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

즐거운 여행 2008. 5. 21. 14:39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1)서설- 그대 삶은 모두 문학의 자궁

 

삶, 삶의 균열에서 나온 영혼의 위안

생텍쥐페리가 비행기 사고를 당해 병실에 누워있을 때의 이야기다. 막 의식을 회복한 그는 아내에게 커피 한 잔을 부탁했다. 커피를 탄 아내는 아직 마실 수는 없다며 커피 잔을 남편의 코끝에 대주었다. 생텍쥐페리는 커피향을 음미하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잠들었다고 한다.

85세의 노인은 나흘 밤낮의 사투 끝에 뼈만 남은 물고기를 끌고온 뒤 피로를 못 이겨 잠이 들었다. 소년은 노인의 가슴에 귀를 대보고, 상처난 그의 두 손을 보고 울기 시작했다. 소년은 울음을 터뜨렸고, 문밖을 나와 내내 울었으며, 테라스에 가서 커피 한 깡통을 달라며 말할 때도 울먹였다. “뜨겁게 해서, 밀크와 설탕을 듬뿍 넣어주세요.” 이건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장면이다.

일러스트|김상민기자

나는 그다지 커피를 즐기는 편이 아니고, 더구나 커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그래도 누군가 “차 뭘로 드릴까요?” 하고 호의를 베풀면 나는 예외 없이 커피를 찾는다. 나의 커피에는 생텍쥐페리가 맡았던 향기가 배어있고, 노인을 생각하는 소년의 마음이 배어있다.

매화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기 어려워서
-이은상, ‘개나리’


매화는 겨울 끝에 피는 꽃이니 매화가 졌다 함은 봄이 왔다는 말이고, 개나리는 봄의 처음에 피는 꽃이니 개나리가 피었다 함도 봄이 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냥 아무렇게나 누구나 다 쓰는 말로 “봄이 왔소!”라고 말할 수가 없다. 너무 특별하고 너무나도 소중하면 그런 법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그냥 심상하게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없어 자기 마음을 담아 전할 표현을 고심한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잘 가!” 한마디로 끝내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래서 장미꽃을 품에 안겨주고, 밤새 고심하여 시를 지어주며 전송한다. 표현의 수준이나 효과의 득실, 그리고 상징이니 은유니 하는 방법은 그 다음 문제다.

815년 6월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멀리 강주(江州)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백낙천은 심양강에의 포구에서 배 위에서 들려오는 애절한 비파 소리를 들었다. 비파 연주의 주인공은 상인의 아내였다. 그녀는 장안의 기녀 출신으로 젊은 시절을 화려하게 보냈지만, 늙어서는 장사꾼에게 몸을 의탁한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백낙천은 곡절 많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비감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88행이나 되는 긴 노래 ‘비파행(琵琶行)’을 지어주었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스르렁 두어 마디 줄 고르는 소리에 轉軸揆絃三兩聲
곡조도 이루기 전 정 먼저 일어나네 未成曲調先有情


백거이와 같은 해에 태어난 유우석(劉禹錫 772~842)도 벗에게 보낸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시기 전 마음이 먼저 취하고 未飮心先醉
바람결에 그리움 짙어만 가네 臨風思倍多


그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설레고, 거기에 닿기도 전에 마음이 들뜨는 일이 있다. 웃지 않으려고 맘먹으면 어떤 코미디에도 웃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심상한 대중가요 가사에도 깊이 공명하기도 한다. 사랑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 찾아오고, 감동도 미리 가슴을 달궈놓은 사람에게서만 일어나는 법이다. 술에 대취하는 날은 예외없이 마음이 먼저 취했던 날이다. 안 취하려 맘먹으면 몸도 술을 받지 않고 마셔도 아니 취한다. 곡절 많은 여인이 비파를 타기 위해 스르렁 스르렁 줄 고르는 소리만으로도 백거이의 마음은 이미 들썩거렸고, 벗에 대한 그리움이 일자 술에 앞서 마음이 먼저 취한다. 설렘, 그것은 미리 취하는 마음인 것이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서른한 살 되는 해 아내를 잃었다. 아내는 새로 짓는 집 주변에 많은 꽃과 나무를 심고 싶어했다. 심노숭은 아내를 새집 가까이 묻고, 아내의 생전 바람을 생각하며 그 주변에 많은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죽은 뒤 무궁한 세월을 아내와 함께 즐기고 싶었던 까닭이다. 이를 보던 사람들이 안쓰러워 한마디했다. “살아갈 생각은 안 하고 사후의 계책만 세우는구려. 죽으면 알지 못하는데 뭘 계획한단 말이오.” 이에 심노숭은 발끈하여 쏘아붙였다. “죽으면 알지 못한다니 그게 대체 말이 되오!”(신산종수기·新山種樹記)

이후에도 심노숭은 아내를 그리며 수십 편의 감동적인 시문(詩文)을 지었으니, 그건 저승의 아내에게 닿으려는 간절한 마음의 소산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는가.

문학이란 생의를 느끼게 해주는 커피향이고, 우유와 설탕이 듬뿍 든 머그잔 커피이다. 커피가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지만, 살랑거리는 그 향이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머그잔 하나가 삶을 생동하게 한다. 문학이 그렇지 않은가? 이 문학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봄을 두고도 봄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미리 취하는 마음, 즉 설렘’, 그리고 누군가에게 ‘간절하게 닿으려는 마음’에서 잉태된다.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마음에서 잉태된 문학은 천지간의 고운 언어의 옷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 세상 사람들 사이를 소통시킨다. 실로 문학이 있어 나와 너, 산 자와 죽은 자, 먼 데 사람과 여기 사람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유득공은 이덕무의 ‘청비록’에 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적부터 시를 짓는 사람과 시를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를 짓는 사람은 여항의 아녀자들이라도 안 될 것이 없지만, 시를 말함에 있어서는 슬기롭고 통달하여 감식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을 깎아내리려 함이 아니라 시를 알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천리마(千里馬)는 언제나 있지만 그 자질을 알아보는 자는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한유의 말처럼, 세상에 좋은 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감식안을 지닌 평자가 드물 뿐이다. 이덕무는 ‘청비록’의 첫머리에 당나라의 승려 실휴(貫休)의 시를 실었다.

하늘과 땅 사이 말은 기운이 있어 乾坤有淸氣
흩어져 시인 비장에 스며드네 散入詩人脾
천 사람 억만 사람 많은 중에도 千人萬人中
한두 사람 정도가 알 수 있을까 一人兩人知


세상에 만나기 어려운 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공자도 “하늘도 원망 않고 남도 탓하지 않는다. 나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하늘뿐이로다!”라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제(齊)나라를 열국의 패자(覇者)로 만들어 천하를 호령했던 관중(管仲)도 포숙아를 만나지 못했다면 무명 필부로 스러져갔을 것이다. 시인이 천지간의 맑은 기운을 받고 양공(良工)의 고심으로 서너 줄 시를 지어내고, 세상에 이 시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실상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둘 겨우 있다는 말이다. 시도 무식한 인간을 만나면 평생 쌀겨 가마니나 지고 다니다가 죽어가는 천리마의 운명에 처하기 십상이다. 어찌보면 시에 관한 숱한 정보들은 그 시의 안방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울 밖을 배회하며 집안을 기웃거리는 객들의 웅성거림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다시 현학적인 말로 덧칠을 하니, 시는 늘 우리 삶과 겉돌게 마련이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교실은 난수표를 해독하는 고문 시간이 된다.

그러니 남에게 문학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위태로운 일이 된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설 수 있는 것은, 이야기의 주제가 문학이 아니라 그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때로 대단하고 위대하지만, 그것이 잉태되고 탄생하는 지점은 누구에게나 있는 소박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문학의 풍경이 있고, 또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의식하든 못하든 문학을 동경하며, 때로 문학에서 삶의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얻는다.

오랜 세월 문자의 벽이, 입시를 위한 학교 교육이,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문단이라는 조직이, 자기 권위의 유지를 위해 특수한 훈련을 받은 전문가만이 문학을 다룰 수 있다는 거짓 관념이 문학을 우리 삶에서 소외시켰을 뿐이다. 앞으로 얼마간 나는 문학의 갈래, 사조, 기법, 사상 같은 영역이 아니라, 문학이 우리네 삶의 어떤 지점에서 태어나고 그것이 보통 사람들을 어떻게 달래줄 수 있는가를 이야기할 것이다. 흔히 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유사 이래 지금처럼 문학작품이 많이 나오고 많이 읽힌 시대는 없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거론하기로 하자.)

유럽과 남미를 오가는 야간 우편 비행기의 조종사인 파비앵은 밤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좋아했다. 야간에는 지상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지상이 될 때가 있다. 어둠속에서 별이 반짝였다. 외딴집이다.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있는 농부들은 등불이 그 검소한 식탁만을 비춘다고 생각할 뿐, 그 불빛이 80㎞ 떨어진 곳의 사람에게도 전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문학이란 외딴집 농가의 식탁을 비추는 작은 등불과도 같다. 어느 누가 처음부터 세상을 환히 비출 글을 쓰려고 마음먹는가? 그저 상처받은 자기 영혼을 위안하거나, 술값이나 벌어보자는 심산이거나, 아니면 넘치는 흥분을 주체할 길 없어서 붓을 들 뿐이다. 윤동주는 정말 나뭇잎이 바람에 떨리는 소리를 예민하게 느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썼을 뿐이다. 아마도 윤동주는 자기가 들었던 나뭇잎 떨리는 소리를 이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이 함께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윤동주의 ‘서시’와 생텍쥐페리처럼 ‘야간비행’을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밤중에 풀벌레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가족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에 불을 밝히는 것이야 우리네가 항용 겪는 일상이 아닌가! 문학작품의 근원을 거슬러 찾아가면 신비롭게 높은 산이 아니라 집 근처 아무데나 있는 야트막한 야산이 서있고, 천재나 위인이 아니라 고뇌하고 번민하는 평범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기적의 노예가 되고 싶은 사람이 신을 떠벌리듯, 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그 집을 신비화하는 것이다.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人間보다 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藥이 있는 줄을 안다고
首陽山의 어느 오래된 절에서 七十이 넘은 노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맛자락의 山나물을 추었다.”
-백석, ‘절간의 소이야기’


약은 먼 데 있지 않다. 뒷산에서 얻은 병의 약이 히말라야 설산에 있을 리 만무하다. “不平則鳴”이라고 했다. 문학은 삶, 삶의 균열에서 나온다. 처방의 수준에 따라 효과의 차이야 있겠지만, 문학작품은 최소한 자기가 태어난 지점의 아픔 정도는 달래줄 수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문학과 우리의 삶이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이 연재의 목표다.〈이승수|한양대 강사〉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절망-힘겨울 때 ‘그래도 살아보라’

겨울 오대산에 오르고 싶어 진부 가는 차표를 예매하다가 포기하고 눌러앉았다. 몇 차례 오대산은 절망에 빠진 나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지금 이 자리에서 견뎌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절망을 말해보기로 했다. 침묵으로 서있는 겨울 숲이 잘 보이도록 창문을 열고, ‘귀촉도’로 시작하는 김두수의 노래가 흘러나오도록 했다. 대선이 끝난 뒤 정치면 기사를 훑어보며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학원가에 있는 선배의 전화번호를 생각하며 전화기를 조물락거렸다. 마지막으로 박지원의 허생(許生)을 생각했다.

남산 아래 가난한 마을 낡은 초가에서 허생은 7년이나 글을 읽었다. 바느질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아내의 원망어린 시선과 한숨을 애써 외면했지만, 마음 한편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도둑질도 못하냐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 허생의 마음은 일거에 무너져버렸다. 그는 책을 덮고 거리로 나와 거부 변승업에게 만금을 빌려 일국을 좌우할 만한 재부를 얻었다. 정승 이완이 찾아와 대업의 방책을 물으면서 관습과 예법에서 한 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자, 분기를 이기지 못해 죽여 버린다며 칼을 찾았다.

일러스트|김상민기자


이 짧은 이야기에서 내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허생의 눈물이다. 책을 덮을 때, 나라 경제의 허약함을 확인했을 때, 나라에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발견했을 때, 허생은 절망에 갇혀 만강의 눈물을 흘렸다. ‘허생전’은 그 눈물의 바다 위에 떠있는 조각배인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참고 있다고 숨겨진 눈물을 느끼지 못하거나, 말끔히 씻어냈다고 해서 눈물자국을 보지 못한다면 삶의 어느 지점에서 ‘너’와 만날 수 있을까?

그런 ‘특별한 만남’을 전제로 한다면, ‘허생전’에 관한 이런저런 정보는 그야말로 부질없다. 신비롭고 의연한 허생의 행적에는 뜨거운 눈물이 감추어져 있고, 그 뜨거운 눈물을 따라가 보면 시대와 자기 삶에 절망한 지식인 박지원이 서있다. ‘허생전’은 이 절망에서 태어난 것이다. 박지원은 절망의 상황을 피하거나 푸념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끝까지 그 위에 발 딛고 서서 통찰하고 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간추리면 아마도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될 것이다. 혹 아직도 ‘허생전’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존재라면, 그 이유는 모두 그 탄생의 내력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내 삶을 위협할 때가 있다. 더 이상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순간이 있으며, 아니면 살아야 하는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절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 상처투성이의 몸이다. 마음인들 그렇지 않을까? 누구나 다 덮고 살 뿐이다. 성한 부분으로 상처를 덮고, 웃음으로 번민을 얼버무린다. 해야 할 일도 있고 책임도 있다. 그러다가 작은 균열로 삶의 일각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두 손을 놓아버리고 싶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소 경중의 차이가 있지만, 절망의 무게는 언제나 균질하게 다가온다.


北關에 게집은 튼튼하다
北關에 게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튼튼한 게집은있어서
힌저고리에 붉은 길동을달어
검정치마에 어입은 것은
나의 꼭하나 즐거운 꿈이였드니
어늬아츰 게집은
머리에 묵어운 동이를 이고
손에 어린것의 손을끌고
가펴러운 언덕길을
숨이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백석(1912~1995)의 시 ‘절망’(1938)이다. 소년은 아름답고 튼튼한,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함경도 소녀를 혼자서 사랑했다.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두었다. 너무도 순결하고 아름다워서, 흠이 갈라 생각만 해도 괜히 안타깝고 걱정이 앞선다. 그 마음을 나는 안다. 그러다가 소년은 (아마도 학업을 위해) 집을 떠나게 되었다. 몇 해 만에 집에 돌아오는데, 글쎄 그 소녀가 무거운 항아리를 이고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게다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지 않은가!

이 광경을 보는 순간 그는 문득 설움에 사로잡혔다. 사랑해서가 아니다. 자기가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고운 모습이 여지없이 깨졌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 속에서는 일 점 때도 묻히지 않았는데, 현실에서 그 환상이 무참하게 일그러진 것이다. 동시에 자기 삶의 순수함도 산산조각이 났다. 이 시는 막 소년티를 벗어나는 청년의 절망에서 태어났다.

백석의 절망이 맑은 슬픔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에 반해, 시대와 격렬하게 대결하고 지지 않기 위해 고심했던 김수영(1921~1968)의 ‘절망’(1965)은 또 다르다.


風景이 風景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速度가 速度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拙劣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고
救援은 예기치 않는 순간에 오고
絶望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여기 나오는 풍경과 곰팡과 여름과 속도와 졸렬과 수치는 모두 독자의 시선을 현혹시키는, 야구로 비유하면 일종의 유인구다. 말에 휘둘리면 영락없이 헛스윙이다. 이 말들은 이렇게 바꿔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부패는 부패를 반성하지 않고, 비열은 비열을 반성하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으면 잘못을 알 수가 없고, 잘못을 알지 못하면 개선하지 못한다. 세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결정구는 마지막 한 구절,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이것이다. 한복판에 들어오는 155㎞짜리 돌직구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으면, 나의 절망도 그치지 않는다. 세상이 부조리하다면 나는 순응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절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전혀 예기치 않은 시간과 방향에서 불쑥 나타나는 구원의 바람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이는 바로 시인의 비장한 자기 다짐이다. 시인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기 영혼을 잠재우지 못하게 했던 김수영이다. 이 시는 절망에서 태어나 비장하게 절망을 다짐하고 있는데도, 문득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여 대충 자리 잡고 누우려는 몸에 새로운 긴장을 주입한다. 묘한 일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서 모스크바를 떠나 멀리 우랄 지역으로 쫓겨간 닥터 지바고는 감자 농사를 지으며 배춧국 한 그릇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밤에는 늑대들이 우는 가운데 삶의 희열을 느끼며 시를 썼다.

1953년 이반 제니소비치는 벌써 8년째 혹독한 라게리 수용소 생활을 견디는 중이다. 하지만 이 악명 높은 수용소에도 삶의 본능과 기쁨이 있다. 영하 30도에 이르는 추운 겨울 노역을 마치고 돌아온 뒤 받는 한 그릇의 뜨뜻한 국, 말도 못하고 군침을 삼키며 바라보다가 얻어 피운 한 모금의 담배연기는, 그에게 자유나 전생애보다도 귀중하다. 밤 10시 이반 제니소비치는 행운의 연속이었던 하루에 감사하며 잠자리에 든다.

‘닥터 지바고’와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는 모두 처절한 절망에서 어떻게 삶을 길어 올리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그러한 절망 속에서 잉태되고 탄생한 것이다.

누구의 삶인들 절망의 연속이 아니며, 누구의 사연인들 슬프지 않으며, 따지고 보면 살아있는 것치고 허무하지 않은 게 어디 있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더 이상 삶을 버티기가 힘겨울 때, 어디선가 멀고도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래도 살아보아야 하지 않겠냐고. 우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간다.

문학이란 자기 삶을 사막에서 건져내는, 아니면 자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한데 그것이 때때로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상처를 치유해주기도 한다. 놀라운 건, 아주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약효를 발휘하고, 지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삶의 몫이 신에게서 인간으로 넘어온 뒤, 사람들은 삶의 무게에 시달려야 했고, 살아야 하는 이유도 스스로 발견해야 했다. 그리고 커다란 약속이 비워진 휑한 자리를 사람들은 오랜 세월의 체험과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 얻은 작은 발견과 지혜로 채워야 했다.

이미 님이 떠나갔는데도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라고 되뇌며 정신을 벼리는 것이나, 삶이 아무리 서러워도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조지훈, ‘승무’)며 춤사위를 가다듬는 것이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떼를 바라보며 “그는 그의 몸짓이 슬픔을 넘어서려는 것임을 알까”(이성복,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떼처럼’)라며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 그리고 난로 위의 주전자를 보며 “극에 달한 고통만이, 영혼을 건져 올릴 수 있다”(이윤학, ‘난로 위의 주전자’)며 삶의 고통을 달래는 것, 이는 모두 왜소한 인간이 스스로 삶의 이유를 내놓는 산고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태어난 작은 발견과 지혜들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반짝인다.

모든 신화와 의례는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상징의 형식으로 품고 있다. 하지만 신과 영웅들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일상은 심리적으로 ‘죽음(소멸, 혼돈) →태어남(생성, 질서)’의 연속이다. 한줄의 시를 쓰거나, 한편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모두 작은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자기 삶의 부정을 씻어내는 씻김굿을 펼치는 것과 같다. 이를 통해 아주 미세하게 부활과 갱신을 체험하거나, 아니면 마음의 오욕을 씻어내기 때문이다. 애초에 구원은 문학의 몫이 아니었다.

오대산은 겨울이 가기 전에 찾아볼 생각이다. 겨울 산은 한마디 말도 없이 나를 비장하면서도 의연하게 한다. 선배한테는 전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절망이 희망을 낳는 것이 아니라, 견뎌냄 그 자체가 희망이 되는 것이다. 세 번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종적을 감춰 아직도 행방을 알 수 없는 허생을 찾아야 한다. 허생과 같은 인물을 그렇게 사라지게 해서는 안된다. 허생을 찾는 것이 바로 나의 일이 아닌가! 김두수의 노래 가락은 잔잔해졌다. 가만히 아래 시구를 읊조려본다.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일과이거니… -신석정, ‘들길에 서서’  〈이승수|한양대 강사〉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3)여행-떠나지 않고 황홀한 삶 어이 만나랴

러시아의 민담학자 프루프(1895~1970)와 미국의 신화학자 캠벨(1904~1987)은 동서고금의 신화와 민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의 출발로 시작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야기’라는 집은 주인공의 공간 이동과 새로운 세계에서 겪는 일들을 기둥과 들보로 하여 지어진다. 주인공은 길 위에서 더없이 다양한 모험을 하며, 새로운 세계는 사막, 바다 속, 동굴, 섬, 지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세계들은 때론 짙은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고, 매혹적인 음악으로 나그네를 유혹하며, 할머니를 보내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기도 한다. 주인공들은 모험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내면에 숨어있던 지혜와 용기를 발견한다.

