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그

즐거운 여행 2020. 2. 2. 18:26
▲  변영근 작가
[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문화일보 : 2020년 02월 25일(火)
Q : 생명은 어떻게 사고하는가?     -    

A : 非인간의 기호과정도 思考… 인간처럼 주체를 가상 않을 뿐

(25)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 1968∼)

‘사고는 인간전유물’서 탈피
동물도 생각하는 존재 간주
인간과 동등한 지위 부여해

대벌레 보호색, 도상으로 보고
생명, 주로 도상·지표 활용한
‘기호의 연쇄과정서 생존’ 주장

기호, 도상·상징·지표로 분류
기호학 적용범위, 숲으로 확장


◇ 펫팸족의 시대

“배가 난파됐다. 배 안에는 사람 한 명과 개 한 마리가 있다. 이 중 하나만 구조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 딜레마 앞에서 많은 이들은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늙고 병들었으며, 개는 어리고 팔팔한 강아지”라는 조건을 달면 어떨까? 내가 이 문제를 수업 시간에 던졌을 때 과반의 학생들이 개를 선택했고, 사람을 선택한 학생들도 대개 곧바로 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누군가가 가상 상황에서 내리는 선택이 평소 그 사람의 가치관을 드러낸다면, 이 물음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사람과 개의 생명에 대한 가치를 과거만큼 비대칭적으로 판단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반려동물 인구 천만 시대’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두 집 건너 한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운다. 그 밖에도 다양한 부류의 비인간 동물들도 ‘반려’라는 이름 아래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데, 동물과 가족을 이룬다는 뜻에서 ‘펫팸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다.

◇ 기호학으로 바라본 숲의 생태계

비인간 동물은 어떻게 생각하고 소통할까? 개나 고양이와 오랫동안 같이 살아 본 사람이라면 개나 고양이도 자기 의사를 표현하며, 인간과 소통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 다만 인간과 같이 언어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하지 않을 뿐이다. 에콰도르 출신의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은 대표작 ‘숲은 생각한다’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콘이 동물의 생각과 소통이라는 문제를 최초로 탐구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연구가 참신한 이유는 비인간 동물의 의사소통과 사고 행위를 인간의 그것과 동일 선상에서 다루었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비인간 동물에 대한 탐구는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전제하에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특권적·독점적 지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돼 왔다. 반면에 콘은 비인간 동물을 지구상의 또 다른 생각하는 존재로 보고 이들에게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근대 세계에서 사고(思考)는 인간의 전유물이었다. 이와 같은 시각은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언어는 고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재현하거나 상상적으로 재구성하게 한다.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가 기호로서 결합시키는 것은 사물과 그에 대응하는 명칭이 아니라 개념(기의)과 청각 영상(기표)이다. 이것은 언어 기호가 사물들과의 자연적 관계에 기반하지 않으며 외부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도록 해 주는 언어 관습 자체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요컨대 언어는 일종의 정신적 실체로서 외부 세계와 분리됨으로써 능력을 발휘한다.

