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박가네)

세상을 후회없이 살다 간 성실했던 한 인간으로, 사는데 있어서는 냉정했었지만 그래도 정을 알고 나눴던 한 인간이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고 남고 싶습니다. 늘 사랑입니다.

* 법정스님의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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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그리운 이.

2021. 1. 19.

기일은 지났지만 법정(法頂)스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어언간 10년이 되었습니다.

살아 생전에 '법정'스님은 우리의 정신을 깨우며 삶의 본질에 대해 말과 글을 전해 주었습니다.

법정스님은 당대의 독보적인 수필가요 문장가로서 출간한 책은 종교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감명깊게 읽었습다.

 

담담하면서 쉽게 읽히는 책, 정갈하고 맑은 글쓰기로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실로 법정스님의 책은 별처럼 영롱한 청정 언어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수십권이 넘는 저서 중에 대표적인 수필집이 무소유(無所有)입니다.

그때 무소유는 370만권이 판매 되었다고 합니다.

1976년 「범우사」에서 초판이 발간된 후 돌아 가시기 전 까지 86판 까지 발간 되었습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님은 "법정스님의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주장 한다 해도

스님의 책 '무소유' 만큼은 소유하고 싶다" 고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스님은 기독교, 천주교 등 다른 종교와 소통과 화합을 실천하셨던 열린 종교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또한 법정스님은 언행이 일치하였고 무소유와 사랑, 나눔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청빈의 도와 맑고 향기로운 삶을 몸소 실천한 위인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는 자리입니다.

어쩌면 인류를 불안과 공포로 내모는 '코로나 19' 사태도 인간의 욕망이 불러 이르킨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물질만능 주의가 팽배하고, 과욕 때문에 병들어가는 세태에서 우리들에게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또다시 가슴깊이 울림이 되어 다가올 것 같습니다.

 

당시는 눈부신 경제성장, '한강의 기적'을 써 내려가고 있었으며 물질 만능, 인간소외,

모든 일이 화폐 가치 하나로 환산 되기 시작 할 무렵 이었습니다.

 

법정스님이 입적(入寂)하고 나서 '무소유'라는 책이 절판되고 웃돈이 붙어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무소유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돈을 벌어서 필요한 것

이상 쌓아 놓지 말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는 의미라고 피력 하였습니다.

 

서양의 기독교 윤리에서 <성실하고 피땀 흘려 돈을 벌어서 하느님을 위한 일에 쓰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다고 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말이 있는데 이는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그릇을 비어버린자, 즉 탐욕심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사료됩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은

부자라 함은 물질이나 재산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욕심, 집착이 클 수록 바늘 귀가 좁아 진다는

뜻, 즉 천국에 가기 힘들다는 뜻이 아닐까요?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이 욕망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집착과 소유욕으로 부터 무소유의 해방감을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또한 법정스님은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었습니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는 받아도 사람으로 인해 치유되고 위안되기가 쉽지 않다.

법정스님은 전 생애를 걸쳐 민초들에게 위안 그 자체 였다" '장혜민'의<무소유의 행복>중에서

 

뿐만아니라 사회 운동가, 환경 운동가로서 세속일에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끊임없는 소유사(所有史)였으나 소유욕을 버리면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회문제 까지도 피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법정스님은 끝없이 정진하는 청빈하고 진정한 수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이 시대의

참 스승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정스님이 당대의 수필가로 알고 있는데 사실, 글은 하루에 한, 두시간 씩 쓰고

나머지 시간은 참선 정진했다고 합니다.

법정스님의 산문집은 누구나 다 아는 쉬운 말로 쓰여져 있다.

법정스님은 글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었으며 어떻게 보면 법보시, 혹은 중생 제도가

아니었는가? 라고 사료됩니다.