일러스트|김상민기자


주몽은 아버지를 찾아 부여를 떠나고, 손오공 일행은 불경을 구하러 10만8000리 서역 길을 나선다. 바리데기는 아버지를 살릴 약을 구하러 서천으로 가고, 85세 노인은 자기가 아직 어부임을 증명하고 싶어 바다에 배를 띄운다. 이들은 한결같이 길 위에서 온갖 예기치 못한 고초를 겪는다. 그리하여 주몽은 고구려를 세우고, 손오공 일행은 불경을 얻고, 바리데기는 약을 구하며, 어부는 물고기 뼈만으로도 자신이 아직 어부임을 입증한다. 모두 모험적인 여행을 통해서만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한 가지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그 주인공들은 모두 우리의 분신이고 대역이다.

신과 영웅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세계란, 기실 초라하고 왜소하며 상처투성이인 우리들의 내면이 천상에 투사되면서 굴절 변용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여섯 살 소년은 집 앞 슈퍼에 혼자 심부름을 다녀오면서 거대한 세상을 만나고, 열일곱 소녀는 보고픈 바닷가에 혼자 다녀오면서 정신의 크기가 한 뼘 자라며, 집밖에 몰랐던 마흔 살 아줌마는 혼자 기차 여행을 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대면한다. 순간 이들은 모두 자기 삶의 작은 영웅이 되며, 세상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의 일상을 탈출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어 귀환한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끊임없이 거듭나는 것이다.

여행은 ‘출발→여정→귀환’의 세 단계를 밟는데, 여행자의 내면은 발길에 따라 ‘설렘→경이→성숙’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그 지점 지점에서 문학은 어김없이 태어난다. 여행 가방을 싸고 지도를 펼쳐 볼 때, 낯선 풍물과 만날 때마다, 잠 못 이루는 타관의 객사에서, 짧은 시간 인연을 맺은 사람과 헤어지며 뒤돌아보는 순간, 집에 돌아와 꿈만 같았던 지난 날을 추억하는 가운데, 문학은 꿈틀거리며 몸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적 황홀경에 빠진다. 그 순간은 누구나 이미 작가이다.

사마천은 약관의 나이에 역사의 현장을 두루 찾아보았는데, 뒷사람들은 장강 대하 같은 문장의 동력을 그 여행에서 찾곤 했다. 옛 사람들은 흔히 창작의 조건으로 1만 권의 책을 읽고 1만 리 길을 다녀야 한다며, ‘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를 들었는데, 어떤 이들은 그중 1만 리 여행이 더 중요하다며 ‘독만권서(讀萬卷書), 불여행만리로(不如行萬里路)’로 고쳐 말하기도 했다. 권필(權필, 1569~1612)은 아끼는 제자에게, 천하를 널리 보지 못하면 시 또한 갇히게 되니 뒷날의 먼 여행을 위해 수영과 중국어를 배워둘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여행은 시를 낳고, 문장은 여행에 생명을 준다. 여행과 문학은 서로 없으면 못 사는 사이인 셈이다.

18세기 조선 최고의 과학자 홍대용(1731~1783)은 천안에 머물면서도 그 시야가 우주에 두루 미쳤고 가슴의 크기는 천하를 담을 만했다. 그는 평소 중국어를 공부하며 장쾌한 여행을 꿈꾸었다. 꿈이 간절하면 이루어지는 법, 35세 되던 해에 숙부를 따라 북경에 갈 기회를 얻었다. 1765년 11월27일 압록강을 건너며 활화산처럼 솟구치는 감회를 이기지 못한 홍대용은 한 곡조 미친 노래(狂歌)를 지어 읊었다.

간밤에 꿈을 꾸니 요동(遼東) 들판 날아 건너 / 산해관(山海關)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 망해정(望海亭) 제일층에 취후(醉後)에 높이 앉아 / 갈석산(碣石山) 발로 박차 발해를 마신 후에 / 진시황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 오늘날 초초 행색 뉘 탓이라 하리오.

광활한 요동벌을 날아 건너고, 거대한 산해관 철문을 한 손으로 밀어 열고, 몽골과 요동 사이를 가로 지른 갈석산을 발로 차내고 발해 물을 다 마신다니, 몸은 파리한 서생이어도 그 기상은 세상을 덮은 거인이었다. 거문고 연주를 탄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울린다. 이 노래는 먼 여행에 나서는 그의 포부가 얼마나 원대했는지를, 또 거꾸로 그의 식견이 조선사회에서 얼마나 짓눌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1712년 겨울, 60세의 포의처사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가족들의 만류로 아우 창업(昌業, 1658~1721)에게 연행(燕行)의 기회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형은 입맛을 다셨고, 아우는 쾌재를 불렀다. 형은 진한 아쉬움을 50수의 시에 담아 아우에게 주었다. 아래는 그중 일부인데, 지금도 길 떠나는 이의 가슴을 장하게 할 만하다.

우리 인생 견문이 적으면 아니 되니 人生不可少所見
안목이 커져야만 가슴도 넓어진다네 大目方令胸두擴

산하를 직접 보면 느껴 앎이 깊으리니 山河觸目懲感深
10년 사서 읽음보다 나음을 알 것일세 可知勝讀十年史

과연 아우는 조롱을 벗어난 새처럼 마음껏 노닐었고 ‘연행일기’라는 불후의 여행기를 남겼다.

1780년 여름 박지원(1737~1805)은 선배들의 길을 밟아 나서 압록강을 건너 요양(遼陽)에 이르렀다. 조선에서 가자면 요양은 드넓은 요동벌에 있는 첫 번째 도시였다. 눈앞에 펼쳐진 일망무제의 벌판을 보고 박지원은 ‘정말 한 번 목 놓아 울 만한 곳’이라며 탄식했다. 일행이 고개를 갸웃하며 까닭을 물었다. 박지원은 사람의 울음소리를 천지간의 우레에 견주며, 천지간에 기운이 꽉 막혀 있듯 사람의 마음속에도 불평과 억울함이 갇혀있는데, 이를 풀어내는 데에는 소리만한 것이 없다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캄캄한 곳에 갇혀 지내다가, 갑자기 툭 트인 곳에 나와 손과 발을 펴매 그 마음이 시원해지니, 어찌 한마디 참된 소리를 마음껏 터뜨리지 않으리오. 그러니 우리는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한바탕 울 만하고, 황해도 장연 바닷가 금모래 밭을 거닐며 한바탕 울 만하이! 또 이제 이 요동 벌판은 산해관까지 1200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 산도 없이 저 멀리 하늘과 땅이 닿아있고 고금에 먹구름만 오갈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목 놓아 울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박지원은 조선에선 보지 못한 드넓은 벌판을 보았고, 또 거기서 진실을 마음껏 말할 수 있는 열린 사회를 떠올렸다. 제도와 관습과 편견에 매여 진실을 외면하는 조선 사회를 통곡한 것이다. 조선의 여행자들 앞에 다가온 요동벌은 그냥 넓기만 한 들판이 아니었다. 이 공간은 천하의 역사를 반추하고, 우주의 운행 원리를 관찰하고, 조선의 현실을 아프게 되돌아보며 새로운 세계를 설계하는 그런 곳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문학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인 것이다. 이 글은 경이의 소산이다.

슬기로운 여행자들은 반드시 귀로에 소중한 선물을 안고 온다. 마사이족 소년은 혼자 밀림에 나가서는 지혜와 용기를 지닌 어른이 되어 돌아오고, 계모와 언니들에게 쫓겨난 바살리사는 어두운 숲속에 들어갔다가 불씨를 얻어 돌아온다. 1778년 북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박제가(1750~1805)의 품속에는 병든 조선을 치유할 처방이 들어있었다. 아래는 그해 가을 강화에서 새벽녘 지은 시이다.

밤은 길고 마음엔 번민이 많아 夜長心轉多
일어나려 하다가 다시 눕누나 欲起還復休
한 몸 의식 연연할 뿐이 아니라 匪直衣食戀
아득한 천지간의 근심 품었네 遙懷天地愁
벌레 하나 이따금 찌르르 울고 一蟲時돌돌
잎새들 문득 놀라 바삭거린다 衆葉驚
붉은 해는 어제와 다름없건만 朱炎如昨日
푸른 살쩍 어느새 가을이 왔네 靑빈忽已秋
천 마디로 깊은 회포 풀어내느라 千言賦幽懷
내 한 몸 도모할 겨를이 없네 未暇一身謀

가을 밤 마음은 이 생각 저 걱정을 옮겨 다니느라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일어나볼까 하다가도 이내 생각을 접는 것은 심신이 지쳐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고민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천지간 백성들의 삶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위는 고요하고 캄캄한데 시인의 마음은 너무 맑다. 그래서 미처 잠들지 못한 벌레 한 마리가 찌르르 우는 소리가 이따금 들리고, 마른 잎들을 스치고 지나는 소리도 귀에 들어온다. 5구의 일충(一蟲)에서 ‘일(一)’은 박제가의 고독을, 6구 ‘중엽경(衆葉驚)’의 ‘경(驚)’은 박제가의 불안을 표상한다. 실은 온 세상에 자기 혼자 깨어있고,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자기가 깜짝 놀라는 것이다. 햇살은 여름처럼 뜨겁고 몸은 아직 20대 청춘이지만, 생각이 무르익고 걱정이 깊어지면서 그의 몸은 점차 가을로 익어갔다. 살쩍에서 느껴지는 가을은 여행자의 성숙을 상징한다. 박제가의 처방은 몇 해 뒤 《북학의(北學議)》로 정리되었다.

1888년 6월 고흐(1853~1890)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도를 보며 여행을 꿈꾸듯 밤하늘을 보면서 별로 가는 꿈을 꾼다고 했다. 그가 꿈꾼 것은 현실과 지각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창작의 동력이었다. 1919년 서머셋 모옴(1874~1965)은 《달과 6펜스》에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운명을 말했다. 그에 따르면 낯선 곳에 대한 그리움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고, 여행은 오래 전에 떠난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또 일상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만나러 가는 행보이다. 토머스 만((1875~1955)도 《마의 산》에서 새로운 공간이 어떻게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속인까지도 손쉽게 방랑자로 만드는가를 말한 바 있다.

저 멀고도 깊은 곳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무당이 명산대천을 찾아 나서듯, 일상과 관습의 무력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여행 가방을 꾸린다. 지금 이국의 낯선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거나, 인터넷에서 여행지의 정보와 교통편을 검색하고 있거나, 지난 여행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고 있는 이들은 모두 문학을 잉태하고 있는 중이다. 〈 이승수 | 한양대 강사/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4)소멸-사라지는 것, 그 찰나의 아름다움

지는 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 잠시 멈춰서 ‘아!’ 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은 신성(神聖, divinity)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도의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말씀이다. 노을의 전송 속에 침강하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알맞게 익은 진도 홍주나 한산 소곡주를 국자에 떠내 혀끝으로 살짝 음미할 때, ‘타인의 삶’ 같은 영화나 ‘죄와 벌’ 같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접고 나서, 하동 악양루에 앉아 섬진강 물결 따라 눈길을 흘려보내면서, 한 순간 시간과 숨을 멈춰 세우고 짧은 탄식을 내뱉는 것은 모두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미적 각성으로 세계를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이때 그 순간은 영원이 된다.

큰애가 일곱 살 때 문득 자긴 슬픈 음악이 좋다기에 깜짝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 슬픈 게 아름답잖아”라고 심상하게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이 마음 깊이 남아서일까, 마음이 짠해지며 생명을 낳은 업보를 느꼈다. “아빠도 늙어?” “늙지.” “늙으면 죽어?” “죽지.” “아빠도?” “그럼.” “……” “생명 있는 것은 모두 다 사라지는 거란다.” 역시 여섯 살 때의 작은애와 주고받은 대화이다. 아이는 순간, 그윽한 현자의 표정을 지었다. 한번 안아주면서 나도 문득 현자가 된 느낌이었다. 안타깝지만 아이들은 꽤나 힘든 과정을 거치며 아름다움을 알아가고, 실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미의식을 따라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허무를 거쳐 소멸이 나타난다. 소멸은 아름다움의 대모(大母)인 것이다.

천거할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천거하지 않는 것은 당시 관리의 허물이고, 세상에 알릴 만한 행적이 있는데도 알리지 않는 것은 뒷사람의 책임이다.

얼마 전 후배가 준 이용휴(李用休, 1708~1782) 산문집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인재를 쓰지 못하는 것은 권력자의 잘못이고, 아름다운 사연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문인의 허물임을 말한 것이다. 그 사연을 무엇으로 세상에 전할 것인가? 100년 전까지만 해도 그건 오직 글이요, 문학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려 하거나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면이 사라지려 할 때, 그 사람이나 그 장면을 다치지 않고 생생하게 잡아두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다. 차마 아무렇게나 잊어버리거나 지나쳐버리거나 버려두지 못하는 사연이 있다. 때로 사라져버린 것을 떠올려 눈과 귀가 잠시 멀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모두가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다. 누구인들 그런 마음이 없으랴! 그러니 누구의 삶인들 문학이 아니랴!

일러스트|김상민기자

지난 늦은 가을 앞산에 있는 극락사에 오른 적이 있다. 백마산 중턱의 극락사는 그 오가는 길이 아름다운 절집이다. 풍경 소리를 들으며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돌고 내려가는데 문득 대웅전 앞에 숨어서 빛 바래가는 조그만 단풍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빨간 빛과 노란 빛과 파란 빛이 섞여 있는데, 파란 빛은 완연히 아래쪽에 힘없이 숨어있다. 나도 모르게 “곱다!”고 말을 흘렸다. 잘 늙은 할머니를 우린 보통 “곱다!”고 한다. 석양에 물든 노을도 고운 것이다. 아기나 신록이나 아침 해는? 그건 예쁘다고 해야 한다. 곱다는 말에는 소멸이 내포되어 있고, 그래서 그 말에는 ‘설움’이 배어있다. 그래서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고 한 지훈의 마음을 난 이해할 수 있다. 후배 하나가 논문을 쓰다가 시인이 노쇠하여 읊은 시구 “庭菊想應開口笑, 巖楓寧有皺顔悲”를 “뜰 국화는 아마도 활짝 피었을 테니, 바위 위 단풍이 어찌 곱지 않을 것인가”라고 번역했는데, 슬프다는 뜻의 ‘悲’ 자를 ‘곱다’고 한 이유를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1771년 박지원은 43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한 누이를 잃고 짧은 묘지명을 지었다.

㉮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다. 나는 그때 갓 여덟 살이었다. 장난으로 누워 발을 구르고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더듬거리며 의젓하게 말을 하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을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달래며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어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어뜨리던 일을 생각하였다.

㉮는 28년 전 누이가 시집가던 날 새벽의 한 장면이다. 다정하기만한 이 광경이 인상적인 진짜 이유는 오뉘의 숨겨진 마음에 있다. 누이나 아우는 모두 이 날이 두 사람이 헤어지는 날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 짧은 풍경에 자욱하게 깔려있는 분위기는 ‘설움’이다. ㉯는 28년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 눈앞에 있는 광경을 보여준다. 그렇게 헤어진 누이는 43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었는데, 그나마 그의 시신을 실은 배도 멀리 사라지고 있다. 대조적인 두 장면 사이에 만 가마의 슬픈 정서가 감추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 ‘상실과 소멸’이라고 하는 유사한 체험이 점층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첫 번째는 누이의 혼인이고, 두 번째는 누이의 죽음이며, 세 번째는 누이의 관을 실은 배의 사라짐이다. 짧은 글 속에 지속적으로 누이가 멀어져 가는 과정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 글이 하염없는 슬픔을 자아낸다면, 그건 누이의 죽음 때문이라기보다도 사랑하는 존재가 차츰 멀어져 사라지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체험하기 때문이다.

고골리(1809~1852)와 생텍쥐페리(1900~1944)는 살았던 시대와 공간에서 일점 겹치는 부분이 없다. 물론 나도 이들과 일면식이 없다. 하지만 내 책꽂이에 김성탄(1608~1661)과 신채호(1880~1936)가 나란히 앉아있듯, 나와 두 사람은 때로 모여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고골리는 ‘외투’에서 어렵게 장만한 외투를 강탈당하고 그만 절망을 이기지 못해 쓸쓸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그렸다.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유목민들의 텐트를 기웃거리다 사막 위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는 노예들의 모습을 잡았다.

나는 그가 고통을 느낀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죽음과 함께 미지의 세계가 하나 죽는지라, 나는 그의 안에서 꺼져 가는 영상들이 어떤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세네갈의 어떤 대농원이, 남쪽 모로코의 어떤 하얀 도시들이 차차 망각 속에 파묻혀 들어가는 것이었던가? … 그 단단한 해골이 내게는 그 오랜 보물상자같이 보였다.

(안응렬 역, ‘인간의 대지’)

누구의 보호나 사랑도 받지 못하고, 흔한 파리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핀으로 꽂아 현미경을 들이대는 자연 관측자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던 존재가 사라졌다. 동료 관리들의 조롱을 아무런 저항 없이 참아내다가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도 그저 평범하기만 했던 한 존재가 이제는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버렸다. 비록 생을 마감하기 바로 직전이긴 했지만 그에게도 외투의 모습을 빌려 인생의 소중한 순간이 찾아와 짧은 시간 동안 그의 고달픈 삶을 비춰주기도 했고, 견딜 수 없는 불행이 엄습하기도 했다. (조주관 역, ‘외투’)

솔직히 따져보라. 사막 위에 누워 영면을 기다리는 노예와, 외투 하나로 환희에 젖었다가 또 그 외투 때문에 절망에 빠져 죽어간 아까끼예비치, 이들의 삶이 우리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누군가 거기에 마음을 주고 따스하게 말을 거는 순간 보물상자가 열리고, 희미한 불꽃이 사라지기를 멈추고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 불행한 삶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고 한 장면을 건져 남겨준 두 작가를 좋은 벗으로 삼기로 했다. 우리의 삶도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지위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고, 돈을 처발라 거대한 묘역을 조성하고 큰 빗돌에 이름을 새겨 넣어야 그 삶이 전해질 수 있다면 세상은 너무 슬프지 않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소박하고 작아도 진실하고 아름다운 ‘나의 삶’이고 ‘이웃의 일상’이다.

사진을 순간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문학을 포함하여 어떤 예술이든 그렇지 않을까? 모든 예술은 순간의 강렬한 인상, 어떻게든 그것을 포착하고 잡아두려는 몸부림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억겁의 세월 무수한 사람들의 사연 중, 지극히 일부 순간들만이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 또 몇몇만이 영원에 버금가는 지위를 얻게 된다. 의상(義湘, 625~702) 스님은 “한량 없는 세월이 한 순간 생각이요, 한 순간 생각이 한량 없는 세월.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이라고 갈파했고, 청초(淸初)의 문장가 김성탄은 “죽을 먹을 때 떠오른 착상을 숟갈을 놓고 잡아야지, 다 먹은 뒤에 잡으려고 한다면 안 된다”고 하였다.

신라 천년 사직을 뒤로하고 등을 보이고 떠난 마의태자, 시집가는 누이의 뒷모습, 수평선 위로 한 점이 되는 사라지는 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만 차츰 작아지는 기러기, 늙은 아버지의 눈빛, 깜빡거리며 줄어드는 촛불, 곱게 물드는 석양과 단풍 등에 우리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거기서 삶의 소멸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바로 우리 삶에서 문학이 반짝이는 순간이다.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한용운, ‘떠날 때의 님의 얼굴’)

현재 지구상에는 6800개 정도의 언어가 있는데, 평균 2주에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밖에 하루하루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사라지는 것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 문학도 끝내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5)호기-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무엇이랴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뜻대로 되는 일은 없고 눈치 볼 것은 왜 그리도 많은지한 없이 초라해지고아무에게도 위로 받지 못 할때 산에 올라보라. 세상을 굽어보는 호연지기의 순간 삶은 새로워지고 그 삶에서 문학이 숨 쉬리라.


