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포커스

즐거운 여행 2017. 9. 28. 15:56
[박종인의 땅의 歷史"뒷문으로 다닐지언정, 더러운 꼴은 보지 않겠노라"

[93] 성주 북비공 이석문과 사도세자 뒤주에 갇히던 날

사도세자 뒤주에 갇힐 때 유일하게 몸으로 반대한 남인 출신 무사 이석문
곤장 맞고 파직… 낙향한 곳이 고향 성주 한개마을
노론 꼴 보기 싫다며 북쪽으로 작은 문 내고 사도세자 향해 경배… '北扉公'이라 불려
증손 이원조는 17세 급제… 남인 출신으로 한직 전전… 학문에 매진해 독자적 학풍
'조상 들먹이지 않고 염치와 도리 지켜야 양반'

1762년 여름, 창덕궁

실록에 따르면 아비 눈 밖에 난 사도세자는 보름 동안 아버지 영조 부름을 기다렸다. 1762년 음력 5월 23일부터 윤5월 13일까지다. 그동안 밥을 먹었다는 기록도 없고 물을 마셨다는 기록도 없다. 첫날은 밤을 새우고 방으로 돌아갔으나, 이후에는 창덕궁 시민당 뜰에 앉아 영조에게 용서를 빌었다. 두 번 아비에게 뵙기를 청했지만, 영조는 거절했다. 대신 세자를 사칭하며 밤에 부녀자를 겁탈하고 다녔던 사내 둘에 대해 처벌을 명하고, 삼남에 들이닥친 가뭄에 기우제용 향(香)을 내렸을 뿐이다.

보름 만인 윤5월 13일 풍경은 이러했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上幸昌德宮 廢世子爲庶人 自內嚴囚).'

왕족 지위를 박탈한 뒤 어딘가에 집어넣었다는 뜻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뒤주라고도 하고 작은 방이라고도 했다. 한중록에는 뒤주라고 기록돼 있다. 15일간 식음 전폐한 27세 청년을 한여름 끓어오르는 돌바닥 위 뒤주 속에 가뒀다. 미필적 고의가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이다. 세자는 8일 만에 죽었다. 더위에 쪄 죽었다. 실록 기록은 여기까지다. 영조가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라며 사관을 물리친 탓이다. 뒤주에 가둔 후 영조가 명을 내렸는데, 이 명 내용이 끔찍했던지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史官諱而不敢書).'(영조실록)

8일 뒤 세자가 죽고, 죽음 직후 신분은 왕족으로 회복되고 그 아들이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정조며, 정조가 아비를 잊지 못해 수원에 왕릉을 만들었네, 그런 이야기가 뒤를 잇는다.

그런데 더 구체적인 묘사가 다른 기록에 남아 있다. 구한말 독립운동가 이승희(1847~1916) 문집 '한계유고(韓溪遺稿)'에 나온다.

호위 무사의 항명

그때 세자의 호위 무사가 "부자(父子)가 서로 영결하는데 어찌 군명(君命)을 기다리리오"하고는 세손을 등에 업고 들어갔다. 진노한 영조가 즉시 나가라 명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감히 물러나지 않았다. 이윽고 세자가 큰 궤 속에 들어갔다. 이에 영조가 그에게 큰 돌을 위에 올려놓으라 명했다. 무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울었다. "죽더라도 감히 못 하겠나이다." 임금이 거듭 다그쳤으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니, 영조가 급히 끌어내리도록 명했다(英廟呼公擧一大石加諸上 公叩頭泣曰 臣死不敢奉命 屢命不前 英廟遽命曳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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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한개마을.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호위 무사 이름은 이석문(1713~1773)이다. 호는 돈재(遯齋)이고 성산 이씨다. 기록에 따르면 이석문은 이튿날 곤장 50대를 맞고 파직됐다. 나이 마흔아홉 먹은 이석문은 관직에 썼던 모든 도구를 버리고(盡散宦具) 벗들과 소리 내 울며 작별한 뒤 낙향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벽에 적어놓고 문을 닫아걸었다(한계유고, '돈재부군 행장').

한계 이승희는 돈재 이석문의 후손이니 기록에 크고 작은 과장은 없을 리 없겠다. 하지만 여러 다른 기록에도 비슷한 일이 적혀 있으니 영조 대에 사도세자를 지키는 무관 가운데 심지 곧고 대나무처럼 강직한 사내가 있었음은 틀림이 없다.

정치적 죽음과 남인 이석문

예나 제나 문제는 정치다. 사도세자가 엽기적으로 죽게 된 연유도 정치적이다. 세자가 스무 살인 1755년 전라도 나주에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는 대자보가 붙었다. 간신은 여당인 노론이요, 대자보를 붙인 이는 소론이었다. 세자는 엄벌을 주장하는 노론을 배척하고, 이후 웬만한 노론 주장은 모조리 반대했다.

여야를 두루 쓰겠다는 영조였지만, 결국 그가 이리 짜증을 낸다. "지금 치우친 논의 때문에 애비 당(父黨), 아들 당(子黨)이 생겼으니 조정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 짜증 보름 만에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둬버렸고, 이에 노론 소속인 '조정 신하'들은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 그저 궁궐 문밖에서 울기만 하였다(한계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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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장꼬장한 양반 이석문이 살던 고택.
그때 제2야당쯤 되는 남인 집안에서 태어나 남인 학풍을 익히고 남인 습속대로 살고 남인 철학으로 사유하던 이석문이, 그 꼴을 보지 못하고 세자를 옹호하다가 곤장을 맞고 낙향해버린 것이다. 신산한 몸을 끌고 돌아간 고향이 경상북도 성주 한개마을이다.

성산 이씨 집성촌 한개마을

영남은 남인 땅이다. 임진왜란 전 기축옥사로 실각한 남인들이 낙향해 권력을 비판하며 날을 세웠던 땅이다. 이석문 또한 남인이었다. 과거에 급제했으되 한직을 전전하는 그를 노론 측이 설득했다. "시의(時議)를 따르면 출세길을 보장하리라."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영남에 사는 탓에 시의를 알지 못한다." 그 고집이 시의를 이겼다. 고집은 결국 곤장 50대로 이끌고 그를 낙향하게 만들었다.

이석문이 사는 한개마을은 대포리(大浦里)라고도 했다. 큰(한) 나루(개) 마을이라는 뜻이다.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지금도 옛 모습이 남아서 돌담길은 등록문화재 261호로, 마을 전체는 중요민속자료 255호로 지정돼 있다. 마을 앞은 들판이 넉넉하다. 뒷산은 그윽하다. 사드(THAAD)가 들어오면서 성주가 시끌시끌하지만 한개마을은 시류와 무관하게 그 가운데 앉아 있다.

북으로 문을 내니, 북비공(北扉公)

그런데 한개마을에는 남인과 노론이 공존했다. 같은 문중이라도 이념이 달랐고, 이념이 다르면 동문이라도 왕래가 없었다. 이석문이 살던 집 앞에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촌 이석구가 살았다. 노론이었다. 그런데 그 집을 수시로 찾아오는 노론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대문 앞을 지나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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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 한개마을에는 북쪽으로 난 싸리문이 있다. 사도세자를 옹호하다 파직된 이석문이 살던 집에 있다. 거들먹거리는 노론 보기 싫다고 남쪽 대문을 뜯어버리고 만든 문이다. 양반이 뭔지 알고 싶다면 한개마을에 꼭 가본다. /박종인 기자
하여 이석문은 그쪽 문을 뜯어서 북쪽 담장에 싸리문(扉)을 열었다. "시류에 아첨하는 무리와 접하기 싫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대문을 향해 절하며 사도세자를 기렸으니, '지금까지 그를 이름이나 호로 부르지 않고 모두 북비공(北扉公)이라 부른다(至今人稱公不名且不號而輒曰北扉公北扉公云).'(이남규·1855~1907·〈수당유집·修堂遺集〉) 혈연을 내칠 정도이니 언뜻 보면 냉혹한 정치가로 읽을 수도 있고, 권력 찾아 몰려다니는 정치꾼에 대한 냉소로도 읽을 수 있겠다. 이석문은 귀거래사 옆에 '無愧心(무괴심)'이라 적어놓았다. 부끄러움 없이 살라는 뜻이다.

한개마을 사람들

이석문의 증손에 이원조(1792~1871)가 있다. 호는 응와(凝窩)라 한다. 응와 이원조는 천재였다. 열일곱 살에 서울로 올라가 과거에 붙으니, 영남 시골에서 온 아이의 소년등과를 모두 놀라워했다. 등과 2년 뒤 순조 임금이 묻는다. "네가 스스로 지은 글인가?" 과거 시험장 자리 잡아주는 놈, 글 지어 주는 놈, 글씨 써 주는 놈 모두 따로 부리며 시험 보는 졸렬한 당시 세태를 잘 알고 있기에 묻는 말이었다. 놀라움은 거기까지였다. 시골 촌놈에, 남인이었으니까.

남인이라는 이유로 셀 수 없는 한직을 맡으며 벼슬 생활을 한 이원조는 학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후손에게 남긴 말은 '讀書種子(독서종자)'였다. 글 읽는 씨앗이 되거라. 시류를 좇아 살면 끝없이 방황하니, 진리에서 답을 찾으라는 말이다.

그래도 인간이었는지라, 은퇴 후 만년에 조정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서 새해 포부를 누가 묻자 이리 말한다. "올해에는 나도 노론이 한번 되어봤으면 좋겠소." 이원조의 학풍은 조카 한주 이진상(1818~1886)으로 이어져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한주학파의 뿌리가 되었다.

2017년 한개마을

이석문의 고택에 걸린 현판. '讀書種子室(독서종자실)'이라 적혀 있다.
이석문이 대문까지 옮기며 쳐다보지도 않았던 앞집에는 이원조의 10촌 이원규가 살았다. 역시 노론이었다. 이원규가 죽던 날, 아내 순천 박씨에게 이리 유언을 했다. "後家三子(후가삼자)." "뒷집 셋째 아들을 양자로 삼으라"는 뜻이다. 아내는 남편 염을 하기도 전에 담장을 넘어 응와의 집에 석고대죄를 하며 양자를 청했다. 그리하여 이원조의 셋째 아들 구상이 그 집 양자로 가고, 두 집은 화해를 했다.

이석문이 만든 싸리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증손 이원조가 살던 집도 남아 있다. 이원조가 사랑했던 조카네 한주 종택도 남아 있다.

21세기 한개마을 방문객에 남인과 노론은 없다. 그냥 대한민국 시민이다. 그런데 오는 사람들 저마다 자기네 가문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북비 이석문과 응와 이원조가 살았던 그 집, 응와고택을 지키는 이수학(79)이 이리 말하곤 한다. 북비의 8대손이다. "머리에 든 지식 많다고 양반이 아니 고 무식하다고 상놈이 아니다. 할아버지를 들먹이며 자기네가 양반이라고 하는데, 정치를 잘한다고 하여, 권력을 오래 잡았다고 하여 양반이 아니다. 염치와 도리를 지키고 할 바를 하면 그게 바로 양반이다."

입 발린 수사(修辭)를 신념이라 하고, 낡은 족보에 적힌 조상 덕을 자기 것인 양 떠드는 21세기 양반들은 고개 숙여 북쪽으로 난 싸리문을 들어가볼 일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8/2017092800049.html
 

[박종인의 땅의 歷史 일 중독자 세종 사후 19년, 그 무덤을 옮겼더니…

[91] 세종대왕릉 영릉과 성주 왕자 태실의 비밀

'성군' 칭송받는 세종대왕, 태종이 걱정할 정도로 비만에 고기 편식 즐겨… 운동 않는 저질 체력
스스로 일에 중독된 임금… 요로결석… 안질… 당뇨병… 관료들도 과로에 시달려
사후 왕실에 변고 잇따라… 맏아들 문종은 요절
둘째아들 수양은 쿠데타… 조카 단종 죽이고 다섯 형제도 함께 죽여
잇단 흉사에 이계전, 이인손 묘 옮기고 여주로 왕릉 이장 '조선 역사 100년 연장'
왕자들 태실 조성 때는 이장경 무덤 강제 이장

박종인의 땅의 歷史
뚱뚱한 우리 임금님

친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냉정한 권력자 태종이지만, 아들 건강에 관한 한 그저 아버지였다. 왕위를 물려받은 셋째아들 세종이 육식만 밝히는 데다 운동도 하지 않는 책벌레이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왕이 되었으니 직접 말은 하지 못하고 신하들을 불러 따로 조언을 한다. '내 아들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습니다. 절대로 채식은 안 합니다.' '내 아들은 노는 걸 좋아하지 않아 뚱뚱해졌으니 운동을 시켜야 합니다(主上不喜游田 然肌膚肥重 須當以時出遊節宣).' 그리하여 성군(聖君) 세종대왕은 왕위 등극 두 달 만에 아버지를 따라 강제로 사냥과 군사훈련에 참가해야 했다.

임금님 수라상과 건강은 이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가뭄에 절식하겠다는 세종에게 의사들이 이렇게도 말한다. "'내 아들은 고기나 생선 없이 찬을 줄여 내면 먹지 않는다'는 태종 임금 말씀이 귓가에 쟁쟁합니다. 어찌 이러십니까."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루에 네 끼를 먹는데, 이걸로 족하다."