그런데 수필집에서 불교 용어를 찾아 볼 수 없고 동서양의 철학적 사유는 물론 실천적 지혜를 망라해

신선한 울림으로 닥아와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써 보내주신 글은 불교스님이면서도 어찌나 카톨릭적인 용어로 씌어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전 저와 함께 가르멜 수녀원에 가서 강의를 하셨을 때도 눈감고 들으면 그대로

'카톨릭 수사님의 말씀'이라고 그곳 수녀들이 표현했던 일이 떠 오릅니다"

―이해인 수녀의 맑은 편지<법정스님께> 중에서

 

무소유의 줄거리는 집착과 번뇌에서 풀려나 마음의 평안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무소유는 중국어판(2005, 天下文化) 일본어판(2001, 東方出版)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무소유> 법정, 범우사 발행, 초판 1976, 4, 15일, 16쇄,

1985, 7,30 표지를 바꿔 찍은 2판은 63쇄까지,

1999, 08, 05 작은 문고판

3판 80쇄, 2008년 4, 20일,

개정판은 맞춤법과 교정부호를 손질하고 양장본으로 꾸민 것이다.

어렵고 잘 쓰이지 않는 한문은 한글로 쉽게 풀어 고쳐 썼다.

책 재목이 「무소유」목차는 1, 복원 불국사∼35, 불교의 평화관이며 다섯 번 째가 '무소유'이다.

다음은 23∼27페이지 「무소유」 전문(全文) 줄거리는∼

 

무소유

 

1,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요,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밥 그릇,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 않은 평판 이것 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 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하는 말이다.

'K.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 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는 빈손으로 갈 것이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무엇인가를 갖는 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 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2,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蘭草) 두 그루를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쳐라 살아 있는 생물 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 뿐이었다.

그애들을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 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 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생달 처럼 항시 청청 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간 일이 있었다.

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 에서는

매미들이 있는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난초를 뜰에 내놓고 온 생각이 난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 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 거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 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 겠다고 결심했다.

난 난을 가꾸면서 산철(승가의 유행기)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했고, 분(盆)을

내 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쳐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 놓고 나간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화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 보냈는 데도 서운하고

허전함 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 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3, 인간의 역사는 소유사(所有史)처럼 느낀다.

소유욕(所有慾)에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으로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 하러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직한 비극도 불사 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4,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레한다.

그것은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 대던 나라 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事例)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소유사(所有史)에서 무소유사(無所有史)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5.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법죄처럼 생각된다…"

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6, 우리들의 소유관념(所有觀念)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 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인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 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物量)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7,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 법정스님(박재철) 약력

1932년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출생했다.

우수영 초등학교 졸업했다.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목포 상고를 졸업했다.

전남대 상대 3학년 1학기 때에 1954년 오대산을 향해 떠났다.

법정스님은 18세∼21세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출가의 계기는 6,25전쟁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시체를 보고 인생의 무상을 느꼈다고 한다.

한국 전쟁을 겪으며 삶과 죽음, 인간의 선의지를 고민하고 인간의 존재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라는 화두가 있었다.

밤차로 서울에 내린 법정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 안국동에 있던 선학원에서

판사 출신이며 당대의 선승인 효봉스님을 만나 대화하고 그자리에서 머리를 깎았다.

 

 

△ 1954년 22세 때, 경남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다.

△ 1956년 송광사에서 효봉스님의 문하로 들어감

△ 1956년 사미계 수계,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가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 1959년 4월 경남 합천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 1960년, 28세가 되던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통도사에서 <불교사전>편찬 작업에 동참하였다.

△ 1967년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스님과 더불어 <불교경전>을 번역하였다.

 

△ 1972년에는 <동아일보>에 <무소유> 수필을 연재

△ 1973년, 첫 번째 수상집(에세이집) <영혼의 모음>을 출간하였다.

△ 1973년 함석헌 선생이 주도한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였다.

함석헌, 장준하와 함께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를 결성

△ 1975년 인민혁명당 사건에 충격을 받아 그해 10월 송광사 자정암터에 토굴을 지어 홀로 살았다.

△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

 

그뒤 지리산 쌍계사, 해인사 ,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선(禪)을

수련 하기 위해 스님들이 일정 기간 동안 한 곳에 앉아 수련하는 행위)하였고 <불교신문>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을 지냈다.

△ 1970년 후반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佛日庵)을 지어 17년 동안 살았다.

※ 불일암은 송광사의 16국사 중, 제 7대인 고려시대 자정국사가 창건했다.

자정암 폐사지에 법정스님이 건물울 새로 올려 불일암 이라고 명명했다.