시진(柴進)의 집에 식객으로 있던 무송(武松)은 고향의 형을 보러 길을 나섰다. 고향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경양강(景陽崗)을 넘어야 했다. 마침 고개 아래 주막 앞에 주기(酒旗)가 흔들리는데, 깃발에는 ‘삼완불과강(三碗不過崗)’이라 씌어 있었다. “세 사발을 마시면 고개를 넘지 못한다”는 뜻이다. 무송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시키고 안주로 소고기 두 근을 주문했다. 무송은 석 잔을 마시고 술을 더 요구했다. 주인이 난색을 표하자, 무송은 얼굴을 부라리며 기어이 고기 두 근 안주에 남은 술을 모두 마신 뒤 호기롭게 문을 나섰다. 그 다음 술 취한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잡은 일은 ‘수호전’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7, 8년 전인가, 한겨울 밤에 폭설이 내려 그만 성남에서 버스가 끊기고 말았다. 광주 집에 가기 위해서는 갈마치를 넘어 40리를 걸어야 했다. 잠시 하늘을 보며 투덜대던 나는 인근 해장국집에 들어가 “여기 순대국밥 하나에 소주 한 병!”을 호기롭게 외쳤다. ‘삼완불과강’의 금기를 어기며 술을 마시던 무송의 호기를 흉내낸 것이다. 소주 몇 잔으로 호기가 등등해진 나는 천지간에 독행(獨行)하는 기분으로 눈 쌓인 밤길을 세 시간 넘게 걸어 집에 도착했다. 범을 잡지는 못했지만 그때 내 기개는 완연 호걸의 그것이었다. 나는 옛 이야기의 까만 글자들을 보았을 뿐인데, 삶의 마디마디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내 안에서 살아나기도 하고 내 옆을 나란히 걸으며 의기를 독려하기도 한다. 묘한 일이다.

정몽주(1337~1392)는 극심한 혼란의 시기인 고려말, 수차례 전쟁에 참여하고 도합 여섯 차례나 외교 사행을 떠났던 풍진남북의 경륜가였다. 그는 지사이기 전에 굳세고 시원시원한 호걸의 면모가 강하다. 바닷길로 명나라 남경에 사신 갔을 때 예부의 관리에게 준 시는 “남아는 평생토록 먼 노닒 사랑하니, 타향에 오래 머묾 무엇을 탄식하리”로 시작하여 다음 구절로 마무리된다.

때로 성남 저자에서 술을 마시면 時來飮酒城南市
호기가 온 중국을 덮고도 남지요 豪氣猶能塞九州

기상이 이만하면 맹자가 말한 바 나약한 자를 붙들어 세울 만하지 않은가? 내가 병든 나뭇잎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한잔 술을 청할 만하지 않은가?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고 내 삶이 끝없이 추락해가는데 수십억 누구에게서도 위로받지 못해 외로울 때, 우리에겐 천고 이전의 호걸 친구들이 필요하다.

조선후기의 여러 야담들은 임형수(1504~1547)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임형수가 이황(1501~1570)과 같이 홍문관에서 근무했을 적의 일이다. 어느 날 밤 입직하던 임형수는 술에 취해 이황에게 말했다. “자네도 남아의 기이하고 장쾌한 일을 아는가?” 퇴계는 빙그레 웃으며 말해보라고 했다. 임형수는 취기가 도도하여 말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 때 검은 담비 갖옷을 입고, 허리에는 긴 백우전(白羽箭)을 차고, 어깨에는 백 근짜리 각궁(角弓)을 멘 채 철총마를 타고 말을 달려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만 리 바람이 몰아쳐 나와 산의 온갖 나무들이 흔들리는데, 갑자기 송아지만한 멧돼지가 길을 잃고 달아나면 살을 먹여 쏘아 죽이네.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배를 가르고, 긴 꼬챙이에 고기를 꿰어 불에 구우면 기름과 피가 뚝뚝 떨어진다네. 이때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고기를 잘라 씹어 먹고는 큰 은사발에 자하주(紫霞酒)를 가득 부어 한 입에 쭈욱 마시네. 날이 어스레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눈보라가 몰아쳐 술 취한 얼굴에 달려든다네. 이러한 맛을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임형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무릎을 치며 껄껄 웃었다.

이완(1602~1674)이 소년 시절 사냥을 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산적의 집에 들었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희롱하다가 돌아온 산적의 손에 잡혀 대들보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산적은 갓 잡아온 사슴 고기를 구워 술을 마시다가 이완을 힐끗 보고는, 곧 죽을 놈이지만 맛이나 보게 해준다며 칼 끝에 고기를 찍어 주었다. 이완은 태연자약하게 고기를 받아 먹었다. 산적은 이완의 기개에 마음이 울려 묶은 것을 풀어주고 술과 고기를 함께 먹으며 의형제를 맺었다. 산적은 뒷날 포도대장이 된 이완에게 발탁되어 나라에 쓰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후기 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글만 보아도 취기 가득하여 걸걸한 임형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산중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사슴고기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는 이완과 산적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입맛이 다셔지며 장한 기운이 솟아오른다. 이만하면 삶이 구차스럽지 않다. 머릿속에 가득하던 시름들이 일순 무색해진다. 옛 사람들도 이들의 호기로 고달픈 삶을 달래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전해왔던 것이다.

김종서(1390~1453)가 함경도 절제사 시절 지은 것이다. 잎 다 진 나뭇가지에 북풍이 사정없이 몰아치고 눈 위에 비치는 달빛은 얼음처럼 차갑다. 나라 끝 국경인지라 공기에는 전선의 긴장감이 팽팽하다. 이때 성곽의 장대 위에 장검을 짚고 서서 두만강 너머를 바라보니 온 천하에 거칠 것이 없다.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랴!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조선조 지식인들에게서 절대적 존숭을 받은 주희(朱熹·1130~1200)는 38세이던 1167년 가을 벗 장식(張·1132~1180)을 찾아 장사(長沙)로 여행을 했다. 다섯 달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다. 11월에는 ‘구운몽’의 무대이기도 한 남악 형산(衡山)의 축융봉(祝融峯·해발 1290)에 올랐다. 산 꼭대기에서 탁주 몇 사발을 마시고 호기가 발동 나는 듯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시 한 수를 남겼다.

만리라 먼길 와서 긴 바람에 몸 맡기니我來萬里駕長風
깊은 골 층층 구름 가슴을 씻어주네 絶壑層雲許蕩胸
막걸리 세 사발에 호기가 일어나서 濁酒三杯豪氣發
목청껏 읊조리며 축융봉 날아 내려왔네 朗吟飛下祝融峰

일개 서생이라도 천근의 무게와 만리의 시야를 갖추면 마치 태산처럼 일월과 호흡을 함께 하게 된다. 글만 읽는 일이야 참으로 작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 축융봉을 가슴에 품은 주희가 산에서 내려온 뒤 하산주(下山酒)를 걸렀을 리 없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아마도 이런 면모 때문에 주희를 더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몇 해 전 조선시대 연행로를 답사할 때의 일이다. 요동벌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랜 세월 중국의 북진(北鎭)이었던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올랐다. 홍대용의 ‘의산문답(醫山問答)’이 탄생한 곳이다. 꼭대기에 올라보니 동쪽에는 우리가 달려온 요동벌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는 산의 능선들이 파도치는데 그 너머에는 몽골 초원이 펼쳐져 있다. 남쪽에는 아스라이 발해가 눈에 들어온다. 서쪽은 북경으로 가는 길인데 점점이 산들이 솟아 있다. 구름은 몸을 감싸고 있는데, 손만 뻗으면 하늘을 잡을 수 있을 듯하다. 동서남북과 천지상하를 차례로 돌아보니 절로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 다산의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을 흉내 내 다섯 줄 ‘호기가’를 읊조렸다.

의무려산 꼭대기에 주연을 펼쳐놓고 / 요동벌 발해 신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 미주(美酒) 삼백 잔을 나누어 마신 뒤에 / 호기가 한 곡조를 목 놓아 부른다면 / 그 또한 통쾌하지 아니할까

보통 사람들의 간과 쓸개는 20대 후반부터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해서 50쯤 되면 거의 남는 게 없다. 뜻대로 되는 일은 없고 세상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돌아간다. 눈치 볼 곳은 또 왜 그렇게도 많은지. 너무 작아진 자신을 견딜 수 없으면 주말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굽어보고 한 곡조 호기가를 불러볼 일이다. 초저녁 비감한 심정으로 조촐한 술상을 받았을 때 옛 이야기 속 호걸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술잔을 주고받을 일이다. 문학이 그 삶을 새롭게 하고, 다시 그 삶에서 문학이 태어나리라. 옛 말에 ‘문정상생(文情相生)’이라 했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⑥거울…왜 거기 있는가, 거울속에서 어떤사람이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 어느 날, 불현듯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문득 낯선 존재가 되었다. 누워있던 작은 방은 막막한 바다가 되었고, 나는 뗏목 위에 누워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문득 내 존재가 서러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 없으며, 나의 삶에 대한 주권도 전무하다는 느낌에 빠졌기 때문이다. 나는 가위눌린 듯 한참을 누워있다가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는 어떤 사람(타자)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1960년대 일본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영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앞의 학생부터 차례대로 “I am a Japanese”라는 문장을 읽었다. 자기 차례가 가까워올수록 긴장이 고조되던 한 학생이 있었다.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선생님의 독촉에, 소년은 입안으로 우물거렸다. “저는 일본인이 아니라서….” 이후 소년은 자신을 이산인(離散人, 디아스포라)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나치 지배 아래서 공포와 불안에 떨었던 유대인의 흔적, 영국 통치 시기에 우간다로 이주했다가 뒷날 다시 영국으로 이주한 인도계 여인의 사연, 팔레스타인 지식인의 논문, 중국 옌볜의 조선족 등을 찾아다녔다. 바로 거기에 자신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재일교포 지식인 서경식씨(1951~)의 이야기다.

나는 여전히 가끔 거울 속의 타자에 놀라고, 서씨는 지금도 밖으로 ‘그’를 찾아다니고 있다. 아무리 봐도 낯설기에 고흐(1853~90)는 좋은 거울을 샀고, 40여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비슷한 시기 유럽의 표현주의를 주도했던 제임스 앙소르(1860~1949)와 막스 베크만(1884~1950)은 각각 평생 112점과 80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반대로 우리는 또 서씨처럼 골목길 이주노동자의 불안한 표정에서, 다리 아래로 목을 웅크린 철새의 자세에서, 그리고 불타버려 재만 남은 남대문에서 우리 자신을 만난다. 우리는 거울 속에서 타자를 만나고, 타자에게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성찰하는 자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지만,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거울’만을 이야기하기로 하자.

“나는 누구인가.” 조건과 태생을 따져보고, 살아온 생애를 하나하나 떠올리고,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나’는 점점 더 낯설어진다. 몇 권의 소설을 쓸 수 있고 10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도 모자랄 거 같은 ‘나의 정체’는 의외로 짧은 시구에서 그 면목이 드러난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 서정주· ‘자화상(自畵像)’ 중에서



내 삶의 내력은 ‘애비는 종’과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는 두 구절로 해결되었다. 여기서 ‘종’과 ‘바람’은 상징이며, 그것은 개념어가 담을 수 없는 복잡하면서도 상호 모순적인 의미를 포괄한다. 걸치고 있는 것을 다 벗고 나면 알몸이 남고, 문장에서 형용사와 부사를 빼고 나면 존재(명사)와 행위(동사)만 남는다. 그리고 삶에서 부수적인 것들을 다 덜어내고 나면 비로소 실체가 드러난다. 서정주의 ‘종’과 ‘바람’은 그렇게 다 덜어내고 남은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잉태하기 위하여 / 그는 수많은 풍경을 학살한다(허만하, ‘장미의 가시·언어의 가시’)”고 했다. ‘종’과 ‘바람’은 그렇게 잉태되어 탄생한 것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것이니 어찌 그것이 슬프게 반짝이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서 자신에 대한 애착은 그 애착을 버릴 때 비로소 살아남는다는 패러독스가 성립된다.

자신의 삶과 내면을 대상화한 문학의 유래는 멀고도 오래다. 그중에는 시화일치론(詩畵一致論)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초상화에 짧은 시를 붙이는 특별한 전통도 있다. 김시습(1435~93)은 스스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거기에 이런 시를 붙였다.

이하(李賀) 같은 천재도 내려다보니, 해동(海東)에선 더욱 더 뛰어나구나. 이름 높아 헛되이 기려졌지만, 네 삶에서 만난 자 누구이더냐? 네 모습은 지극히 자그마하고, 네 말은 또 너무도 어리석으니, 의당 너는 네 몸을 두어야 하리, 거칠고 후미진 산골짝 안에.

당나라의 천재 시인 이하(李賀)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후미진 곳에 버려진 존재가 그가 파악한 자신의 모습이다. 김시습은 자화상을 그린 뒤 몇 줄 시를 적어놓고, 그림 속 자신을 보고 이야기를 건네며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남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남다른 자기애 때문이다. 그들은 거울을 보면서 끊임없이 자기 안의 자기를 호출한다.

역관 출신으로 이언진(1740~66)이라는 이가 있었다. 옛 성현의 길을 가지 않고 뒷 세상의 진짜 성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27살 젊은 나이에 죽어가면서 자신이 지은 대부분의 시문을 불살라 없앴다. 둬봐야 보고 이해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너무 오만하여 일찍 죽었다는 평까지 들었다. 하지만 한 시대 그 재주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스승 이용휴는 필부 한 사람의 죽음에도 세상에 사람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애도하였다. 이언진도 자신의 초상화에 짧은 글을 붙였다.



정승 약간 명과, 과거 장원 약간 명. 사람들은 영화롭다 생각하지만, 쯧쯧, 어느 놈의 궁색한 유자(儒者)가, 감히 천고 문형(文衡)을 잡고 있는가!

세상엔 정승도 몇 명 있고, 과거 때마다 배출되는 장원급제자도 여러 명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그들을 영화롭게 여긴다. 하지만 이언진은 혀를 찼다. 뭘 그렇게 뻐기는지, 또 뭘 그렇게 대단하게 보는지, 또 어떤 생각 짧고 솜씨 없는 유자(儒者)가 대제학(文衡) 자리를 차고 있는지. 깊은 물은 말이 없는데 도랑들이 자랑을 다투고, 사자의 그림자 아니 보이는 곳 여우들이 설치는 격이다. 이언진의 눈에 세상은 전도(顚倒) 그 자체이다. 그는 아마도 종종 자신의 초상화를 지긋이 바라보며, 그 눈 속에서 자신을 찾았을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 표현주의를 선도했던 유럽의 화가들은 빈번히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옮겨 담았다. 고통스럽게 삶과 맞섰던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하며 의식 아래 감추어진 무의식의 실상을 잡아 끌어내려고 시도했다. 앞에서 말한 고흐, 앙소르, 베크만 외에 뭉크(1863~1944)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뭉크의 여러 자화상에서 자신의 고통과 죽음과 불안을 읽는다.

이러한 미술 사조와 흐름을 같이하여 우리나라에서도 표제는 그림(自畵像)으로 하되 내용은 시(詩)로 하는 작품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서정주의 ‘자화상’은 1937년에 지어졌다. 굳이 산모퉁이 돌아 인적 없는 외딴 우물을 찾아 남 몰래 조용히 그 안을 들여다보고, 거기 비친 사람을 미워하고 그리워하기를 반복하는 윤동주의 ‘자화상’은 1941년에 탄생했다. 거기에는 자애(自愛)와 자학(自虐)을 반복하는 식민지 지식인 윤동주가 있고, 역시 자신에 대한 신뢰와 불신을 되풀이하는 지금의 ‘나’가 있다.

햇빛이 못 미치는 우물 속 깊은 곳의 물을 퍼올리는 듯, 이러한 시들은 대부분 자기 내면의 심연을 투시하여 강렬하고 단호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보여준다. 1970년대 중반 최승자는 뱀으로 자신을 비유하며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라고 슬프게 말했고, 90년대 이승훈은 “나는 남이다”라며 자신이 어디서든 타자임을 기운 없는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최근 이수익은 자신의 자리에 ‘핏빛 자해(自害)의 울음소리를 내는 종’을 대신 놓았다. 모두 거울에 비친 자신을 그려낸 시의 자화상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루한 소설을 읽을 때, 낯선 인물들의 심리는 마치 내 마음 속을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얼굴박물관에 가면 석상과 목상의 수백 가지 표정이 나도 모르게 내 얼굴로 전이된다. 마찬가지로 나는 김시습에게서 ‘불화(不和)하는 나’를 보고, 이언진에게서 ‘혼자 오만하다가 좌절하는 나’를 만난다. 바람을 맞아 주름이 깊게 팬 얼굴과 남 몰래 우물을 들여다보는 수줍은 마음도 모두 나의 것이 된다. 옛말에 물에 비추지 말고 사람에게 비추라고 했다. 사회의 풍요를 가늠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다채로운 표정과 자세이다. 내가 나의 얼굴을 그리지 않아도 시시각각 나의 모습을 비춰주는 자화상이 많았으면 좋겠다. 말이 넘쳐 피곤한 세상이다. 나도 좋은 거울을 하나 마련해야겠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7)폐허-무너지고 빈 곳에 자유가 있다

10년 전 전주에 간 김에 이웃 고을 김제의 금산사를 찾은 일이 있다. 전각과 불상의 크기가 나를 압도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사람들이 북적거려 산사의 적요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휑한 기분으로 차를 몰아 나오는데, 얼핏 맞은편에 ‘귀신사(歸信寺)’라 적혀있는 초라한 표지판이 보였다. 홀린 듯 차를 잡아 돌렸다. 절집은 허름했다. 작은 건물에는 단청도 입히지 않았고, 지붕 위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두엇 스님이 있었는데 두 줄 띠의 이른바 ‘백수 추리닝’ 차림이었다. 대웅전 문지방 아래에는 꽃잔디가 무리지어 피었는데 모두 땅에 낮게 엎드려 있었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경내의 객은 우리뿐이었다. 도무지 권위라고는 느껴지지 않아 우리는 느긋하게 이 구석 저 구석을 둘러보았다. 마당 한 구석의 흰둥이의 표정도 심드렁했다. 무심코 아이가 들고 있던 과자를 흰둥이에게 주려는데, 문득 적막을 깨고 걸림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자 주지 마쇼, 입맛 버링께!”

돌아보니 아까 그 ‘백수 추리닝’ 차림의 스님인데, 말을 해놓고도 별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난 그만 머쓱해져 흰둥이에게 보시하려던 과자를 내 입으로 넣고 말았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도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 귀신사의 풍경을,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무너질수록/ 존재는 진실해진다/ 폐허만이 자유롭게 숨을 쉰다.” 거기서 얻은 건 자유였다. 모든 것은 무너진다. 온 힘을 다해 떠받치던 것이 무너지는 순간 비로소 자유가 찾아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 내가 왜 멀쩡한 귀신사를 폐허라고 생각했는지, 10년이 지난 오늘도 귀신사를 지나는 바람이 그때처럼 자유로운지는 알지 못하겠다.

며칠 전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 터를 다녀왔다. 일연 스님(1206~1289)이 열네 살에 출가하여 스물두 살 승과에 합격하기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여기 머무는 동안 그는 원효와 의상이 낙산사로 관음보살을 친견하러 온 이야기, 조신(調信)이 불전에서 태수의 딸과 인연을 맺게 해달라고 발원하는 장면, 그리고 견우노인이 수로부인에게 절벽 위의 꽃을 꺾어 바치며 ‘헌화가’를 부른 사연들을 들었고, 이를 뒷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사람도 집도 다 사라진 곳에는, 눈에 둘러싸인 3층 석탑만이 설악산·동해와 묵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은 무심히 이곳을 지나쳐 그 위에 새로 복원한 절집으로 향한다. 탑 위를 오가는 바람은 800년 전 사미승 시절의 일연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일연과 나 사이에는 세월의 간극이 사라진다.


1455년 윤 6월 세조는 단종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았다. 이듬해 비밀모의가 발각되어 사육신이 처형되었다. 더 이상 폭거의 현실을 견디지 못한 청년 김시습(1435~1493)은 1457년 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길을 나섰다. 그의 발길은 개성에서 평양을 거쳐 묘향산으로 이어졌다. 김시습은 왜 하필 평생의 방랑을 이 길에서 시작했을까? 거기에 폐허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과 평양은 고려와 고구려의 옛 도읍지이다. 발에 차이는 게 역사이고 눈에 걸리는 게 묵은 세월이었다. 어느 것 하나 허물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빛이 아니 바랜 것이 없었다. 상처 입은 영혼을 달래주는 데는 황량한 폐허만한 곳이 없다. 그의 눈에 든 개성의 풍경은 이러했다.

