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묵유거(禪墨幽居)

소소한 일상적 삶을 사유의 장독에서 삭혀낸 낭만적인 글과 이야기

퇴헌 정천익 선생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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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기록

2010. 10. 11.

(본 글은 대종회에서 발간한 자료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퇴헌 정천익선생 사적비문

 

 

( 이 사적비는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1065의11번지 대로변에 세워져 있음 비문은 아래와 같음)

 

문충공 퇴헌 정천익선생 면화사적비

 

아름다운 이름은 숨기려해도 나타나는 것이요 빛나는 공적은 사양해도 자기 것이 되는 법이니 우리나라 면화 재배사에 있어서 널리 알려진 정천익(鄭天益)선생의 사적이 그것이다,선생의 본관은 진양(진주)요 시조는 고려초 호장(戶長)을 지내신 봉산공(鳳山公)휘 자우(子友)요 고려 현종조에 병부상서를 지내신 은열공의 후예로써 대대로 이름 들린 충효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학문에 힘쓰고 사물에 밝아 일찌기 벼슬길에 올라 고려 공민왕때 전객령과 판사를 역임하시고 판개성부사를 지내시다 치사(致仕)하셔서 고향인 단성 사월리 옛집에 돌아와 작은 한 정자를 짓고 퇴헌이라 이름하고서 뜻을 세워 시 읊고 학문을 강론하며 보람있는 여생을 보냈다 선생이 제자 중에서 뛰어난 이를 뽑아 사위를 삼으니 그가 곧 충선공 삼우당 문익점선생인데 충선공이 공민왕十二년 서기一三六三년三월 원나라에 사신가는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같이 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원나라 목면씨 십여개를 따가지고 이듬해 봄에 고향에 이르러 장인인 선생께 드렸다, 선생께서 처음 심은지라 재배의 법을 잘 몰라 거의 실패해 버리고 겨우 한 개가 싹이나 거기서 백여개의 씨를 얻어 삼년 동안 늘려 심고 가꾸어 크게 번연(蕃衍)시켜 공민왕 十六년 一三 六七年 봄에 이웃에 나누어 배양케 했는데 선생이 목면씨를 처음 심은 곳이 바로 단성의 배양동으로서 그 당시 선생이 우거하신 곳이었다

 

그뿐 아니라 지혜를 기울여 온갖 궁리 다 하여서 목면 재배법은 물론이고 「씨아」와「물레」도 창제하여 목면종자와 함께 온 고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심어 가꾸도록 권하고 령하였다 그러자 원나라 승려 홍원대사가 오므로 선생이 그를 며칠 머물게 하고서 베틀 만드는 법과 베짜는 방법을 상세히 물어 성책(成冊) 하고 나무 베어 말려서 수개월에 걸친 실험끝에 드디어 「베틀」 을 만들어 가비에게 가르쳐 처음으로 무명베 한필을 짜내게 했더니 그것을 보고 이웃과 이웃이 서로 배우고 서로 전하여 십년이 못되어 온 나라에 펴졌던 것인데 선생은 어질고 겸손하여 면화 재배와 베짜기 시작한 공로까지 모두 다 사위인 충선공에게 돌렸지마는 사람들은 매양 목면 재배의 역사를 말할때면 충선공과 함께 선생의 공로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리하여 조선 태종 임금때에 이르러 선생에게는 진양군(晋陽君)을 봉하고 또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사위요 제자인 충선공에게는 강성군(江城君)과 충선(忠宣)의 시호를 내려 두 집안이 큰 영광을 입었고 순조三三년 서기 一八三三년 에는 진주 마동리에 선생께 제향 받드는 청계서원을 세웠거니와 어진이의 어진 공적은 겨레와 함께 길이 갈것이라 여기 두 어른께 찬송을 바친 다.

 

「 목면씨 열 낱을 붓대 속에 감춰서

 

수천리 길 목숨 걸고 돌아온 충선공

 

나라위한 그 씨앗 장인인 선생께 드렸도다,

 

문충공이 정성드려 처음 심은 목면 씨앗

 

단 한줄기 싹이 돋아 삼년동안 가꾸어서

 

온 나라에 퍼뜨리고 씨아 물레 창조하고

 

베틀도 만들어서 처음 짜낸 그 공로여

 

길이길이 그 은혜 기리오리다.」

 

배양동에목면씨를처음심은지六백七년되는一九七一년六월一일 후학 문학박사 노산 이 은 상 삼가지음

 