채식 또한 편식을 했다. 성현(1439~ 1504)이 쓴 용재총화에 따르면 '지금까지 궁궐에 가득 찬 앵두는 문종 임금이 손수 심은 것이다.' 왕세자 시절 문종이 후원에 손수 심은 앵두를 아버지 세종에 올리니, "바깥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世子)의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며 기뻐하였다.(문종실록)

53년 인생, 재위 32년 동안 세종은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행했다. 편식을 줄이고 공부 또한 조금만 게을렀다면 환갑 지나고 고희 지나 더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태종이 '장엄하고 엄중한(莊重)' 사람이라 평했던 아들이었지만, 건강을 돌볼 줄 몰랐다.

고생하는 관료들

최고 권력자가 건강을 팽개치고 국사를 돌보는데, 그 신하들이 게으를 수가 없다. 황희 정승 사직서 제출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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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왕릉인 영릉. 세종은 셀 수 없이 많고 판단할 수 없이 큰 업을 이룬 왕이다. 하지만 후손들 가족사는 비극적이었다. 결국 서울 헌릉 옆에 있던 세종릉은 19년 만에 이곳 영릉으로 이장됐다. /박종인 기자
1427년 음력 10월 7일 부모상을 당해 3년 동안 휴직계를 낸 정승 황희를 100일 만에 업무에 복귀시켰다. 황희는 64세였다. 11월 27일 세종은 세 번 복직 명령 철회를 신청한 황희를 기어이 복직시키며 직접 불러 고기를 먹였다. 황희는 결국 "어찌 감히 따르지 않으오리까"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자리에서 나아가 울면서 고기를 받아먹었다. 세종은 "앞으로 국정에 관계되는 이가 아니면 상중에는 복직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5년 뒤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세종은 "갑자기 물러가 한가롭게 지내기를 청하는가"라며 거부했다.(세종실록)

7년 뒤 1439년 황희가 도승지 김돈을 시켜서 다시 사직의 뜻을 올렸다. 김돈이 "황희가 아래로 피를 흘리고 귀와 눈이 어둡다고 한다"고 넌지시 보고했다. 세종은 "진짜 그러한지 직접 봤나"고 따져 물었다. "귀는 어두우나, 정신은 혼미하지 않은 듯…"이라 우물쭈물하는 김돈에게 세종은 황희의 재택근무를 명했다. 황희 나이 76세였다. 1449년 5월 가뭄이 들었다. 황희 나이 여든여섯이다. 황희가 말했다. "나이가 구십에 가까운데 공이 없이 월급만 받으니 하늘이 노한 것이오. 그러니 사직서를 받아주시길." 이 또한 거부됐다. 세종은 그해 10월에야 은퇴를 허가했다. 이듬해 세종이 죽었다. 2년 뒤 황희가 죽었다.

1434년 12월 질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낸 판중추원사 허조(許稠)도 사직을 거절당했다. 5년 뒤 1439년 11월 21일 좌의정이 된 허조가 세 번째 사직서를 제출했다. 세종이 말했다. "근래 밤낮으로 근무하기에 병이 나은 줄 알았다. 그런데 과로가 병이 될 줄 몰랐다. 안심하고 몸 관리하시라." 사표는 반려했다. 실록에 따르면 허조는 한 달 뒤인 12월 28일 일흔한 살로 졸(卒)하였다. 세종 재임 기간 유능한 관료들에게 집안 상사(喪事)는 핑계가 되지 않았고, 고령과 질병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일이었다. 하지만 실록이나 다른 사료 어디에도 악덕 고용주급인 세종의 부당 노동행위에 대해 악담 한마디 찾을 수 없으니, 최고 지도자 스스로 보여준 덕목과 업적이 장중하고 큰 덕이다.

'종합병원' 같았던 세종

그 결과 늙은 관리들은 병에 시달렸다. 최고 지도자 세종은 심했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털어놓은 병만 다섯 가지였다.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팠고(그래서 별명이 단족(短足)대왕이었다), 등에 종기가 나고, 목이 자주 마르는 당뇨병이 있었고, 바늘로 찌르듯 아파져 오는 요로결석을 앓았고, 왼쪽 눈을 다쳐 안대를 했으며, 오른쪽 눈 또한 한 걸음 밖 사람 형체만 알아볼 정도였다.(세종실록, 세종 21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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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을 조성하며 이장한 이인손(위)과 이계전의 묘. 조정에서는 이 문중들에 크게 사례를 하고 묘를 옮기도록 했다.

세종이 마흔다섯 살인 1442년 겨울 창덕궁에서 대소동이 벌어졌다.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창덕궁(昌德宮)에서 거애(擧哀)하기를 무릇 3일 동안 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4년 11월 18일) '거애'는 장례 때 곡(哭)을 했다는 말이니, 모두가 세종이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병으로 누웠다는 말이다.

1450년 2월 15일 영응대군 집에서 생활하던 왕이 반역범과 강력범을 제외한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틀 뒤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했던(終始以正)' 왕이 훙(薨·왕의 죽음)하였다.(세종 32년 2월 17일) 쉰세 살이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이어지는 변괴와 천장(遷葬)

세종이 죽고 조정에서는 "아버지 가까이 묻으라"는 유언에 따라 태종 무덤인 헌릉 옆에 먼저 죽은 소헌왕후와 합장됐다. 맏아들 문종이 왕위 계승 2년 만에 요절했다. 38세였다. 1457년 9월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장남 의경이 가위에 눌려 죽었다. 열아홉 살이었다. 두 달 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였다. 열여섯 살이었다. 수양은 형제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도 죽였다. 수양의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형인 양녕과 효령이 살해를 부추겼다.

왕이 된 수양대군은 평생 피부병을 앓다가 51세에 죽었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가 아들을 낳다가 죽었다. 아들도 곧 죽었다. 예종도 열아홉 살에 요절했다.

소름 끼치는 변고의 원인으로 사람들은 세종의 묫자리를 꼽았다. 흉지라는 것이다. 결국 예종이 요절하기 전 세종릉의 이장이 결정됐다. 예종 즉위년 1468년 12월이다.

1급 지관들이 전국을 뒤져 찾아낸 땅이 지금 세종 능이 있는 경기도 여주 능서면 왕대리였다. 최고의 지관 안효례가 뒤지고 또 뒤져 제왕의 땅을 찾아내고 보니, 거기에 목은 이색의 후손이자 세조 반정을 도운 공신 한산 이씨 이계전과 역시 공신인 광주 이씨 이인손의 묘가 있지 않은가. 실록은 두 가문의 후손에게 지극 정성으로 사례를 하고 세종을 천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69년 3월이다. 안효례가 찍은 자리는 이계전의 묘였고, 이인손의 묘는 그 옆이었다.

이인손 문중에는 이런 말도 전한다. '이인손이 후손에게 일렀다. 내가 죽으면 여기 묻되, 묘 앞 개울에 다리를 놓지 말고 재실이나 사당 따위 건물도 짓지 말라고. 그런데 명당 덕에 가문이 번성하자 후손들이 큼직한 재실을 지어놓으니, 훗날 소낙비를 만난 지관 안효례가 비를 피하러 돌다리 건너 들어간 건물이 그 재실이요 거기서 본 언덕이 천하명당이었다.'

풍수가들에 따르면 '다리 짧은 대왕이 영원히 쉴 자리(短足大王 永乏之地, 단족대왕 영핍지지)'라는 비기가 무덤 속에서 나왔고, 영릉 천장으로 인해 조선 왕조가 100년 연장됐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이인손과 이계전의 묘는 각각 여주 땅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한산 이씨 이계전의 묘는 연산군 시대 폐비 윤씨 사건에 후손이 연루돼 봉분 파괴라는 횡액을 겪기도 했다. 세종은 죽어서 본의 아니게 두 이씨 가문에 민폐를 끼친 권력자가 되어버렸다.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자식 복이 많은 세종은 18남 4녀 가운데 아들들 태(胎)를 모아 한곳에 묻었으니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이다. 태실을 둠으로써 지역 세력가들을 위압하는 효과를 거뒀기에 역대 왕들은 모두 태실을 각처에 두었다. 맏아들 문종을 뺀 열일곱 왕자와 손자인 단종 태실이 있다. 열여덟 개라야 옳은데, 실제로는 열아홉 개다. '塘(당)'이라고 이름만 적힌 표석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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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에 있는 세종대왕자태실. 가운데 있는 비석은 세조의 태실이다.
나중에 단종이 된 손자 홍위가 태어나자 세종은 그 태를 성주에 묻으라 명했다. 조정에서 풍수를 담당했던 사람은 태종의 서녀 숙혜옹주의 남편인 성주 이씨 이정녕이다. 세종의 서매제다.

그런데 하필이면 성주 태봉산에서 찾아낸 명당자리에 이정녕의 조상 이장경의 무덤이 있었다. 이정녕은 조상 묘가 있다는 사실을 누락하고 명당이라 보고했다. 차곡차곡 세종 아들들 태실이 그곳에 들어섰다. 훗날 보고 누락 사실이 발각됐다. 세종은 즉각 이장경 묘의 이장을 명했고, 이정녕은 해임됐다. 매제라 귀양은 면했다.

세조 태실 또한 이곳에 있다. "왕이 되셨으니 태실을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하들 주청에 세조는 "형제는 같이 있어야 한다"며 불허했다. 세조 태실 반대편 끝에 조카 단종 태실이 앉아 있다. 수양대군에 반대한 다섯 동생 태실 석물들은 계곡으로 던져지고 파묻혔다. 성군 세종에 얽힌 풍수 이야기였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14/2017091400087.html


[박종인의 땅의 歷史 무능한 정권이 자초한 전쟁… 백성들의 붉은 피

[90] 강화도 경징이풀의 비밀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한겨울 47일간 벌어진 병자호란
최고 지도자 인조와 인조반정 공신들… 북방에서 힘 키운 여진족을 오랑캐라 무시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 자기를 멸시한 조선 정복 준비
남한산성 들어간 지도자들 적 앞에서 춤추며 明 경배
功臣 출신 사령관 김류, 부하들 사지로 내몰아
강화도 수비 대장 김경징, '내 아버지 군수품'이라며 군사들 맨주먹 출정
나라는 망했지만 권력층 여전히 明 숭배
강화도 갯벌에는 백성들 피처럼 붉은 나문재풀 한가득… '경징이풀'이라며 원망

1636년 겨울 47일 동안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전쟁,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한다. 비현실적으로 무능하고 이기적인 권력자들 탓에 고생한 백성들 이야기다. 강화도 갯벌을 뒤덮은 나문재 풀밭이 저리 붉게 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40년 전 압록강변

임진왜란 와중인 1596년 음력 2월 13일 명나라 사신 여희원과 조선 통역사 하세국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 전해 조선 영토 안에서 인삼을 캐다 벌어진 여진족 27명 살해 사건에 대한 협상단이다. 협상단이 3열로 서 있던 보병 6000여명을 사열할 무렵 사령관 구령에 맞춰 3000여 기마군이 일제히 부동자세로 정렬했다. 협상단이 흠칫했다. 전쟁 초 "왜적을 물리칠 원군을 보내주겠다"고 했던 여진족의 청이 떠올랐다. 명과 조선은 "오랑캐 진위를 알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었다.

여진족 추장 노을가적(老乙可赤)이 말했다. "호인(胡人)이 함부로 인삼을 캤으니 우리가 먼저 잘못을 범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사람이 마음대로 호인을 죽였으니 어찌 분개한 마음이 없겠는가. 그 원수를 갚고자 한다."

간이 콩알만 해진 협상단 앞에 추장 노을가적이 몸을 낮춘다. "천조(天朝·명나라) 어르신이 이처럼 누추한 곳에 왕림한 것은 전고에 없었던 경사다. 내 어찌 감히 함부로 병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범하겠는가." 협상단 얼굴에 미소가 올라오던 그 순간 분을 삭이던 추장이 소리를 높였다. "풀 한 뿌리를 훔치는 게 죄가 얼마나 크다고 다 죽인단 말인가. 일찍이 군사를 동원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조-명 협상단 얼굴이 흙빛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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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도 갯벌에는 붉은 나문재 초원이 많다. 해 뜰 녘이면 하늘 나는 백로 떼와 함께 선경을 이룬다. 이 붉은 선경 속에 380년 전 벌어진 병자호란의 비밀이 숨어 있다. /박종인 기자
침묵을 깨고 여진 추장이 결론을 내렸다. "지금 천조의 명령이 있으므로 중지한다." 협상단은 오랑캐 추장 하나 잘 구워삶았다고 안도하며 다시 압록강을 도강했다. 임진왜란은 여진의 도움 없이 종료됐다.

그 며칠 전 이 추장은 선물을 들고 찾아온 조선 사신 김희윤에게 "나라 대 나라로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제안은 거절당했다. '희윤은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말을 빨리 달려 되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2월 1일) 이 오랑캐 추장이 훗날 명을 멸망시키고 대청 제국을 건설한 청 태조, 누르하치다.

청을 오랑캐라 배척하다

김희윤의 두려움은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조는 명나라 은혜를 잊지 못했다. 명나라는 그때 군사를 일으켜서 조선을 돕지 않았던가. 전쟁 당시 왕이던 선조는 이순신 '따위' 조선 장수들과 의병 대신 황제국 명나라에 모든 공을 돌렸다.