정사 보던 궁전 비어 새들만 지저귀고  
決策殿空喧鳥雀 

훈련원 담 무너져 장마비가 줄줄 새네  
動螺墻倒雨霖


봄에 떠난 김시습의 발길은 가을이 되어서야 평양에 이르렀다. 평양의 분위기도 개성과 다르지 않았다. 외려 가을 기운은 고도의 황막감을 더해주었다. ‘금오신화’ 중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송도의 홍생이 평양에서 기자(箕子)의 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능력을 인정받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작품의 시간 배경은 김시습이 송도를 거쳐 평양을 지났던 해인 1457년이다. 주인공 홍생은 바로 1457년 봄 세상과 맞서며 길을 떠났던 스물세 살 청년 김시습 자신이었던 것이다. 작품에서 홍생은 평양을 두고 이렇게 읊조린다.

풍류 넘친 사연들 모두가 먼지 되니  
風流勝事成塵土 

적막한 빈 성에는 납가새만 우거졌네  
寂寞空城蔓 藜


쓸쓸한 가을의 안개 내리는 밤, 폐허 위에서 홍생은 기자의 딸과 술을 마시며 세상 이치를 말할 수 있었다. 자유야말로 폐허가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김시습은 폐허 위에서 비로소 울분으로 갇혀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고,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한숨은 시가 되었고, 그 상상의 나래는 기이한 이야기가 되었다. 1930년대 후반 이태준(1904~?)은 평양을 찾아 대동강 물결의 시체 같은 싸늘한 촉감을 느끼며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 서리를 밟으면 곧 두꺼운 얼음이 언다)’를 탄식한다. 소설 ‘패강랭(浿江冷)’의 내용이다. 이 또한 역사의 폐허에서 한줌의 자유를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김시습의 그것과 상통한다.

모든 존재는 세월이 지나면 동강나고 부스러지고 종국에는 무너지고 만다. 그 위로 바람이 지나고 안개와 비가 내리며 세월이 쌓인다. 동강 난 비석에는 이끼가 끼고, 허물어진 담장 위 아래로 고양이와 족제비가 출입하며, 무너진 집터에는 쑥과 명아주가 자란다. 그중에서도 남다른 감회를 일으키는 곳은 옛 도읍지의 궁궐터와 무너진 성벽, 허물어진 신전(神殿), 그리고 주춧돌과 탑만 덩그러니 남은 절터이다.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빈 자리의 크기는 차지하고 있던 것의 크기에 비례하는 법이다.

부도는 풀에 묻혀 길도 이미 없거늘  
草沒浮屠路已迷 

들판의 농부들은 옛 절터라 전하누나
野人傳道古招提

김생의 비석 글씨 비바람에 닳았는데
金生碑字磨風雨 

애써 이끼 헤치며 옛 글을 찾아보네  
强拂苔痕檢舊題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경주의 옛 분황사 터를 찾아 읊은 것이다. 그는 길도 찾을 수 없는 폐사지를 굳이 찾아, 이끼를 헤쳐가며 비바람에 닳은 비석의 글씨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어보았다. 무너진 절터에서 그가 느낀 것은 자유이고 겸허이다. 몸은 더 낮아진 대신 영혼은 더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귀신사와 진전사 터에서 얻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보르헤스(1899~1986)의 소설 ‘원형의 폐허들’은 꿈꾸는 자에 대한 짧은 이야기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똑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세상에서 주인공 ‘그’는 특별하고도 초자연적인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목표는 꿈속에서 완벽한 인간을 빚어내어 현실에 내놓는 것이다. 이런 ‘그’는 잠자고 꿈꾸기 좋은 곳을 찾아간다. 그곳은 오래전 화재로 폐허가 되어, 이제는 신도 신앙도 사라진 밀림 속의 신전이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가시적인 세계의 가장 최소치였기 때문이었다. - 황병하 옮김

자기만의 꿈을 꾸는 사람이 폐허를 찾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채우고(實) 세우기에(立) 여념이 없지만 현자들은 알고 있다. 무너지고 빈 곳에 자유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불타 없어진 숭례문을 찾아간다. 모든 존재는 무너지는 순간 진실해지며, 터만 남은 빈 공간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숭례문은 비로소 자유를 얻은 것이다. 거대하고 존귀한 것은 우리를 억압하고 가두려 한다. 이에 반해 무너지고 사라져 텅 빈 공간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고 연민을 불러온다. 어루만지고, 들여다보고, 말을 걸게 한다. 사람들이 폐허가 된 숭례문을 찾는 이유는, 이제야 어루만지고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설이지만 숭례문은 폐허가 되고 나서 우리들 마음속에 들어온 것이다.

개인은 모두 죽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개인의 죽음에서 지혜를 배워 자신들의 삶을 영속시켜나간다. 인류가 존속하는 이유이다. 개체는 모두 무너진다. 하지만 그 자리는 자유와 지혜를 주고, 나머지 전체를 건강하게 존속할 수 있게 한다. 폐허가 된 숭례문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 폐허에서, 우리의 전 국토와 미래를 살리는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새 정부의 대운하 계획은 마땅히 취소되어야 한다. 사라지는 것들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결국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문인들은 왜 이 문제에 침묵하고 있는가?

모든 존재는 무너지는 순간 진실해지며, 터만 남은 빈 공간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거대하고 존귀한 것은 우리를 억압하고 가두려 한다. 이에 반해 무너지고 사라져 텅 빈 공간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고 연민을 불러온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8)탄생-어떤 생명의 탄생이가슴 아리지 않고경건하지 않으랴

“축하합니다, 딸입니다! 아기도 산모도 모두 건강합니다.”

분만실 앞 간호사의 말에, 나는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보았는데 자꾸 눈물이 어렸다. 눈물이 흘러 고개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시 한 구절이 기러기 무리가 되어 먼 하늘을 가로질러갔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위해 / 봄부터 솥작새는 / 그렇게 울어나보다. (서정주, ‘국화옆에서’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으레 떠들어댄 시이지만, 솔직히 그런 말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그 멋쩍기만 하던 몇 마디가 첫딸이 태어난 순간 말을 하며 내게 다가온 것이다. 나는 그때 모든 존재는 무수한 곡절을 거쳐 숱한 사연을 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깊은 내력 없는 존재는 없다. 지금 살아 숨쉬는 생명은 예외 없이 지구의 세월만큼 견뎌온 존재들인 것이다. ‘국화옆에서’는 탄생의 비의를 건드린 시이다. 국화를 누님에 비유한 이 시의 세 번째 연은 그렇게 어색할 수 없다. 내 기준에서 이 몇 줄은 떼어버리는 게 옳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다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또 눈물이 났다. 우리 삶이란 강물처럼 이어 흐르고 산맥처럼 이어 달리건만, 앞 물이 뒤의 물을 보지 못하고 저 산과 이 산이 만나지 못하듯 하나의 접점을 공유하지 못함을 생각했다. 어느 무덥던 여름날 옥상에 누워 별빛을 보며 그 별과 나 사이 수백만 광년의 세월 때문에 가슴이 시렸듯, 나를 만든 인연과 이 아이가 만들어갈 인연이 서로 닿지 못하는 것이 서러웠다. 나는 눈물 한 방울을 떨구며, 아주 낮은 마음으로 이 아이가 만들어갈 인연을 위해 기도했다. 새 아이를 맞이하는 기쁨에는 아주 깊은 슬픔이 내재되어 있었다. 나는 눈물로 두 아이를 맞이한 셈이다.

그러고 보니 죽음을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장례식의 공식적인 표정은 애도이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일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가의 분위기는 북적거리고 때로는 흥겹기까지 했다. 풍악을 울렸고 놀이를 베풀었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풍조가 만연하여 논란이 일었을 정도이다. 죽음을 대하는 문학의 입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죽음에 대한 헌사를 빼고 나면 문학사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거기에는 알지 못할 묘한 홀가분함이 있다.

하지만 삶을 맞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탄생을 위한 공식적인 태도는 축하이다. 하지만 실제 그 분위기는 언제나 차분하고 고요하다. 누구라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노래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오랜 기다림과 견디기 힘든 진통이 있다. 피가 흐른다. 새로 태어난 생명의 곁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을 피해간다고 해도 죽음을 떠안고 살아가는 것은 그의 숙명이다. 생명의 탄생에 엄숙함과 비장함이 감도는 것은 이 때문일까? 허만하는 ‘창조하는 정신은 언제나 / 피를 흘린다’(‘創자에 대하여’) 했고, 유하는 ‘글을 쓰는 매순간 내 몸은 / 여성이 된다 으아아아아’(‘Becoming Woman’)라고 했는데, 이는 모두 출산의 아픔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은유이다.

지바고의 가족은 볼셰비키 혁명의 태풍을 피해 우랄 지역으로 몸을 피했다. 그해 겨울 아내 또냐가 임신을 했다. 지바고는 일기를 썼다. 아이를 낳을 때 모든 여성들은 버림받고 난 외로움으로 고독감에 잠긴다. 여성은 혼자서 아이를 낳고, 실존의 한 모퉁이에 요람을 놓기 위해 조용하고 안전한 장소로 옮기고, 말없이 홀로 아기를 키운다. 모든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이기 때문이다. 그의 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주는 마리아의 영광이었다. 모든 여성에게 있어서 신은 그 자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 모든 여성은 위인의 어머니인 것이다 - 훗날 그들을 실망시키는 때가 있더라도 그것이 여성의 죄는 아니다. - 오재국 옮김

새 생명을 낳을 때는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절연된 고독감이 수반된다. 진통 끝에 아이를 낳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말없이 돌본다. 새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여성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어머니는 모두 위대하다. 그가 낳은 자식이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새 생명을 맞이하는 의례는 침묵의 기도이다. 가시적인 물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눈을 감는다. 적막이 흐른다. 마지막 꽃잎 하나가 피려고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에는,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나도 눈을 감는다.(이호우, ‘개화(開花)’) 깊은 산간 마을의 눈 오는 아침에 나이 어린 아내가 첫아들을 낳았다. 캄캄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 외딴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태어난 아이의 외가일 것이다. 뜰의 배나무에서 무심히 짖는 까치 소리는, 외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산촌의 적막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백석은 1936년 아이가 태어난 평안도 깊은 산촌의 풍경을 시로 빚어내며, 그 제목을 ‘적경(寂境)’이라고 했다. 탄생 앞에서는 숨을 죽이는 법이다.

소리가 없어 적막한 것이 아니다. 깊은 산중의 그윽함은 간헐적인 뻐꾸기 울음소리로 더 깊어진다. 새 생명의 탄생에는 대지를 헤치고 나오는 기세와 알을 깨는 소리가 있다. 이 기세와 소리는 생명을 기다리는 경건한 침묵 속에서만 감지할 수 있다. 임부의 배에 귀를 기울이면 서서히 크게 들려오는 태아의 심장박동소리처럼. 이 소리는 그 밖의 세상 모두를 적막하게 한다.

봄비 고와 방울도 지지 않으니, 밤중에도 소리가 아니 들렸네. 눈 녹아 남쪽 시내 불어났거니, 풀싹들이 얼마간 돋아났으리. 春雨細不滴, 夜中微有聲. 雪盡南溪漲, 草芽多少生 - 정몽주, ‘춘흥(春興)’

겨울나무의 혼은 오히려 건조하다. 오리나무 흑갈색 둥치에 시린 귀를 붙이면 물관 속을 흐르는 은빛 물소리가 엷게 깔리는 눈송이 같은 순도로 희박하게 들린다. …… 거꾸로 흐르는 물소리의 설레임. - 허만하, ‘육십령재에서 눈을 만나다’


너무 고와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봄비를 정몽주는 밤새 들었고, 눈 쌓인 육십령재의 오리나무 흑갈색 둥치에서 허만하는 수직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그건 간절하게 기다리고 침묵으로 기도하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생명이 태어나는 소리인 것이다. 스무 살의 양치기 청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와 산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행운을 얻었다. 그때 그는 온갖 정령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나뭇가지나 풀잎이 조금씩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별똥별이 머리 위를 스쳐갈 때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의 소리가 들려왔다. (알퐁스 도데, ‘별’) 이 소리는 모든 생명을 사랑할 때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곰과 범이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환웅은 한 타래 쑥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며 100일 동안 빛을 보지 말라고 했다. 곰은 삼칠일 동안 그 금기를 지키어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곰은 어둠 속에서 견디고 기다린 끝에 사람의 몸을 얻은 것이다. 어떤 생명의 탄생이 그렇지 아니하랴? 유화부인이 방에 있자 햇빛이 따라와 비추었다. 몸을 피하니 또 따라와 비추었다. 그 뒤로 유화부인은 태기가 있어 주몽을 낳았다. 세상 어떤 목숨이 태양의 정령으로 잉태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두 편의 이야기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탄생은 가슴 아린 곡절을 지니며 신성치 아니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3월이다. 남도에는 벌써 매화가 피고 동백꽃이 벌었다. 이제 온 산하에 거뭇거뭇 새 생명이 피어오르고, 새들은 짝을 찾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 벽에 허리를 받치고 다부지게 앉아 손에 물을 묻혀가며 느리게 느리게 왼새끼를 꼰다. 말을 하는 것은 금기이다. 금줄을 만드는 것이다. 참숯과 청솔가지는 마련되어 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둘레에 그 금줄을 칠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삼칠일 문에 금줄을 쳐 나쁜 기운의 침입을 막았듯이, 또 곰이 삼칠일 어둠 속에서 쑥과 마늘을 씹으며 간절하게 기도했던 마음으로. 어떤 것도 이 땅에 새로 태어나는 생명들을 범할 수는 없다.

탄생을 말하려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들뜬다. 창가 화분의 작은 선인장 꽃이 예사롭지 않다. 윤동주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했는데, 나는 오늘 거기에 이렇게 화답한다.

금줄을 치는 마음으로 / 모든 태어나는 것을 기다리노라.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⑩모순-눈물로 깨달은 존재의 진실,어긋남

다함없이 흐르는 산 아래 시내 / 산속의 스님에게 보시를 하네 / 각자 바가지 하나 지니고 와서 / 모두가 온 달빛을 담아 가누나. 無盡山下川, 普供山中侶. 各持一瓢來, 總得全月去.

이태준이 ‘무서록’에서 추사 김정희의 작품으로 소개하며, 염불처럼 자꾸 외고 싶다고 한 시다.(추사의 문집에는 없음) 입에 달고 싶다고 했으니 시에 대한 것으론 최고의 찬사이다. 이 시의 그 무엇이 이태준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1, 2구에서 시내가 수행자들에게 베푸는 것은 물이다. 그런데 4구에서 스님들이 가져가는 것은 달이다. 이 짧은 사이에 미묘한 균열이 있다. 또 물이 목적이라면 한 사람이 큰 물통을 가져오면 될 일인데, 각자 모두 바가지를 가지고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강(千江)에 새겨진 달(불법)을 얻으려 용맹정진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그린 것일까? 이는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을 ‘죽은 공명이 달아나며 중달을 낳았다’고 풀이한 촌학구의 해석이다.

여기서 달은 소망과 염원의 표상이다. 산중 승려들에게도 좀처럼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고,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다. 이들이 밤중에 제각각 바가지를 들고 와서 달을 담아가는 것은, 내면에 감추어진 상처와 그리움을 달래는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니 먹 산수화 같은 시의 풍경에서 삶이 생동한다. ‘시인의 언어는 기대지 않는다’(허만하)고 했다. 김정희는 일일이 말하지 않고도, 수행자의 엄정한 모습 속에 감추어진 인간적 면모를 드러냈다. 이태준이 사랑한 것은 탈속의 청정함과 인간의 번민이 공존하는 풍경이고, 경물만을 그려 마음은 절로 드러나게 한 솜씨이다. 산중 수행자의 번민처럼, 표면과 내면 사이에는 합치되지 않는 틈이 있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사랑하던 여인이 죽었다. 그녀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녀와 함께 했던 공간과 물건들을 견딜 수가 없어 그녀의 묘지를 찾아갔다. 대리석 십자가에는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다 잠들었노라”고 씌어 있었다. 오래 머물고 싶었으나 쫓겨날 것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숨겼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옆 무덤의 대리석 판이 올려지더니 시체 하나가 나타났다. 그 앞 비석에는 “여기 아무개가 쉰한 살의 나이로 잠들다. 벗들을 사랑했고, 정직했다. 선량한 그는 주님의 평화 속에서 잠들었노라”라고 씌어 있었다. 시체는 자기 비석의 글을 읽더니, 작은 돌을 주워 그 글씨를 지우고 새로 썼다.

“ … 유산상속을 바라고 가혹하게 대하여 아버지의 죽음을 재촉했고, 아내에게 고통을 주었다. 아이들을 괴롭혔고, 이웃을 속였고, 틈만 있으면 도둑질을 한 그는 비참하게 죽었노라.”

주위를 돌아보니 모든 무덤들이 열려있고, 시체들이 무덤에서 나와 묘비에 새겨진 거짓말을 지우고 진실을 써넣고 있었다. 나는 그녀 역시 비석에 새로운 문구를 새겨 넣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무덤을 찾아갔다. 내가 조금 전에 읽었던 대리석 십자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어느 날 불륜 관계를 맺으러 나갔다가 비를 맞아 감기에 걸려 죽었노라.” (모파상, ‘고인’, 한용택 옮김)

1735년 1월, 북경을 다녀오던 박문수는 평양을 지나며 역대 감사들의 생사당(生祠堂)과 선정비(善政碑)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보았다. 모두 감사의 선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백성들의 고혈로 세워진 것들이었다. 박문수는 영조에게 진언하기를, 선정비는 모두 대동강에 빠뜨려버리고 생사당의 초상화는 치워버리게 해야 폐단이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영조는 그대로 시행하게 했다. 지금 대동강에는 그때 버려진 비석들이 잠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관행은 그 이후에 더욱 기승을 부렸다. 함경도 무산 땅의 권노인은 의병장 최동욱에게 왜인들을 위한 호닭의 유래를 설명하며 차유령 영마루에 줄지어 서있는 불망비(不忘碑)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비석의 크기는 재임 시의 폭정과 비례한다. 이기영의 ‘두만강’에 나오는 이야기다. 지금 우린 어느 고을에 가도 어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줄지어 서있는 선정비를 볼 수 있다. 나는 그 빗돌들을 볼 때마다 의문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현명한 관리들이 많았는데 왜 나라는 그렇게 망했으며, 이 땅의 백성들은 아직껏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일까? 이 빗돌들은 영광의 표지일까, 아니면 실패의 증거일까? 기록과 실상 사이에는 심각한 허위가 있다.

1930년대 후반,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이비에타는 파시스트들에게 사로잡혀 총살형을 선고받고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지하실에 수감되었다. 이튿날 아침이면 형이 집행될 것이다. 그는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힌 두 사람을 보며, 추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잡았다. 파시스트들은 이비에타에게서 그의 동료가 숨은 곳을 알아내기 위해 교묘하게 압박했다. 이비에타는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일부러 동료의 소재와는 상관없는 곳을 알려주었다. 예상과 달리 이비에타는 총살형을 면했다. 며칠 뒤 그는 자기가 일부러 틀리게 알려준 곳에서 동료가 사로잡혀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동료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은신처를 옮겼는데, 그게 하필 이비에타가 알려준 그곳이었던 것이다. 사르트르(1905~1980)의 소설 ‘벽(壁)’(1939)의 줄거리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모든 것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땅에 주저앉았다. 어찌나 웃었던지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다.” (이환 옮김)

- 황진이


의지와 운명은 이렇게 어긋날 때가 많다. 인생은 생각하면 희극이고 느끼면 비극이란 말이 나온 이유이다.(버나드 쇼) 생각하면 우습지 않은가! 현진건(1900~1943)의 ‘운수좋은 날’과 로맹가리(1914~1980)의 ‘벽(壁)’은 모두 그러한 모순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나 이제 가네.” 정인은 의관을 갖추며 힘들게 엉덩이를 떼었다. 애걸하거나 교태라도 부렸다면 그도 차마 선뜻 문을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황진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게 아니었다. 마음과 달리 말은 그를 선선하게 보내준 것이다. 님이 떠난 뒤 혼자 남은 황진이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처사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 시는 마음과 말 사이에서 길을 잃은 황진이의 탄식인 셈이다. 마음과 말도 서로를 믿지 못한다.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이타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며, 이 다른 요소들은 불일치하는 것은 물론 상호 모순·대립하면서도 동거한다. 나도 세상도 자기 안에 이타성을 지닌 모순의 존재이다. 열등감은 엉뚱한 우월감으로 나타나고, 결과는 노력을 배반하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에게 눈을 부라린다. 고상한 표정은 추악한 욕망을 감추고 있으며, 극약은 독성과 약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인구 숫자가 인구센서스의 발표를 빗겨가듯이, 실상은 언제나 규정을 조롱하며 달아난다. 이러한 불일치와 모순이 존재의 진실이다.