이 사적비는 경상남도 진주시 성지동 168번지 사적제118호 진주성내 청계서원 묘정에 이전 건수되어있는데 당시 건비위원장은 전 문교부장관 안호상박사였고 박정희대통령이 "유방백세"라는 휘호를 써서 비 전면에 새겼기에 일명 "유방백세비"라 일컸는다

 

(비문) 退軒 鄭天益先生 事蹟碑

 

과거의 우리 문화는 정신면에 편중하여 물질을 홀시(忽視)한 혐(嫌)이 없지 않았다, 정신면도 중하려니와 물질을 개발하고 혹은 도입하여 성(盛)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이바지함에서 빛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저 고려말엽 元에서 면종취래(棉種取來)와 그 재배는 우리의 물질생활 특히 의생활에 일대혁명을 이르킨 만큼 그 의의(意義)가 심장(深長)하였다

 

면종취래에는 삼우당 문익점의 공이 물론 컸지만 그 재배 전파(傳播) 에 성공하여 우리 실생활에 복리를 갖다 준 분은 퇴헌 정천익선생 이었다,

 

선생의 관(貫 )은 진양이요, 은열공의 후예이니 이 鄭씨는 東方의 망 족(望族)으로 대대로 잠영(簪纓)이 그치지 않았다

 

선생은 고려의 의조상서(儀曹尙書) 휘(諱) 유(愈)의 아들로서 천자

 

(天資)가 총혜연특(聰慧英特)하며 효우(孝友)가 지극하고 학문이 뛰어 나 유생들이 우러러 봤으며 벼슬이 여러번 올라 전객령(典客令)과 판사(判事)를 지내시고 판부사(判府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셔서 강성(江城) 금(今) 산청군 단성으로 귀향하여 자연과 학문으로 벗을 삼아 여생을 보냈다,

 

동향(同鄕)의 文士로 선생의 사위가 된 문익점도 학식이 출중(出衆) 하여 공민왕조에 등제(登第) 同王12년(1363년)에 書狀官으로 원도 (元都)에 갔다가 귀로(歸路) 면전(棉田 )에서 종자 十枚가량을 취(取 )하여 왔다, 棉은 본시 인도를 발상지로 하여 중국에 수입 元代에는 널리 재배되었다,

 

문공은 그 取來한 棉種의 一半을 장인인 선생에게 드려서 심게 하고 一半은 자기가 시식(試植)하였다,

 

文公의 시식은 모두 실패하였으나 선생의 그것은 겨우 一枚의 득생 (得生)으로 百枚가량의 득실(得實)을 보았다

 

그후 年年 가종(加種)하여 同王 十六年(一三六七年)에는 향인(鄕人) 들에게 나누어 주어 재배케 하여 큰 성과를 거두어 선생의 면종시배 (棉種始培)에 성공한 鄕里인 丹城 남쪽 沙月里의 마을 이름을 培養村 이라 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때 선생은 取子車(씨아)와 繅絲車(물레)를 창조하였는데 또 마침 원승(元僧) 홍원대사(弘願大師)가 선생댁에 과입(過入) 木棉을 보고 경탄(敬歎)함으로 선생은 그를 며칠 집에 묵히고 직조(織造)의 술(術) 을 자세히 물어 드디어 직조기(織造機)를 제작하여 가비(家婢)를 시켜 일필(一匹)의 棉布를 직조케 하였다

 

이로부터 인리(隣里)에 學習 傳播되어 十年안에 全國에 보편(普遍) 되 었다, 선생의 숭고한 인격과 공적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널리 알려져 조선 太宗朝에 선생을 晉陽君에, 文公을 江城君에 封하고 선생의 시(諡)를 文忠, 文公의 諡를 충선(忠宣)이라 내렸다,

 

그리고 純祖 33년에는 晉陽 마동에 淸溪書院을 세워 선생을 享祀하였

 

다, 아! 아! 선생의 愛國愛族의 높으신 精神과 一枚得生의 棉種으로

 

써 마침내 우리민족 衣生活과 衣料산업에 新紀元을 짓게 한 그 공훈 (功勳)이야말로 길이 겨레의 큰 귀감(龜鑑)과 횃불이 될 것이다

 

선생의 木棉事蹟碑를 建立코자 건비위원장 安浩相氏와 鄭在宇氏가 나에게 찾아와 비문을 청탁(請託)함으로 나는 그 意義깊은 일에 감격

 

하여 감히 사양치 않고 졸문(拙文)으로 대략 위와 같이 엮어 놓았다.

