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박가네)

세상을 후회없이 살다 간 성실했던 한 인간으로, 사는데 있어서는 냉정했었지만 그래도 정을 알고 나눴던 한 인간이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고 남고 싶습니다. 늘 사랑입니다.

*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한 한옥과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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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인테리어 참조

2020. 9. 21.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한 한옥과 굴뚝

 

청송·영덕·영양 마을(2) 청송 덕천마을 옛집굴뚝

▲ 덕천마을 정경 송정고택 뒤, 언덕에 올라 내려다본 덕천마을 정경.

이 언덕은 독립운동가 철기 이범석장군이 명상을 한 자리로 유명하다.ⓒ 김정봉

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마음이 맑은 사람, 이오덕 선생과 곱게 늙은 옛집, 성천댁을 보고난 뒤라 기분이 좋다. 좋은 기분에 찾아간 마을은 덕천마을. 청송 파천면 덕천리에 있다. 청송심씨 집성촌이다. 600여 년 전에 들어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송심씨 경파(京派)와 향파(鄕派) 이야기

청송심씨 시조는 심홍부로 심연, 심룡으로 대가 이어지다 4세손, 심덕부(1328-1401)와 심원부(1330-?)에 이르러 두 파로 나뉜다. 심덕부 후손은 경파, 심원부 후손은 향파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심덕부는 조선건국에 가담하여 아들 심온과 손자 심회까지 3대 내리 정승에 올랐다. 심온의 딸이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고 심덕부 여섯째아들 심종은 태조의 부마다. 왕실과 혼맥을 맺어 청송심씨는 명문가 반열에 올랐다. 대대로 서울에 살아 경파로 불린다.

 

반면 심덕부 동생, 심원부는 조선개국에 반대하고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심원부는 세 아들에게 '나라가 망하고 임금을 잃었으니 조상이 묻혀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시조선산을 지키며 살라'는 유훈을 남겼다. 선훈불사(先訓不仕), 선조의 유훈에 따라 대대로 벼슬을 멀리하였다.

 

 

▲ 송소고택 별채와 본채 사이, 고택 뒤에서 본 정경이다.

99칸 집으로 사진으로는 안채와 마당, 사랑채 일부만 담을 수 있다.ⓒ 김정봉

 

600여 년 전, 덕천마을에 낙향한 후손은 향파로 심원부 후손이다. 청송심씨 가문의 명성은 심덕부 후손이 떨치고 정작 본향에서 가문을 지킨 후손은 심원부 후손이다. 향파가 청송에 내려와 터 잡은 후, 심원부의 11대손 심처대에 이르러 부를 크게 일궜다.

 

심처대는 선대가 살던 덕천마을에서 분가하여 파천면 지경리 호박골에 살던 중, 한 노승이 알려준 곳에 뫼를 쓰고 난 뒤, 큰 부를 일궜다는 것이다. 경주 최부잣집이 12대, 청송 심부잣집이 9대의 부를 누렸다고 말들 하는데 심부잣집의 9대 중 1대는 심처대를 두고 하는 말이다.

 

1880년, 심처대 7대손 송소 심호택(1862-1930)은 덕천마을에 송소고택을 짓고 호박골에서 돌아왔다. 해방 후, 심호택의 아들 심상원(심처대의 8대손)과 손자 심운섭(심처대의 9대손)은 소작농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9대에 걸친 만석의 부는 막을 내렸다. 영조 대에서 해방 후까지 200여 년에 걸쳐 부를 누린 것이다.

 

 

▲ 송소고택 안채 꽃담 흙과 암키와로 질박하게 쌓았다.

음악의 리듬치기마냥 무늬를 내었다. 쪽문으로 드나들 때 호흡을 가다듬으라는 게다.

 

 

▲ 송소고택 안채 담구멍 안채에서 사랑채를 엿보려고 뚫어놓았다.

사랑채에서는 막혀 보이지 않는다.

 

덕천마을은 송소고택을 중심으로 송정고택, 찰방공종택이 양옆에 있고 창실고택, 초전댁까지 몇 채의 고택이 모여 있다. 송소고택 옆집, 송정고택은 송소의 둘째아들 송정 심상광의 살림집으로 1914년에 지은 것이다. 송소 아들집이라 굴뚝이나 꽃담 모양이 많이 닮았다.

송소고택은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나란히 있고 작은 사랑채 뒤에 안채가, 큰 사랑채 옆에 별채가 있다. 담으로 영역을 구분하였다.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사이에 'ㄱ'자로 꺾인 헛담을 쌓아 큰 사랑채에서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담은 흙돌담을 기본으로 하고 군데군데 흙과 돌, 암키와로 꽃담을 쌓았다. 쪽문을 넘나들 때 호흡과 발걸음을 가다듬으라는 걸까? '오선지와 리듬치기' 무늬가 보인다. 어린아이는 한 박자, 따안하고 넘고 안주인은 두 박자 따아아안, 할머니는 따아아안 따아아안하며 넘으라는 게다.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내담에 구멍을 내어 안채에서 사랑채를 엿보게 했다. 구멍이 희한하다. 안채에서는 구멍이 세 개고 사랑채에서는 구멍이 여섯 개다. 안채 하나에 사랑채 두 개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다. 안채 구멍은 담 안에서 45도로 두 개로 갈라져 안채에서는 사랑채를 두 갈래로 볼 수 있다. 거꾸로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막혀 보이지 않는다.