―그곳에서 수많은 저서로 인해 명성이 알려지자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아 오게 되었다.

△ 1992년 4월,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쳐를 옮겨 홀로 수행정진하게 된다.

△ 1994년∼2003년: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회주(會主)

△ 1966년∼2003년:서울 성북동 「길상사」회주

△ 2004년 제2회 대원상 대상

 

―수필집 <무소유>를 비롯하여 <산에는 꽃이 피네> <인연 이야기> <오두막 편지>

<물소리 바람소리> <영혼의 모음> <버리고 떠나기> <산방한담> <텅빈 충만> <인도기행>

<인생 응원가> <홀로 사는 즐거움>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네> <맑고 향기롭게>

<아름다운 마무리> 법문집<일기일회> 「진리의 말씀(법구경)」수십권의 책을 출간함

(법문집, 산문집, 잠언집, 역서, 33권, 영문판 3, 중국어판 3, 일본어판 4, 계46권, 오디오 2)

 

● 참조:「영혼의 모음(母音)」은 「무소유」보다 3년 앞선 1973년 1월 1일 '동서 문화원'

에서 출판된 법정스님의 첫 번째 수상집이다.

'무소유'의 모본(母本)이 된 책이다.

'무소유'에 실린 총 35편 가운데 23편을 이 책에서 골라 수록 된 것이다.

스님은 말머리를 통해 이 책이 무소유에 인용된 원문인 점을 밝혀 놓았다.

'영혼의 모음' 은 2002년 1월 25일 '샘터사'에서도 출판 되었다.

혹자는 '영혼의 모음'이 잘 안 팔려서 '무소유'를 출간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전자의 책도

절판 되었다.

 

―법정스님이 폭 넓은 사유를 하고 주제가 다양한 것은 그 바탕에 학창 시절에 많은 독서를 했다는

부분이다.

출가하기 전, 사흘 동안 쌓아둔 책 때문에 망서렸다는 일화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출가한 뒤에도 경전 외의 책을 많이 보았고 독서 노트를 썼 다고 한다.

또한 스님은 예술가적 재능이 뛰어나 음악, 미술, 사진 등에 관심이 많했다고 한다.

 

―김영한(길상화)씨로 부터 성북동 요정 대원각을 기부받아 1997년 길상사(吉祥寺)를 창원했다.

길상사는 우리나라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 주인인 공덕주 길상화 「김영한」씨가 조계종에

시주한 절이다.

※대원각 소유주인 「김영한」씨는 16세에 기생이 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천재 시인 백석(백기행)을 연인으로 두었다.

김영한씨는 백석 시인의 연인 '자야' 였고 백석은 그녀를 지칭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들의 애절한 러브 스토리는 오페라로 상연 되기도 했다.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때 당시 설법차 로스앤젤레스 송광사 분원(고려사)에 들린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000여평 대지와 건물 40여동 등(당시 싯가 1,000억원)을 시주하겠으니 받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법정스님은 줄곧 사양했다.

법정스님과 김영한 사이 10년의 기간 동안 권유와 거절이 이어졌다.

1995년 6월,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2년 간의 개 보수 를 거쳐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등록했다.

 

법정스님에게 조건없이 1,000억원에 해당하는 재산을 기부한 김영한씨를 보고 어떤 기자가 물었다.

"기부한 천억원이 아깝지 않느냐? "

"그 까짓 천억 이면 백석의 시 한 구절 보다 못하다" 라고 말했다.

김영한씨는 매년 7월 1일 백석의 생일날이면 목욕재계하고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 다고 한다.

고귀한 사랑을 지녔던 "길상화"보살은 1999년 11월 14일 유명을 달리 했으며 유골은 49제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뒷쪽 언덕에 뿌려졌다.

물론 통큰 기부를 한 김영한씨도 대인(大人) 다운 면모가 있지만 그 토록 큰 불심을 자아내게

만든 스님의 큰 그릇을 다시 보게된 계기였다.

 

현장스님의 말에 의하면 관절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간 김에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폐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2007년 부터 폐암으로 투병(여러 차례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2009년 겨울에 강원도의 오두막에서 제주도로 거처를 옮겨 요양했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 강남구 삼성병원에 입원했다.