 

牛峰 李 丙 燾 謹撰

 

(이 사적비는 진주성내 청계서원 묘정에 세워져 있는데 원래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세우기로되어 있었으나 문씨들의 방해로 산청군에서 농지 전용 허가를 내 주지 않아 7년동안이란 긴 세월동안 현지에 누워 있다가 위의 진주성내 청계서원뜰에 세울려니까 또 당시 진주시장인 문 백과 문씨 문중원들이 대규모로 몰려와 진주성문을 잠가 놓고 대형트럭으로 문앞을 가로 막아 당시 부산에서 불러온 대형 크레인을 진주성에 못들어 가게함으로 양문중원 500여명씩 동원되는 큰 문중 싸움을 치르고 난후에 이곳에 옮겨 세우게되었다, )

 

이 사적비는 경남 진주시 상봉동1065의11번지의 대로변에 세워져 있고 위의 로산 이은상씨가 찬한 사적비문과 같이 새겨서 세운 九尺大碑(아홉자비)다

 

退軒 鄭天益先生 事蹟碑

 

退軒 鄭天益선생의 서랑(壻郞)인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元國 사행(使行) 길에 木棉 씨앗을 몰래 붓대 속에 숨겨 왔다 그때 삼우당(三憂堂)은 젊은 나이로 그 씨앗을 심고 가꿀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장인인 退軒公은 마침 致仕해서 고향 沙月에 와 있는터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손수 심어 조석으로 돌보며 정성을 다해 드디어 그 재배에 성공했다,

 

먼저 삼우당은 위험을 무릅쓰고 木棉 씨앗을 가져 왔으나 退軒公은 무서운 집념(執念)으로 이것을 손수 재배하여 전국에 傳播시켰던 것이다.

 

만에 하나 퇴헌공의 그 끈질긴 노고(勞苦)가 없었던들 어찌 되었을까?

 

차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씨아」와「물레」와「베틀」까지 궁구창안(窮究創案)하

 

여 비로소 우리 겨레의 복식문화사(服飾文化史)에 일대변혁 (一大變革)을 가져 왔다

 

이로 말미암아 自古로 삶의 三大要件인 衣食住중 그 첫째인 衣生活의 영위(營爲 )에 끼친 지대한 공로는 참으로 退軒公의 빛나는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하면 퇴헌 정천익선생과 삼우당 문익점 선생과의 옹서간(翁壻間)에 맺어졌던 이 역사적 사실은 길이 남아 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천고(千古)의 설한풍(雪寒風) 속에서도

 

후세 창생(蒼生)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줄

 

저 목면꽃 처럼 두분 先覺者로서의 드높은 뜻은 이에 하나로 어우러져

 

더욱 향기롭도다.

 

여기 명(銘)으로 시조 한수를 읊어 기리노니

 

「두터운 흙의 품에 씨앗은 싹을 트다

 

흙과 씨 만남이란 하늘의 뜻이거니

 

오늘도 그날의 우로(雨露) 가슴마다 꽃피우다.」

 

檀紀 四三二一年(一九八八年) 仲秋節 초정(艸丁) 김상옥(金相沃) 삼가 찬(撰)하다

 

《고려사》一一一卷四六編에 실려있는 木棉기록〔원문〕文益漸晉州江城縣人 恭愍朝登第累遷正言 奉使如元因 留附德興君 及德興敗乃 還得木棉種 歸屬其舅 鄭天益種之 初不曉培養 之術幾槁止一莖在比 三年遂大蕃衍 其取子車 繅糸車 皆天益創之

 

〔해설문〕「문익점은 진주 강성현인인데 공민왕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이 되어 사신을 받들고 원나라에 가서 덕흥군에게 머물러 지내다가 덕흥군이 패하자 돌아 올 때 목면종자를 얻어 와서 그의 장인께 드렸고 장인 정천익이 처음 심었는지라 그 배양기술에 밝지 못하여 거의 싹나지 않았는데

 

단 한 개가 싹이 나 그것을 삼년동안 성취시켜 드디어 크게 번식시켰고 그 「씨아」와「 물레」도 다 천익이 창제한 것이 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태조실록〉一四卷一四編에 실려 있는 木棉기록 〔원문〕益漸恭愍庚子登科調金海府司錄 癸卯以諄諭博士陞

 

