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박가네)

세상을 후회없이 살다 간 성실했던 한 인간으로, 사는데 있어서는 냉정했었지만 그래도 정을 알고 나눴던 한 인간이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고 남고 싶습니다. 늘 사랑입니다.

* 법정 스님의 마지막 길도 '무소유'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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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18.

"내 장례식을 하지 마라. 관(棺)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살던 강원도 오두막에 대나무로 만든 평상이 있다. 그 위에 내 몸을 올리고 다비해라.
그리고 재는 평소 가꾸던 오두막 뜰의 꽃밭에다 뿌려라.”
산문집 <무소유>로 세상에 깨달음을 전한 법정(法頂) 스님이 11일 오후 1시52분께
서울 성북2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그가 남긴 무소유의 유언은 그러했다.
그가 창건하고 회주로 있던 정든 길상사를 떠나는 법정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경향신문은 이렇게 스케치하였다.
법정 스님의 마지막 길도 '무소유'의 길이었다.
화려한 관 대신 대나무 평상 위에 가사만 덮고 떠났다.
대나무 평상은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법정 스님이 평소 애용하던 평상과 똑같은 모양이다.
거창한 장례 절차도 없이 3배 의식만 치러졌다.
일체의 의식을 받들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에 따른 것이다.
"정진의 힘으로 죽을 때 어지럽지 않도록 하라"는 스님의 유언도 추가로 공개됐다.
지난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의 법체가 12일 낮 12시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떠나
다비장이 마련된 전남 순천 송광사로 떠났다. 송광사는 스님의 출가본찰이다.
다비준비위원회는 오전 11시30분쯤 법체를 길상사 경내 행지실에서
극락전 앞마당으로 옮겨 3배를 고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엔 먹장구름이 두껍게 끼어 있었다.
이날 성북동 골짜기 길상사에 모인 인원은 6000여명.
신도들은 운구차 주위로 몰려들어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많은 시민도 법체가 모셔진 영구차를 어루만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맑은 도량에 스며들었다.
운구차가 송광사로 떠난 뒤에도 신도들은 길상사 극락전과 분향소가 설치된 설법전에
모여들어 극락왕생을 빌었다.
법정 스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도 공개됐다.
"입적하시기 전날 밤
'어디서든지 내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잘하라.
정진의 힘으로 죽을 때 어지럽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다비준비위 대변인 진화스님은 전했다.
진화 스님은 "법정 스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식을 또렷이 유지하신 것으로 보인다"면서
"스님은 병상에서도 계속 강원도 오두막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지만,
그곳에는 눈이 쌓여 접근이 불가능해 상좌스님들이 길상사로 모셨다"고 설명했다.
법정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랐다.
목포상고와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했다. 스무 살 즈음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그는 인간과 존재라는 물음과 직면했다.
학창 시절, 밤을 새우며 그걸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스물네 살 때,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집을 나왔다.
그저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심정이었다.
서울로 간 그는 안국동 선학원에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냈던 효봉 스님을 만났다.
그리고 출가의 결심을 밝혔다.
그 길로 출가자의 삶,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부도만 남아 있던 전남 송광사 불일암 터에 토굴을 짓고 홀로 살면서 독서와 수행에 매진했다.
거기서 쓴 에세이집 『무소유』(76년 출간)는 밀리언셀러가 됐다.
요즘도 ‘불교=무소유’의 등식을 떠올리는 건 순전히 법정 스님의 공이다
“나 오늘 갈라네”
“언제쯤 가시렵니까?”
“오전에 가지”
지난 1966년 10월 15일(음력 9월 2일) 사명대사가 주석했던 표충사 서래각에서
시자들이 숨을 몰아 쉬는 효봉스님에게 마지막 말을 청했다.
그리고 나서 효봉스님은 오전 10시에 세수 79세, 법랍 42년을 일기로 입적했다.
“네 이놈 듣거라!
왜놈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고 목숨 바쳐 싸웠거늘 똑같은 조선사람인 네놈이
왜판사가 되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한단 말이냐! 짐승보다 못한 놈!”
사형수 청년은 조선인 최초의 판사 이찬형에게 고함을 치며 그 얼굴에 침을 뱉었다.
조선의 젊은 판사 이찬형은 사색이 돼 집으로 돌아왔다.
"오판이야! 오판! 오판."
그 이찬형은 괴로워하다 법복을 벗고 출가한다.
그때 법복을 벗고 출가한 법관 이찬형이 효봉(曉峰)스님이다.
38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한 효봉스님였지만
그의 수행 정진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이 철저했다.
'무자(無字) 화두'를 들었다.
한번 삼매에 들면 엉덩이가 헐어 방바닥 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 때,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생겼다.
스님이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이대통령이 스님을 반갑게 맞으며 생일을 묻자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生不生 死不死),
어디 중한테 생일이 있겠소이까?"
이 말에 이대통령이 정색(正色)을 했다고 한다.
생의 후반기에는 해인사 가야총림, 금정사, 통영 도솔암, 미륵산 토굴,
미래사에서 고절의 수행을 거듭했다.
그리고 조계종 비구승단 종정으로 불위를 선양하는데도 진력했다.
법관을 그만두고 엿장수를 하다가 구도의 길로 들어선 큰스님이다
1957년 총무원장과 종정에 추대되었다.
그는 말년에 화두 무(無)자를 끌어 안고 틈만 나면
“무라 무라”하고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 효봉스님을 끝까지 곁에서 지켰던 법정스님이다.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物量)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법정스님은 세속적 욕망과 경쟁의 용광로 속에 담긴 대중은 무소유를 지향하고,
정갈하고 고적한 느낌의 글을 통해 불교의 정신세계와 교유했다.
사부대중과 교유하면서도 그는 늘 성찰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의 성찰적 자세는 2008년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에서 남긴 법문의 한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돌이켜 보니 한 일에 비해 받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중 도둑질’을 하면서 너무 빚을 많이 졌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법정스님은 눈이 소복히 쌓인 3월에 길상사에서 이승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