권력은 언제나 그러한 불일치와 모순을 일소하고 어긋남 없는 동일성의 세계를 만들려고 한다. 이를 위해 군대를 앞세웠고, 신을 내세웠으며, 정교한 이론을 만들었다. 태양으로 작은 빛들을 무화시키고, 큰 목소리로 작은 목소리들을 잠재우려 하였다. 불일치를 견디지 못한 권력이 휘두른 전가의 보도는 선택과 통합이다. 그것은 흐트러짐 없는 일사불란한 세계를 기획한다. 하지만 그런 기도가 성공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차이가 없으면 조화가 있을 수 없고, 모순이 없으면 건강한 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 조화와 운동이 없다면 그 결과는 파멸일 뿐이다.

태양이 서산 너머로 침강하면 숨었던 작은 빛들이 나타나고, 사람과 기계 소리에 묻혀있던 풀벌레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문학은 그런 작은 진실들을 주목한다. 때로는 군대를 막아섰고, 때로는 신에게 저항하였으며, 때로는 정교한 이론의 허위를 해체해버렸다. 이를 위해 짓밟힌 이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거대한 신전과 마주 섰으며, 밤을 새워 몇 줄의 글을 고민했다. 문학의 소임은 웅변으로 세상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버려지는 작은 진실들을 살려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립항들 사이의 거리와 편폭이 존재의 깊이와 너비를 결정한다. 그 깊이와 너비를 포기할 수 없기에, 문학의 시선은 언제나 균열과 틈, 불일치와 모순에 머문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것을 온전하게 살려내려 하는 것이다. 함민복은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핀 국화를 보았다. 그 국화는 전생과 내생 사이에 핀 것이다. 하지만 눈물이 메마르면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서지 못하며, 세상의 숱한 경계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꽃’) 불일치와 모순의 사이에 서서 어긋나는 것들 사이의 경계를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눈물, 가슴 아픈 사랑인 것이다. 문학에서 정답은 없다. 세계의 불일치와 모순을 응시하고 드러낼 뿐이다.

나도 세상도 자기 안에 이타성을 지닌 모순의 존재이다. 열등감은 엉뚱한 우월감으로 나타나고, 결과는 노력을 배반한다. 고상한 표정은 추악한 표정을 감추고 있으며, 극약은 독성과 약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와 모순이 존재의 진실이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⑪ 풍류-농염한 달빛에 겨워마음을 읊조리면그대로 한 편의 詩
봄 숲은 흥분되어 있다. 꿈틀거리며 사랑의 행위를 준비하고 있다. 볕은 대지를 유혹하고 바람은 부드러이 나무들을 어루만진다. 새들의 소리에서는 구애의 관능이 묻어나온다. 바야흐로 짝짓기의 계절이고 바람나는 시절이다. 숲을 걷다보면 묘한 눈짓을 받는 느낌에 순간 당황하기도 한다. 봄 숲에서 에로틱한 풍정을 느낌은 옛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정극인(1401~1481)은 보슬비 내리는 봄 풍경을 바라보다가, 수풀에서 오는 새 소리에서 교태를 느꼈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春氣)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嬌態)로다 / 물아일체(物我一體)어니 흥(興)이야 다를소냐.”(‘상춘곡’)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을 나선다. 새 봄 맞아 “호연(胡燕, 명매기) 비조(翡鳥, 물총새) 뭇 새들은 농초화답(弄草和答) 짝을 지어 쌍거쌍래 (雙去雙來) 날아들어 온갖 춘정(春情) 다투었다.”(‘열녀춘향수절가’)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도 그 관능적인 느낌에 사로잡혀 광한루로 행차한다.

1년 내내 집안에 갇혀 온갖 가사에 시달리던 아낙들이 술과 음식 장만하고 벗님들 불러모아 화전놀이를 가던 때도 바로 이 시절, 청명(淸明) 무렵이었다. 그들은 꽃지짐 몇 처럼으로 봄기운을 삼켜 규중에서 썩은 간장을 씻어내었다. 그리고 높이 올라 홍진 세상 굽어보았고, 호탕해진 심신으로 또 힘겨운 일상을 버텨내곤 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밑줄을 그어가며 ‘상춘곡’을 공부했지만, 이 노래의 가락이 내 몸에서 되살아난 것은, 문학을 공부하고도 한참 세월을 보낸 뒤였다. 오갖 신고 속에서 나름대로 일 점 여유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쓰던 어느 봄날 ‘상춘곡’은 나의 노래가 되었다.

갓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노코 /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 화풍(和風)이 건닷 부러 녹수(綠水) 건너오니 /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밑줄 칠 이유도, 분석할 필요도 없다. 흥얼흥얼 읊조리기만 하면 원문 그대로 내 몸의 가락이 된다. 이 맛은 삶의 애환이 몸에서 숙성되고, 가끔은 시간보다 더디게 걷는 여유를 지닌 이라면 누구나 맛볼 수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평생 전국을 떠돌며 시문을 짓고 깊은 산중에 은거하며 독서로 세월을 보낸 사람이다. 1705년 섣달 스무날 밤, 그는 이운(李澐)이란 제자와 함께 묘적암(妙寂庵,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을 방문했다. 마침 날도 몹시 춥고 눈까지 내리려 하여 제자는 나들이를 그만두자고 하였다. 삼연은 흥을 깬다며 크게 꾸짖고는 혼자 걸어 나섰다. 제자는 할 수 없이 좇아 나섰다. 계곡에 들어서자 함박눈이 쏟아져 땅에 한 자나 쌓였다. 제자는 소매로 갓에 쌓인 눈을 연신 털면서 가다가 돌아보니, 스승은 온몸에 눈을 뒤집어쓰고 갓은 눌려 찌그러질 정도였지만 끝내 한 번도 털지 않았다. 제자는 그날 스승의 모습을 두고 마치 유리광여래가 세상에 나온 듯하다고 했다. 김창흡도 이날의 느낌을 ‘눈 속에 묘적암을 찾아 雪中訪妙寂菴’란 시에서 이렇게 남겨놓았다.

큰 눈도 이는 흥취 막지 못하니 / 신명이 먼저 일어 길을 나서네. 大雪莫禁興, 超超神欲行.

1768년 겨울 어느 날 밤 한양 종로, 희미한 달빛이 어스름했다. 청년 박제가(1750~1805)는 생각했다. ‘이러한 때 벗을 찾지 않으면 벗은 있어 무엇에 쓰겠는가?’ 그는 돈 10전을 움켜쥐고, 가슴엔 ‘이소경(離騷經)’을 품은 뒤, 원각사 탑 북쪽에 있는 유금(柳琴, 1741~1788)의 집 문을 두드려 막걸리를 사 마셨다. 유금은 두 딸의 재롱을 보고 있다가, 박제가를 맞이하여 해금을 탔다. 잠시 후 눈이 내려 뜰에 가득 쌓였다. 흥이 다하지 않은 박제가가 시를 지어 제안했다.

올 적에는 달빛이 희미했는데 / 취중에 눈은 깊이 쌓였네 / 이러한 때 벗이 있지 않으면 /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 나는 ‘이소’ 지녔으니 / 그대는 해금 끼고 / 한밤중에 문을 나서 / 이자(李子)를 찾아가세. 來時月陰, 醉中雪深. 不有友生, 將何以堪. 我有離騷, 子挾琴, 夜半出門, 于李子尋.

이자(李子)은 역시 근처에 살던 이덕무(1741~1793)를 가리킨다. 이들은 이덕무의 집을 찾아가 또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해금을 켜고 놀다가 잠시 눈을 붙였다. 유금은 이 날의 광경을 이렇게 그려냈다.

손님은 ‘이소경’을 품에 지니고 / 눈 오는 한밤중에 나를 찾았네 / 불평한 그대 마음 나는 아노니 / 광릉산(廣陵散) 한 곡조를 연주하노라. 客持離騷經, 訪我雪夜半. 知君不平心, 一彈廣陵散.

이들이 넘치고 남아 밤 늦도록 술 마시고 돌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모두 서얼이었다. 식견과 포부는 세상을 덮었지만, 발 디딜 땅은 사방 몇 자에 지나지 않았다. ‘불평한 마음’이란 그것을 말함이다. ‘광릉산’은 이름만 전해지는 전설의 곡조이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광릉산’ 곡조를 연주하며, 세상으로부터 외면받은 자신들의 처지와 심정을 위로했던 것이다.

1798년 정약용(1762~1836)을 비롯한 열다섯 사람이 뜻을 모아 시사(詩社)를 만들었다. 참여하는 사람의 나이는 정약용보다 네 살이 많거나 적은 것으로 한정했다. 뜻이 모아진 다음에는 규약을 만들었는데, 그중 모임의 날짜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면 서지(西池)의 연꽃을 구경하기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며, 한해가 저물 무렵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면 한 번 모인다. ‘죽란시사첩서(竹蘭詩社帖序)’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마음의 리듬을 맞추는 것이 풍류다. 한 자락 자유만 있다면, 스치는 봄바람에서도 풍류를 지어낼 수 있다. 때론 가난하고, 때론 고달프다 해도 풍류를 잃지 않음은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이 글을 보고 있으면 먹을 게 없어도 입맛이 다셔진다. 사람들은 나며들며 살구나무에 꽃이 언제 피나 살폈을 것이고, 겨울이 오면 하늘을 보며 눈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시흥은 이미 가슴에 가득해졌으니, 몇 글자 시야 짓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보다 200년 전 김육(1580~1658)은 술벗을 청하며 이렇게 읊조렸다.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해옴세 / 백년 덧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자 하노라.” 언제 어디에서 만날지는 그 다음에 상의할 문제이다. 이만한 여유라면 문학은 부르지 않아도 오게 마련이다.

큰집에서 밤을 이어 잔치가 벌어져도 / 부귀할 때의 맛은 쉬이 사라지는 법이라네 / 어찌 눈 내린 깊은 겨울밤 산사에서 / 한가로이 나무 등걸 태워 술 데움만 하리오. 華堂煥室宴連宵 富貴中間味易銷 何似山齋深夜雪 閑燒暖寒.

이규보(1168~1241)의 시, ‘겨울밤 산사에서의 한 잔 冬夜山寺小酌’이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술을 데운다. 아름다운 풍경과 따스한 분위기를 천천히 음미하려는 것이다. 이 밤을 어서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최근 몇몇 술자리에서 폭탄주 세례를 받았다. 예외 없이 대취하여 정신을 못 차렸다. 투자 대비 소득 효과로 보면 최고의 경제성을 지닌 셈이다. 사람들은 묵묵히 마시다가 자기도 모르게 쓰러져 자고, 헤어지고, 그리고 다음날이면 굳이 어제를 기억하지 않는다. 폭탄주를 마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빨리 취해 어색한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고, 해가 가고 달이 뜨는 느린 시간을 앞질러 가고 싶기 때문이다. 폭탄주 술문화에는 명확하게 경제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속도와 계산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풍류는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일 점 여유가 웃음을 자아내듯, 한 자락 자유가 풍류를 지어낸다. 풍류란 마음의 작용을 불어가는 대로[風] 흘러가는 대로[流] 맡겨두는 것이고, 바람과 시내의 속도에 마음의 리듬을 맞추는 것이다. 풍월(風月)이라고 할 때는 바람과 달의 속도에 삶의 보조를 맞추는 것을 뜻한다. 달이 돋아오는 속도에 맞춰, “솔불 혀지마라 어졔 진 달 도다온다 / 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여라”(한석봉)라고 말하는 것을 이름이다.

한 잔의 소주에도 풍류가 있다. 남의 자유와 희망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한 자락 풍류이다. 때로 가난하고, 고달프다 해도 말이다. 풍류를 잃지 않음은 자기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이렇게 바꿔 부른다.

가난하다고 해서 풍류를 모르겠는가 / 말없이 달이 뜨길 기다리면서 / 목젖 타고 흐르는 소주의 소리를 듣는 / 한 자락 풍류를 어찌 버리겠는가.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⑫ 불안-홀로 선다면그대 불안하리라 그러나 자유로우리라

소설가 현은 10년 만에 평양을 찾았다. 평양성과 부벽루(浮碧樓), 연광정(鍊光亭)과 청류벽, 그리고 대동강이 우직한 순정으로 맞아주었다. 평양 거리에는 머릿수건 한 여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그 악센트 명랑한 사투리와 함께 ‘피양내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인 머릿수건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현은 폐허가 주는 서글픔에 사로잡혔다. 친구들을 만나 대동강변 동일관에 가서 술을 마셨다. 현은 장구 장단과 ‘방아타령’이 좋은데, 친구 김은 유성기와 댄스를 고집했다. 가뜩이나 불편한 심사가 누적되어 있는데, 친구 김은 현에게 세상에 잘 팔리는 글이나 쓰라며 핀잔을 주었다. 현은 기어이 상을 뒤집어엎고 강가에 나가 물결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 ….” ‘주역’에 있는 말이 생각난다.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어름이 올 것을 각오하란 말이다. 현은 술이 확 깨여진다. 저고리를 여미나 찬 기운은 품 속에 사모친다. “이상견빙지 … 이상견빙지 ….”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 - 이태준‘패강랭(浿江冷)’(1938)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1930년대 후반, 세상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에 대한 수탈은 더욱 가혹해졌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문화는 하나하나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소설가는 이러한 정세 변화에 민감했고, 그럴수록 마음은 불안했다. 시대 변화를 감지하고 격분해도 그는 무력하기만 했다. 이제 곧 두꺼운 얼음이 얼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선 땅에 암운이 드리워진다고 생각하니, 술이 확 깨었다. 이 소설의 뿌리에는, 시체처럼 차가운 정세를 감지한 이태준의 불안이 놓여있다.

기원전 222년쯤 가을,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일행은 흰 옷과 흰 갓 차림으로 역수(易水·지금의 북경 서남쪽) 가에 모였다. 진시황을 암살하러 떠나는 형가(荊軻)를 전송하는 자리였다. 형가는 친구의 축(筑)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는 역수를 건너 떠나갔는데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후 형가는 자기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죽음의 길을 떠나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인물로 기억되었다. 그가 부른 ‘역수가(易水歌)’는 천고의 비장한 노래가 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자객열전’의 내용이다.

사람들은 그를 신념의 화신, 비범한 인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이는 박지원의 말처럼, 사마천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고, 부엌 바닥에서 숟가락을 주워들고 ‘심봤다’고 외치는 격이다. 사마천은 이 사건의 앞뒤에,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 주도면밀하지 못한 일 처리, 결행 앞의 머뭇거림, 거사 실패 뒤 의뢰인의 신분을 노출하는 장면 등을 배치하였다. 떠나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음은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진실을 직언했다가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의 형벌을 받은 사마천은, 신념을 위해 결연하게 죽음의 길을 떠나가는 인물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장면의 구성만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마음을 얻었다면, 우리는 형가에게서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불안에 가득 찬 떨림을 감지할 수 있다.

외지에서 온 도시의 고독자 처용은 아내의 외도를 목격했다. 아내와 역신의 동침은, 역병에 걸린 아내를 은유한다. 그는 넘어서기 어려운 거대한 운명 앞에 선 것이다. 당시 역병은 인간으로선 불가항력이었다. 아내는 죽을 운명에 처한 것이다. 처용은 절박한 마음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아내의 병을 고치려고 했다. 처용 이야기는 거대한 운명 앞에 선 작은 인간의 무력감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염원과 절규를 담고 있다. 그의 아내는 죽었고, 대신 처용의 염원과 절규는 주술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이후 처용의 이야기는 종교로, 무용으로, 문학으로 거듭나기를 반복했다.

그로부터 1000여년이 흐른 뒤, 김춘수(1922~2004)의 ‘처용단장(處容斷章)’은 이렇게 시작한다.

바다가 왼종일 /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 이따금 /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무의미 시’ 운운하며 처용과는 관련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어림없는 말이다. 세상에 의미 없는 말이 어디 있을까, 알아내지 못할 뿐이다. 내가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본다. 바다의 눈은 어둠 속에서 몰래 응시하는 생쥐의 눈이다. 나는 그 넓은 바다에 의해서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가늘게 몸을 흔드는 느릅나무 잎들은 나의 마음이다. 남의 시선을 느끼며 떨고 있음은 바로 불안의 표지이다. 병든 아내 앞에서 절감한 처용의 무력감은, 1000여년 뒤 세상과 대면한 시인의 불안으로 바뀐 것이다.

근대 이후 문학작품에서 나를 향하는 타자의 시선은 불안 형성의 조건으로 자주 등장한다. 남편 몰래 정부를 만나고 나오던 이레네는, 정부의 전 애인이었다는 여인에게 협박을 당한다. 그날 이후 이레네는 그 여인의 경멸에 가득 찬 시선과,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듯한 남편의 차가운 시선을 떨쳐내지 못한다. 강박감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자살을 결심한다. 슈테판 츠바이크(1891~1942)가 지은 ‘아내의 불안’의 줄거리다. 루쉰(1881~1936)이 지은 ‘광인일기(狂人日記)’의 주인공도 남들의 시선 때문에 극심한 불안을 체험한다. 개도 자신을 노려보고, 노인의 눈길도 이상하고, 아이들의 시선도 심상치 않다. 그는 결국 미치고 만다. 현대인들에게 불안은 타인의 시선으로 밀려온다.

신의 뜻과 사회의 법을 모두 외면한 23세의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만의 의지와 판단대로 살인을 단행한다. 살인 후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고심하는 가운데 지쳐간다. 비극을 직감한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오지만, 물어보지는 못하고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린다. 소냐의 권유로 자수를 결심한 라스콜리니코프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찾아가 뜨거운 사랑을 고백한다.

“어머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저에 대한 어떤 소문이 들리더라도, 다른 사람이 어머니께 저에 관해 어떤 얘길 하더라도, 지금처럼 변함없이 절 사랑해주시겠습니까?” - ‘죄와 벌’(장실 옮김)

각자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소진되어가던 모자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언제가 이 장면에서 책장은 더 이상 넘겨지지 않았고, 내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 적이 있었다. 아들은 자기가 저지른 일을 말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서로는 알고 있다. 어머니는 아들의 고통을, 아들은 어머니의 두려움을. 어머니는 아들 생각에 마음이 아플 뿐이고, 아들도 어머니가 걱정될 뿐이다. 어떤 어머니와 자식의 사이가 그렇지 않을까.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다 불안하다. 형가처럼 우리는 낯선 상황에 직면해서 불안하고, 죽음과 병 때문에 불안하다. 모든 현상은 변화와 운동을 내포하고 있으니, 미묘한 파장, 섬광 같은 떨림,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은 불안하다. 식민지 백성 이태준이 그랬고, 나치즘의 광풍이 일던 1940년대 초반 유럽에 절망하여 자살한 츠바이크도 그런 경우이다. 신의 품을 외면하고 세상에 홀로서기를 시도한 사람들은 개성과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수반되는 고독과 불안도 함께 떠안아야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루쉰, 김춘수의 불안은 힘들게 얻은 자유의 대가이고, 또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진짜 삼우(三友)는 불안과 불면 그리고 우울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나무 한 그루 서있는 시골길에 서서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린다. 이들은 내일을 담보로 오늘을 버틸 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지껄이며 고도를 환기한다. 이들이 계속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 말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사뮈엘 베케트(1906~89),‘고도를 기다리며’(1952)) 불안하기 때문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걸며, 글을 쓴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50년째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언제 올지도,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은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다.

“아빠, 이거 되게 재밌어.”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불쑥 말했다. “이거 있잖아, 몽상가 … 불안 ….” 내 방 문에는 후배의 시 ‘몽상가 K씨의 불안-정신병원’이 붙어 있었다. 그게 뭐가 재미있냐고 묻자, 아이는 도리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재밌잖아”하고 말끝을 높인다. 아이가 재미있다고 한 부분은, “내 머리 속에 애벌레가 득실거려요 / 나비가 아니라 날개 가진 도마뱀이 되려고 해요” 같이 은유가 살아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내 시선은 자꾸 “누군가 내 머리 속을 들여다보고 있어요”라든가, “문을 열 수가 없어요”와 같은 구절에 가서 머문다. 나는 후배의 불안을 ‘질병의 징후’로 보았음에 반해, 아이는 ‘생동(生動)의 표지’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이는 내게 불안은 질병이 아님을 가르쳐 준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불안하며, 그 불안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관습과 상투성, 상식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석 같은 안정감을 견디지 못하고, 의심하고 돌아보며 길을 떠난다. 불안을 통해서만 생동하는 삶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불안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친근한 존재로 소개해준다. 사이좋게 지내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다 불안하다. 모든 현상은 변화와 운동을 내포하고 있으니, 미묘한 파장, 섬광같은 떨림,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은 불안하다. 그러나 그 불안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⑬ 광기-광인의 시선 빌려 세상의 허위·모순 날카롭게 드러내다

명료함의 유혹이 있다. 모든 건 명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이 있다. 모든 문제에는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나의 앎과 믿음에 종속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총명함이 있다. 명료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시비를 가르고 쾌도난마로 상황을 정리한다. 겸허함을 잃은 지식과 신념은 반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은 그 명료함을 견디지 못한다. 돌아보지 않는 지식과 신념은 언제나 폭력과 독단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문학에 있어 세상은 늘 흐릿하고 불확실하다.