左正言 爲計稟使左侍中李公遂書狀官 赴元朝將還見路傍木棉樹 取其實十許枚 盛囊以來 甲辰至晉州 以其半與鄕人 典客令致仕 鄭天益種而培養唯一枚得生 天益至秋取實至百許枚 年年加種 至丁未春分其種以給鄕里 勸令種養 益漸自種皆不榮

 

胡僧弘願到天益家 見木棉感泣曰 不圖今日復見本土之物 天益 留飯數日 因問繰織之術 弘願備說其詳且作具與之 天益敎其家

 

婢 織成一匹 隣里傳相學得 以遍一鄕不十年又遍一國 事聞洪

 

武 乙卯召益漸 爲典儀注簿

 

(해설문)「 익점이 공민왕때 경자년에 등과하여 김해부 사록에 출사 계묘년 (一三六三년)에 순유박사에서 좌정언에 승진되어 계품사 좌시중 이공수의 서장 관으로 원나라에 갔다 돌아 올때 길가의 목면을 보고 그 열매 십여개를 따 주머니에 담아 돌아와 갑진년(一三六四년)에 진주에 이르러 그 반을 고향에 사는 전객령 치사 정천익에게 드렸고 정천익이 심은 것 중 오직 한 개가 싹이 나 그것을 배양하여 천익은 가을에 이르러 백여개의 종자를 수확 하여 해마다 종자를 늘려 심어 정미년 봄에 이르러 이웃마을 사 람들에게 그 종자를 나누어 주어 심어 가꾸도록 권하고 령하였다.

 

익점 자기가 심은 것은 다 싹이 나지 않았다

 

원나라 스님 홍원대사가 천익의 집에 이르러 면화를 보고 감읍 하며 말하기를 〔내 오늘 본토지물을 다시 볼 수 있으 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면서 눈물 짓기에 천익은 그를 수일 동안 머물게 하여 베짜는 기술을 물었더니 홍원이 그것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또 베틀 부속 기구도 만들어 주었다 천익은 그것을 그의 가비에게 가르쳐 한필의 목면베(木綿布)를 짜서 이웃 마을

 

에 전하고 서로 배우고 익혀 전하게 하였더니 온 고을에 펴지고 십년도 못되어서 온 나라에 펴졌다

 

이 일을 들은 조정에서는 우왕一년을묘년(一三七五년)에 익점을 불러 전의주부(正六品))벼슬을 주어 복직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東國通鑑五十四卷원문》

 

益漸嘗奉使如元得木棉種歸屬其舅鄭天益種之初不曉培養之術幾槁止一莖在比三年遂大蕃衍 其取子車 繅糸車 皆天益創之

 

《동국통감 해설문》익점이 일찍이 사신을 받들고 원나라에 갔다가 목면씨를 얻어 돌아와 그 장인께 드렸고 장인 정천익이 처음심었는지라 그 배양기술에 밝지 못하여 거의 싹나지 않았고 단 한개가 싹이 나 그것을 삼년동안 늘려 심어 드디어 크게 번 식시켰고 그「씨아」와「물레」도 다 천익이 창제한 것이다 《東國輿地勝覽三十一卷四十一頁원문》

 

益漸恭愍朝登第以正言爲書狀官如元得木棉種 歸屬其舅 鄭天益種之 比三年遂大蕃 取子車 繅糸車 皆天益創之

 

《동국여지승람 해설문》

 

익점이 공민왕때 과거에 올라 정언으로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 에 갔다가 목면씨를 얻어 돌아와 그 장인께 드렸고 장인 정천익 이 심어서 삼년동안 성취시켜서 크게 번식시켰고 「씨아」와「물레」도 다 천익이 창제한 것이다 《大東韻府群玉九卷三頁및六卷十六頁원문》

 

【木棉種】麗末益漸如元得木棉種 屬其舅鄭天益種之 初不曉培養之術幾槁止一莖在比三年遂大蕃

 

《대동운부군옥 해설문》

 

목면종은 고려말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 목면씨를 얻어와 그 장인께 드렸고 장인 정천익이 처음 심었는지라 그 배양기술에 밝지 못하여 거의 싹나지 않았고 단 한개가 싹이 나 그것을 삼년동안 성취시켜 크게 번식시킨 것이다 【取子車】恭愍王時正言文益漸如元取木棉種而來種之取子車繅糸車其舅鄭天益所創

 

《해설문》취자거는 공민왕때 정언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목면씨를 취하여 들여온 그 종자의 씨를 발기는 취자거(씨아)

 

와 실을 뽑는 소사거 (물레)는 다 그의 장인 정천익이 창제한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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