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묵유거(禪墨幽居)

소소한 일상적 삶을 사유의 장독에서 삭혀낸 낭만적인 글과 이야기

정용의사 제향 봉헌 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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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2010. 10. 10.

                                

                                     존경하는 군수님과 추모위원장님께

 

 지역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시고 민의에 귀 기울이시는 천사령 군수님과 황석산성추모위원회 위원장님께 문안을 드리며 진양 정씨 문중을 대표하여 삼가 호소를 합니다.

함양 군청에서는 매년 황석산성 전투에서 산화하신 순국 선열들께 제향하여 충절의 고장이라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1. 鄭 庸 別將의 임진왜란 전투 활약상

 읍지 인물편에 기록된 내용과 진사 영천 최연중의 기록 그리고 당시의 유림 상소문에 나타난 鄭 庸 장군의 활약상에 대해 조금도 加減이 없이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임진란이 발발하자 노령에도 불구하고 公(鄭 庸)은 형의 아들인 익주와 광주, 종형의 아들인 이례와 상례와 함께 家僮 수십 명을 데리고 의병을 일으켜 송암 김면 장군의 휘하에 들어갑니다.

송암 선생이 의병을 일으킬 때 郭再祐, 郭䞭, 趙宗道 등의 장수들도 정 공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게 됩니다.

송암 선생은 정 공을 의롭게 여겨 늘 가까이에 두고 군영을 상의하며 여러 참모들보다 존경하였다고 합니다.

 

 정 공은 낙동강 하류에 있는 적을 추격하여 토벌하겠다고 하자 ‘그대는 늙은 몸이니 부디 조심하고 적에게 달려가지 마시오’ 라는 송암 선생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두에서 돌격하여 적의 깃발을 꺾고 수급을 벤 것이 십여 급에 이르고 적은 패퇴하여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병영에서 공의 공로를 낱낱이 조정에 아뢰자 우감사 金鶴峯이 공로를 치하하여 문경 고을의 수령으로 차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무인은 단지 적을 토벌할 뿐이지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하여 취임을 끝내 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 구국의 일념이 얼마나 순수하고 거룩한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로 別將으로 뽑힌 장군이 안음과 언양에 머물러 진을 치고 있던 적을 습격하여 목을 베고 물자를 많이 노획하여 본진으로 돌아오자 김 면 장군이 진중에서 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장군은 통곡하며 손수 시신을 염습하여 가야산 기슭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후에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로 달려가서 兵使 崔慶會 진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노쇠한 그를 측은하게 여겨 歸家 시키자 잠시 집으로 돌아와 가정의 일을 조치한 다음 가족과 작별하여 다시 진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은 위태롭고 인심은 흉흉해져서 더 이상 살아날 길이 없게되자 黃公 進과 함께 선두에 올라 돌격하여 적을 무수히 죽이고 죽음을 각오한 전투를 하다가 마침내 성이 함몰되자 두 조카를 돌아보며 ‘적의 칼날에 죽는 것 보다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하며 촉석 밑으로 투신하였습니다. 이 때가 1593년 6월29일 공의 나이 55세였습니다.

 

2. 순절 이후의 기록

 정 공이 순절한 후 12년(1606년 을사년, 선조38년)만에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는 조치를 내렸는데 아들인 상주가 ‘아비의 죽음을 가지고 자식의 이익을 삼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다’고 하여 은전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지역의 임지준 등의 유림 후생들이 순조 임금께 상소문(1814년 순조 14년 4월)을 올립니다.

그 상소문의 일부를 보면 ‘독실한 충성과 드높은 절개를 지니고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곧 신들이 살고 있는 안의 고을의 의사 鄭 庸과 劉名蓋입니다.........중략.............

아. 郭䞭과 趙宗道는 모두 지방 고을의 수령으로서 황석산성에서 순절하였는데 그 뒤에 고을 사람들이 사당 하나를 창건하여 숙묘조 을미년에 사액의 은전을 받기까지 하였고 贈職과 시호를 주는 은전도 입었습니다.

 

 그러나 정씨와 유씨 두 사람은 애당초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도 아니고 관리로서의 책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도망하여 숨지 않고 무기와 갑옷을 착용하고 시퍼런 칼날을 밟는 용기를 발휘하여 능히 사욕을 버리고 옳은 도리를 취하는 의리를 알았으니 그들의 죽음은 곽씨와 조씨보다 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벼슬 한 자리 받지 못하고 도내의 공론에 의하여 지방의 사당에 함께 제향을 올리고 있을 뿐입니다........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鄭과 劉名蓋의 꿋꿋한 충성과 절개를 기리소서. 그리하여 이들을 郭䞭, 趙宗道를 제향하는 황암사에 함께 제향을 올리도록 하고 벼슬과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푸소서‘ 라는 글이 나옵니다.

 

 3. 黃巖祠 별사에 위패 봉안

 국역 농산세헌에 의사정공유적비(101p-106p)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안의 고을로부터 사림의 공론이 일제히 일어나 서둘러 돈을 갹출해 계를 조직하여 마을 유허에 비석을 세워 공의 유적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계획하였다.’

 

 ‘또 文獻備考를 살펴보니 안의현에 옛날부터 황암서원이 있는데 곽충열공과 조충의공 두 선현을 받들어 모시며 공도 함께 그곳의 별사에 제향을 올린다고 되어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또한 典考大方의 기록에도 황암사에서 네 분의 영령(郭䞭, 趙宗道, 별사:鄭 庸, 劉名蓋)들께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그러다가 한말의 국운이 쇠잔해지고 일제 시대에 이르러 중단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지역 유지의 헌신적 노력으로 황석산성순국선열추모위원회가 발족되어 추모 행사를 실행하여 오던 과정에서 별사에 모셔진 정 공만이 흠향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후손으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모든 잘못이 저희 후손들의 무성의와 무지 탓으로 돌리고 가슴을 치고 통회하며 간절히 청합니다.

 

 존경하는 군수님 그리고 위원장님!

 황암사 별사에 모셔진 鄭 庸 선조에게도 매년 향을 피워 목숨을 바친 거룩한 救國의 정신을 본받고 오랜 세월 제향하던 전통이 原狀回復될 수 있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鄭 庸 별장께 제향하여 기존의 훌륭하신 영령들의 위업을 더욱 빛내고 후손들의 귀감이 되게 하소서.

군수님과 위원장님의 바른 통찰과 결단이 後日 많은 이들에게 두루 회자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추모위원회의 뜻 깊은 활동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차후 관련 행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헌신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9년 8월 20일

진양정씨 은열공파 거창문중 회장 정 상 대

대 종 회 장 정 태 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