그때 명나라 인구는 1억명 정도였다. 만주 땅 여진족은 다섯 부족 다 합쳐 100만명 정도였다. 그 무렵 걸출한 추장 누르하치가 여진족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전쟁 후 왕이 된 광해군은 국가 생존을 위해 이 새로운 세력에 친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명에 대한 배신자라는 핑계로, 그때 야당 세력이던 서인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등극시켰다. 쿠데타 명분이 친명(親明)이었다. 인조 또한 당연히 친명이었다. 친명은 즉 배청(排淸)이었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1626년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된 홍타이지는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명나라 잔당 모문룡을 조선이 보호하고, 교역 요청을 거듭 거부한 데 따른 보복이었다. 강화도까지 도망갔다가 올라온 인조 정권은 배청 정책을 강화했다. 문신(文臣)들은 전쟁 불사를 외쳤고, 무신(武臣)들은 협상을 요구했다. 인조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반정 공신인 문신들 말을 따라야 했다.

전쟁의 징조들

1636년 2월 후금 권력자 용골대와 마부대가 조선에 입국했다. 가지고 온 서류에 인조 정권이 경악했다. '후금이 황제국임.' '용골대를 죽이고 머리를 잘라 명나라로 보내자'는 상소가 올라왔다. 2월 26일 사신 일행이 창덕궁을 찾았다. 조선 정부는 창덕궁 금천교 옆에 천막을 쳐놓고 그리 인도했다. 푸대접에 분을 삭이고 있는데, 강풍에 천막이 날아갔다. 중무장한 궁궐 수비대가 천막을 에워싸고 있었다. 용골대와 마부대는 서둘러 원대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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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사령관 김류가 어이없는 작전으로 군사 200명을 몰살시킨 북문. 훗날 이 문에 전승문(全勝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잊지 말자 6·25’라는 구호와 비슷하다.
전쟁 냄새를 맡은 조선 정부는 3월 1일 국경 지역에 '오랑캐와 절교하니 방어 태세를 갖추라'고 왕명을 내렸다. 3월 7일 왕명 문서를 들고 가던 전령이 원대 복귀 중이던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 4월 11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심양에서 열린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조선 사신 두 사람이 참석했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는데, 두 사람은 절을 하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이 둘에게 '형제국을 무시한 행위'라는 국서를 들려 보냈다. 조선 정부는 국서를 가지고 온 두 사람을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라며 귀양을 보내버렸다.

5월 26일 인조가 교서를 내렸다. "우리 국토가 수천 리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6월 17일 또 내린다. "우리는 명의 동쪽 신하국으로, 명이 땅을 잃었다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 하지도 않는 정권이었다. 그해 10월 청 태종이 선언했다. "11월 25일 전 화친을 결정하라. 아니면 동정(東征)하리라. 나는 큰길을 통해 곧장 경성으로 향할 것인데, 산성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귀국이 믿는 것은 강화도지만 내가 팔도를 유린하면 일개 섬으로 나라가 되겠는가. 귀국 유신(儒臣)들이 붓을 들어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청 태종이 말하는 그대로 전쟁이 시작됐고, 끝났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터졌다.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10여개 성은 그대로 놔두고 청군은 순식간에 서울로 진입했다. 청 태종 예언대로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그 속도에 눌려 숭례문 대신 시체들을 운반하는 문인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제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일을 나열해본다.

적 앞에서 춤춘 임금과 세자

산성에 들어간 지 13일째. 성 안에 말 먹일 풀이 떨어져 말들이 굶어 죽었다. 그 말을 거둬 군사들이 먹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성 밖에 있는 청군에 술과 소를 대접했다. 관료들은 "고위직을 보냈다가 억류되면 창피하니 아랫사람을 보내자"고 했다. 소 두 마리와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가지고 하급 관리가 갔다. 청 태종이 말했다. "굶주린 그대들이 나눠 먹어라. 팔도의 술과 고기는 우리 맘이다." 관료들은 "술을 보내자는 놈 목을 베자"고 주장했다.(인조실록) 심열(沈悅)이라는 유생이 화친하는 계책을 세우기를 청했다. 조정이 격분해 상소문을 불살라버렸다.

12월 29일 전시 사령관 김류가 산성 북문 밖에서 전투를 벌였다. 적은 싸우려 하지 않고 소와 말을 두고 물러났다. 김류가 비장 유호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 베게 하였다.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였다.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갔다. 매복한 적에게 200명이 몰사했다.

11일 뒤 밤에 한 장교가 성 밖에서 적의 목을 베어 들고 왔다. 김류가 목을 받아 인조에게 올리자 옷감 세 필을 상으로 주었다. 머리에 피가 한 점 없어 기이했다. 잠시 뒤 보니 북문 전투에서 적에게 죽은 사람 목이었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연려실기술) 김류가 왕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구했으나 왕은 그대로 두었다.(인조실록)

김류는 인조반정 일등공신이다. 또 다른 일등공신인 조선군 총사령관 김자점은 청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 또한 전후 무사했다.

설날이 되었다. 인조는 명나라 수도 북경을 향해 예를 올렸다. 망궐례라고 한다. 망궐례 격식을 두고 관료들끼리 난상토론을 벌인 뒤 임금과 세자 부자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청 태종은 산성 동쪽 벌봉에서 대포를 겨누고 지켜보고 있었다.(인조실록) 이튿날 청 태종이 사신에게 말했다. '자식이 거꾸로 매달린 듯 위급한데 아비로서 구원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아비처럼 섬기던 명이 어떻게 너희를 구원할까?'(연려실기술) 정권을 창출한 공신은 무능력해도 개의치 않았고, 중화기로 무장한 적 앞에서 최고 지도자가 춤을 추었다. 전쟁이 되겠는가.

백성을 사지로 내몬 야전사령관

경기도 가평 조종암에 새겨져 있는 선조 어필 '萬折必東(만절필동)'. '만번 구부러져도 명나라를 섬기리'라는 뜻이다.
김경징은 남한산성 사령관 김류의 아들이다. 그리고 강화도 수비 총책임자였다. 그런데, '…(김포 나루에서) 경징이 배를 모아 그의 가속과 친구를 먼저 건너가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사족 남녀(士族男女)가 수십 리나 뻗쳐 있었으며, 빈궁 일행이 나루에 도착해도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한 채 이틀 동안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었다. 사녀들이 온 언덕과 들에 퍼져서 울부짖다가 적병이 들이닥치니 차이고 밟혀 혹은 끌려가고 혹은 바닷물에 빠져 죽어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으니 참혹함이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연려실기술) 쓰러진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경징아, 경징아 네가 이럴 수 있느냐…'

김경징은 추위를 이긴다는 핑계로 술을 마셨고, "바다가 꽁꽁 얼었으니 배가 뜰 수가 없다"며 청군의 공격을 무시하였다. 청군이 바다를 건너자 "우리 아버지가 마련한 무기이니 함부로 쓸 수 없다"며 군사들을 맨손으로 출정시켰다. 달아난 김경징 대신 부관 강진흔이 분전했으나 결국 청나라 전군(全軍)이 성으로 들어왔다.

강화도 함락 소식과 함께 남한산성 농성전도 끝났다. 47일 만이다. 조선 국왕 인조는 잠실 한강변 삼전도로 나가서 땅에 이마를 찧고 군신의 맹세를 했다. 전쟁 후 강진흔은 패전을 이유로 유배형을 받았다가 벌이 가중돼 처형됐다. 군졸들은 친척을 잃은 것같이 슬퍼하였다.(병자록)

1684년 경기도 가평군수 이제두는 가평 조종천변 바위를 조종암이라 이름 붙이고 글 자 22자를 새겼다. 그중에 '萬折必東 再造藩邦(만절필동 재조번방)'이라는 선조 어필이 눈에 띈다. '황하가 일만 번 굽이쳐도 동쪽으로 흐르니, 명나라가 도와서 나라를 되찾았네.' 명이 망하고 40년이 지난 뒤였다. 강화도 갯벌에는 나문재가 가득 피었다. 노인들은 붉은 나문재를 '경징이풀'이라 부른다. 전쟁은 끝났으되 그 상처는 매우 깊었고, 여전히 붉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07/2017090700054.html


[박종인의 땅의 歷史]  만주로 갔느니라… 목숨을 바쳤기에 떳떳했느니라

[89] 만주로 떠난 이회영 형제와 투사의 아내 이은숙

1910년 경술년, 이회영 6형제는 600억대 재산 팔아 만주로 집단 망명
안동 선비 이상룡 등 집단 망명한 동지들과 신흥무관학교 설립 주도
한국 독립투쟁사의 중심… 전재산 독립자금으로 탕진… 형제… 자식들… 모두 죽어
무장투쟁 노리던 이회영은 조카 등의 밀고로 고문사… 동생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
아내 이은숙 "살아온 모든 게 夢幻"

박종인의 땅의 歷史
이은숙의 혼례

1908년 10월 20일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열아홉 살 규수 이은숙이 마흔한 살 먹은 사내 이회영과 서양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첫 아내와 사별한 이회영은 두 번째 결혼이다. 평안도 암행어사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이다. 2년 전 별세한 고관대작 가문에 출가했으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비단옷 입고 살겠지, 라고 남들은 생각했다.

2년 뒤 이회영 집안은 물론 시아주버니 건영과 석영과 철영, 시동생 시영과 호영까지 여섯 형제 집안이 문중 땅 수백만 평을 일시에 다 팔고서 한꺼번에 만주로 떠났다. 식솔이 예순 명에 달했고 마차가 열 대가 넘었다. 1910년 경술년 12월 30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고 넉 달이 지난 엄동설한 동지섣달이었다. 단순한 이사 혹은 이민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집단 망명이었다.

경술국치와 집단망명

1910년 8월 29일 이름만 남아 있던 나라, 대한제국이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고관대작과 지식인은 일본에 빌붙어 권세를 얻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투쟁을 택했다. 민영환처럼 1905년 을사늑약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고 매천 황현처럼 경술년 국치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아내 이은숙과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이회영의 유해는 없다. 허묘다. 이회영은 전재산을 털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여섯형제의 넷째다. /박종인 기자
'스스로 죽어서 일본을 이롭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지식인들은 망명을 택했다. 을사늑약 때 거리에서 바위에 머리를 찧어 자살 미수에 그쳤던 이상설이 그랬고(백범일지), 경상도 안동의 지사 석주 이상룡이 그랬다. 이상룡은 궁궐 같은 99칸짜리 임청각을 버리고 온 가족이 만주로 떠났다. 이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총독부 요시찰 인물, 불령선인(不逞鮮人) 목록에 올랐다. '푸테이(不逞)'는 '고집 세고 반항하는 놈'이라는 뜻이다.

대신 '착한' 조선인에게는 상을 주었다. 합방에 공헌한 고관대작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돈을 내려주었다. 지역 양반들에게도 효자, 효부상을 듬뿍 내렸다. 온 나라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재인용). 고관대작 가문에 갑부였던 이회영 형제는, 망명을 택했다.

이회영 형제의 망명

'사람들은 우리를 공신의 후예라 한다. 괴변으로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명문 호족으로서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지 않고 구차히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왜적과 혈투하시던 조상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하니, 여러 형님과 아우님들은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 형제들을 모아놓고 이회영이 이리 말했다.(이관직, 〈우당 이회영 실기〉) 이회영 형제는 조선 초 정승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다. 모두가 그를 따랐다.

우당 이회영(1867~1932).
우당 이회영(1867~1932).
먼 친척 백부인 이유원에게 양자로 간 둘째 이석영은 갑부였다. '양주 가오실에 별장이 있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80리였다. 80리 왕래하는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녔다.'(황현, 〈매천야록〉)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왕현종에 따르면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에 있던 땅은 640정보, 192만 평에 달했다. 서울 명동에도 형제들 땅이 산재했다. 1960년대 한 조사에서 60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이 나온 적이 있다.

그 땅을 팔고, 못 판 땅은 버리고서 이 갑부 집안 6형제가 만주벌 북풍 속으로 떠난 것이다. 월남 이상재가 이렇게 말했다. "6형제 전 가족이 한마음으로 결의했으니, 동포의 모범이 되리라."(우당 이회영 실기)

처분하지 못한 명동 땅은 총독부 토지조사를 거쳐 남의 땅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주소로 경기도 경성부 황금정 2목 164번지 591평도 이 형제들 땅이었다. 현재 을지로 2가 164번지 부근이다. 서울 YWCA회관 북쪽이다. 회관 소공원에는 이회영의 흉상이 서 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독립운동에 조직과 자금은 필수다. 이회영 형제가 바로 그 일을 했다. 형제는 이듬해 4월 안동 선비 석주 이상룡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 경학사를 설립했다. 밭을 갈아 생산을 하고(耕) 교육을 하며(學) 군사력을 키우는(武) 결사체였다.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은 이회영, 재무부장은 오랜 동지인 이동녕이 맡았다. 이상룡이 쓴 취지문은 이렇다. '한 삼태기 흙이 쌓여 태산을 이룬다. 힘을 축적해서 끝장에 대비할 것이다.'(우당 이회영 실기)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이석영의 자금을 털어 구입한 인근 합니하 산속에 본격적인 독립운동 교육기관이 설립되니, 8년에 걸쳐 3500명에 이르는 항일투쟁 지도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같은 만주 항일투쟁의 불꽃을 지핀 운동 기지였다. 교장은 셋째형 이철영이 맡았다. 3·1 운동 이후에는 해마다 입교를 원하는 조선 청년이 600명에 이르렀다. 3년 만에 자금이 바닥났다.

독립투쟁의 중심에서

신흥학교 설립 후 자금난에 빠진 이회영은 1913년 서울에서 돈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다 1918년 이회영은 왕실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 망명을 기도한다. 일본의 귀족 작위를 거부했던 전 내부대신 민영달이 5만원을 댔다. 동생 이시영이 이 돈으로 북경에 고종 거처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20일 고종이 급서했다. 식혜를 들이켜고 죽었다고 했다. 독살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날 왕실 당직자는 이완용이었다. 훗날 사학자 이증복은 조선 남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을 독살범으로 지목했다. 또 다른 친일파 윤덕영이라는 설도 있다.

