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박가네)

세상을 후회없이 살다 간 성실했던 한 인간으로, 사는데 있어서는 냉정했었지만 그래도 정을 알고 나눴던 한 인간이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고 남고 싶습니다. 늘 사랑입니다.

* 가을 바람 편지 /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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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사랑

2020. 10. 15.

가을 바람 편지 / 이해인 수녀

 

 

꽃밭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코스모스 빛깔입니다.

코스모스 코스모스를 노래의 후렴처럼

읊조리며 바람은 내게 와서 말합니다.

"나는 모든 꽃을 흔드는 바람이에요.

당신도 꽃처럼 아름답게 흔들려 보세요.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믿음과 사랑의 길에서 나는

흔들리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면서 살아온 것 같네요.

종종 흔들리기는 하되 쉽게 쓰러지지만

않으면 되는데 말이지요.

아름다운 것들에 깊이 감동할 줄 알고

일상의 작은 것들에도 깊이 감사할 줄 알고 아픈 사람 슬픈 사람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많이

울 줄도 알고 그렇게 순하게 아름답게 흔들리면서

이 가을을 보내고 싶습니다.

산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단풍나무 빛깔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을 골고루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져 있는 나에게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붉은 뺨을

지닌 바람이 내게 와서 말합니다.

'무어든 너무 잘하겠다고 욕심부리지 마세요

사람들의 눈을 잘 들여다보면

그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답니다!'

그래서 이 가을엔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고 아껴두기로 합니다.

나를 의심하고 오해하고 힘들게 하는

한 사람에게 성을 내고 변명하기 보다

침묵 속에 그를 위해 기도하며 끝까지

우정과 신뢰의 눈길을 보낼 수 있을 때,

진정 용서하기 힘들었던 한 사람을 내가 환히 웃게 해 주고 그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이란 단어를 자신 있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수평선과 맞닿은 푸르고 투명한

하늘빛을 닮았습니다.

문득 어머니가 그립고 어릴 적 동무들을

보고싶어하는 나에게 어디선가

들어본듯한 다정한 목소리로 바람이

말을 건네옵니다.

'언제나 그렇게 그리움이 많으시니

이별도 갈수록 힘들겠군요!

그러면 슬픔도 많아질테니 걱정입니다.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바람의 존재를

자주 묵상해 보세요...'

충고는 고맙지만 그래도 이 가을엔 내가

슬퍼서 자꾸 울게 되더라도 더 많은

그리움을 키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