 

익살 넘치는 창실고택의 사람모양 굴뚝

 

 

▲ 안채마루 위 검정비닐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제비 몰러 달았다.

화단 풀을 뽑느라 매운 손을 바삐 놀리는 종부와 종손에게 간단하게 눈인사하였다. 정갈한 음식솜씨로 이름난 최윤희 종부와 심처대 11대손, 심재오 종손이다. 종부의 눈매는 서글서글해보였다. 종손은 갑자기 사라졌다가 막 돌아온 모양이다. "남편들은 다 똑같은가 봐요? 뭘 시키려면 바로 사라지고 안보여요." 같이 간 아내에게 전하는 종부의 너스레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범부(凡婦)'나 종부(宗婦)나 남편 없으면 남편 흉보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보여줄 게 있다며 안채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마루 위에 걸어 놓은 검정비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제비를 쫓으려 달아놓았단다. 제비가 온 집안에 똥을 싸고 집을 망가뜨린다는 것이다. '효험'을 보긴 했다고 한다. 집 마루에 검정비닐을 걸어놓았다고 혹시 흉볼까봐 '선수쓰기'한 거다. 접빈객에 손 마를 새 없는 종부인데 그냥 지나가는 객에게 조차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게다.

 

집 구경하고 있을 때에도 내 눈은 굴뚝에 닿아 있었다. 대문채 옆, 낮은 굴뚝은 여느 옛집과 다르지 않다. 안채는 'ㅁ'자 구조다. 예상대로 굴뚝은 네모다. 네모난 마당에 네모난 굴뚝, 잘 어울린다. 연도(煙道)를 마당까지 끌어내 굴뚝을 처마 밖, 마당에 설치하였다. 암키와로 점선무늬를 낸 다음 옹기로 몸체를 길게 뺐다. 밋밋한 안채에 그럴싸한 수직 장식 역할을 한다.

 

 

▲ 송소고택 안채 안마당 굴뚝 네모난 안채 마당에 네모난 굴뚝, 잘 어울린다.

굴뚝을 마당까지 끌어내 그럴싸한 장식물로 삼았다.

 

 

▲ 송정고택 안채 굴뚝과 꽃담 송소의 아들집이라 송소고택과 굴뚝과 꽃담이 많이 닮았다.ⓒ 김정봉

안채 밖으로 나오면 사랑채 뒷마당이고 이 마당에서 쪽문으로 나가면 안채 뒷마당이 나온다. 사랑채와 안채 뒷마당에 서 있는 굴뚝은 모두 널빤지로 만든 널굴뚝이다. 사랑채뒷마당에 두 개, 안채 뒷마당에 세 개 있다. 모두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뻗었다.

 

언제부터인지, 낮은 굴뚝에서 모두 널굴뚝으로 바뀌었다. 심원부가 세 아들을 붙잡고 '자신과 같이 은둔하지 말라'고 당부했다하는데 심원부의 후손이 이제야 유훈을 받드는 걸까? 은둔의 후손에서 심원부의 지조, 굳은 심지를 밖으로 드러내려는 듯 보였다. 벼슬하지 말라는 유훈도 조선왕조 때 얘기지, 조선이 망한 지 100년이 지났으니 세상 밖으로 드러낼 때도 된 게지.

 

별채의 굴뚝도 송정고택이나 송소고택의 안채굴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연가는 소뿔 같다. 굴뚝 가운데에 눈인지 코인지 두 개 구멍을 뚫었다. 익살이다. 별채 쪽문에 앉아 있는 두 마리 익살꾼, 돌사자와 아주 잘 어울린다. 익살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익살로 치면 창실고택의 사람모양 굴뚝을 따라오지 못한다. 대 놓고 사람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 장독대와 굴뚝 송소고택 안채 뒷마당 굴뚝이다.

장독대는 안주인의 둥근 마음씨 닮았고 하늘 높이 솟은 널굴뚝은 선조(심원부)의 지조 닮았다.

 

 

▲ 송소고택 별채 굴뚝 굴뚝 몸통은 안채 굴뚝처럼 암키와로 무늬를 내었다.

연가는 소뿔처럼 생겼다.

 

 

▲ 창실고택 굴뚝 굴뚝을 사람모양으로 만들어 익살스럽다.

영광 불갑사 굴뚝과 많이 닮았다.

 

집을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종부와 종손은 아직도 화단에서 풀을 뽑고 있었다. 오늘은 월요일이니 접객할 일이 없었나 보다. 오늘은 작정하고 풀만 뽑을 생각인 게다. 마당은 주말에 몰려온 객들에 밟혀 곱게 다져진 상태다. 송소고택 마당은 찾는 이가 많아 해가 갈수록 점점 단단해졌다.

 

단단한 마당을 밟고 심원부 후손은 선조의 유훈에 따라 오늘도 본향을 지키며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출세보다는 은둔을 택한 선조, 심원부의 지조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나 보다. 멀리 보이는 대나무와 함께 뾰족 솟은 널굴뚝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 대나무와 굴뚝 안채 옆 마당에 자라는 대나무와 안채 뒷마당 널굴뚝이 선조,

심원부의 지조와 절개를 드러내는 것 같다. [오마이뉴스 글:김정봉, 편집:박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