3·1운동 직전 이회영은 중국으로 돌아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회영은 "자리다툼에 분규가 끝이 없을 것이니" 행정조직이 아닌 투쟁본부를 만들자고 했다. 동생 이시영은 재무총장으로 임정에 참여했고 이회영은 무장투쟁노선을 걸었다.

이후 북경 자금성 북쪽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로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됐다. '그 당시 국내에서 마음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개 우리 집에 거주하게 됐다.'(이회영의 아들, 독립지사 이규창, 〈운명의 여신(餘燼, '남은 재'〉) 이규창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적으면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 인물사가 된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 노선사가 된다. 민족주의,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모든 노선이 이회영의 북경 거처를 거쳐 나뉘었다.(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간난과 고초, 죽음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백여 명의 대가족을 이끄는 모습은 만주 원주민들에게는 장관이었다. 중국 육필 마차가 거의 백 차가 되니 대부호의 이동이다. 부호의 호화로운 행렬쯤으로 짐작했으리라.(이규창, 〈운명의 여신〉)

대의를 좇는 남정네를 따라가니, 여자들 간난과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회영이 서울로 간 사이 이은숙은 마적 떼에게 총을 맞고 6개월 된 아들 규창은 얼굴을 화롯불에 크게 데였다. 그 몸으로 이은숙은 큰딸 규숙과 젖먹이를 안고 업고서 신흥학교 학생들 밥을 지었다. '죽을 쑤는 때면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이은숙, 〈서간도시종기〉)

가난을 피해, 대의를 좇아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형제들은 고단하게 살고 고단하게 죽었다. 자금을 책임졌던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맏형 건영도 병사했다. 신흥학교장 셋째 철영도 병사했다. 여섯째 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아들 대도 대부분 해방 전 중국에서 죽었다.

이회영의 두 딸 규숙과 현숙은 고아원에서 산 적도 있었다. 아들 규창은 함께 살던 단재 신채호가 준 옷을 뜯어 만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1925년 아내 이은숙이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조선으로 돌아갔다. 고무신 공장 급료와 옷 수선으로 번 돈을 보내면, 그 돈으로 가족들이 연명했다. 삶은 매우, 아주 매우 신산하였다. '귀한 집 부인들이 이 같은 고생은 듣지도 못했을 것이어늘, 그러나 여필종부의 본의를 지키는 것이다.'(서간도시종기) 그러나 그해 작별한 남편을 이은숙은 영영 보지 못한다.

이회영의 죽음

이회영은 백정기, 정화암 등과 의기투합해 남화연맹을 창설했다. 요인 암살이 주된 임무였다. 1932년 11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투쟁의 중심지로 다시 만주를 택한 이회영은 상해에서 대련 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런데 대련 항구에서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1월 17일 일본 경찰은 심문 도중 이회영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시신 인수를 위해 찾아간 딸 규숙은 혈흔이 낭자한 얼굴과 역시 혈흔이 묻은 옷을 보았다. 동지들은 이회영이 고문사했다고 확신했고, 이회영을 밀고한 사람이 있다고 확신했고, 찾아냈고, 처단했다.

이회영의 손자인 우당장학회 회장 이종찬(전 국정원장)이 말했다. "밀고자는, 우리 할아버지의 조카 이규서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은 이석영의 둘째 아들인 사촌형 규서를 동지들에게 고발했고, 동지들은 이규서와 공범 연충렬로부터 자백을 받고 처단했다. 이종찬이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창피하니 함구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역사는 떳떳해야 한다. 그때 우리 우국지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 투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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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상해 비행장에서 귀국을 기다리는 임정요원들. 가운데 키 큰 사람이 김구, 오른쪽 중절모를 쓴 노인이 이시영이다. 울고 있다.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은“이시영과 김구, 조완구(김구 왼쪽 중절모 쓴 사람)가 입고 있는 양복은 우리 아버지가 마련한 옷”이라고 기억했다. /우당기념관 제공
형제 가운데 다섯째인 이시영만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다. 이시영은 1945년 11월 9일 다른 임정 요원들과 상해 비행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눈물을 닦았다. 노혁명가, 노투쟁가가 울었다. 1948년 이시영은 대한 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다가 6·25전쟁 와중인 1951년 사퇴했다. 이시영은 서울 수유동 애국순국선열묘역에 묻혀 있다. 서울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이 있다.

1946년 귀국한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1966년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를 탈고했다. 첫 문장은 이러했다. '이영구의 과거나 현재는 모두가 몽환(夢幻)이라.' 이영구는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이름이다.
2조 원이 넘는 재산을 기꺼이 조국에 바쳤던 '이회영' 구성 및 제작= 뉴스큐레이션팀 오현영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31/20170831000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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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있는 서울 재동 83번지… 구한말 역사의 소용돌이 휩쓸고 간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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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동·서쪽 가회동과 옥인동은 모조리 친일파 손으로
헌법재판소 흰 소나무는 그 모든 것을 목격
다음 주가 경술국치 107주년

박종인의 땅의 歷史
재동에 사는 늙은이

18세기 후반, 서울 재동에는 덩치 큰 늙은이가 살았다. 붉은 얼굴에 구레나룻이 듬성듬성했고 귀밑까지 광대뼈가 뻗었는데 이마에 주름을 잡고 입을 열면, 그 목소리가 수십보 떨어진 담장 밖까지 들렸다. 사내는 글을 잘 썼다. 붓을 들면 책이 출판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필사해서 돌려보고 흉내를 낼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그때 임금인 정조가 이리 말한다. "요즈음 문풍이 이리 된 것은 모두 박아무개(朴某)의 죄다.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세상 문체가 이리 되었다." - 박종채, 〈과정록〉 열하일기는 사내가 청나라를 여행하고 쓴 기행문이고, 사내 이름은 연암 박지원이다. 정작 과거시험에 들어서는 답안지에 그림을 왕창 그려놓고 나오는 기행도 했다. 하여 벼슬은 보잘것없었다. 그런데 생각하는 바가 남달랐다.

백탑파와 18세기 조선

그 글 잘 쓰는 박지원이 젊을 적부터 집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대표적이다. 집에서 원각사 십층석탑이 보인다 해서 이들을 백탑파(白塔派)라 불렀다. 공통점이 있다. 오랑캐, 혹은 되놈이라 불렀던 북쪽 청나라에서 대오각성을 하고 나라를 개혁하려는 의지. 성리학과 허영에 절어 망가지고 있는 나라를 오랑캐가 습득한 신문물로 고치겠다는 말이다. 이들을 북학파(北學派)라 부른다.

그때 나라는 이랬다. '조선인은 너무 가난해서 비싼 서양 상품을 살 수도 없었다. 무기, 총, 가구, 포도주와 술은 너무 비싸서 독한 술로 조선 민중을 타락시킬 개연성이 없었다.'- 윌리엄 길모어, 〈서양인 교사 윌리엄 길모어 서울을 걷다〉(문소영, '못난 조선' 재인용) '중국이 사치로 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조선은 반드시 검소함 탓에 쇠퇴할 것이다. 물건이 없어 쓰지 못하면서 검소함이라고 한다.' - 박제가, 〈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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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헌법재판소에는 오래된 백송이 있다. 백송 주변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구한말 개화파가 이곳에서 태동하기도 했고 나라를 팔아먹는 모리배들이 이 땅을 밟기도 했다. /박종인 기자
북학파가 내건 기치는 이랬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되 새롭게 만들라. 서양은 물론이거니와 되놈도 왜놈도 부국강병으로 치닫는데 조선만 상거지 꼴이니 개혁과 개방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런데 1800년 북학파 주장을 인정했던 정조가 급사했다. 이후 북학파는 돌연변이 정도 취급받았다. 박지원은 1805년 재동에서 죽었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회고했다. "선친 문집을 발간하려다가 내용에 놀라 준비를 멈춰버렸다." 당대에 공개하기에는 북학파의 주장이 불온했다는 뜻이다.

재동에서 태어난 젊은이

박지원이 죽고 2년 뒤 재동 집에서 손자가 태어났다. 할아버지를 닮은 이 아이 이름은 박규수다. 재능이 격세로 유전돼, 박규수 또한 문재(文才)와 세계관이 남달랐다. 박규수 또한 재동 주변에 살던 야심 찬 양반 자제들을 불러 세상을 가르쳤다.

그 자제들 가운데 유길준을 받아준 인연은 특이했다. 조부 박지원과 유길준 고조부 유한준은 집안 묘지 이장 문제로 다투다 '백세의 원수'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라며 원수 집안이 되었다. 그런데 1871년 그가 홍문관 대제학 시절, 장원급제한 답안을 보니 작가가 유길준이 아닌가. 양가에서 "원수를 어찌!" 하는데, 박규수가 유길준에게 이리 말했다. "어른들이 풀지 못했던 감정을 우리가 풀어드린다." 둘은 목숨을 건 사제지간이 되었다.

손자 사랑방에서 오간 메시지는 조부 세대 때와 동일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단재 신채호는 이들의 대화를 '지동설의 효력'이라는 수필로 이렇게 묘사했다.

박규수가 벽장에서 지구본을 꺼내 김옥균에게 보였다. 박규수가 지구본을 한 번 돌리고선 가로되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디 정한 중국이 있느냐?" 개화를 주장하던 김옥균도 그때까지 중국을 높이는 것이 옳다 하는 사상에 속박되어 국가 독립을 부를 일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가 크게 깨닫고 무릎을 치고 일어났다. 박규수의 지구 돌림에 김옥균의 손바닥이 울려 혼(魂)이 돌았다. - 신채호, 〈지동설의 효력〉

신채호가 한 줄 덧붙였다.

"이 끝에 갑신정변이 폭발되었더라."

북학파가 개혁을 논하던 집, 그리고 손자 박규수가 옆집 사는 홍영식과 재동 골짜기 아래 살던 김옥균, 박영효와 서광범, 유길준과 함께 개화를 꿈꾸던, 커다란 백송(白松)이 서 있는 그 집터가 지금 서울 종로구 재동 83번지 헌법재판소 자리다.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이 응축돼 있는 공간이다.

개화파의 요람 재동

역관 오경석과 한약사 유홍기, 대감 박규수를 개화파 3인방이라 한다. 선배인 북학파 멤버는 재야 학자와 불우한 서자, 중인 출신이었다. 개화파에는 박규수라는 고관대작이 있었다.

1866년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는 대동강에 들어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다.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대원군 눈에 들었다. 박규수는 3년 뒤 서울 시장인 한성부 판윤과 형조판서에 겸직 임명됐다. 개화파 거물이 권력 한가운데에 진입했다. 역관과 한약사와 고관대작은 흰 소나무 아래 모여 신천지를 설계했다.

경복궁 동쪽 골짜기 아래 북촌마을 양반 자제들에게 이들은 세상을 가르쳤다. 선배 북학파가 좌절했던 이유, 불우한 권력 주변부 인사라는 약점이 이들에겐 없었다. 제자들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꿈꿨다.

그런데 재동 박규수를 찾아온 사람은 혁명가뿐 아니었다. 그리고 숱한 방문객 가운데 한 사람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달리 굴러갔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 이름은 이영(1809~1830). 조선 23대 국왕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다.

박규수와 효명세자

효명세자와 박규수가 교류했던 창덕궁 요금문.
효명세자와 박규수가 교류했던 창덕궁 요금문.
1825년 음력 5월 6일 할머니 수빈 박씨 사당인 경우궁에 효명세자가 참배했다.(순조실록) 효명세자는 창덕궁 후원에 있는 작은 집에서 주로 생활했다. 그리고 그날 효명세자가 재동 박규수 집을 찾았다. 걸어서 10분 거리다. 박규수는 열여덟 살이었고 세자는 열여섯 살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명성과 세계관을 알고 있던 그 세자가 그 가문을 찾은 것이다. 두 사람은 삼경(밤 11시~새벽 1시)까지 대화를 나눴고 이후 박규수는 궁궐을 수시로 드나드는 사이로 발전했다.

박규수의 아버지 박종채는 이렇게 기록했다. '기축년(1829년) 세자가 아버지(박지원)가 남긴 글을 올리라 분부했다. 훗날 반환된 책을 보니 책마다 접어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강구한 대목 중 자기 생각과 부합하는 게 있으면 표시를 해둔 것이다.'(과정록)

아버지 순조 뒤를 이어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였다. 지식인과 관료 모두가 대환영했던 미래의 개혁군주였다. 세상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시대였고 나라는 가난했다. 그런데 이듬해 세자가 스물한 살에 죽었다. 세자와 함께 개혁을 벼르던 박규수는 '환재'라는 자기 호의 앞글자를 굳셀 환(桓)에서 재갈 환(瓛)으로 바꿔버리고 20년 칩거에 들어갔다. 그 사이 순조가 죽고 일곱 살짜리 왕 헌종이 등극하고 허수아비 같은 철종이 왕이 되고 조선은 시대정신과 무관하게 역주행해갔다.

세자와 개혁사상가가 교류하던 후원 문은 요금문(曜金門)이다. 일제강점기 이리저리 찢겨나간 창덕궁 서쪽 담장에 숨어 있다. 굳게 닫혀 있다.