기차역으로부터 200㎞나 떨어진 한적한 시골마을에 병원이 있다. 이 병원의 6호실은 정신병자 다섯 명이 갇혀있는 특수 병동이다. 6호실의 수위 니키타는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질서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려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을 들먹이며 환자를 착취하고 구타한다. 6호실에는 지식이 해박하고 신경이 예민한 이반 드미트리치가 갇혀 있다. 병원장은 지독한 독서광으로 철학을 사랑하는 허무주의자 안드레이 예피무이치이다.

안드레이는 6호실의 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매일 6호실을 찾아 이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반은 주장한다. 의사들이 미치광이와 정상적인 사람을 구별하지 못해, 불행한 몇몇 사람들만이 속죄양으로 병실에 들어와 있다고. 안드레이는 대답한다. 감옥이나 정신병원이 존재하는 이상 누군가는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두 사람은 정상인과 미치광이 사이에는 근원적인 구분이 없으며, 불합리한 제도와 불온한 의도가 억지로 두 부류 사이를 가르는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안드레이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총명한 대화 상대자를 찾은 것이 기뻤다. 의사와 정신병자는 대화하고 교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차츰 안드레이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안드레이는 강직함 때문에 고을 유력 인사들에게서 미움까지 사 곧 병원장 자리를 잃었다. 새로 부임한 의사는 안드레이를 정중하게 초대하여 6호실에 가두었다. 안드레이는 처사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돌아온 것은 니키타의 무자비한 폭력뿐이었다. 물빛 같은 달빛이 쇠창살을 뚫고 들어와 방바닥 위에 그물 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안드레이는 공포를 느끼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몇 년 동안을 매일같이 이와 똑같은 아픔을 맛보지 않으면 안됐다는 무섭고 참을 수 없는 생각이 똑똑히 떠올랐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기가 그걸 몰랐을 뿐 아니라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몰랐다. 고통에 대한 관념조차 없었다.

- 체홉, ‘6호실’(1892) | 동완 옮김

안드레이는 격한 분노에 사로잡혔지만 침대 위에 쓰러져 이튿날 죽고 만다. 이 이야기는 정상인 사람이 미치광이로 취급되어 정신병동에 갇히게 되는 경로와 함께, 정상/비정상의 구분에 작용하는 계략과 폭력을 섬뜩하리만치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안드레이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지식인들은 ‘앎’의 비도덕성을, 어제의 상관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니키타는 부도덕한 ‘앎’이 야기하는 잔혹한 폭력을 상징한다. 젊은 시절 레닌은 이 글을 읽다가, 자기가 6호실에 갇힌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중행(中行)의 선비를 얻어 더불어 하지 못하면, 반드시 광견과 함께할 것이다. 광자(狂者)는 진취적이며 견자는 근실하다. - ‘논어’

공자의 말이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광(狂)’은 ‘뜻이 너무 높고 커 행동이 받쳐주지 못함’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의 뜻을 좇아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 세상의 허위와 모순을 용납할 수 없고 더더욱 그 논리에 용납될 수 없을 때, 지적·도덕적 우월성과 현실적·사회적 미약함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광사(狂士)가 탄생했다. 공자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광사(狂士) 또는 광객(狂客)을 자처했다. 광사나 광객을 자처함은 거대하고 완강한 세계에 맞서 자존심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 팽팽한 대결 가운데서 언제나 시대의 고민을 담은 문학이 태어났다.

광사의 사유와 행동은 인습을 타파하고 부조리를 파헤치는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홍우교(洪禹敎)는 18세기의 광사(狂士)였다. 술을 잘 마셨는데, 술 마신 뒤에는 반드시 통곡하며 ‘조여식(趙汝式), 조여식’ 하고 크게 부르짖었다. 여식은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자이다. 밥을 많이 먹어 배가 불룩한 사람을 보면 혀를 차며 말했다. “선비가 밥을 많이 먹으면 그 집은 반드시 망하니, 그들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어도 반드시 ‘너’라고 호칭하며 이름을 불렀다.

이덕무(1741~1793)가 지은 홍우교 이야기다. 홍우교의 행동은 격식을 파괴한다. 통곡하며 조헌을 찾은 것은 세상에 그만한 인물이 없음에 절망한 때문이고, 배 나온 선비를 보며 혀를 찬 것은 그들의 무위도식을 조롱한 것이다. 고관대작의 이름을 막 부름은 그들의 무능을 욕보인 것이다. 통념을 따르지 않고 지배층의 거짓을 까발려 놓는 행동을 사람들은 ‘광(狂)’이라 했고, 이덕무는 자칫 사라질 그의 이야기를 조촐하게나마 엮어놓았다. 당대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뒷사람들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건 바로 그들의 목소리이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낙타에서 사자를 거쳐 아이가 되는 정신의 세 단계 변화를 말한 적이 있다. 자부심을 억누르기 위해 머리를 숙이는 것은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는 낙타의 단계이다. 그런데 낙타는 사막에 이르면 사자가 된다. 사막에서는 무시무시한 용이 나타나 당위에 따를 것을 강요한다. 이에 정신은 사자가 되어 “나는 원한다”고 말하며 용에 맞선다. 새로운 가치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건 억세고 경건한 정신의 무서운 약탈이다. 자유를 약탈하기 위해서는 가장 신성한 것 속에서 광란과 방종을 찾아내야만 한다. 창조하기 위해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 바로 사자의 단계이다. ‘광(狂)’은 그런 정신이다.

광사(狂士)들이란 묵은 규범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유를 찾으려 했던 역사의 사자들인 셈이다. 하지만 광사와 미치광이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작은 시내에 고래를 가져다 놓으면 몸부림치다가 죽는 것처럼, 편협한 사회에 놓인 호걸의 처지도 마찬가지이다. 용납되지 못하고 소통이 차단되어 있는 식견과 경륜은 썩다 못해 기이한 형태로 굴절되어 표출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그건 광증(狂症)의 징표가 되어 세인들의 비난을 받는다. 말이나 그럴듯하게 하고 낯빛이나 꾸미는 속유(俗儒)들은 언제나 광사(狂士)와 광인을 구분하지 못하여 끝내 호걸 현사들의 삶을 누추하게 만든다고, 조성기(趙聖期, 1637~1689)는 분통을 터뜨렸다. 조성기의 울분은 안드레이의 그것과 본질상 다르지 않고, 아래 시에 보이는 임제(林悌, 1549~1587)의 심정과도 통한다.

말을 하면 세인들 미쳤다고 하고 出言世謂狂
입 다물면 세인들 바보라 하네 緘口世云癡

나의 눈으로는 나를 볼 수가 없고,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한다. 나는 남의 시선을 빌려야 나를 볼 수 있고, 물고기는 물을 떠나야 물을 볼 수 있다. 오만한 이성과 신념으로 가득찬 세상의 허위는, 그 이성과 신념의 건너편에서만 볼 수 있는 법이다. 안드레이가 6호실 안에서 보았을 때 그 밖은 모두 비정상이다. 홍우교의 관점에서 세상에 제대로 된 선비는 하나도 없었다. 임제는 당시 미치광이 아니면 바보로 몰렸지만 오늘 우리는 임제의 눈으로 그 시대를 본다. 돈키호테는 편력기사를 꿈꾸는 과대망상증 환자인가, 아니면 온 몸으로 시대의 모순을 통렬하게 보여주는 광사인가?

3·1 운동 이후 극도의 무력감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은 평양 남포에서 만난 광인 김창억을 통해 자유와 해탈을 강하게 느꼈다.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 이를 비웃는 동료들은 알지 못한다. 식민지에서 누리는 권리와 자유와 인식은 모두 가짜라는 사실을. 현실에서 질식하며 광인과 교감하는 그가 정상인가, 빼앗긴 들에서 술 취해 겨우 광인이나 조롱하는 그의 친구들이 정상인가?

루쉰(1881~1936)은 ‘광인일기(狂人日記)’(1918)에서 광인의 시선으로 역사의 허위를 일거에 드러냈다. 나는 친구를 통해 광인의 며칠 일기를 엿본다. 일기의 주인공은 역사책에서 ‘인의도덕(仁義道德)’과 ‘식인(食人)’이라는 글자만을 조합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강박증에 사로잡힌다. 이는 지난 중국의 4000년이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이름으로 자행해온 잔혹한 식인(食人)의 역사임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 강도가 죽인 사람이 많은가, 아니면 인의도덕이 죽인 사람이 많은가?

문학은 광인(狂人)의 시선으로 세상을 통찰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왔다. 어떤 이는 스스로 미쳐 격렬하게 세상과 맞서며 천지에 가득한 통곡을 터뜨렸다. 아니면 세상과 무모하게 대결하는 광사(狂士)에 공명했고, 사람들의 조롱 속에 광인(狂人)의 말을 경청했으며, 광자의 시선을 빌려 세상의 허위를 날카롭게 드러내기도 했다. 광인의 번뜩이는 눈빛과 몇 마디 중얼거림으로 세상의 명료한 질서는 일순 허위와 가식의 혼돈으로 바뀐다. 그러니 기지(旣知)의 명료함은 문학의 천적인 것이다.

뜻이 높고 커서 부조리한 세상을 용납하지 못한다. 식견과 경륜은 소통되지 못하고 썩다 못해 기이한 형태로 표출된다. 스스로 미쳐 격렬하게 세상과 맞서며 통곡을 터뜨린다. 그 팽팽한 대결 가운데시대의 고민을 담은 문학이 태어나고 …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⑭ 해학-마음의 상처 다독이며 삶을 구원하는 웃음의 미학

박공습은 빈한해도 술을 좋아했다. 하루는 손님이 왔는데 술이 없어 영통사에 사람을 보냈다. 영통사 승려는 두루미에 시냇물을 가득 담아 마개를 단단히 하여 보냈다. 박공습은 돈 한 푼 안 들이고 두 말 미주를 얻었다며 기뻐했다. 마개를 열어보니 물이었다. 박공습은 크게 웃고는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손님이 왔는데 / 주머니엔 무일푼이라 / 여악(廬岳)의 술을 얻으려다 / 허랑히 혜산(惠山)의 샘물만 얻었으니 / 범처럼 생긴 숲속 바위요 / 벽 위의 활이 만든 뱀 그림자라 / 푸줏간 앞만 지나도 크게 입맛 다시거늘 / 하물며 술잔을 앞에 두었음에랴.

여악(廬岳)은 고승 혜원(慧遠)이 도연명 등 산 밖의 벗들이 찾아오면 술을 대접했다는 산이고 혜산(惠山)은 차를 달이기에 가장 좋다는 물이 있는 곳이다. 한나라 장수 이광(李廣)은 사냥을 하다 바위를 범으로 알고 활을 힘껏 쏜 적이 있으며, 진나라 때 악광(樂廣)을 찾아온 손님은 술잔 속에 비친 활 그림자를 뱀으로 착각하고 마신 뒤 배앓이를 하였다. 모두 두루미 속 가짜 술을 일컬은 것이다. 괘씸한 심정을 숨긴 채 천연덕스럽게 옛 사연을 늘어놓은 뒤, 빈 술잔을 앞에 두고 입맛만 다시고 있노라고 했다. 영통사 승려는 빙그레 웃고는 좋은 술을 가득 담아 보내주었다.(‘파한집’) 이럴 때 술은 그냥 술이 아니다.

선조 때 이옥봉은 서녀였는데 총기가 넘쳤다. 하루는 이웃 아낙이 찾아왔다. 남편이 소도둑으로 몰려 관아에 갇혔다는 것이다. 옥봉은 대신 소장을 써주었는데, 그 말미에 두 구절을 붙였다.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니온대 /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리오.(妾身非織女, 郎豈是牽牛.)” 그 수령은 남편을 풀어주었다.(‘지봉유설’) 꾸며낸 말이겠지만, 세상의 각박함이 덜어지는 느낌이다.

북경에 사신 갔던 문사가 하루는 수레를 타고 가는 미인을 보았다. 문에 기대 넋을 놓고 바라보던 그는 문득 필묵을 찾아 두 구절 시를 적어 보냈다. “마음은 미인을 따라 나서고 / 몸만 덩그러니 문에 기댔네.(心逐紅粧去, 身空獨倚門.)” 그 미인은 수레를 세우고는 그 자리에서 답시를 지어 주었다. “수레 무겁다 나귀 성을 내더니 / 한 사람 넋이 더 탔던 거군요.(驢嗔車載重, 却添一人魂.)”(‘어우야담’) 인생이 즐거워진다.

유희춘(1513~1577)과 송덕봉(1521~1578) 부부는 오랜 벗처럼 사이가 좋았다. 1569년 겨울의 일이다. 유희춘이 승지로 있으면서 엿새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모주(母酒) 한 동이를 아내에게 보내며 시 한 수를 덧붙였다.

눈 내려 바람 더욱 차니 / 냉방의 당신 모습 생각났다오 / 이 술이 품질은 변변찮으나 / 찬 속을 덥히기는 충분하리다.(雪下風增冷, 思君坐冷房. 此료雖品下, 亦足煖寒腸.)

송덕봉도 남편에게 답시를 보냈다.

국화잎에 눈발이 날린다 해도 / 은대에는 따스한 방이 있으리 / 추운 집서 따스한 술을 받들어 / 고맙게도 뱃속을 채웠답니다. (菊葉雖飛雪, 銀臺有煖房. 寒堂溫酒受, 多謝感充腸.)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대궐 숙직 중 생긴 술 단지 하나를 아내 몫으로 챙겨 시와 함께 보내준 남편과, 그 술을 마시고는 그 자리에서 사람을 세워놓고 몇 줄 시를 엮어 보내는 아내.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스한 배려가 없이는 지어지기 어려운 풍경이다. 술을 보낸 유희춘의 마음도, 술을 마신 송덕봉의 마음도, 이 풍경을 상상하는 나의 마음도 흐뭇하다.

프로이트는 두 종류의 농담을 구별했다. 하나는 속이고 놀리는 목적을 지니며, 때리고 벗기는 공격과 파괴의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농담과 웃음은 자주 상처를 남긴다. “낚시질은 한가한 일이지만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으며, 바둑은 맑은 놀이지만 전쟁의 마음이 꿈틀댄다.(釣水逸事也, 尙持生殺之柄, 奕棋淸戱也, 且動戰爭之心.)”는 ‘채근담’의 구절처럼 말이다. 한때 유행했던 참새와 식인종 시리즈에서는 살해와 식인이 놀이처럼 자행된다. 사람들은 웃으면서 잔인한 폭력을 내면화했던 것이다. 폭압이 사람들을 짓누르던 시절의 일이다.

다른 하나는 순진하여 무해한 농담인데, 이것이 바로 해학(諧謔)이다. ‘해(諧)’는 어우르다, 어울리게 한다는 뜻을 지녔다. 학(謔)은 우스갯소리(농담)이다. 해학은 이질적인 것들을 어울리게 하고 어색한 사이를 조화롭게 하는 농담인 것이다. 여기에는 약점을 까발리고, 등 뒤에서 조롱하는 공격성이 없다. 상대방의 아픔에 연민을 보내고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내가 자유로워지고, 나아가 우리 모두를 해방시키려는 욕망, 이것이 해학의 마음이다. 박공습과 영통사 승려, 이옥봉과 고을 수령, 문사와 북경 아가씨, 유희춘과 송덕봉은 아주 우아한 해학을 나누었다. 이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더 넉넉해지고, 그들의 사이에 온기가 흘렀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일상에서 삶을 구원하는 것은 웃음뿐이다. 민중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귀족들을 원하는 것은 신(神)이고 권위며 이름이다. 그들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고 싶어 숭고한 가치를 좇는다. 그들에게 농담은 천박한 것이 된다. 반대로 민중들은 당장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하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더 자주 더 크게 웃으며, 환한 표정을 짓는다. 생각해보라. 민중들이 전승시켜 온 이야기들의 태반은 해학담이다. 그들은 해학을 징검다리 삼아 오랜 세월을 견뎌왔는데, 그 다리의 많은 부분은 문학이 놓은 것이다.

이도령은 버들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춘향에 반하지만 방자의 태도가 녹록지 않다. 애가 탄 이도령은 방자를 형님이라 부르며 애원한다. 방자는 아우 이도령에게서 단단하게 다짐을 받고 나서야 걸음을 옮긴다.(‘남원고사본 춘향전’) 이춘풍은 주색으로 가산을 탕진하고도 정신을 못 차려 호조 돈 2000냥을 빌려 평양으로 장사를 떠나지만, 평양 기생 추월에게 빠져 기방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한다. 비장(裨將)으로 변복하여 평양에 간 그의 아내는 춘풍을 잡아 형틀에 올려 매고 추상같이 호령한다. “이 놈 들어라, 네가 이춘풍이렷다. 사정없이 매우 쳐라!” 춘풍은 울며불며 목숨을 구걸한다.(‘이춘풍전’) 주색이 과도하여 병이 골수에 든 남해 용왕 앞에 현신 별주부는 온갖 지혜로 토끼 한 마리를 용궁으로 데려오지만 용왕은 토끼의 말에 속아 충신의 간언도 듣지 않고 토끼를 돌려보낸다.(‘토끼전’)

세 편 이야기에서는 일상의 질서가 뒤집힌다. 관노 방자는 부사 아들 이몽룡의 형님이 되고, 남편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휘둘리던 아내는 이춘풍을 꾸짖으며 매질을 하고, 지존의 용왕은 세상 물정에 깜깜한 바보가 된다. 설화에서도 탈춤판에서도 굿마당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완고한 현실의 질서를 일순 흩뜨려 관계를 역전시켜 시원하게 웃는 순간 삶은 고통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해학에는 불균형을 교정하고 평형을 회복하는 힘이 있다. 이항복과 박문수와 정수동과 김삿갓이 오랜 세월 이야기의 주인공 자리를 놓치지 않은 이유이다.

씩씩하고 부끄럼 타지 않고 점순이는 나만 보면 심술이다. 악담을 해대고, 저희 수탉으로 우리 집 수탉을 못 살게 군다. 분을 못 이긴 나는 점순네 수탉을 단매에 죽이고 걱정에 울음을 터뜨리는데, 의외로 점순은 부드러운 말로 달래주며 몸을 포개 넘어뜨렸다. 나는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에 땅이 꺼지는 듯 정신이 아찔해졌다. 점순은 남몰래 나를 좋아했던 것이다.(김유정, ‘동백꽃’) 생기가 돌아 따스하다. 나와 장인님과 점순 사이의 묘한 실랑이를 빚어내는 김유정의 손끝에서 악의라고는 찾을 수 없다.(‘봄·봄’)

목욕탕에 앉은 그 사내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 몸짱들도 그 근처에서는 몸가짐이 조심스럽다. 그의 왼쪽 팔에는 ‘참자’, 오른쪽 팔에는 ‘착하게 살자’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고독’) 500점 하수의 도전을 물리친 1000점 당구 실력자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야말로 고수의 풍모가 느껴진다. 그런데 그 고수가 뒷정리를 하면서 신발을 벗고 부채질을 하는데, 그의 양말 엄지발가락 부분에 구멍이 나있는 것이다. 그의 가방에서 나온 양말들도 모두 그랬다. 의아해하는 내게 친구가 살짝 귓속말을 했다. “고수 체면에 몸을 쓸 수는 없잖아. 대신 구두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하다 보면 양말이 이 모양이 된다네.”(‘고수’) 조폭의 고독과 고수의 고심에 보내는 성석제의 시선에도 따스한 해학이 농익어 있다.