소쉬르는 언어를 모든 기호 체계의 모범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콘이 아마존 숲에서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동식물을 관찰한 결과, 기호의 전형적 성격은 언어적인 것에 있다기보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비언어적인 것에 있다. 기호란 세계 속에 펼쳐지는 무언가를 나타내는데, 그러려면 기호를 해석하고 표상하는 해석자가 있어야 한다. 기호를 연쇄적으로 창출하는, 끝없는 추론 과정에 참여하는 해석자가 있을 때, 기호가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콘은 기호의 해석자가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는 아마존의 다양한 생명체가 저마다 ‘자기(self)’로서 기호를 해석하는 것으로 보고, 이들이 어떻게 기호의 연쇄 과정으로서 ‘자기들의 생태계(ecology of selves)’를 엮어 나가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콘은 특히 프래그머티즘을 창시한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의 기호학에 입각해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 등 세 부류로 나누고, 관습에 의해 형성된 인간의 언어는 그중 상징에 불과하다고 논한다. 반면 비인간은 주로 도상과 지표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아마존의 대벌레는 주변 식물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보호색을 띤다. 콘은 도상이 닮음의 기호이듯이 대벌레의 보호색 또한 일종의 도상이라고 주장한다. 진드기가 사슴, 인간 등 낙산(酪酸)을 풍기는 종을 같은 항온 동물로 표상하는 것 또한 도상의 기호 작용에 따른 현상이다. 또한 아마존의 흰털원숭이는 자신이 올라앉은 나무의 흔들림을 곧이어 일어날 위험의 신호로 해석한다. 이때 나무의 흔들림은 원숭이에게 위험을 가리키는 지표로 표상된다. 이렇듯 대벌레, 진드기, 흰털원숭이 등은 모두 기호의 해석자이며, 이들의 생명 활동은 단순한 생리 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자기들의 생태계는 기호의 연쇄 과정 그 자체이며 이 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생명 활동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호는 인간의 언어에 한정되지 않으며 모든 생명체의 생명 활동으로 확장된다. 생명이 기호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 인간 아닌 생명체의 기호 과정도 사고인가?

인간과 사고의 관계는 20세기 유럽 사상사에서 주요 논쟁거리 중 하나로, 서구의 많은 사상가는 이 문제에 관해 서로 물고 물리는 논변을 펼쳐 왔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의 변증법적 이성이 세계 속에서 세계에 의해 자기를 구성해 나간다고 논했다. 그러자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사르트르를 비판하고 나섰다. 레비스트로스는 변증법적 이성이 자아와 타자 및 유럽과 비유럽을 대립시키는 유럽 중심주의, 나아가 인간과 세계를 대립시키는 인간 중심주의로 귀결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후 레비스트로스 또한 자크 데리다에게 호된 비판을 받는다. 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를 겨냥해 구조주의가 유럽어로 구사되는 한 구조주의에 잠재된 유럽 중심주의의 망령을 쫓아내거나 인간 주체를 완전히 해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콘은 인간 주체와 숲의 사고 간 논쟁에서 레비스트로스의 편에 선 채 퍼스의 기호학을 통해 숲의 사고의 우위성을 설파한다. 퍼스에 따르면, 기호가 없다면 인간은 사고할 수 없다. 자아란 사고의 주체로서 기호의 연쇄 과정 그 자체이고, 사고는 종결 없는 추론을 통해 기호를 연쇄적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에 참여하는 행위다. 퍼스의 관점은 내면의 성찰로 종결되는 코기토적 사고방식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며 사고가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 비인간으로까지 확장될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퍼스는 비인간 생명체의 기호 과정을 논한 적이 없다. 콘은 바로 이 지점에서 퍼스의 기호학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를 아마존의 숲으로 확장해 비인간 생명체의 기호 과정 또한 사고임을 명시화한다.
 

▲  차은정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콘은 특히 숲이 사고를 그 자체로 놓아둔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마존 열대 우림에서는 사고의 주체가 먼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에 의한 사고가 이를 뒤따르지도 않는다. 숲에서는 사고가 그 자체로 있고, 이 사고의 흐름 안에서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때마침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이렇듯 콘은 인간이 숲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넘어서 숲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음으로써 숲의 가르침과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한다.

◇ 숲의 사고, 인간의 사고를 넘어 되돌아오다

근대 이래 서구인들은 자연과 생명의 존재를 대상으로 바라봐 왔지만 일상에서 이들 존재와 마주치며 그들 또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 모순은 인간의 시각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환기하고, 여전히 야생의 숲으로부터 자성과 통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사고의 장으로서의 숲의 기호학에서, 자아의 사고는 각각의 신체에 국지화되지 않으며 신체 또한 인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숲의 기호학에 참여하는 모든 이는 신체를 넘어 확장될 수 있고, 이로써 서로의 관점을 교환할 수도 있다. 그런데 관점을 교환한다는 생각은 동아시아인들에게 어쩐지 낯설지 않다. 어쩌면 서구 근대인들이 주체의 철학을 넘어서서 대안의 철학으로 제시한 숲의 사고는 한반도에 뿌리내린 우리의 먼 조상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 수렵민의 사고방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차은정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에두아르도 콘

