하여금 외워 익히게 하였는데, 성경(誠敬)이 바로 첫 번째의 조목이었다.

 

또 일찍이 부제학(副提學)공에게 경계하기를, “학문을 하는 실제는 구두 문자(口讀文字)의 사이에 있지 않다. 사람에게 다만 하나의 마음과 몸이 있는데, 깨우치고 가다듬지 않고서 마구 내버려 둔다면 결국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지난 흉년이 들 때를 인하여 부제학공이 재화를 불릴 것을 말하니, 공이 한참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죽음을 구제하기에 정말로 급급하지만 만약 오로지 이것을 마음먹는다면 곧바로 의리를 해칠 것이니, 너희들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궁한 것으로 인해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볼 수 있다.

 

아! 공은 자질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저절로 암암리에 도리와 합치되었으니, 사우(師友)간에 훈도한 힘과 학문을 강마한 공부에서 얻어 심신(心身)으로 체인(體認)하여 성정을 함양한 것이 정말로 깊다고 이를 만하다. 어찌 턱을 세우고 도의(道義)를 이야기하여 사람의 기호에 맞기를 바라는 세상 사람들과 비유하여 개괄적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오직 깊이 스스로 감추어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임천(林泉)에서 늙어 굽힌 채 펼쳐보지 못하여 재능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도가 당시에 시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에게 축적된 것을 그의 아들에게 가르쳐주어 꺼져가는 불씨에다 곧은 기를 불어넣음으로써 내세에 명성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융성한 때를 만나 임금을 경연(經筵)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조석으로 계도하여 지극한 치세(治世)를 조성하려고 기약하였으니, 공의 학문이 또한 세상에 크게 행해졌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나는 공이 굽힌 것이 아니라 공이 폈다고 여긴다.

 

공은 장사랑(將仕郞) 강근우(姜謹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고려조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강계용(姜啓庸)의 후손으로 관향은 진주(晉州)이다. 부인은 지어미로서 군자(君子)를 섬길 적에 어긋난 덕이 없었고 어머니로서 자식을 의리의 방법으로 가르쳤으며,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에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니, 이는 도를 지키는 군자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어미 역할을 잘하고 어머니 역할을 잘하였던 (옛 춘추 시대 노(魯)나라) 공보문백(公父文伯)의 어머니에게 손색이 없으니, 이를 또한 전할 만하다. 공보다 35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미 부제학공의 녹(祿)을 8년간 누린 것이고 춘추 93세였다. 거창(居昌) 가조현(加祚縣) 용산(龍山)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묏자리에다 별도로 장사를 치렀다.

 

공은 3남을 두었다. 맏아들 정율(鄭)은 충순위(忠順衛) 박사충(朴士忠)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정창세(鄭昌世)ㆍ정창후(鄭昌後)를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정창세는 배수립(裵樹立)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고, 정창후는 유후갑(劉後甲)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둘째 아들 부제학(副提學) 정온(鄭蘊)은 충의위(忠義衛) 윤할(尹劼)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정창시(鄭昌詩)ㆍ정창훈(鄭昌訓)ㆍ정창모(鄭昌謨)를 낳았다. 정창시는 운봉 현감(雲峰縣監)으로 충의위(忠義衛) 이희옹(李希雍)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정창훈은 사과(司果) 유영정(柳永貞)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정창모는 찰방(察訪) 박공구(朴羾衢)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셋째 아들 종묘서 부봉사(宗廟署副奉事) 정백(鄭絔)은 참의(參議) 장지현(張智賢)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어 정창훈으로 후사를 삼았다. 딸은 유학(幼學) 신영(愼詠)에게 시집가 자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부제학이 귀하게 되어 3대에게 은총이 미루어졌는데, 공에게는 이조 참판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숭정(崇禎)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에 예조에서 공의 효행을 아뢰니,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이윽고 또 온 향리의 사람들이 오래 될수록 더욱더 존경하고 사모하여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돌을 흘겨보니, 옥(玉)으로 다듬지 않은 옥돌이었는가? 쪼아서 갈아놓으니, 옥돌이 옥이 되었는가? 옥돌이여! 옥이여! 역산(嶧山)의 양지에서 나왔도다.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고 그 문채를 드러내지 않았도다. 오직 오래도록 보존하니, 그 진성이 변하지 않았도다. 옥이여! 옥돌이여! 전부 다 후손에게 물려주었도다.

 

각주

 

1) ≪회암집(晦菴集)≫ 제68권 기유남강여산(記遊南康廬山)에 “회옹(晦翁;주자(朱子))이 정정사(程正思)ㆍ정복지(丁復之)ㆍ황직경(黃直卿)과 같이 와서 강산(江山)의 경치를 유람하고 즐거워서 돌아갈 줄을 몰랐는데, 때는 순희(淳熙) 기해년(己亥年;1179) 중오일(重午日;단오날)이었다.”고 하였음.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吏曹參判八溪鄭公神道碑銘 幷序

 

 