앞에 닥친 한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 긴박한 상황에서도 마음 구석에 한 치 자리를 남기는 여유, 그리고 우울과 슬픔을 걷어내려는 따스한 배려에서 해학이 발생한다. 상처를 주지 않고 웃음을 일으키는 것이 해학이다. 그것은 활을 쏘지 않고 적장을 사로잡고, 약을 쓰지 않고 병을 고치는 것과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그윽한 통찰과 무궁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이야말로 문학의 소임 중에서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순진하여 무해한 농담이 바로 해학(諧謔)이다. ‘해(諧)’는 어우르는 것이고 ‘학(謔)’은 농담이다. 해학은 이질적인 것들을 어울리게 하고 어색한 사이를 조화롭게 하는 농담이라 하겠다. 여기에는 약점을 들추고, 등 뒤에서 조롱하는 공격이 없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내가 자유로워지고, 나아가 우리 모두를 해방시키려는 욕망이 해학의 마음이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⑮ 분노-노여움 곰삭여서 문장으로 풀어내 세상을 바꾸는 힘

기원전 92년쯤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던 임안(任安)은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내, 황제에게 현사(賢士)를 추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임안은 적극적인 간언으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뒤 바깥 출입을 삼가며 ‘사기’의 저술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편지를 받고 고심하던 사마천은 붓을 들었다. 편지는 길어졌다. 사마천은 자신이 궁형을 당하게 된 경위와 그 이후의 참담한 심정을 절박하게 풀어냈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가난하여 속량 받을 돈도 내지 못했고, 사귀던 벗들 중에도 구해주러 나선 사람이 없었으며, 가까운 친지들조차도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선비들이란 땅을 그어 감옥을 만들어도 들어가지 않고, 나무를 깎아 관리를 삼아도 따지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행동에 앞서 득실을 따지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인정세태의 무상함은 물론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속으로는 득실을 셈하는 선비들의 이중성을 통절하게 깨달았다. 사마천은 절망했고, 그 절망은 깨달음을 낳았으며, 깨달음은 ‘사기열전’의 인물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피와 살이 되었다.

그는 욕된 삶을 견뎌 끝내 뜻한 바를 이룬 역사의 인물들을 발견했다. 문왕은 갇힌 채 ‘주역(周易)’을 풀었고, 공자는 횡액을 만나 ‘춘추(春秋)’를 지었고, 굴원은 쫓겨나서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이 실명하자 ‘국어(國語)’가 새겨졌고, 손자는 다리가 잘린 뒤 병법을 정리했으며, 한비자는 감옥에 갇혀 ‘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지었다. ‘시경(詩經)’의 300편 시도 성현들이 발분(發憤)하여 지어낸 것이다. 이들이 오욕을 참고 물러나 문장으로 비분(悲憤)을 풀어낸 것은 후세에 자신의 뜻과 존재를 나타내고자 함이었다. 사마천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은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는 책이 완성되면 명산에 숨겨 ‘그 사람(其人)’에게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사기’ 130권이 완성되었고, 오늘 수많은 이들이 ‘그 사람’이 되어 무시로 사마천과 밀어를 나눈다. 사마천은 좌구명과 손자, 한비자 같은 선배들에게서 치욕을 창조로 전환시키는 힘을 얻었다. 그 힘이 바로 뜨거운 마음, 즉 분노였다. 그 이전에 공자는 자신에 대해 “뜨거운 마음이 일면 먹는 일도 잊는다(發憤忘食)”고 했고, 그 뒤로 이지(李贄·1527~1602)는 “분노 없이 지은 글은 춥지도 않은데 떨고, 아프지도 않은데 신음하는 격이니 지은들 무어 볼 게 있으랴”라고 했다.

‘수호전’에서 임충(林沖)은 본래 온후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인물이었다. 이는 그의 환경, 즉 비교적 높은 사회적인 지위와 유복한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내가 희롱당하는 장면을 보고도 참아낸 것이나, 고구(高)의 음모로 유배를 떠나면서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은 것은, 모두 주류 세계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에게는 기존 질서를 부정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는 핍박에 분노가 폭발하여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다. 이로써 그는 귀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채 주류 사회에서 이탈하여 양산박으로 향한다.

양산박 두령 왕륜(王倫)은 특출한 무예나 도량도 없으면서 어쩌다가 녹림객의 우두머리가 된 인물이다. 그는 의심이 많고, 능력 있는 자를 시기하며, 내세울 만한 명분이나 지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인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려 시기하여 내친다. 왕륜은 양산박을 찾은 임충과 양지(楊志), 그리고 조개(晁蓋) 일행을 차례로 박대하여 내쫓으려 한다. 분노를 삭이고 있던 임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왕륜을 척살한 뒤 양산박을 접수한다. 임충이 왕륜을 죽인 명분은 ‘심흉협애(心胸狹隘), 질현투능(嫉賢能)’ 여덟 글자이다. 도량이 좁아 어진 사람을 미워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시기한다는 말이다.

임충은 무능한 위정자를 징치하는 명분으로 왕륜을 처단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목적과 방향 없는 도적들은 일순 부조리한 국가를 상대하는 의적들로 바뀐다. 무능하고 부패하며 인재를 버린다는 점에서 조정의 고구와 양산박의 왕륜은 같다. 위정자의 폭압으로 삶의 기반을 모두 잃고, 분노에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르고 다시 권력에 맞서는 임충의 삶은 ‘수호전’ 호걸들의 삶을 대변한다. 이들의 행동을 이끌어가는 것은 공히 분노이다. 이들의 마음 뒤에는 작가의 분노가 숨어있고, 이들의 행동은 수많은 독자들의 분노를 대신 풀어주었다. “난세의 음악은 원망하며 분노한다(亂世之音怨以怒)”고 했다. (예기)

마감동은 양반가의 사노 출신으로, 자기 아내를 범한 주인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달아나 구월산 화적떼의 부두목이 된 인물이다. 그는 장길산 일행을 털다가 외려 사로잡히고 만다. 감동의 마음에는 주류세계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과 뜨거운 분노가 들끓고 있다. 그가 보기에 임금과 재상은 화적보다 더 큰 도적놈들이고, 선비라는 것들은 이름이나 얻으려고 이 솟을대문 저 사랑으로 주린 개 장바닥 싸돌 듯하는 도적의 뇌수이다. 금세 뜻이 맞은 두 사람은 이후 부패하고 부정한 조정에 맞서나간다.(장길산) 1970년대 젊은 작가 황석영은 조선 숙종 시절을 배경으로 당시 권력층과 지식인들에 대한 분노를 분출한 것이다.

권력과 지식이 결탁하고, 허위와 부정이 공도를 가장하는 사회에서 정직하고 유능한 인재들은 갈 곳이 없다. 맨손으로 범을 잡은 무송(武松), 70근 선장(禪杖)을 지팡이처럼 휘두르는 노지심, 80만 금군(禁軍)의 교두였던 임충은 양산박에 흘러든다. 표범처럼 날랜 장길산,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는 이갑송과 강선흥, 상술과 검술에 두루 능한 송도 상단의 행수 박대근 등은 구월산에 모인다. 이들 사이의 정직과 신의는 세상에서 통하지 않고, 출중한 용력과 무예는 살인과 방화에 쓰인다. 이들은 모두 쓰이지 않는 인재의 표상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자리에 쓰이지 못하는 인재는 도적이 되기 십상이다.

연경을 다녀오고 네 해가 지난 1770년 홍대용(1731~83)은 집 근처에 작은 초가 정자를 지었다. 이름은 두보 시에서 빌려와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 했다.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초정이라니, 운치가 넘친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딴판이다.

가을 터럭을 크다 하고 태산을 작다 한 것은 장주(莊周)가 분격(憤激)해서 한 말이다. … 쇠미한 세상에 태어나 화란을 겪자니 눈이 아리고 마음 아픈 것이 이를 데 없다. … 언뜻 태어났다가 문득 죽어가는 것이야 하루살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 정자에 누웠다가 장차 조물주에게 이 몸을 돌리고자 한다.

긴 제목의 일부이다. 장자의 논법대로 초정이 건곤처럼 광대한 것이라면, 새로운 생각 하나를 수용치 못하는 조선은 더없이 비좁은 곳이 된다. 이미 세계 수준의 과학을 체득한 홍대용은 비좁은 조선 사회에서 운신할 길이 없었다. 그는 절망하고 분노했다. 예로부터 일군의 사람들은 ‘장자’에서 달관과 여유가 아닌, 지식인의 거친 분격(憤激)을 읽어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시대에 분격하던 사람들이다. ‘건곤일초정’은 자기 시대에 대한 참지 못할 분격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홍대용의 생각에 깊이 공명한 사람들은 혈기 왕성한 20대 서얼 청년들이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덕무와 유득공과 박제가이다.

마르쿠제(1898~1979)는 ‘1차원적 인간’(64)에서, 외적으로 계급 차이가 지워지고 사람들의 정신 활동이 상품에 대한 욕망으로 통합되면서, 부정과 비판 의식이 사라지고 만 선진기술사회의 현상을 예리하게 짚어냈다. 청백리의 후손 마준은 취직을 위해 북촌 김대감 집을 드나들면서 차츰 세상의 허위와 비리에 관대해진다. 다 먹고 살기 위한 게 아니냐며 가치 판단의 눈을 감아버린다. (서기원·마록열전3) 이유야 어찌됐든 이제 중요한 건 적응과 생존뿐이고, 비판과 부정은 패배한 자들의 불평처럼 취급된다. 문인 학사들은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판단, 참과 거짓의 기준, 그리고 먼 옛날과 먼 뒷날의 역사에 대한 고려는 당장의 밥그릇 논리에 묻혀버렸다. 문학은 개인의 내면과 가족의 애환만을 끌어안고 있으며, 문인은 더 이상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세상 또한 이제는 작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문학은 역사의 이정표와 사회의 거울 역할을 그친 것인가. 1710년 설악산 백담 계곡의 김창흡은 겨우내 공부하고 떠나는 제자에게 준 글에서 ‘노하여 떨치면 만 리를 솟구치는 대붕’과 ‘한번 노하면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겐 노여움이 없을 수 없고, 그 노여움은 또한 자잘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 문학은 너무 말랑말랑하기만 하다. 이 시대 나는 다시, 더 많은 식견과 더 뜨거운 용기를 장착하여 역사와 사회를 맞대면하는 작품들의 출현을 기다린다.

권력과 지식이 결탁하고, 허위와 부정이 공도를 가장하는 사회. 정직하고 유능한 인재들은 갈 곳이 없다. 그 인정세태의 무상함에 절망하고, 그 절망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 욕된 삶을 견뎌내고 마침내 뜻한 바를 이룬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16) 풍자-분노 내려놓고 여유를 입은 뒤비수를 품다

누이야 / 풍자(諷刺)가 아니면 해탈(解脫)이다.

-김수영, ‘누이야 장하고나!’

1961년 8월, 5·16군사정변 직후 발표되어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나는 이렇게 푼다. 삶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또는 운명)과 부딪침의 연속이다. 그 불가해함과 부조리함에 눈을 감아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면 끊임없이 맞설 수밖에 없다. 해탈은 결국 죽음 아닌가! 하지만 나는 약하고 상대방은 강하니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무모하다. 풍자는 약한 내가 거대한 힘과 효과적으로 대결해가는 방법이다. 풍자는 약자의 선택인지라 승리는 어렵다 해도, 나의 실존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최소한 패배는 아니며, 아주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역사의 승자가 되기도 한다. 해탈만 있는 세상은 죽음만 있는 세상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조선 창업 직후 태조가 큰 잔치를 베풀었다. 자리를 가득 채운 공신들 대부분은 고려 적에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새 왕조의 공신들 잔치이니 그 장한 분위기야 짐작할 만하다. 자리에선 기녀 설매(雪梅)가 술도 치고 노래도 하며 흥을 돋우었다. 취기가 무르익자 개국 1등 공신 배극렴이 설매를 희롱했다. “듣자니 너희들은 동가식 서가숙을 자주 한다는구나. 오늘밤은 나와 함께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 주위 사람들이 무릎을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밑바닥에서 온갖 세파를 겪은지라, 설매는 농이 통할 길을 만들어놓고 노련하게 응수했다.

“어머나, 정말요! 먹을 자리 잘 자리 가리지 않는 천기니, 왕씨를 섬겼다가 이씨를 섬기는 대감과 무엇이 다르리까? 사리에도 마땅하니 기꺼이 분부를 받들겠나이다.”

배극렴은 낯빛이 하얘져 술잔을 떨어뜨리고 무리 속에 몸을 숨겼다. ‘연려실기술’ 등 여러 야담과 사서에 전해져오는 이야기다. 설마 설매가 그랬을까마는, 수백년 동안 사람들은 설매의 이름으로 철마다 배를 갈아타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객들을 조롱해왔다.

1484년 온갖 영화를 누린 한명회(1415~1487)는 한강 남쪽 가에 정자를 짓고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아뢰었다. 정자 이름은 압구(狎鷗)라 했으니, 갈매기와 가까이 지낸다는 말로 강호에 은거함을 뜻한다. 성종은 그를 옛날의 명신에 견주며 작별의 시를 지어 주었다. 조정 문사들이 다투어 그 시에 화답하였다. 모두 축하와 덕담 일색이었는데, 뒷사람들은 그 중 최경지(崔敬止·?~1479)의 시를 으뜸으로 꼽았다.

세 차례 부름 받아 총애가 두터우니 / 정자가 있다 한들 와서 놀 마음 없네 / 가슴속 끓는 욕심 고요케 하다면야 / 벼슬 바다 가에서도 갈매기와 친할 것을.(三接慇懃寵渥優, 有亭無計得來遊. 胸中政使機心靜, 宦海前頭可狎鷗.)

처사의 맑은 이름은 얻고 싶고 작록(爵祿)은 버릴 수 없어, 겨우 한강 가에 정자 하나 지어놓고 그마저 찾지 않았던 가식을 조롱한 것이다. 한명회는 최경지를 미워하여 이 시만은 정자에 걸지 않았지만, 수백 편 중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최경지의 시 한 수뿐이다.(‘추강냉화’)

심정(1471~1531)은 1519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주역이다. 뒷날 그는 한강 가에 소요정(逍遙亭)을 지어놓고 다음 시를 새겨 걸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떠받치다가, 늙어서는 강호에 누워있노라.(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어느 날 밤 한 소년 협객이 들어와 머리채를 끌어 잡고, ‘부(扶)’와 ‘와(臥)’ 두 글자를 각각 ‘경(傾)’과 ‘오(汚)’로 고쳐 새길 것을 명했다. 시는 이렇게 바뀌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기울여놓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노라.(靑春傾社稷, 白首汚江湖)”(‘현호쇄담’) 소년 협객은 공론이 빚어낸 형상이고, 이 이야기가 장강처럼 유전되어온 것은 바로 역사이다. 심정은 공을 세우되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공성불거(功成弗居)의 처신을 흉내 냈지만, 사직을 기울이고 강호를 더럽힌 사람이 되고 말았다. 공론과 역사가 살아있는 한 한 때의 허위와 가식은 달아날 길이 없다.

박문수(1691~1756)가 병조판서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1737·8) 영조가 오군영의 장수들을 불러,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강화도 방어시설의 형편을 물었다. 장수들이 각각 자기가 맡고 있는 군영의 사정을 말하고 나자, 박문수가 나서 말했다. “신의 생각에 한양이 강화도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군사들은 어차피 나아가 항복할 것이 뻔하니, 강화도 연미정(燕尾亭) 앞 뻘밭보다는 차라리 모화관(慕華館)의 깨끗한 모래밭에서 무릎을 꿇는 게 낫습니다.” 왕은 크게 웃었다.(‘송천필담’) 웃었다고는 하나, 슬픔이 배어있고 눈물이 흘러나오는 웃음이다.

김소행(1765~1859)의 ‘삼한습유(三韓拾遺)’에서 천군과 마군은 열녀 향랑의 환생(還生) 재가(再嫁)를 둘러싸고 한바탕 전쟁을 벌인다. 마군 측의 마모(魔母)는 치맛자락으로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치는데, 이는 여색을 상징한다. 천군 측에서 천라지망에 걸려 침 흘리며 정신 못 차린 군사들은 모두 유자들이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전장에 나가기를 기피하고, 나갔다가 창을 거꾸로 들고 도망친 자들 또한 모두 유자들이다. 겉으로는 예법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음행을 일삼고, 인의도덕만 앞세워 사회를 나약하고 가난하게 만드는 유자들에 대한 조롱이다.

과장되게 의리와 명분만을 내세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만 바라보았다. 이후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라고 떠받들다가 청나라로부터 ‘아녀자의 나라’라는 조롱을 들었다. 청을 오랑캐의 나라라고 핏대를 세웠지만, 막상 그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렸다. 열강의 세력이 미쳐오자 청나라만 바라보았고, 러시아까지 끌어들였다. 일제가 망하자 그렇게 망할 줄 몰랐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후예들은 오늘날 일제의 은혜를 생각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일언척구 말도 못 꺼내게 한다. 이들이 내세운 건 언제나 숭고한 명분이었지만 속으로 챙긴 건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이었다. 전쟁 불사 등의 강경론을 펼쳤으나 활 한번 잡아본 적이 없고, 배에 물이 새면 먼저 달아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박문수와 김소행의 이야기가 아직도 뼈저린 이유이다.

박지원은 북경에서 열하를 가는 도중 건장한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리는 청나라 군사의 모습을 보고, 잔약한 과하마를 타고도 견마를 잡히며 그나마도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처연하게 돌아보았다. 달리지도 못하고, 유사시 전장에서도 쓸 수 없는 선비들의 말은 쇠미한 국력의 징표였다. 그는 말했다. “불과 몇 십년 안 가 베갯머리에서 조그마한 담뱃대 통을 구유로 삼아 말을 먹이게 될 날이 올 걸세.” 동료가 의아하여 말뜻을 반문하자 웃으며 대답했다.

“서리배 병아리를 여러 번 번갈아 씨를 받아서 너덧 해 지나면, 베갯속에서 우는 꼬마 닭이 되는데 이놈을 침계(枕鷄)라 한다네. 말도 역시 종자가 작아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침마(枕馬)가 아니 되리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열하일기’

농을 했지만 촌철살인의 비수가 감추어져 있고, 말(馬)을 말했지만 말에만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식인들의 동종교배는 궁극에 침마와 같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형의 인사들을 낳으리라는 이야기다. 침마는 과하마의 단계에서 또 한참 퇴보한 지식인들의 미래상을 예견한 것이다.

북곽선생은 벼슬에는 관심 없는 듯 가장한다. 저술한 책이 1만5000권으로 천하가 그의 이름을 사모한다. 어느 날 밤 그는 같은 마을의 수절 과부 동리자의 방에 몰래 들었다가 쫓겨났다. 달아나다가 그만 똥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마침 배가 출출하던 범이 지나다가 북곽선생을 보고 한바탕 준엄하게 꾸짖는다. 유자들이란 아첨이나 일삼으며, 인의와 문자를 내세워 서로를 잡아먹는 족속들이니 더러워서 먹지 않는다고. 똥은 그들 정신의 더러움을 상징한다. 속에 똥만 든 인간들이란 뜻이다. 한순간 1만5000권을 저술한 지식은 세상을 속이는 교지(巧智)가 되었고, 천하에 알려진 이름은 허명(虛名)이 되었다.(‘호질’)

풍자가는 현세를 초월하는 숭고하고 엄숙한 가치를 신뢰하지 않으며, 그 시선은 숭고함과 엄숙함의 이면을 투시하고 겉과 속, 말과 짓의 사이를 예리하게 파고들어 그 간극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사회 전체의 더 나은 삶이다. 모순을 통찰하되 분노는 살짝 가라앉힌다. 한 호흡 쉬고, 한번 눙을 치고, 상황을 통해 허위가 절로 드러나도록 한 뒤, 살짝 몸을 빼 그림자를 거둔다. 참과 거짓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고상함에서 저급함으로 추락하는 속도가 빠르고 낙폭이 클수록 효과는 극대화된다.

바야흐로 풍자의 시절이다. 시민들은 건전한 의식과 전문 식견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위선의 위정자와 지식인과 종교가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에게 풍자는 최소한의 비폭력 무장인 셈이다. 문학은 최소한의 무장을 해제했는가, 대상이 너무 많아 과녁을 잃은 것인가, 네티즌 논객들의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춤사위에 넋을 잃고 있는가, 아니면 이정표를 찾고 있는가?

