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묵유거(禪墨幽居)

소소한 일상적 삶을 사유의 장독에서 삭혀낸 낭만적인 글과 이야기

두물머리 까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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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2019. 1. 28.

가계사 기행>

 

(6) 두물머리 까꼬실

정 태 수

 

우리 선조들이 터를 정한 까꼬실은 수몰되기 전 한 300년간 남이 부러워한 부촌이었다. 토지는 넓고 비옥했고, 밥의 원료인 쌀과 밀 보리에, 기본반찬 원료인 무 배추와 고추, 계절후식꺼리인 참외 수박, 구황식품인 고구마 감자까지 고루 나는 명산지였다. 특히 양쪽 강에 떼 지어 다니는 은어와 황어는 별미감이였다. 산에 땔감 많고 들에 목화 잘 되고···. 말하자면 의식주 넉넉하고 살기좋은 땅이었다. 과장되기는 했지만, 까꼬실의 논 한 마지기는 진주시내의 집 한 채와 안 바꾼다는 말도 있었단다. 제법 넒은 ‘너우니’의 은빛 모래톱은 진주 시민의 여름철 물놀이장소였다. 우리 일족이 까꼬실 안의 한골 새미골 도래미 분딧골 등등 여러 동네에 나뉘어 살았고, 그 중 나의 직계선조는 9대에 걸쳐 ‘새미골’에 살았다.

 

후손 모두 무탈하게 살면서 천석꾼도 만석꾼도 배출되고 신원伸寃 후 농포공을 위하여 조정이 내린 부조묘不祧廟와 유가의 표상인 가호서원佳湖書院 그리고 서당 각후재覺後齋와 나중에는 귀곡초등학교까지 유치하여 범절과 교학을 중시하는 양반가의 기본적 위상을 갖추었었다. 그러나 이랑이 고랑되고, 고랑이 이랑된다는 속담대로 진양호 조성사업으로 개벽을 이루어 그 동네와 들판이 지금은 푸른 호수와 무인도로 변해버렸다.

 

진양호 조성의 첫 삽질이 1962년이었으니 우리 씨족의 까꼬실 집성촌사는 330여 년간이 되는 셈이다. 1969년에 완공된 진양호의 댐은 길이 1.126m, 높이 34m로 309만 톤의 물을 가두어 서부경남의 생활용수 농업용수 공업용수와 관광자원으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다. 옛 명당골이 새 수자원 요충과 새 관광명소로 다시 태어나고, 진양호의 일몰은 진주8경의 하나가 되었다.

 

까꼬실이란 이름은 옛날부터 불리어온 특이한 토속어로 한자화하면서 가귀곡(嘉貴谷) 가이곡(加耳谷) 가귀곡(加貴谷) 가이곡(佳耳谷) 가곡(佳谷) 귀곡(貴谷)으로 변천되어왔다. 내 생각으로는 원 지명 ‘까꼬실’은 지형이 곡식 검는 까꾸리(갈고리의 사투리)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농경시대형 이름이 아니었나 싶다. 백두대간이 태백산맥 소백산맥 지리산으로 굽이쳐 오다가 그 한 가닥이 정지한 산이 마을 뒷산 황학산黃鶴山인데 그 앞엔 낮은 메들이 여럿이 까꾸리발 같이 줄지어 골을 이루고, 그 바깥을 들녘이 둘러싸고, 또다시 그 바깥을 두 강이 흘러와서 합치니, 들판에 까꾸리 엎은 형국이 아닌가. 풍수설로는 뒷산 중심으로 봉황 포란형이라 일컬었다지만.

 

까꼬실로 흘러오는 강은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산청을 돌아오는 경호강과 역시 지리산 발원의 물이 하동을 돌아오는 덕천강이 서로 만나서, 동서 두 물의 로터리를 이룬 3각주로 남강의 기점起點이 되는 요충지가 까꼬실이다. 동서 두 강이 합친 이곳에서부터 남강이란 이름이 생겨나서 아래로 흘러 신안동 들판을 적신 후, 진주성을 감돌아, 금산 대곡 의령 지수로 산태극 수태극 S자로 되풀이 굽이돌면서 낙동강으로 태평양으로 들어간다. 산과 강과 들을 겸비한 이 정착지가 상전벽해 되어 지금은 진양호로 변했고, 까꼬실은 수몰되어 정씨 집성촌은 사라졌다. 수몰 당시 까꼬실에 남아있던 일족 158호 모두는 너우니 물가에 망향비 하나 세워놓고 모두 떠나니, 지금은 빈 섬이 되어버렸다. 종가만 이반성 작은집 집성촌 용암으로 옮기고 일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 다.

 

나의 직계선조는 훈장이었던 조부님의 직장 따라 금산 월아산 아래 월아동(달음동)으로 옮겼다. 결국 내 직계선조 10대와 나는 까꼬실·금산·지수·옥봉동 등, 이 남강 물 따라 살아온 남강족南江族이었던 셈이다. 이 강줄기 곳곳을 옮겨 다니면서 내가 나고 자라고 학교를 다니고 강산을 즐기고 첫 직장을 얻고 했으니, 남강의 아래위로 점철된 군데군데가 내가 살아온 잊지 못할 흔적의 땅들이다. 내가 그 품에서 자랐으니 남강은 나의 은혜의 강, 어머니의 강이다.

 

그 후 내 대에 와서 서울로 옮겨, 달음산 조부손祖父孫 3대시대를 잇고 지금은 그 손자가 할애비가 되어 다시 서울 조부손 3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벌써 기복 많은 5대째의 우리집 현대사가 진행 중인 셈이다. 나는 오래 전에 남강을 떠났지만 마음속에서 남강을 지우지 못하고 지금도 남강문우회에 참여, 고향 문사들과 교류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가 다시 11대조 농포공이 사시던 서울로 올라와 그 어른의 묘역 가까이에 살게 되었으니, 지금 내 삶은 고향 진주를 떠나 사는 타향他鄕살이인가, 낙남落南살이를 청산하고 본고향으로 돌아온 환향還鄕살이인가. “타향살이 몇 해던가”를 부르면서도, 어디를 두고 하는 노래인지 오락가락할 때가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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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까꼬실에서 거주하던 종인 정태수님의 글이다

이곳은 1492년 정 순 선조님이 거창 농산에 입향하기 이전에 선조님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좋은 글을 쓰신 작가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