재동 83번지의 운명

그리 되었다. 좌절한 박규수가 죽고 8년 뒤 제자들은 급진 혁명을 일으켰다. 1884년 갑신정변이다. 3일 천하로 혁명은 끝났다. 김옥균은 망명 생활 끝에 암살됐다. 홍영식은 처형돼 시신이 갈가리 찢겼다. 나머지도 모두 해외로 달아났다.

홍영식 집안은 아버지 명에 의해 독약을 먹고 집단자살했다. 피칠갑으로 방치됐던 홍영식 집에는 이듬해 미국 선교사 겸 의사 알렌의 요청으로 제중원이라는 병원이 들어섰다. 역시 헌법재판소 부지 안쪽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박규수의 집은 역시 개혁파 인사로 훗날 독립협회 초대 회장이 된 안경수에게 넘어갔다. 안경수는 고종 부부를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려다 미수에 그치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1900년 돌아온 안경수는 평리원 재판장 이유인에 의해 고문으로 죽었다. 이유인은 고종과 민비에게 빌붙어 국정을 농락하던 무당 진령군의 수양아들이다. 박규수 집은 당시 경무사 이윤용에게 넘어갔다. 이윤용은, 이완용의 형이다. - 윤효정, 〈풍운한말비사〉

이후 재동 83번지는 병원이 들어서고, 여학교가 들어서고, 이제 국민의 법률 중병을 수술하는 헌법재판소가 되었다. 그 사이 흰 소나무는 망국과 전쟁과 해방과 나라의 부활을 모두 목격하며 저리 늙어버렸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박규수 집을 둘러싼 동네는 가회동이다. 일부만 언급해 본다. 가회동 1번지는 극악무도한 친일파 민영휘와 변절한 혁명가 박영효가 차지했다. 2519평이다. 두 사람은 일본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이다. 가회동 산1번지 임야도 두 사람 차지였다. 3만3500평이다. 10번지 3163평과 26번지 2708평 대지는 이완용 졸개 한창수, 31번지 5447평은 민대식이 가져갔다. 민영휘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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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 이 세 글자를 두고 이완용의 글씨라는 주장이 많다.
경복궁 서편 옥인동 산 2번지 임야 1만평은 윤덕영이 가졌다. 역시 친일파다. 자그마치 1만3평짜리 47번지 땅도 가졌다. 2번지 대지 646평은 이완용이 가졌다. 이완용은 19번지 2817평 땅도 차지했다. 두 필지 모두 네모반듯한 대지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애국청년 이재명이 명동에서 이완용을 칼로 열세 번 찔렀다. 두 군데만 결정타였다. 일본인 의사의 정성어린 수술 끝에 죽다 살아난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옥인동 19번지 저택에서 죽었다.

옥인동에서 사직동 건너에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웠다. 협회장은 안경수였다. 2대 회장은 이완용이었다.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게재돼 있다. "독립문 현판 글씨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세상은 북학파와 개화파 설계대로 굴러왔는가. 다음 주 화요일이 경술국치 107주년이다.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박종인의 땅의 歷史] 승전보를 보냈더니 조정은 장수 목을 베어버렸다

[87] 임진왜란과 해유령전투의 비밀

전쟁 대비 없던 조선, 임진왜란 초기에 갈팡질팡
의지 박약한 지도자 선조 "명나라 귀순이 나의 뜻"
해유령에서 육전 첫 승리… 지휘관 신각은 훈장 대신 참수
민간 약탈… 갑질 일삼던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 반란군이 일본군에 넘겨
"나만 살려주면 남도 땅은 명나라 마음대로 하라"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대, 반란 토벌… 일본군 퇴치
순찰사가 공 가로채… 정문부는 모반 혐의 옥사
명나라 사신 유원외 "고구려 때부터 강국… 준비 없기에 변란 자초"

1419년 조선 4대 왕 세종이 왜구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했다. 1449년에는 두만강 유역 여진족을 소탕하고 4군 6진을 설치했다.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무리를 단칼에 처단한 이 나라에 143년 뒤 전쟁이 터졌다. 임진왜란이다.

폭풍 전야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사절이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다치바나는 기행(奇行)을 남겼다. 상주에 도착해 목사 송응형이 기생 춤과 음악으로 접대하자 이리 말했다. "전쟁 속에 산 나야 그렇다고 쳐도, 노래와 기생 속에 아무 걱정 없이 지낸 당신 머리털이 희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다치바나가 서울에 도착하니 예조판서가 잔치를 베풀었다. 술잔이 돌고 다치바나가 후추 알들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기생과 악공들이 서로 다투며 줍느라 대혼란이 벌어졌다. 다치바나가 통역관에게 탄식했다. "너희 나라는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다.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류성룡·징비록)." 다치바나는 보았다. 대마도 정벌과 6진 건설 이후 100여 년 사이 망가진 스산한 조선을. 다치바나가 보고 들은 바는 고스란히 일본 정부에 보고됐다. 1586년, 임진왜란 발발 6년 전이다.

의지 없는 지도자, 선조의 도주

1592년 음력 4월 14일 대마도를 떠난 일본군 본진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튿날 동래부사 송상현은 분전 끝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서 죽음을 맞았다. 평화로운 시절 부산을 자주 찾아 안면이 있던 일본 장수 다이라(平調益)가 옷깃을 끌며 피하라고 눈치를 줬다. 송상현은 거부했다. 그가 죽은 뒤 다이라는 탄식하며 시신을 관(棺)에 넣어 성 밖에 묻고 푯말을 세웠다. 다이라의 상관인 대마도주 소요시토시(宗義智)는 송상현을 죽인 병사들 목을 베 예를 올렸다. 동래가 함락되고 문경이 함락되고 충주에서 신립이 8만 병사와 함께 죽었다.

4월 28일 최고 지도자 선조가 회의를 열었다. 선조가 발의한 안건은 한양 포기 여부였다. 수도를 포기한다고? 영의정 이산해는 그저 울기만 하다가 "옛날에도 피란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선조실록). 이틀 뒤 폭우 속에 울부짖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선조 일행이 임진강을 건넜다. 5월 초하루 선조가 강 건너 동파역에서 야전회의를 주재했다. 역시 안건은 피란 여부였다.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지도자 본심이 드러났다.

'내부(內附)'는 명나라 영토 요동으로 들어가 귀순한다는 뜻이다. 수도를 떠난 게 엊그젠데, 나라를 떠난다고?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승지 이항복은 찬성했다. 좌의정 류성룡은 거칠게 반대했다. 요동 망명은 무산됐다. 도주하는 내내 선조는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 손에 죽을 수는 없다"며 아쉬워했다.

시스템의 붕괴, 해유령 전투

음력 5월 7일 피란을 거듭하던 조선 정부 지도부가 평양에 도착했다. 그 사이 한강 방어선은 도원수로 임명된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이 맡았다. 한양 수비는 우의정 이양원이 담당했다. 바닷물처럼 밀려든 일본군 앞에서 도원수 김명원은 퇴각을 결정했다. 결사 항전을 외치던 부원수 신각 부대와 이양원의 한양수비대도 결국 흩어졌다. 경기도 양주에서 이들은 함경 남병사 이혼이 이끄는 병력과 극적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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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와 양주를 잇는 해유령 고개에 탑이 하나 서 있다.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전투를 기념하는 ‘해유령전첩비’다. 어이없게도 승리를 이끈 장수 신각은 조선 정부에 의해 참수됐다. 망가진 국가 시스템 탓이다. /박종인 기자

5월 16일 세 지휘관이 이끄는 조선 육군과 일본군 선발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양주와 파주를 잇는 해유령 고개였다. 일본군 70여 명 전원 사살. 임진왜란 육전(陸戰) 첫 승리였다. 사흘 뒤 승전보를 평양으로 보내고 기다리던 이들 앞에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이 도착했다. 선전관이 어명을 읽었다. "비겁한 장수 신각의 목을 쳐라." 부대원들 앞에서 신각이 목 잘려 죽었다. 달아난 도원수 김명원이 "무단 이탈한 신각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보고한 탓이다. 선전관이 남쪽으로 출발한 직후 신각이 올린 전승 보고서와 일본군 머리 70개가 평양에 도착했다. 또 다른 선전관을 급파했으나, 허공으로 달아난 명예와 흩뿌린 피, 땅에 떨어진 군사들 사기는 회복할 수 없었다.

민심 이반, 함경도의 반란

그즈음 함경도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주모자는 국경인(鞠景仁). 가담자는 함경도 주민들이었다. 전주 사람 국경인은 나라에 죄를 짓고 회령으로 쫓겨난 하급 벼슬아치였다. 7월 1일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회령에 접근하자 이들은 선조의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器物)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둔 뒤' 일본군에 넘기고 항복해버렸다(선조실록). 훗날 의병부대에 의해 타도될 때까지 이들은 회령 일대에서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주민들이 왕자들이 가는 길마다 일본군 보라고 왕자들의 행방을 적어 붙이고 다녔다"는 것이다.

두 왕자가 함경도로 간 목적은 근왕병 모집과 주민 위로였다. 그런데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들의 좋은 말과 보화를 보면 기필코 약탈해갔다. 적을 앞에 두고 백성들을 흩어지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見人善馬寶貨則必掠之望賊思散之民).'(이호민·오봉집(五峯集)) '민간을 겁박하고 수령을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侵撓民間逼責守令大失人心).'(권용중·용사일록(龍蛇日錄)) 엄혹한 전란 속에 갑질을 해댄 것이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어떤 왕자인가. 임해군은 '사람 죽이기를 초개같이 하다가 벌을 받으니 도성 안 백성들이 춤을 췄다.' 순화군은 '눈먼 여자의 이 열 개를 쇠뭉치로 깨고 집게로 잡아 빼 결국 죽게 하기도 했다(선조실록).' 전쟁 후에도 악행은 끝이 없었다. 아비 선조는 이들을 벌하라는 상소에 대개 귀를 닫거나 처벌을 불허하곤 했다.

각각 스물한 살, 열세 살에 불과한 이 무뢰한들에게 선조는 군사 모병과 주민 위무 책임을 맡긴 것이다. 반란은 자연스러웠다. 인질이 된 두 왕자는 오랜 기간 휴전 협상에 큰 걸림돌이 됐다. 휴전협상에 임했던 명나라 사신 심유경에게 임해군은 이렇게 말했다. "나만 풀어주면 한강 이남 땅은 마음대로 나눠 가지라(징비록)."

북관대첩

반란군을 제압하고 함경도를 수복한 전투가 북관대첩이다. 총사령관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였다. 정6품이니 그리 높은 직급은 아니었다. 주력부대는 의병이었다. 일본군과 국경인의 행패를 쓰라리게 겪은 주민들도 반란군에서 대거 이탈했다. 음력 9월에 거병한 정문부 부대는 10월 총공세에 들어가 반란군 지도부를 죽이고 적지를 속속 회복했다. 두 왕자를 적에게 넘긴 반란군 토벌이 첫 번째 목적이었으니, 참으로 대의명분에 충실한 전투였다. 실지 회복 또한 목적이었으니 이 또한 달성됐다. 그런데―.

정문부 묘소 아래에 있는 북관대첩비 복제비. 함경도 길주에 있던 비석은 1905년 일본군이 야스쿠니 신사로 가져갔다가 2006년 한국을 거쳐 북한으로 반환됐다.

'의병장 정문부의 전공(戰功)을 순찰사 윤탁연이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정문부의 부하가 왜군 목을 가지고 함경남도를 지나면 모두 빼앗아 자기 수하 군사들에게 주었다. 윤탁연이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에게 옷과 월동 장비를 주었으므로 그들이 조정에 돌아와서는 모두가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결국 종성 부사 정현룡이 함북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정문부는 급이 낮은 길주 부사에 임명됐다.

참고로 사관 박동량이 남긴 사초(史草) '기재사초'는 정현룡을 이렇게 기록했다. "종성부사 정현룡은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至有撫我則后虐我則讎 何使非臣何事非君)'라는 글을 쓰고 왜군에 항복하려다 글을 집어던지고 도주하였다."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했거늘"

6월 5일 평안도 안주에 도착한 선조가 명나라 장수 유원외를 접견했다. 유원외가 말했다.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었는데 근래에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이다(선조실록)." 해유령전투에서 신각과 함께 싸우다 참살을 목격한 함경 남병사 이혼은 임지로 복귀해 반란군과 전투 도중 전사했다. 역시 해유령 전투에 참전했던 우의정 이양원은 의주에 도착한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8일 동안 단식하다 경기도 이천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함경도를 장악했던 반란군을 토벌하고 일본군을 내쫓은 ‘북관대첩’의 주역, 의병장 정문부의 무덤. 경기도 의정부에 있다.
정문부는 전쟁 후 1624년 역모 혐의로 체포돼 고문 끝에 옥사했다. "벼슬할 생각은 하지 말고,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서 숨어 살아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1665년 누명이 풀리고 1709년 북관대첩을 기념하는 북관대첩비가 길주에 건립됐다. 비석은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세워뒀다. 2005년 10월 20일 한국으로 반환된 비석은 이듬해 3월 23일 원건립지인 북한 김책시로 돌아갔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과 독립기념관,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정문부 묘소에 복제비가 서 있다. 해유령에는 1977년 전첩기념비와 사당이 섰다. 비석에는 참수된 신각을 추도하고 거짓 보고를 한 김명원을 비난 하는 글이 적혀 있다.

