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박가네)

세상을 후회없이 살다 간 성실했던 한 인간으로, 사는데 있어서는 냉정했었지만 그래도 정을 알고 나눴던 한 인간이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고 남고 싶습니다. 늘 사랑입니다.

* 천재의 광기 김시습&권필과 남효온의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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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한국)

2020. 12. 29.

 

나의 초상에 쓰다(自寫眞贊)

 

俯視李賀(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 볼 만큼

優於海東(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의이치지) 너를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금오산은 운영자가 덧붙임. 산골짝은 경주 남산 삼릉게곡.

김시습은 용장사 거소에서 <금오신화>를 창작함.

 

 

<금오신화>에 수록된 김시습의 '自寫眞贊'부터 그는 기인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젊은 날의 자기 모습에다 노년의 오만상을 찌푸린 모습까지 그렸으나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젊은 날의 모습은 노추에도 변함없다. 허나 주름 때문인가 많이 온화한 모습이다

자화상이야 서구에도 많지만 찬을 쓴다는 게 희귀한 발상이다.

헌데, 내용인즉 찬이 아니라 자기 비하다. 5세 때 세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비단을 허리에 묶어 끌고 나오던 그런 호기는 찾을 길이 없다.

 

김시습 년보

김시습전 -율곡 이이 (0)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중략 …)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입적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