폐암으로 입원 날자가 길어지자 의사들이 연명을 위한 치료를 권유했지만 스님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2010년 3월 11일 오전 성북동 길상사(송광사 서울 분원)로 옮겨 졌다.

법정스님은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 51분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였다.

3월 12일에는 스님이 수행했던 전남 순천시 송광사로 운구해 13일 오전 11시에 다비하였다.

※ 대한 불교 조계종에서는「대종사」라는 칭호를 수여 했으나 영전에는「비구 법정」이라 써 있었다.

 

법정스님의 유언∼

오랫동안 법정스님을 시봉했던 청학과도 필담을 나누었다.

"생사 경계가 어떠 하십니까?"

"생사 경계는 원래부터 없다"

속가 친 여동생에게는 "꿋꿋하게 살아라"

속가의 외사촌 누님이

"스님 돌아 가시고 나면 이제 어디 가서 스님을 뵐 수 있습니까?" 라고 하자

" 제가 보고 싶으면 불일암으로 가세요" 라고 말 했다고 한다.

현장에게도 말했다.

"내 소원은 하루 빨리 다비장 장작불에 들어가는 거야"

 

3월 11일 오후 입적한 법정스님 유언장 2장이 성북동 길상사에서 공개되었다.

◆ 남기는 말

1,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 계속 참회

하겠습니다.

2, 내것 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사)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 토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동안 풀어논 말 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 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 직인

2010, 2, 24

법정(속명 박재철) ☞ 싸인 ▣ 도장

 

◆ 상좌들 보아라∼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을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 가려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러 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의를 다해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2,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

주기 바란다

3, 덕인, 덕문, 덕현,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

까지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4, 덕진은 머리 맡에 남아 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에게 전해 주면 고맙겠다.

5, 내가 떠나는 경우에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은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바란다.

2010, 2, 24 법정 (박재철)

서울 성북구 성북동 323

 

● 2009년 6월, 법정스님께서 제자 두 명과 류시화 시인을 불러서 하신 유언 내용 중에∼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 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실제 스님의 장례식에서 관(棺)은 짜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들것 위에 숨이 멎은 스님의 육신을 올리고 그 위에 천을 덮었을 뿐 이라고 합니다.

 

―법정스님의 법구는 대나무 침상에 누어 가사 한장 덮여 상좌들의 어깨에 들려 운구되었다.

이는 배낭여행 시, 보았던 바라나시에서 인도인들이 양쪽에서 천에 덮인 시신을 들것에 매고

염을 하면서 갠지스 강가의 화장터로 가는 모습과 흡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정경은 무소유의 극치였고 죽음으로 설법한 서늘한 충격이었다.

삼천 여명의 신도와 시민들은 흐느끼면서 마지막 배웅을 했다.

 

운구차는 송광사 도착해 문수전에 모셨다.

향 한자루 삼배 올리는 것이 의식의 전부 였다.

3월 13일 오전 10시, 범종 소리와 함께 운구는 다비장으로 운반되었다.

역시 만장이 없고 꽃상여도 없었다.

대웅전 한바퀴 돌고 가는 극도로 절제된 의식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평소 모습 그대로 마지막 여행길에 오른 비구 법정…

육신을 버리고 훨훨 날아가고 싶은 곳은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였으리라

 

전국에서 모여든 만오천여 명의 신자와 추모 인파가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법구는 참나무 장작위에 옮겨졌다.

상좌는 스승이 누운 연화대에 불을 붙였다.

상좌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20시간 넘어 타오르던 뼈를 수습해 상좌들은 일곱 항아리에 담아 갔다.

스님께서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유골이 모셔져 있다.

 

※ 법정스님의 상좌로서 법맥을 이어가고 있는 스님은 모두 7명이다.

법정스님의 첫 번째 제자이며 맏상좌인 덕조스님(4대,5대 길상사 주지)과 두번째 상좌인 덕인스님,

현 8대주지 덕일스님, 6대 길상사 주지로 봉직한 덕현스님, 다섯번째 제자 이며 7대 주지였던

덕운스님 및 덕문, 덕진스님이 있습니다.

그외 법정스님의 조카인 현장스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