김명원을 탓할 것인가. 자기 몸 보전에 급급했던 최고지도자와 붕괴된 국가 시스템, 전쟁을 대비하지 않은 정부를 탓해야 한다. 스스로 활과 창을 들고 나라를 지키려 한 백성을 무시한 지도부 책임이다. 해유령 전투 승리 열흘 전인 5월 6일 조선 해군이 거제도 옥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의지와 능력과 책임을 갖춘 장수 이순신이 지휘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7/2017081700355.html

[박종인의 땅의 歷史 사람들이 말하길… "창덕궁 주인은 무당이라네"

[86] 국정을 농단한 무당 진령군(眞靈君)

임오군란 때 충주로 간 민비… 함께 환궁한 무당을 '언니'라 부르며 총애
명륜동에 사당 지어주고 국정 자문역으로 대접
굿으로 국고 축내고 건달들에 벼슬 나눠줘
'요망한 계집…' 상소 봇물… 귀 닫힌 고종과 민비는 상소한 자들을 유배 보내
왕비는 선친 묘 네 번 이장
무당이 농락한 왕실, 무당이 농단한 국가… 결국 사라져

박종인의 땅의 歷史
불우했으되 총명했던 여자가 야반도주해 비루하되 신통력 있는 여자를 만났다. 충주 장호원 아흔아홉 칸짜리 민응식이라는 사람 집에서였다. 지금 그 집터에는 매괴성당이 서 있다. 이후 역사는 기이하게 흘러간다. 135년 전, 1882년 여름날이다.

뒤죽박죽된 인연 속에 두 여자는 두 달 뒤 장호원을 떠나 서울로 함께 올라왔다. 비루한 여자는 서울 동소문 성곽 안쪽에 터를 잡고 살았다. 사당을 짓고 살았다. 사당 이름은 북묘(北廟)다. 중국 관운장을 기리는 사당이다. 지금은 연립주택촌으로 변했다.

총명한 여자는 성은 민씨요 이름은 자영이다. 아영이라는 말도 있다. 훗날 사람들은 민비라고, 명성황후라고 불렀다. 신통력 있는 여자 이름은 박창렬이다. 사람들은 진령군(眞靈君)이라 불렀다. 세간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어젯밤 진령군이 창덕궁에서 한 말이 다음 날 아침에 어명으로 내려오더라"고. 진령군 박창렬은, 무당이다.

서울 명륜동 북묘

서울 명륜동 연립주택촌 골목길에 큰 암벽이 하나 있다. 골목길은 승용차 교행이 어려울 정도로 좁다. 암벽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曾朱壁立(증주벽립)'. 성리학을 완성한 증자와 주자를 잇는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 거물 정치가 송시열이 자기 살던 집에 새긴 글씨다. 지금이야 빽빽한 건물군 사이 골목이지만, 13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봄이면 앵두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골짜기였다. 송시열은 송자(宋子)라 불릴 정도로 거물 중의 거물이다. 이곳 지명도 송동(宋洞)이었다. 그런 거물 집터를 자기 살 곳으로 고르다니, 무당 박창렬은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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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진령군이 북묘를 짓고 살았던 서울 명륜동 송시열 집터. 왼쪽 벽에‘曾朱壁立(증주벽립)’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당 건립 경위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동쪽 마당에 있는 비석에 적혀 있다. 이름은 '북묘묘정비(北廟廟庭碑)'다. 글은 고종이 지었고 글씨는 민영환이 썼다. 북묘라는 사당을 짓게 된 경위와 이를 대대손손 지키겠다는 의지를 적은 비석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비문에 따르면 고종은 "나와 중전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나 나라를 살렸기에 사당을 짓는다"는 것이다.

꿈? 한 나라 최고지도자가 꿈 따위에 홀려서 사당을 지었다? 1883년 음력 10월 21일 북묘 공사가 완료되자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가서 제사를 올렸다. 창덕궁에서 산 너머 북묘까지 길도 새로 닦았다.

임오군란과 명성황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북묘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북묘비. 무당에 농락당한 고종 부부 내력을 읽을 수 있다.
1882년 음력 6월 9일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신식군대인 별기군 급료는 후한 반면, 구식군대는 쌀로 받는 월급이 열네 달이나 밀린 데다 겨우 받은 한 달 치 쌀은 양도 적었고 절반이 모래였다. 폭우 속에 월급 담당 기관인 선혜청과 신식개혁의 자문역 일본공사관이 불탔다.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흥선대원군 지원 속에 구식군대는 이튿날 중무장을 하고서 고종이 있는 창덕궁에 난입했다. 경복궁은 화재로 방치돼 있었다. 먼저 선혜청 청장이자 병조판서(국방부장관) 민겸호를 죽였다. 타깃은 민비(명성황후·이하 민비라 한다)였다. 당시 개방 정책을 채택한 고종, 특히 왕비인 민비가 척결 대상 1호였다. 민비는 궁녀로 변장해 궁을 탈출했다. 난이 수습되고 궁으로 들어온 대원군은 민비가 죽었다고 선언했다. 종적을 알 수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게 실수였다. 군란 닷새 뒤인 6월 14일 오후 3시 45분 시신 없는 수의(壽衣)를 입관까지 마치고 나흘 뒤 상복도 입었는데, 그 며느리가 충청도 장호원에서 생존 신호를 보낸 것이다.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그해 8월 초하루, 대원군의 며느리이자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정적 민비가 화려하게 환궁했다. 대원군은 난에 군사 개입한 청나라로 일찌감치 끌려간 다음이었다.



왕비, 무당을 '언니'라 부르다

시아버지에 의해 사망 선고를 받은 왕비가 장호원에서 절치부심하고 있을 때 미색(美色)과 신통력을 겸비한 무녀 박창렬이 나타났다. 왕비가 물었다. '나는 언제 환궁(還宮)하느냐.' 무녀가 말했다. '8월 보름이나이다.' 보름 차이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왕비는 시름을 덜어주고 희망을 준 무당을 데리고 환궁했다. 그리고 군호(君號)를 내렸다. 진령군(眞靈君). 여자에게 군호는 파격이었다. 원체 무속과 점술을 좋아하는지라, 왕비는 세상에 귀를 닫고 진령군을 맹신했다. 구한말 지식인 황현은 이렇게 기록했다. '왕비는 그 무당을 언니라 부르기도 했다.'(황현, 오하기문·梧下記聞)

무당은 궁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침전 또한 마음대로 들락거렸다. 배를 만지면 복통이 나았고 머리를 만지면 두통이 나았다. 굿을 하면 시름이 걷혔다. 무당이 궁에 상주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을 의식한 무당이 말했다. "저는 본디 관운장의 딸이니, 관운장 사당을 지어주면 그리로 옮기겠어요." 사대문 안 동소문 안쪽, 창덕궁에서 코 닿을 거리 경치 좋은 산기슭에 북묘가 건설됐다. 왕이 몸소 거둥해 무릎을 꿇고 제사를 지냈다. 1884년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 때 왕과 왕비는 이 북묘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다. '꿈에 관운장이 나타나 나라를 두 번이나 살렸다'는 비석 내용은 이를 말한 것이다.

무당의 국정 농단(壟斷)

'매천야록(梅泉野錄·황현)', '윤치호 일기(윤치호)' 같은 개인 기록은 물론 실록에도 진령군이 행한 악행이 세세히 기록돼 있다. 형조참의를 지낸 지석영은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에 세상 사람들이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한다.' 1894년에 올린 상소이니, 무당이 농단을 자행한 기간이 10년을 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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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문에서 바라본 인정전. 규율과 예법이 서 있어야 마땅하거늘, 조선 말 창덕궁에서는 세간에서‘요망한 계집’이라 손가락질하는 무당 하나가 국정을 농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박종인 기자
북묘는 벼슬과 돈을 노리는 양아치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의 말 한마디에 화복이 걸려 있어 수령과 변장들이 그의 손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염치없는 자들이 간혹 자매를 맺기도 하고 혹은 양아들을 맺자고도 하였다. 그중 조병식, 윤영신, 정태호 등이 더욱 심하게 보챘다.'(매천야록)

압권은 경상도 김해 사람 이유인이다. 무관을 꿈꾸며 상경한 이유인은 진령군을 북한산으로 유인해 자기 호령에 따라 시정 잡배들이 변장한 귀신을 출현시켰다. 신통력이 뛰어난 무당도 야밤 산중 귀신에게 속아 넘어갔다. 진령군은 이유인을 수양아들로 삼고서 북묘에 함께 살았다. 황현은 이리 기록했다. '아들이라 했으나, 추문(醜聞)이 들렸다.' 진령군과 이유인은 왕과 왕비에게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고 계시를 내렸다. 왕은 그리 시행하였다.

쏟아지는 상소

당대 지식인과 관료들 상소가 쏟아졌다. 이유인을 벌하라는 전 왕실 강사 김석룡의 상소에 고종은 "취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전 사간원 정언 안효제가 '시일야방성대곡'의 작자 장지연과 함께 '청참북묘요녀소(請斬北廟妖女疏)', 그러니까 '북묘의 요망한 계집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과 왕비는 안효제를 유배시키라 명했다. 결국 김석룡도, 안효제도 원악도(遠惡島), 멀고 험한 섬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안효제는 훗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민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무덤.
경기도 여주에 있는 민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무덤. 다섯 번 이장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사이 왕비는 또 기이한 일을 벌였다.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무덤을 네 번이나 이장한 것이다. 왕비가 되자마자 그녀는 경기도 여주 여흥 민씨 문중 묘역에 있던 아버지 묘를 제천, 이천, 광주를 거쳐 1894년 충남 보령 바닷가로 이장했다. 국가 최고지도자 부부가 무속과 주술에 빠져 있는 사이에 나라는 파탄이 났다. 풍수연구가인 우석대 교수 김두규가 말했다. "초장지도 썩 훌륭한 명당이었고 다른 땅도 나쁘지 않다. 다만, 왕비가 올바른 풍수관, 인생관, 국가관을 갖추지 못했을 뿐."

진령군 그 후

친정아버지 묘를 보령으로 이장한 이듬해 왕비는 일본인에 의해 시해됐다. 황제가 된 고종은 성강호라는 점쟁이에게 죽은 왕비의 혼령이 어디 있는지 캐묻곤 했다. 또 정환덕이라는 시종에게 수시로 왕실과 나라 운세를 자문했다. 정환덕 또한 역술가였다. 정환덕은 '남가록(南柯錄)'이라는 저서에 이 같은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진령군은 1894년 갑오개혁 정부 최고기관인 군국기무처에 의해 거열형(수레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이는 형)을 선고받았다.(백석서독·白石書牘, 이용목) 형 집행 여부는 알 수 없다. 진령군 수양아들 이유인은 양주목사, 병조참판, 한성부 판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이어 법부대신까지 올랐다. 그리고 1907년 직권 남용 혐의로 체포되자 '놀라서'(매천야록) 죽었다. 북묘는 1910년 5월(추정)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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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대조전. 이 부속건물 흥복헌에서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다.
파란만장한 여자 민자영, 민비 혹은 명성황후가 생전에 살던 창덕궁 침전 대조전(大造殿)은 1917년 화재로 전소됐다. 지금 건물은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다 재건했다. 그 오른쪽 부속채 이름은 흥복헌(興福軒)이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가 흥복헌에서 열렸다. 일주일 뒤 대한제국은 식민지가 되었다.

보령에 있던 민비의 친아버지 민치록의 묘는 2003년 왕비의 후손에 의해 처음 묻혔던 여주 선산 그 자리로 돌아왔다. 오천육장(五遷六葬). 조선 풍수사에 남는 진기록이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보아라, 폭군의 흔적이 여기 있다

[85] 고양 칠공자 묘와 연산군 금표비

1994년 고양시 대자동에서 '출입엄금' 새겨진 비석 발견
연산군이 사냥터 만들며 수도권 백성들 쫓아내고 '어기면 사형' 경고
발견된 장소는 연산군에 의해 몰살된 우산군 이하 일곱 부자
가족묘 한가운데 비석은 폭군이라 기록된 연산군의 실상을 알리는 살아 있는 증거물
강화도 교동에는 연산군 유배지, 서울 방학동에는 연산군 묘

박종인의 땅의 歷史

우산군 이종 가문의 멸족

조선 3대 임금 태종 이방원과 후궁 영월 신씨의 셋째 아들 온녕군(溫寧君) 이정(1407~1453)은 아들이 없었다. 하여 동생 근녕군(謹寧君) 이농의 둘째 아들 우산군(牛山君) 이종을 양자로 들였다. 우산군과 아내 문화 류씨 사이에 여섯 형제가 태어났다. 모두 총명하여 입신양명하니 가문이 번창하였다. 둘째 아들 무풍군 이총은 특히나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504년 이총이 죽었다.


무오사화로 함경도로 유배 중이던 이총은 갑자사화 때 서울로 끌려와 고문을 당한 뒤 거제도로 다시 유배당했다. 그리고 교수형을 당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 시신에게 살점을 조금씩 도려내는 형벌, 능지(陵遲) 형을 가했다. 그 목은 서울 거리에 걸어놓았다. 남은 시신도 온전하지 못했다. 이듬해 음력 1월 26일 자 실록에는 당시 왕이 내린 명령이 이리 적혀 있다. "이총의 뼈를 부순 후 가루를 강 건너에 날려버리라."


 

아버지 우산군, 다섯 형제와 함께 연산군에 의해 죽은 무풍군 이총의 묘.
아버지 우산군, 다섯 형제와 함께 연산군에 의해 죽은 무풍군 이총의 묘.