분야 : 인류학-생태 인류학 

사상 : 존재론적 전회, 포스트 휴먼 비평
주요 활동·사건 : 그레고리 베이트슨 도서상 수상(2014)

현재 캐나다 맥길대 인류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에콰도르의 아마존 네트워크를 이끌며 여러 원주민 운동가, 건축가, 변호사, 학자, 과학자, 예술가 등과 함께 아마존 숲을 연구해 오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시즘을 피해 에콰도르로 이주한 이탈리아계 유대인 3세로서 1968년 태어났다. 문학 애호가인 외조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유럽 고전 문학을 두루 섭렵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아마존 원주민의 비정부기구(NGO) 단체에서 활동하며 에콰도르의 아마존 지역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1996년부터 4년 동안 현지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2002년 위스콘신대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당시만 해도 인류학계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후 10여 년간 단 네 편의 논문을 제출했으며, 그중 2007년 논문 ‘개는 어떻게 꿈꾸는가’ 외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3년 ‘숲은 생각한다’를 발표하며 포스트 휴먼 인류학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급부상했다. 이듬해 미국 인류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가운데 하나인 그레고리 베이트슨 도서상을 수상했다. ‘숲은 생각한다’는 아마존 숲에서 원주민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식물을 주의 깊게 관찰해 기술한 책으로, 지금까지 한국어(차은정 옮김, 사월의책, 2018)를 비롯한 아홉 개의 언어로 번역·출간됐다. ‘숲은 생각한다’는 저자의 생태학적 전문성 덕분에 가능했던 작업으로, 그는 코스타리카 열대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열대 생태학 과정을 수료하고 다종다양한 생물종들의 표본을 직접 수집할 정도로 생태학에 박식하다. 특히 아마존에서 식물 표본 1100개 이상, 무척추동물 표본 400개 이상, 파충류 표본 90개 이상, 포유류 표본 60개 이상을 수집해 에콰도르 국립식물원에 기증하는 등 생태학 전문가로서 남다른 이력을 지니고 있다.   


▲  이정호 작가
[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문화일보 : 2020년 02월 18일(火)
Q : 물질의 행위는 인간의 몸에 우발적 영향을 끼치는가?

A : “몸은 장소·물질·제도가 상호 작용하는 물질적 실체”

(24)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 1962~)