往在癸丑獄起。凶孼煽禍。飆發火烈。卿士大夫若犬豕之垂鼎俎。而今副提學鄭公。迺獨捐軀樹大節。每讀其疏。談及其事。未嘗不髮策策若磔也。曰非見道理分明。視刀鉅爲亡物。固不足以辨此。夫豈勉強襲取也哉。及見其先公狀。吁其習於庭訓者。眞是父子也。按狀公諱某。字某。草溪人。嶧陽其號也。在麗朝有諱信傑。爲侍中光儒侯。諡弘文公。鄭氏遂大顯。子諱文。官至禮部尙書。其後世世有聞人。有諱丞,諱邦柱。諱宏衍。比三世擧進士。隱居不仕。宏衍生左散騎常侍習仁。以正直名。牧隱李穡傳之。常侍生寶文閣提學悛。號八溪先生。文章行誼。爲世模楷。於公五代祖也。高祖諱齊安。成均生員。曾祖諱從雅。行忠州牧使。祖諱玉堅。司圃署別提贈司憲府執義。考諱淑。進勇校尉贈承政院左承旨。娶晉州鄭氏副司勇純之女。高麗版圖判書仁得六世孫也。寔生公。公幼而恬靜。不嬉游。不好弄。擧止異凡兒。稍長。游葛川林先生薰之門。遂得其道。諸門人推以爲領袖。癸亥。承旨公歿。公毀踰制。泣血餟粥。將再朞弗已。目幾損。大夫人泣強飯。始飯糲久之復明。癸酉。中進士。念大夫人老。不肯游泮宮。惟日事湯劑奉養。和顏愉色。順適其志。依依膝前孺子慕。少有不安節。戚見于容。若不自支者。大夫人常曰。若憂喜吾一匙多少。吾雖苦飯。爲若強進焉。己卯。大夫人宿疾沈綿。公不解帶。日夜扶掖。醫禱百方。竟用年至不任治而卒。勺飮不入口。欲絶而甦者屢矣。猶能自力。一遵禮制。時歲大侵。將無以供葬事。賴親舊事之營窀穸。備祭奠逾力。旣事。廬于墓傍。斥蔬果食糜粥如前喪。每朝夕墓。必哭盡哀。衰麻之服。不暫去身。是歲村里疫熾。逼廬幕僅數十步。人甚危公。勸公避。公守香火不去。疫卒不染。人謂誠孝所感。先是鄕大夫父老撰次公孝行。亟報縣倅。縣倅申于方伯。以聞于朝廷。乙未歲。朝廷下數條目。選中目者。公實居首。已又李相元翼體察南路。高其行摭實上聞。而亡援于朝。皆寢不行。公平生不事家。蔬食厪厪也。弗以爲意。客至或淸坐相看。至終日不之謝。人有造請輒往。由由與之偕。樂飮諧笑。所居室廬。不蔽風雨。環堵蕭然。庭中植以梅竹。不雜他花卉。日相對怡顏。雅好山水。尋德裕窮智異。恣意登覽。以寓南康廬嶽之趣。又謀與二三同志。築室于嶧溪之上。以爲藏修之所。力綿未克完。雖沈痾在身。亡一日不頮盥。燕居必端坐。未嘗欹側。惟酒乎無量。亦未至失度。屬壬辰倭寇。列郡望風崩潰。凶鋒直伺京都。公失聲大慟曰。奈何以此賊遺吾君乎。抆淚血視。誓不與賊俱生。倡鄕里子弟。聚義旅應金義將沔。往來經畫。多所裨益。雖在草野。一心靡不向君父者如此。喪亂之後。又値飢饉。民交救死。目前有雀鼠畝圳穧穗者。人輒芟薙而不留之。公聞而慘傷。切責曰。此何時乎。人且相食。是升斗亡過爲晷刻計已。惡可以死數盜視也。況民天民。其忍吾手而殺天民哉。見餓莩。分食割橐。濟活甚多。其慈祥惻怛。天性然也。丙申冬。以疾終于正寢。疾革。謂子䋖曰。吾平生行事。亡一可觀。惟奉先節目。汝可遵守勿墜。又曰。吾欲授汝輩以家禮。俾知人道之要。今病至此。奈何亡一言及家事。歿之日。遠近聞之。莫不傷嗟涕洟。咸曰善人亡矣。鄕之士子多白衣冠而哭。如有服之親。公生以嘉靖己亥三月初四日。卒以萬曆丙申十二月初九日。得年五十八。葬于安陰城山下文胄洞艮坐坤向之原。從先兆也。公性度溫雅。摻履端詳。忠信篤敬。和緩不迫。襟懷坦夷。不立城府。不以稠廣而有所矜飾。不以幽獨而有所惰弛。揚人之善。掩人之惡。人有毀己。受而弗較。鄕人之善者愛之。不善者化之。平居群處。恂恂如亡所可否。及據義理責人非。截然有不可犯者。有兄弟皆蚤世。獨娣迷在。親愛篤至。人莫能間。娣有蚤歿者。收其孤而子之。拊養敎誨若己出。與朋友交。久而益敬。終始不貳。好族施黨。有緩急請。悉斥訾而周之。有死喪必自經紀。家居。未明而起。整衣冠謁家廟。出必告所。歸亦如之竟卒。凡有享祀。籩鉶之品。必躬莅之。雖値沍寒。澡洗潔淨。正齋之日。書亦不觀焉。手書誠敬二字毋自欺謹其獨等語。貼于窓壁間。以自省覽。讀書以四子爲本。於性理諸書。亡不硏窮而熟講之。士之自遠方游學林先生者。或先就公質之。其爲文委曲明暢。切近事情。林先生亟稱之曰。鄭某之文。吾所不及也。公已早遊葛川之門。又從事玉溪盧先生最久。玉溪亦深重之。公弗屑屑擧子業。苦家貧親老在。擧場卅餘年。弗獲售。終無慍色。益孜孜以訓後學。敎子弟爲事。嘗錄古人要語于小冊子。使二子誦習之。誠敬乃其第一條也。又嘗警誨副學公曰。爲學之實。不在口讀文字間。人只有一箇心與身。不曾喚醒提省。任他放倒了。終做何樣人。頃因歲歉。副學公言積著。公默然良久曰。汝輩救死固急。若專以此爲心。便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