풍자가의 시선은 숭고함과 엄숙함의 이면을 투시하고 겉과 속, 말과 짓의 사이를 예리하게 파고들어 그 간극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모순을 통찰하되 분노는 살짝 가라앉힌다. 상황을 통해 허위가 절로 드러나도록 한 뒤, 살짝 몸을 빼 그림자를 거둔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17)사랑-영혼을 감싸안고 마음을 어루만져 삶을 바꾸는 묘약

재일동포 가수 이정미에게 고향은 천한 직업을 가졌던 엄마와 술에 절어 살았던 아버지, 조국의 아픈 역사와 방황하던 삶의 기억이 있는 곳이다. 그녀는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기를 다짐했고, 그때부터 많은 일본 사람들이 자기 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케이세이선을 타고 나 이제 돌아가네 / 여기도 또한 내 고향 ….” 그녀의 노래 ‘케이세이선(京成線)’의 1절이다.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내게 주어진 운명을 따스하게 품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송홧가루 날리는 세상, 모란은 진작 피었건만 봄은 다 오지 않은 5월, 사랑을 말한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 나를 밀어 지금에 서게 한 역사, 내게 주어진 운명을 끝까지 사랑하는 책임과 인내를 새로이 다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에 사랑은 없다. 세상에 편안하고 따스하고 용감한 사랑을 감지하고 싶다.

안평대군은 수성궁 안에서 12명의 소녀들에게 온갖 기예를 가르치며 외부 세계와 조금도 통하지 못하게 했다. 17세 운영(雲英)은 12 소녀 중 하나이다. 14세 소년 재사 김 진사는 대군의 문객(文客)이다. 운영과 김 진사는 남몰래 눈이 맞았다. 어느 날 대군은 운영에게 먹을 갈게 했고, 김 진사가 시를 지을 때 홀연 먹물 한 방울이 운영의 손등에 떨어졌다. 한 점 인연이 생긴 것이다. 운영은 차마 그 먹 자국을 지워버리지 못했다. (‘운영전’)

최앵앵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영구를 모시고 고향으로 가다가 길이 막혀 보구사(普救寺)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마침 조실부모하고 세상을 유랑하던 장군서도 보구사에 묵게 되었다. 앵앵에게 첫눈에 반한 장군서는 주지에게 부탁하여 앵앵의 숙소와 가까운 서쪽 곁채[서상(西廂)]를 빌렸다. 그리고 부모의 재를 올린다는 핑계로 앵앵 모녀의 재회(齋會)에 참여한다. 이후 장군서의 마음은 이러했다. “그대 잠깐 던진 아름다움에 / 만 갈래 그리움을 나는 줍노라.” 달 밝은 밤 두 사람은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떠본다.(‘西廂記’)

1772년쯤, 17세의 귀족 출신 표트르 안드레이치는 퇴역 중령인 아버지에 의해 변경으로 입대 조치되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의 낭만적인 생활을 꿈꾸던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표트르가 배속된 벨로고르스크 요새는 시설과 군대 모두 형편 없는 키르기스 초원의 접경지이다. 표트르는 요새의 사령관인 대위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사려 깊고 감정이 풍부한 아가씨를 위해 시를 썼고, 자기 사랑을 모독한 동료와 결투를 하다가 중상을 입었다. 닷새 만에 깨어난 그는 마리야의 입맞춤에 자기 몸에 한줄기 불길이 확 번져나가는 것을 느꼈다.(푸시킨, ‘대위의 딸’)

대학의 스페인어 강사 로베르트 조던은 신념에 따라 1930년대 후반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다. 다리 폭파의 임무를 띤 그는 그 근처 게릴라 부대를 찾아간다. 거기서 파시스트들에게 가족을 잃고 온몸을 유린당한 19살 마리아를 만난다. 조던과 마리아는 작전 수행이 있기까지 사흘 동안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둘째 날 한밤중에 깨어난 조던은, 그녀가 생명의 전부이며 남에게 빼앗길 것 같기나 한 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이튿날 그는 그녀와의 사랑만으로도 자신의 삶은 행운으로 가득 찬 것이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속삭인다. (헤밍웨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사랑에 빠지고, 서로를 통해 삶이 거듭난다. 그 심정을 이제현(1287~1367)은 “빨래터 언덕 위에 버들이 늘어질 때 / 손잡고 속삭이던 백마 탄 님이시여 / 처마에서 쏟아지는 석 달 간 빗물인들 / 손 끝에 남은 향기 어찌 차마 씻어내리”라고 읊었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던 민요를 번역한 것이다. 이승훈에 따르면 ‘너를 만난 날’은, 날개가 달린 날이고, 현실이 사라진 초현실의 날이고, 새가 날아오던 날이고, 불안과 비참과 치욕 따위가 모조리 일어나 빛이 되던 날이다. (‘너를 만난 날’)

사랑은 이렇게 한 번에 오지만, 그렇다고 한 번에 다 오는 법은 없다. 선가의 수행에 비유하자면 돈오점수(頓悟漸修)인지라, 거기에는 고통과 인내가 수반된다. 배꽃에 달빛이 부서지는 밤 일지(一枝) 춘심(春心)을 품고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이루는 밤이 그것이고(이조년), 마음 속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천날) 밤의 꿈으로 맑게 씻는 마음도 그것이다.(서정주, ‘동천’) “꿈 속 넋 오감에도 발자국 남는다면 / 님의 집 앞 자갈길은 거의 모래 되었으리.”(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砂)(조원)나, “뵈오려 안 뵈는 님 눈 감으니 보이시네 /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이은상) 또한 시인에게 포착된 사랑의 수행이다.

운영과 김 진사는 높은 궁궐 담장을 넘나들며 사랑을 이어간다. 궁궐 담장의 높이는 금기의 표상이다. 금기를 어긴 두 사람은 죽음으로 마음을 지키고자 했다. 최앵앵과 장군서는 곡절 끝에 사랑을 나눈다. 앵앵은 부친의 상중이었고, 그들이 사랑을 나눈 공간은 사원이었다. ‘서상기’에 대해 음서(淫書)라는 비난이 그치지 않았는데, 김성탄은 이를 두고 “문사가 보면 문학이고, 음탕한 자가 보면 음서”(文者見之謂之文, 淫者見之謂之淫)라는 말로 일축했다. 표트르는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향해 연인을 구해오고, 큰 부상을 입은 조던은 “두 사람 중 한쪽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거야”라는 말로 마리아를 보내놓고 혼자 죽음을 맞이한다.

뜨거운 사랑은 오래 묵고 많이 참는 단련의 과정을 거쳐 그윽한 사랑이 된다. 오랜 세월 사랑을 지켜주는 것은 책임과 인내이다. 마리야의 아버지 이반 대위는 주변 요새들이 반란군에게 점령되어가자 아내에게 몸을 피할 것을 권한다. 아내 바실리사는 말한다. “여태껏 같이 살았으면 죽을 때도 같이 죽어야지요.”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반은 딸과 부인을 보내며 말한다. “자, 미샤, 행복하거라. … 나와 바실리사가 살았던 것처럼 너희들도 살거라. … 여보 우리도 키스합시다.” 부인은 울면서 말했다. “잘 가세요. 제가 혹시 당신께 잘못한 일이 있거든 용서하세요!”(석영중 옮김) 자기도 모르게 이 노부부의 사연에 마음이 끌린다면 그 자신 사랑을 숙성시키고 있다는 증거이다.

서로를 생각하는 이용과 월선의 마음은 애틋하기 그지없지만 운명은 두 사람의 인연을 조금씩 빗나가게 했다. 어긋나던 인연은 월선의 죽음 앞에서 겨우 합치된다. 용은 다 죽어가는 월선을 내려다보았고, 월선은 그 모습을 눈이 부신 듯 올려보았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산판일 끝내고 왔다.” 용이는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럴 줄 알았십니다.” “임자.” 얼굴 가까이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 떤다. 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댄다. 얼마 후 그 경련은 멎었다. “임자.” “야.” “가만히,” 이불 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머리를 쓸어주고 주먹만큼 작아진 얼굴에서 턱을 쓸어주고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박경리, ‘토지’)

끝까지 서로를 가슴에 품고 참고 견딘 덕분에 두 사람은 황홀하게 슬픈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 짧은 대면으로 두 사람은 오래도록 자신들을 괴롭히던 운명의 장난을 떨쳐낼 수 있었고, 번민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었으며, 한을 남기지 않아도 되었다. 이 대목에 이르러 독자들은 가슴속에 뭉쳐있던 응어리가 빠져나오는 느낌을 받는다.

심각하게 인류의 운명을 걱정하고 사회 개혁을 꿈꾸며 혁명 사상이 담긴 책들을 탐독하던 10월의 마지막 날, 나는 굶주림에 지쳐 강가를 헤매다가 술집 여급 나타샤를 만났다. 우리는 함께 빵을 훔쳤다. 내가 이빨을 부딪치며 추위에 떨자, 나타샤는 아이 달래듯 나를 어르며 자신을 끌어안게 해주었다. 내가 알지 못할 감동에 눈물을 흘리자, 그녀는 “울지 말아요! 하느님이 당신을 축복해 주실 거예요. 일터에도 곧 나갈 수 있을 거고요”라고 달래주며 입을 맞추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받은 키스였다. 역사의 변혁을 꿈꾸는 (대단한) 나를 안아주고 달래주고 쓰다듬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세상에 대한 저주와 분노로 삶의 벼랑 끝에 선 (하찮은) 술집 여인이었던 것이다. (고리키, ‘어느 가을날’)

자기모순에 빠진 어떤 의사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은 인류를 너무 사랑하는데, 인류 전체를 사랑하면 할수록 인간 하나하나에 대한 사랑은 점점 더 적어지며, 반대로 하나하나의 인간을 증오할수록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은 뜨겁게 타오른다는 것이다. 조시마 장로는 믿음이 부족한 귀부인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실천적인 사랑과 공상적인 사랑과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실천적인 사랑은 묵묵한 노동과 인내일 뿐이며, 아무리 애써도 목표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된다고 한다.(도스토예프스키, ‘까라마조프 형제들’) 사랑은 요란한 구호나 싸늘한 이념이 아니라, 따스한 눈길이고 어루만져주는 손길인 것이다. 장로가 말한 실천적인 사랑이란 바로 나타샤의 사랑이 아닐까? 세상에 나타샤는 얼마나 많은가!

사랑하게 되면 그녀의 속눈썹 아래 감추어진 수심이 보이고, 봄 숲에서 우는 검은등뻐꾸기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리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너’에게 날아가게 된다. 그러니 그 사연을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세상의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사랑에서 태어나지 않은 문학은 없다. 지금이라도 책을 덮고, 컴퓨터와 TV를 끄고 ‘너’에게 말을 걸어볼 일이다.

뜨거운 사랑은 오래 묵고 많이 참는 과정을 거쳐 그윽한 사랑이 된다. 사랑을 지켜주는 것은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인내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겨드랑이에 날개 돋아 ‘그’에게 날아갈 수 있게 된다. 희망속에서, 때로는 절망속에서 사랑은 꽃핀다. 세상의 모든 다른 존재들처럼, 사랑 없인 문학도 없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18)공포-합리·규범의 경계에 출몰하는 내면의 괴물

많은 경우 공포는 유년기의 체험으로 기억된다. 아이는 어느 시점 ‘무서운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무서운 이야기’는 낯설고 경이로운 세계이다. 일단 이 세계를 접한 아이는 눈을 가리면서도 거기에 탐닉한다. 때로 아이는 세계와의 합일이 깨지고 낯선 세계에 혼자 남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눈을 떠보니 엄마가 없는 것이다. 경이로운 세계를 접하든, 혼자 낯선 세계에 남겨지든 아이가 체험하는 것은 공포이다. 거대한 세계와 무서운 힘을 체감하는 것이다.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로 疾走하오. / … / 十三人의 兒孩는 무서운 兒孩와 무서워하는 兒孩와 그러케 뿐이 모혓소.

-이상, ‘烏瞰圖’

빠져나가지 못해, 빠져나갈 수 없기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는 아이는 악몽을 꾸는 아이다. 제1의 아해부터 13의 아해까지는 공포가 증폭되고 증식되어감에 따라 달라지는 하나의 아해일 뿐이며, 나중에 남는 것은 ‘무서운 아이’(공포의 대상)와 ‘무서워하는 아이’(공포의 주체)로 분열된 자아이다. 막다른 골목은 차단된 출로를, 질주는 공포 심리를 상징한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는 시인의 기억을 좀체 떠나지 않는 형상 중의 하나이다. 기형도는 동짓날 밤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듣던 문풍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라고 울었고, 스스로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라고 자위했다(‘바람의 집-겨울 版畵 1’). 아무도 없는 기억 속 옛집에 들러, “덜컹이는 문고리 하나. / 막다른 골목에 갇혀 / 그 소릴 듣는다”는 시인 또한 유년기의 공포 체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백인덕, ‘적막한 이주 5’).

공포를 체험하면서 아이는 혼자 남겨지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그럼에도 혼자 남겨지는 상황이 반복되면 공포는 마음 깊은 곳에 누적된다. 공포가 쌓여 있는 곳은 심해이고 절해고도이며 인적이 닿지 않는 저 깊은 숲이다. 거기에는 공포를 먹고 자라는 괴물이 산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생각되고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의 한계에서 출몰하며, 어떠한 정의에도 붙잡히지 않으면서 정체성과 관련된 우리의 공적인 규범들에 도전한다(리처드 커니). 심해의 괴물은 가끔 수면 위로 출몰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건 각자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에드거 앨런 포(1809~1849)는 세 살 이전에 부모를 잃었다. 젊어서부터 술과 도박과 아편에 탐닉했다. 지독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글을 썼는데, 그가 남긴 74편의 단편 대부분은 공포 이야기다. 그는 자기 작품이 표방하는 주제는 공포이며, 그 공포는 영혼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했다. ‘검은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는 초자연적인 괴물의 형상이며, ‘어셔가의 몰락’의 초반부에 그려진 늦가을 저물녘 늪가의 황폐한 옛집은 바로 괴물의 집이다. 검은 고양이와 그 기괴한 분위기는 유년기에 포의 마음 깊은 곳에 축적된 공포감에서 나온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괴물들은 사회집단의 무의식에 거주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기 의지와 앎을 압도하는 자연현상·사회 흐름·권력에 공포를 느꼈다. 미지의 거대한 힘이 합리적으로 풀리지 않고 굴절, 변용되면서 전설이 태어났다. 한밤중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귀신, 해마다 처녀를 공물로 받아먹는 지네, 부녀자를 납치하여 지하국으로 데려가는 금돼지 등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다. 부모가 아들의 겨드랑이에 난 날개를 꺾자 앞산에서 용마가 울며 날아갔다는 ‘아기장수설화’는 권력에 대한 공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과학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한때 학교에서는 매번 2등만 하는 학생이 1등을 독차지하는 학생을 죽인 뒤 벌어지는 괴기담이 유행했고, 얼마 전에는 빨간마스크라는 흉측한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이야기 뒤에는 무한경쟁에 내몰려 살해 충동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공포감과,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시민들의 낭패감이 도사리고 있다. 이야기들은 사회집단의 내면 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신묘한 거울인 셈이다.

이탁오는 말했다. 평소 식견이 풍부한 사람에게 평범한 것도 견문이 적은 사람이 갑자기 보면 괴이한 것이 된다고. 이 말을 받아 200년 뒤에 박지원은 말했다. 통달한 선비에게는 괴이한 일이 없으니, 견문이 적으면 괴이한 것이 많은 법이라고. 광우병 논란을 두고 괴담(怪談)이라고 하니, 식견 없는 사람들이 보면 괴담임에 틀림없다. 설사 괴담이라고 해도 그것은 생존본능을 위협받는 공포감에서 발아된 것으로 국민들의 마음 심연의 진실임을 알아야 한다. 공포감은 자칫 괴담을 거쳐 괴물로 진화하여 세상에 출몰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한 사회의 공포는 전란기에 최고조에 달한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에서 인간의 사유와 도덕적 판단은 중지되고 생존본능만이 작동한다. 생존본능에 공포감이 더해지면서 무자비한 학살과 피의 보복이 반복된다. 공포감은 공격성 및 살해 충동을 낳고, 그로 인해 공포감은 다시 증폭된다. 한 사회의 공포 상황과 한 개인의 공포 심리는 떨어질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문학은 둘의 관계를 정밀하게 추적해가기도 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기에 지바고가 적위군 빨치산에서 18개월 동안 지내며 듣고 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적위군 빨치산 대원 팔르이흐는 가족을 무척 사랑했다. 적위군과 백위군 사이 잔혹한 보복이 되풀이되는 동안 그의 가족이 부대에 도착했는데, 그 즈음 그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의 머리에서는 고문당하고 신음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는 사랑하던 아이들에게 목각 인형을 만들어주던 예리한 도끼로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가족에게 있을 고통을 미리 없애준다며(‘닥터 지바고’).

팔르이흐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백제 장수 계백의 이야기가 떠오르게 한다. 나당 연합 대군 앞에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계백은 처자식이 적의 노예가 되어 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죽는 게 낫다며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황산벌로 나아갔다. 김부식이 이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실은 이래, 계백은 오랜 세월 충의로운 장수로 칭송받아왔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계백의 행위는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이건 꾸며진 것이다. 충의로운 적군을 칭송하여 자기편에 본을 보이고 군주의 의리를 내세운 것은 오랜 세월 지속되어온 통치 전술이다.

최윤은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88)에서 1980년 5월의 공포를 살려내고자 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15세 소녀는 시장에서 일하는 엄마와 둘이 산다. 대학에 다니던 오빠는 한해 전 석연치 않은 사고로 죽었다. 그 뒤로 소녀는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갈까봐 무서웠다. 그날도 엄마는 몇 번이나 소녀를 떼어놓으려고 했는데, 소녀는 필사적으로 엄마의 허리를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몸에 구멍이 난 채 피를 흘리며 죽었다. 소녀는 누군가에 의해 낯선 마을에 버려졌고, 두꺼비만한 딱정벌레들에게 쫓겨 동굴로 몸을 피했다. 눈만 감으면 그 괴물들이 나타났다.

남자는 공사 현장 근처에서 소녀를 발견했다. 그가 소녀에게서 느낀 감정은 공포였다. 처음에 그 공포가 분노의 감정을 일으켜 남자는 소녀를 구타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통해, 모든 의미가 비어버린 실성한 웃음을 통해, 흔적 없이 지워져버린 인격의 모든 부재를 통해, 점점 더 자세하고 깊이 있게 그녀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소문의 도시 전체를 보았다. 그가 그녀와 함께 지낸 몇 달이 바로 지옥이었고, 그녀가 사라진 다음에도 지옥은 계속되었다. 극심한 공포는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당시 권력자는 공포에 사로잡혀 군대를 투입했고, 술을 마신 군인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살육을 저질렀다. 소설 밖 역사의 상황이다. 소녀의 엄마는 아들을 잃으며, 소녀는 엄마를 잃으며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에게 소녀가 제3자 ‘그녀’가 아닌 2인칭 ‘너’가 되면서, 소녀의 체험은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그는 소녀의 행적을 찾아다닌 오빠의 친구들이고, 또 남겨진 자들이고, 소설 밖 독자들인 우리다. 작가는 그처럼 그날의 공포감을 체험하고 공유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괴물은 우리 안에 있는 타자이다. 아무리 없애도 사라지지 않는 에일리언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괴물이 우리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 지난 공포를 잊으려 해서는 안 된다. 잊어버리려 하면 할수록 그 공포는 에일리언처럼 되살아난다. 공포에서 떠오른 괴물은 그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가 잊으려 하는 우리 내면 깊은 곳의 모습을 환기하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괴물을 불러내어 대화와 화해를 시도해야 하는 계절이다.

괴물은 우리 안에 있는 타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괴물이 우리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공포를 잊으려 해서는 안 된다. 잊으려 할 수록 그 공포는 되살아난다. 공포는 우리 내면 깊은 곳의 모습을 환기하는 것이다.2008년 05월 16일 17:31

 

▲ 이승수< 경희대 연구교수>
경기도 광주에서 1964년에 태어났다. 문학과 역사와 지리가 만나는 지점을 탐색하고, 옛날과 오늘 사이에 대화의 다리를 놓는 것이 직업이다. 문학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태어나는 만큼, 문학 연구자의 소임 중 하나는 문학을 그 삶의 자리에 돌려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간 ‘거문고 줄 꽂아놓고’,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산사에도 그리움이 있었네’, ‘옥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 등의 책을 냈다. 현재 한양대 국문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사람에게 있는 6가지 감옥


어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에게는6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감옥은
자기 도취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면
정말 못 말립니다.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 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봅니다.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사람은 이 6가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감옥 들에서
탈출할 수가 있겠지요. - 좋은글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