물질·제도 등이 몸 가로지르는
운동으로서 ‘횡단신체성’ 제시
음식=대표적 ‘횡단신체적’ 물질

인간의 몸은 많은 물질과 만나
건강해지기도, 病 걸리기도 해

자연의 살이 인간의 몸이자
인간의 살이 자연의 몸 주장

생산과정에 퍼진 독성물질 추적
사회적 부정의·환경피해 폭로


20세기 후반 서구 담론계에서는 ‘몸적 전환(bodily turn)’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몸이라는 주제가 집중 조명을 받았다. 조형적 몸, 액체 몸, 말랑말랑한 몸, 수행적 몸과 같은 용어가 등장했고, 몸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러나 이 논의에는 몸의 물질성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는 비판이 이내 제기되었다.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물질이며 이 사실을 간과한 채 몸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었다. 이에 따라 담론계에서는 물질로서의 몸에 주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물질을 해명하려는 노력은 신유물론을 비롯한 새로운 이론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스테이시 앨러이모는 신유물론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학자로, 그의 물질관은 휴머니즘적 전통과 상반된 지점에 있다.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을 유일한 지적·이성적 존재로 간주한다. 인간은 다른 동식물과 달리 자기 행동의 의미와 목적을 명확히 인식한다. 반면 자연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몸이라면 다른 동물은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휴머니스트들은 인간과 동물을 분리할 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도 구분한다. 성적 행위에서 남성에게는 능동적 역할을, 여성에게는 수동적 역할을 강제로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앨러이모는 이로써 여성의 몸이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한 살덩어리로 격하되었다며 휴머니즘적 전통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서구의 사유 전통에 따르면, 여성은 동물처럼 자연에 속박된 존재로서 추상적 사유 능력이나 자율성, 주체성 등 근대적 인간의 특성을 결여하고 있다. 기존의 페미니즘 이론은 이 오래된 편견에 맞서 싸우기 위한 전략으로 여성을 자연에서 분리해 내려 노력했다. 그 결과, 생물학적·자연적 성(섹스)과 사회적 성(젠더)을 구분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욱 급진적인 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앨러이모는 과거의 페미니즘 이론이 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성의 자연적·물질적 소여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물질 세계의 영향력과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결정론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물질이 무엇인지 새롭게 정의하고 물질과 인간의 상호 작용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어떻게 교차하고 상호작용하는가

앨러이모는 서양의 인간 중심주의와 남성 중심주의를 해체할 도구로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횡단신체성에는 ‘신체(body)’가 아니라 ‘살된(corporea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개념적으로 중요한 차이다. 신체는 안과 밖의 경계, 너와 나의 경계가 분명한 개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한 명, 두 명과 같은 방식으로 그 수를 명확히 헤아리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살에는 형태가 없어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 또한 안과 밖을 나누지 않기 때문에 모든 동식물과 광물질을 개별화하지 않으며 모두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땅처럼 존재한다. 이 점에서 횡단신체성은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서 포스트 휴머니즘과 같은 계보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 없는 물질을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했던 철학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횡단신체성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사유할 여지가 더욱 큰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앨러이모는 횡단신체성을 개념적으로만 정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 개념으로 역사적 사례를 재조명해 이전에 간과되던 물질적 진실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다. 앨러이모가 주목한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산업 재난 중 하나인 호크스네스트 터널 사고다. 1930년대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는 산을 가로질러 4.8㎞ 길이의 터널을 뚫는 공사가 시행돼 인부 3000여 명이 투입되었다. 그런데 규폐증을 유발하는 위험 물질인 이산화규소 분진이 발생하는데도 건설 회사에서는 마스크를 비롯한 보호 장비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부들은 이산화규소 분진에 장기간 노출되었고, 그중 500∼1000명이 규폐증으로 사망했다.

신유물론이 등장하기 전 페미니스트와 생태 비평가들은 이 사건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주로 주목했다. 재난이 자본, 권력, 계급과 연루되며 어떻게 담론으로 구성되는지, 몸이 규폐증과 같은 특정한 병명으로 어떻게 의료화하고 증상화하는지 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으로는 노동자의 몸과 자연의 물질성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없다. 앨러이모는 그 대신 노동자의 몸, 화학 물질, 터널, 의료 시스템 등이 침투하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물질적 상호 작용을 더욱 중시한다. 굴착 작업에 임하는 노동자의 몸에서 권력, 지식, 물질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살펴보려 한 것이다.

노동자는 고통을 호소하지만 건설 회사에서는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고통을 일축해 버린다. 질병을 가시화하려면 그 밖에도 여러 물질이 개입해야 한다. 노동자는 병원을 방문해 엑스선 사진을 촬영한 뒤 전문의에게 해석과 진단까지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경험을 질병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렇듯 앨러이모는 이산화규소, 엑스선, 의사의 시선 등이 유입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석회암, 주물사(沙), 연마재와 같은 물질이 어떻게 노동자의 몸을 투과했는지를 밝혀낸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