총명하되 불우했던 사내가 바람에 날아가고 한 해가 지났다. 이총의 아버지 우산군 이종, 맏형 이원과 네 동생 정, 간, 변, 건이 죽었다. 각기 다른 곳에 유배됐던 사내들이 같은 날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서기 1506년 음력 6월 24일이다. 우산군을 포함해 이들 일곱 부자를 칠공자(七公子)라 한다. 한 가문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그 군주는 연산군이다.

팔극조정과 환가탄생

조선 9대 임금은 성종이다. 풍수학에서 전하는 설화다. 어느 날 조정회의에 문득 보니 장차관 가운데 극(克)자 돌림을 쓰는 자가 여럿 보였다. 영의정 이극배, 우의정 이극균, 병조판서 이극증, 형조판서 이극감, 공조판서 이극기, 병조참의 이극규, 좌통례 이극견까지 국무총리부터 의전 담당 비서까지 여덟이나 되었다. 모두 광주 이씨다. 세간에서는 이를 일러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 했다.

한 가문이 그리 창대하니 왕이라고 부러움이 없을 리 없다. 하여 성종은 지금 서울 정동에 있었던 광주 이씨 종가를 빌려 자손을 낳았다. 풍수학에서는 이를 환가탄생(換家誕生)이라 부른다. 공식적으로 성종은 왕후 4명과 후궁 8명으로부터 왕자 16명, 공주와 옹주 12명을 두고 나이 37세에 죽었다. 실록에 따르면 성종의 첫아들은 대궐 안에서 태어났다고 돼 있으니 환가탄생에 따른 덕과 득은 이 왕자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 아들이 연산군이다.

폭군 연산군

성종의 맏아들로서 세자가 된 연산군은 그 누가 보더라도 조선 왕실 정통성을 잇는 후계자였다. 문제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였다. TV 드라마는 물론 영화 소재로도 단골로 등장하는 폐비 윤씨와 연산군 이야기다. '…어느 순간 성종 사랑을 상실한 윤씨가 임금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버리고, 평민으로 내쫓긴 윤씨는 결국 사약을 먹고 죽었다. 영민했던 아들 연산군은 왕이 되고 10년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고 '미쳐 버려'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르다 폐위되었다….' 친모 이야기를 듣고서 연산군은 '윤씨묘'로 남아 있던 어머니 묘를 왕릉으로 격상시키고 회릉이라 명했다. 회릉은 원래 지금 서울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회릉 주변 지역을 지금 회기동이라고 한다. 회릉은 지금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져 있다. 그러니까 연산군은 불우한 가정사가 만든 폭군이었지 날 때부터 괴물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강화도 교동에 있는 연산군 유배 추정지 중 한곳. 기록이 없는 탓에 확실하지 않다.
강화도 교동에 있는 연산군 유배 추정지 중 한곳. 기록이 없는 탓에 확실하지 않다.

조선 정치사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투쟁사다.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흥사대부 세력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이래, 전주 이씨 왕실 권력과 사대부 관료 권력은 주도권 경쟁을 벌이며 500년을 존속했다. 연산군 시대는 약화된 권력을 신권으로부터 과격하게 회수하려는 시대였다. 이런 관점에서는 "연산군은 과격한 왕권주의자였지 폭군은 아니었다"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하지만 정치는 백성을 위함이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도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세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성까지 폭력으로 탄압하면, 폭군(暴君)이다.

연산군 금표(禁標)

1994년 11월 중순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한 묘역에서 오래된 비석이 발견됐다. 높이 1.38m, 폭 54㎝, 두께 22.5㎝짜리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금표내범입자논기훼제서율처참).' '금표 내에 침범한 자는 기훼제서율에 따라 참형에 처한다.' '기훼제서율'은 임금이 정한 법률을 어기는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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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길가에 서 있는 연산군 금표비. “수도권 전역을 자기 사냥터로 만들고 백성들을 쫓아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1994년 연산군에 의해 멸족당한 우산군 일곱 부자 가족묘역에서 발견됐다. /박종인 기자

대표적인 기훼제서율이 1504년 연산군이 공포한 한글사용금지법이다. 언문으로 임금을 비난하는 글이 난무하자 아예 한글을 금지한 법률이다. 대자동에서 발견된 이 비석은 금표 구역 침입범을 이 한글사용금지법 위반자와 동일하게 처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處斬(처참)'은 참형에 처한다는 뜻이다. 참형은 목을 잘라 죽이는 형벌이다. 도대체 이 금표는 무엇인가.

집권 초기부터 토지에 관심을 보이던 연산군은 궁궐 주변에서 시작해 민가를 철거시키고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어갔다. 집권 9년째인 1503년 음력 11월에는 선친 성종 후궁들이 살고 있는 자수궁과 수성궁까지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반발하는 신하들에게 연산군은 "부득이한 일이다"라며 무시하고 관철시켰다. 며칠 후 "겨울이라 민가 철거가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리 답했다. "일단 백성들을 먼저 내보내고, 날이 풀리면 집을 철거시키라."

백성들을 내쫓고 차지한 토지에 연산군이 세운 비석이 금표(禁標)다. 실록 기록에만 남아 있던 그 금표가 근 500년 세월이 지난 1994년에 고양시에서 실물로 발견된 것이다.

백성이 하늘이거늘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왕의 사냥터이니, 이 비석 안쪽으로 침범한 자는 목을 베어 죽인다.’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왕의 사냥터이니, 이 비석 안쪽으로 침범한 자는 목을 베어 죽인다.’

실록 기록을 모아 보면 이렇다.

"남산에 봉수대가 있는데, 금표 안에 있으니 어찌하리까." "봉수는 변방 일의 유무를 보고할 뿐이니, 모든 봉수를 폐지하라."(연산군 10년·1504년 음력 11월 1일)

"금표 안을 범한 사람 천동(千同)은 머리를 베어, 전례대로 금표 근처에 내걸고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라."(1504년 11월 3일)

급기야 연산군은 서울을 에워싼 수도권지역을 자기 사냥터와 유락지로 선포하고 이 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그 지역이 고양, 파주, 양주, 포천, 광주, 김포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철거 현황이 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인용해본다.

우찬성 이계동(李季仝)이 동·서·북 금표 지도를 가지고 아뢰기를, "동쪽은 한강 삼전도, 광진, 묘적산, 추현, 천마산, 마산, 주엽산으로부터 북쪽은 석점, 홍복산, 해유점까지 서쪽은 파주 보곡현까지 남쪽은 한강 노량진, 용산 양화도까지인데, 동쪽은 70리, 서쪽은 60리, 북쪽은 65리, 남쪽은 10리입니다." 보고를 받은 연산군이 곧바로 이렇게 지시한다. "한강 망원정(望遠亭) 근처를 다시 살펴보아 표를 세우라."(연산군 10년·1504년 11월 9일)

"예로부터 제왕은 누구나 연회를 베풀고 놀이하는 곳이 있었다. 장의문 밖의 산이 밝고 물이 고와 참으로 절경이므로 금표(禁標)를 세우고 이궁(離宮) 수십 칸을 지어 잠시 쉬는 곳으로 하고자 한다."(연산군 11년·1505년 7월 1일)

고양에 사는 목동은 소에게 풀을 먹이지 못하게 되었고 김포에 사는 뱃사공은 물길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목숨을 걸고 법을 어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도래하였다.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정치의 제1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말이다. 결국 연산군 재위 12년, 다음과 같은 세상이 오고야 말았다.

서울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뒤편 왼쪽).
서울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뒤편 왼쪽).

"부역이 번거로워 백성들은 살 길이 없으므로, 많이 모여서 도둑이 되어 사람과 물건을 겁탈했다. 길가는 사람이 끊어지기도 하고 각 도에서 바치는 공물까지 약탈당했다. 금표 제도가 생기면서부터 도둑들이 금표를 보금자리 삼아 날로 죽이고 약탈했다. 아무리 서울의 즐비하게 모여 사는 동네라도 꺼리지 않고 어둡기만 하면 떼를 지어 다니면서 겁탈하였다. 집을 불태우고 재물을 빼앗아 가도 사람들은 모두 피하여 숨고 감히 잡지 못하였다. 더욱 간악하고 교활한 것은, 왕명을 받들었다고 일컬으면서 똑바로 인가에 들어가 보화와 재물을 빼앗아 가는데도 사람들은 모두 허둥지둥 달아나 숨을 뿐 따져볼 수가 없으므로 매우 괴로워하였다."(연산군 12년·1506년 2월 2일)

'왕명을 사칭해도 따져볼 수도 없는 세상'임을 알지도 못하고, 다음 날 연산군은 또 이리 말한다. "듣건대 백운산(白雲山)에서 송이버섯이 난다 하니, 모두 금표 안에 들게 하라." 백운산에 금표를 세우고 일곱 달 뒤 폭군은 폐위됐다.

칠공자와 폭군의 악연

대자동 금표는 그 폭정을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증거다. 그런데 이 금표가 발견된 곳이 하필이면 연산군에게 폐족 당한 칠공자 가문 가족묘가 아닌가.

연산군 폐위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 곧바로 칠공자 가문 신원을 회복시키고, 이들의 가문 묏자리로 준 땅이 바로 폭군의 사냥터, 고양 대자동이었다. 폐위와 함께 철거된 금표가 21세기를 6년 앞두고 드러난 것이다. 아버지부터 여섯 형제가 떼죽음을 당한 우산군 후손들은 지금까지 "원수의 비석을 철거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 중이다.

폭군 그 후

연산군은 폐위 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고 두 달 뒤 죽었다. 죽기 전에 '아내를 보고 싶다'고 했으나 원은 이루지 못했다. 교동에는 연산군 유배지가 두 군데 있다. 옮기며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기록이 없는 탓에 추정과 구전으로 두 군데가 서로 유배지라 주장한다는 말이다. 교동 어딘가에 있던 무덤은 8년 뒤 아내 거창 신씨 요청에 의해 서울 방학동에 있는 태종 후궁 조씨 묘역으로 이장됐다 . 생전에 왕이라 불리지 못했고, 무덤도 왕릉이 아니라 묘(墓)다. 연산군 사돈 능성 구씨 가문에 이어 구씨 가문 사돈 덕수 이씨 문중에서 연산군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97년 발족한 연산군숭모회에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예절교육과 세종대왕 한글 창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여기까지 연산군과 금표에 얽힌 이야기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8/2017062800388.html


** 검색 : http://search.chosun.com/search/news.search?query=%EB%B0%95%EC%A2%85%EC%9D%B8%EC%9D%98+%EB%95%85%EC%9D%98+%EF%A6%8C%E5%8F%B2&pageno=0&orderby=news&naviarraystr=&kind=&cont1=&cont2=&cont5=&categoryname=&categoryd2=&c_scope=more_news&sdate=&edate=&premium=




[박종인의 땅의 歷史]  559년 전 청령포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나

[50] 소년 임금 살인사건과 영월 미디어박물관장 고명진

수양대군에 왕위 뺏긴 어린 임금 단종
영월 유배 넉 달 만에 사약 받고 시신은 버려져
실록에는 "스스로 죽었다" "예를 갖춰 장례 지냈다"
미디어박물관장 고명진 "작고 정직한 기록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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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하게(寧) 지나가는(越) 땅, 영월(寧越)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한번 들어가면 큰 화(禍) 없이 무탈하게 살 수 있는 땅이다. 하나 559년 전 열일곱 먹은 소년이 영월에 가고 살고 죽은 내력은 그 누가 보아도 평온할 수 없었다. 소년 발걸음 닿은 곳은 빠짐없이 21세기 관광지요, 인문 기행 목적지가 되었다. 소년 이름은 이홍위요, 그가 죽고 나서 200년 뒤 붙은 이름은 단종이다.

강원도 영월과 이홍위, 노산군, 단종

1457년 6월 22일(이하 음력) 조선 7대 임금 세조는 내시 안노를 화양정으로 보내 영월로 떠나는 조카 홍위를 배웅했다. 자기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멀쩡하게 임금으로 있는 눈엣가시 어린 조카를 상왕으로 앉히고 왕이 된 지 햇수로 3년 만이다. 그 전날 세조는 조카를 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유배를 명했다. 화양정은 지금 서울 광진구 화양동에 있던 정자다. 세종 임금이 만들고 이름 지은 정자다. 1911년 큰 벼락을 맞고 부서져 터만 남아 있다. 나흘 뒤 세조는 형수이자 노산군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고 묘를 파헤쳐버렸다.

어미 묘가 어찌 됐는지 알 턱 없이, 열일곱 살 소년은 양주·양평·원주를 거쳐 일곱 날 만에 영월에 도착했다. 주천을 지나 영월로 들어가는 입구 배일치 고개에서 소년은 서쪽 한양을 향해 큰절을 했다. 영월에 다다르자 큰 고개가 나왔다. 마침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군졸 쉰 명은 노산군을 서강 건너 청령포에 가뒀다. 궁녀들도 함께였다. 서강이 360도 휘어들고 한쪽은 절벽인 담벼락 없는 감옥이었다. 청령포를 유배지로 고른 사람은 영월 수령을 지냈던 신숙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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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 청령포는 서강이 석회암 지대를 흐르며 만든 물돌이동이다. 559년 전 이 절경 속에 열일곱 살 먹은 소년 이홍위, 단종 임금이 두 달 동안 유배됐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했다. /박종인 기자

세조는 옷 열 벌을 보내고 사시사철 제철 과실이 끊이지 않도록 배려도 했다. 청령포에 우물이 없다고 하니, 우물도 급히 뚫으라 자상하게 지시도 했다. 매달 영월 수령에게 조카 문안을 드리라고 엄명도 내렸다. 가뭄이라 전국에 술을 금했으나 청령포만큼은 술을 바치도록 일러두었다. 석 달 뒤 역모를 계획하던 금성대군 무리가 발각됐다. 10월 21일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 죽었다. 나라에서는 예로써 장사 지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조선실록에 세조 3년 6월 22일부터 10월 21일까지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다른 기록은 하나같이 단종이 1457년 10월 24일 사약을 먹고 죽었다고 적고 있으니, 실록 기록자는 단종의 죽음을 사흘 전에 예언했다는 말인가. '예로써 장사 지냈다'는 기록 또한 세간에 전하는 기록과 영월 땅에 남은 흔적으로 볼 때 터무니가 없다. 역사는 기록이고 거울이며 교훈이며 반(反)교훈이다. 그릇된 기록은 교훈도 반교훈도 될 수 없다.