앨러이모가 묘사하는 자연은 척박한 황무지도, 아름다운 풍경도, 기괴한 절벽도 아니다. 자연은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이자 몸에 치명적인 해를 가하는 불길한 힘이며 권력과 지식의 연결망과 분리될 수 없는 물질적 실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은 장소, 물질, 제도가 서로 충돌하며 상호 작용하는 물질적 실체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의 허파로는 미세 먼지만 침투하는 게 아니다. 회사 시스템, 의료 제도, 경찰, 행정 당국과 같은 네트워크도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횡단신체성은 다양한 물질, 제도, 담론이 몸을 가로지르는 물질적 운동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호크스네스트 터널 사고의 사례가 말해 주듯 이 물질적 운동의 행위자는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위, 무기체, 생태계, 화학 물질, 엑스선 등 모든 물질에 행위 능력이 있다. 인간의 몸은 이들 물질과 만나 더 건강해지기도 하고,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몸은 물질 세계의 우발적·창발적 혼합물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인간이 날마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음식은 대표적인 횡단신체적 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앨러이모에 따르면, 살을 비롯한 물질에는 주체와 타자, 안과 밖,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넘나들며 경계를 허물고 몸이 외부를 향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가 인간 주체이고 어디서부터가 비인간 타자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 자연의 살이 인간의 몸이고, 인간의 살이 자연의 몸이다. 몸이 곧 자연이자 물질이다. 그래서 앨러이모는 횡단신체성이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는 세계와 맞물리는 지점”이라고 주장한다.
 

▲  김종갑 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앨러이모의 논의는 생태계 파괴를 비롯한 전 지구적 위기에 대처하는 생태이론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그는 환경주의 운동이 논리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요구들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즉 지역적이지만 전 지구적이고, 개인적이지만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실천적이고 철학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앨러이모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횡단신체성이라는 독창적 개념을 제시해 물질이 몸과 환경 사이를 이동하는 양태를 보여 주었다. 그의 이론은 인류의 생산 및 소비 활동 전반에 퍼져 있는 독성 물질을 추적하고, 전 지구적으로 연결돼 있는 사회적 부정의, 느슨한 규제, 환경 피해의 실상을 폭로하는 데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시의적·실천적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지구는 기후 변화, 온도 상승, 오존층 파괴, 플라스틱 오염, 해빙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인류의 멸종이 임박했다는 불길한 뉴스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생태계가 마주한 위기가 인간의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 등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점이다. 자연을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는 기술 문명적 세계관이 인류세의 위기를 불러온 것이다. 화석 에너지 사용을 감축하고 그린 에너지를 개발하는 등 과학 정책 차원의 실천과 노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 전환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간의 몸이 자연의 살이며 자연의 몸이 인간의 살이라는 깨달음이 없다면 이런 노력은 임시방편으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김종갑 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스테이시 앨러이모

분야 : 환경 인문학, 영미 문학, 과학학

사상 : 신유물론, 물질적 페미니즘, 환경 정의 


주요 활동·사건 : 문학환경학회 환경 비평 부문 저술상 수상(2011)

오늘날 신유물론적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학자로 환경 인문학, 과학학, 동물학, 미국 문학, 문화 이론 등을 횡단하며 연구와 강의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특히 신유물론, 물질적 페미니즘, 환경 정의, 해양 인문학을 연구하는 새로운 모델을 창안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1985년 구스타프아돌푸스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86년 위스콘신대 매디슨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 일리노이대 영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후 4년간 같은 학교에서 영문학과 여성학을 가르쳤다. 강사 생활을 마무리한 뒤 텍사스대 알링턴 영문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으며 2010년 같은 과 석학 강의 교수로 부임했다. 2019년부터는 오리건대 영문학과 석학 강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0년 첫 저서 ‘길들지 않은 땅’을 출간해 남성적 권력에 훈육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자연을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제시했다. 2010년에는 ‘말 살 흙’을 발표해 학문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창안한 횡단신체성 개념은 살(물질)의 횡단하는 성질을 이론적 논의 대상으로 삼는 계기가 되었는데, 동명의 미술 전시가 2019년 독일 쾰른 루트비히미술관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말 살 흙’은 생태적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와 함께 2011년 문학환경학회(ASLE) 환경 비평 부문 저술상을 수상했으며 독일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한국어 등으로 번역됐다. 2016년작 ‘노출’에서는 인류의 윤리와 정치가 21세기 지구 환경에 의해 급진적으로 뒤바뀌는 현실을 드러내 과학자, 활동가, 예술가, 작가, 이론가들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 밖에 신유물론적 페미니즘과 관련된 여러 기획서와 학술지를 편집했으며, 단독 저서로 ‘푸른 생태학의 구성’ ‘저항과 쾌락’을 출간할 예정이다.