역사를 기록하는 고명진

미디어기자박물관 관장 고명진.
미디어기자박물관 관장 고명진.

1980년대 이래 고명진은 최루탄을 맞고 살았다. 1984년부터다. 고명진은 사진기자였다. 주간시민, 경향신문, 선데이서울, 한국일보, 통신사 뉴시스까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고명진은 카메라로 세상을 기록했다.

은퇴했으면 세상 구경이나 하고 동무들과 앉아서 음풍농월하는 인생도 즐거웠겠다. 그런데 기록하는 습성은 떨쳐내지 못해서 은퇴 이듬해 고명진은 현역 때 그러모아 둔 온갖 기록 싸 들고 영월에 내려와 미디어기자박물관을 열고 말았다.

기억하는가. 1987년 6월 부산에서 대형 태극기 앞을 웃통을 벗고 뛰어가며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던 사내 사진을. 비폭력을 상징하는 이 사진은 1999년 12월 31일 미국 AP통신사가 발표한 '금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됐다. 이 사진을 비롯해 그가 민주화 시위 때 찍은 사진들은 지금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고명진이 말했다. "역사는 기록이다. 거대한 역사가 전부가 아니다. 작고 세밀한 기록이 역사를 만든다. 나는 그 역할을 했다." 겁에 질린 노인의 눈망울, 돌멩이를 쥔 대학생의 주먹이 역사라고 그가 말했다. 박물관에는 그가 현역 시절 쓰던 카메라, 필름, 신분증, 출입증, 동료가 기증한 출입국 기록, 신문, 완장, 고명진이 촬영한 역사적 사진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최근 유행 중인 드론 촬영 교육도 하고, 사진을 통해 초등학생들에게 잔잔하되 거센 역사를 보여준다. 그런데 왜 영월에, 왜 박물관인가. 그가 말했다. "원래는 단양에 가서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누라 친구가 영월 놀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문 닫은 박물관이 두 곳 있다는 게 아닌가. 귀신한테 홀렸다." 장터에 가다가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단양으로 가려던 고명진의 발길은 잠시 영월에 멎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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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이 만든 ‘한반도 지형’. 이 지형이 있는 땅 이름은 한반도면이 됐다.

박물관 옆에는 서강이 흐른다. 서강에는 한반도 생김을 똑 닮은 물돌이동이 있다. 서강이 360도 휘돌면서 만든 지형이다. 영월 땅은 지질이 석회암이다. 물살이 땅을 갉아내며 흘러가 그런 지형을 만들었고, 그걸 용케 찾아내 사람이 몰린다. 사람이 몰리니 돈이 몰리고, 그리하여 2009년 박물관이 있는 서면(西面)은 한반도면(韓半島面)으로 공식 개명했다.

방랑 시인이 잠든 영월

방랑 시인 김삿갓이 그랬다. 홍경래의 난 때 역적질을 한 할아버지 탓에 파락한 집에서 태어난 삿갓 김병연(1807~1863)은 고향 경기도 남양주를 떠나 황해도로, 강원도로 떠돌았다. 영월에서 살면서 장가도 가고 아들도 낳았지만 역적 집안이요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보인 모멸감에 팔도를 떠돌았다.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녔고, 손길 가는 대로 시를 썼고, 눈길 가는 대로 여자를 건드리고 파락호로 살았다. 그러다 전라도 화순 동복에서 죽었는데, 3년 후 그 아들 익균이 시신을 모셔 와 묻은 곳이 바로 영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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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면에 있는 방랑시인 김삿갓 묘.

불과 150년 전 이야기이나 세간에서는 망각됐던 삿갓은 영월 사학자 박영국에 의해 부활했다. 김삿갓을 찾아다니던 박영국은 1982년 영월 창절서원 원장인 안동 김씨 김영배를 만났다. 그가 박영국에게 말했다. "우리 증조부가 한양 가서 김병기라는 친척을 만났지. 그 친척이 김병연 삿갓 묘가 양백지간, 영월과 영춘 사이에 있으니 돌봐달라고 했대." 그리하여 1982년 10월 24일 박영국과 김영배는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 영월과 영춘 사이 좌표를 찾아 헤매다 와석골에서 무덤과 생가 초석과 기둥을 발견했다. 그때 3대째 살고 있던 와석골 이장이 이리 말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삿갓 무덤이라고 알고 있었고, 왜정 때 이미 일본 기자들이 여러 번 다녀갔어." 지금 김삿갓 무덤이 있는 계곡은 김삿갓계곡이 되었다. 계곡이 있는 하동면은 김삿갓면이 되었다.

청령포와 엄흥도와 정사종

자, 다시 단종 이야기다. 청령포로 유배된 지 두 달 뒤 폭우가 쏟아졌다. 궁녀 6명과 섬 아닌 섬에 갇힌 소년 모습을 상상해보자. 죽음은 예견된 운명이지만, 익사는 아니었다. 한양을 향한 서쪽 절벽까지 올라가 크게 울어도 보고 두 갈래로 갈라진 거송(巨松)에 앉아 울어도 보았지만 하릴없었다. 유배 두 달 만에 노산군은 읍내에 있는 객사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거기에서 다시 두 달 만에 사약을 받은 것이다. 어린아이가 어찌 자발적으로 독약을 먹을 수 있으랴. 어찌 스스로 목을 매 죽을 마음을 먹을 수 있으랴. 하여 '공명심에 불타는 하인이 숨어 있는 소년을 찾아내 활줄로 목을 졸라 죽였다'는 말이 나왔다. 사인은 불명이지만 최소한 실록처럼 자살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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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임금 단종이 묻힌 영월 장릉.

예로써 장사를 지낸 것도 아니었다. 얼어붙은 서강변에 버려진 시신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날 밤 엄흥도라는 영월 하급 관리와 영월 유배 소식에 군위현감으로 있다가 영월에 와 있던 정사종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수습해 관에 넣고 장례를 치렀다. 엄흥도가 지게에 관을 지고 한 언덕 위에 묻으니, 이 무덤이 200년 뒤 숙종 때 단종 왕으로 복위시키며 지금 보는 장릉이 되었다.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도대체 누구인가.

왕실 정통성에 결정적 흠집인 단종 사건은 이때에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숙종은 이 사건을 해결하면서 어제시(御製詩)를 영월 땅에 내려주었다. 시를 현판으로 내건 정자는 사라졌고, 이후 영조와 정조가 잇따라 글을 덧붙여 내리니, 지금 영월 초입 요선정에서 그 현판을 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라는 시호를 받은 소년 이홍위, 영월과 단종에 얽힌 이야기다.

[영월 여행수첩]

영월 여행지도

〈여행 순서〉

1. 요선정: 반드시 강물 아래 요선암을 둘러볼 것. 정자에 붙은 세 임금의 현판도 의미 있음.

2. 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 관장으로부터 설명을 들을 것. www.ywmuseum.com, 5000원. 월·화 휴관.

3. 한반도 지형: 숲 속으로 난 오솔길 즐기기.

4. 선돌/소나기재: 선돌 앞에 주차장. 소나기재 내리막길이 낭만적.

5. 장릉/관풍헌: 왕릉 어귀에 있는 정령송의 애틋함.

6. 청령포: 관음송이 주는 먹먹함. 도선료 3000원.

7. 김삿갓계곡: 무덤 앞 시비 공원과 위쪽 생가. 하루 나들이라면 김삿갓계곡은 일찍 해가 지니 서두를 것.

〈맛집〉 주천면에 있는 다하누촌.

〈여행 정보〉 영월 관광 사이트: www.ywtour.com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찬란하였으되 너무도 허망하였느니라

[벡제 마지막 수도 부여와 토박이 고고학자 심상육(上)]
 

그 마지막 날 풍경

찬바람이 부는 음력 8월 2일, 백제 수도 사비성 왕궁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서기 660년이었다. 대청마루 위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과 신라 태종 무열왕이 앉아 있었다. 마루 아래 땅바닥에는 백제 의자왕이 앉아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백제로 망명한 신라 장수 검일(黔日)이 포박된 채 앉아 있었다. 18년 전인 642년 7월 검일은 백제군에 포위된 대야성(大耶城) 식량창고를 불태웠다. 검일은 성주인 김품석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한(恨) 풀이를 벼르던 사내였다. 그 전투에서 성주 김품석과 고타소랑(古陀炤娘) 부부가 죽었다. 고타소랑은 태종의 딸이고 김품석은 사위였다. 18년이 흘렀다.

태종이 말했다. "너는 죄가 세 가지다. 창고를 불질러 성 안에 식량이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고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며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한 죄." 신라 병사들은 검일의 팔다리를 소 네 마리에 묶어 찢어버리고 백마강에 던졌다. 백제 왕국 678년 역사도 끝났다. 7월 9일 금강 하구 기벌포에 상륙한 당나라 부대와 같은 날 황산벌에서 계백 부대와 맞붙은 김유신 부대가 사비성에 진군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부여에서 나고 자란 고고학자 심상육.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토박이 학자가 바라본 백제
"생각할 수록 애잔한 역사"

고고학자 심상육과 궁남지(宮南池)

부여군립 백제고도문화재단 책임연구원 심상육은 1973년생이다. 백마강 지류인 왕포천 건너 장암면 정안리가 고향이다. 마을 주변에는 백제 시대 가마터가 있었고 선산에는 고분이 널려 있었다. 중학교 때는 배를 타고 강 건너 읍내로 소풍을 갔다. 옛 절터인 군수리사지에 오르면 궁남지(宮南池)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역사에 관심이 있었는데, 어찌 하다 보니 고고학자가 되었다"고 그가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서기 634년 3월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이 성 남쪽에 20리 물길을 내 못을 만들고 버드나무를 심고 한가운데에 섬을 만들었다. 4년 뒤 3월에는 "왕과 왕비가 큰 연못(大池)에 배를 띄웠다"고 돼 있다. 전설에 따르면 무왕은 서동이고 왕비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다. 두 나라가 피터지게 싸우는 와중에 벌인 사랑이라, 궁남지는 연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됐다. 부여를 상징하는 캐릭터도 서동과 선화공주요, 궁남지가 있는 곳 이름도 서동공원이다.

하지만 '궁 남쪽 연못'이라는 기록만 있을 뿐, 이 연못이 궁남지라는 다른 근거는 없다. 부여에서 나고 자란 70대 김요한-원한 자매는 "지금처럼 정비돼 있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에도 궁남지 못가에서 놀았다"고 회상한다. 밤이면 연못가 버드나무 밑동에 조명이 켜지고, 작은 섬 위에 있는 정자도 불을 밝힌다.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백제가 망했다. 평화를 그리워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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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성에 밤이 왔다. 궁남지(宮南池)에도 밤이 내렸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찬란했던, 허망했던, 백제였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유아독존이었던 백제,
나당 연합군에게
한 달 만에 멸망

7세기, 멸망으로 가는 나날들

백제를 둘러싼 7세기 동아시아 역사는 복잡하다. 시대순으로 짤막하게 언급을 해본다. 641년 의자왕이 즉위했다. 642년 의자왕이 신라 깊숙이 쳐들어가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백제 사령관 윤충은 김춘추의 딸과 사위 목을 잘라갔다. 88년 전인 554년 관산성에서 성왕 목을 잘라간 신라에 대한 복수였다. 648년 딸을 잃은 김춘추가 나당연합을 제안하러 당나라로 떠났다. 그해 김유신이 옥문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야성 성주 김품석 부부 유해와 생포한 백제 장수 8명을 맞교환했다. 651년 당나라는 두 차례 벌인 고구려 공격에 실패하면서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하라고 요구했다. 백제는 이를 무시하고 655년 고구려, 말갈 연합군과 함께 신라 북쪽을 공격했다. 세상은 합종연횡이 한창인데, 백제는 유아독존이었다.

백제시대 도읍지 부여 관문이 됐던 사비성문. /조선일보 DB

기록에 따르면 655년 이후 백제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붉은색 말이 한 절 대웅전에 들어가 죽었다. 659년 2월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 책상 위에 앉았다. 4월에 태자궁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했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백제는 망한다"고 울었다. 대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의자왕은 개의치 않았다. 승리감에 취해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했고 왕궁 남쪽에 큰 정자를 세웠다. 왕비와 비, 궁녀들과 함께 술을 즐기며 충신들을 멀리했다. 이미 648년 김춘추가 맺은 나당동맹이 차근차근 진행돼 659년에는 백제를 칠 준비가 완료돼 있는 상태였다. <下편에 계속>

 
[박종인의 땅의 歷史] 묻혀 있던 백제 古都, 그들의 땀에 빛이 되었다
유네스코 유산에 오른 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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