 

 

[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문화일보 : 2020년 02월 11일(火)
Q :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인간의 시간성과 기억 방식을 바꾸는가?
▲  변영근 작가

A : 양방향 소통으로 시간 거스르며 현실과 가상공간이 교류

(23) 볼프강 에른스트(Wolfgang Ernst, 1959∼) 

가상공간에 가득 들어찬 일상들  
문화적으론 인간의 기록이지만  
기술로는 디지털미디어가 주체  

기술미디어는 과거의 개념없어  
역사의 법칙 거슬러 항상 현재  
인류에게 실시간 시간성 안겨줘  

사용자 참여로 지속적 업데이트  
끊임없이 이동·연결되고 재구성
 

21세기 인류는 디지털 가상공간에서 자신의 일상을 기록·열람·공유하는 새로운 인간종으로 변모해 왔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마트폰, 노트북, PC 등의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SNS를 비롯한 가상공간에서도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이들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독일 미디어 이론가 볼프강 에른스트에 따르면, 이 새로운 인류는 일차적으로 디지털 미디어 그 자체와 대화하는 존재다. 손가락으로 키보드와 터치스크린을 누르고 저장 및 전송 버튼을 클릭하는 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 디지털 미디어와의 대화이며, 이후 코딩, 전송, 디코딩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받는 수신자는 인간과 디지털 미디어가 나눈 대화의 관객에 가깝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에른스트는 급진적 미디어 결정론의 시각에서 미디어가 기록의 실제 행위자라는 주장을 펼친다. 가상공간에 저장된 삶의 기록들은 원형 그대로가 아닌 이진법 코드로 저장된다.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기록하는 주체가 인간이지만, 기술적 차원에서는 디지털 미디어들이다.  

게다가 가상공간에 저장된 일상의 기록들은 필사와 같은 물리적 기록과 서로 다른 시간적 차원에 존재한다. 물리적 실체가 있는 기록은 오래돼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거시적 시간성(macro-temporality)을 따르지만, 물리적 실체가 없는 디지털 기록은 사용자의 요구에 의해 문자나 이미지의 형태로 변환돼 일시적 의미를 전달할 뿐이다. 따라서 디지털 기록은 미시적 시간성(micro-temporality)을 따르며 자연적 시간을 거스른다. 다시 말해, 가상의 기록은 언제나 같은 위치에 존재하는 법이 없다. 그 대신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새롭게 생성되며 다시 0과 1의 무수한 조합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21세기 인류의 일상은 점점 디지털의 시간성을 따르고 있다.

◇미디어의 시간성은 인간의 시간성과 어떻게 다른가 

에른스트는 지난 20여 년 동안 미디어 고고학이 학제 간 연구로 발전하는 데 있어 중추적 역할을 했다. 미디어 고고학은 미디어의 역사를 서술하는 전통적 방식, 즉 선형적이고 진화론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대안적인 시간적 도식으로 미디어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학문적 기획으로 등장했다. 미디어의 역사를 회귀적 시간, 즉 등장과 소멸과 재등장이라는 틀로 설명하고자 망각되고 배제된 미디어를 발굴해 역사에 기록하고, 미디어의 물질성이 새로운 시대, 지식, 체계 등의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인 행위자인지를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에른스트는 미디어 고고학의 지향을 따르면서도 미디어의 주체성을 더욱 부각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역사에 포섭되지 않는 미디어 자체의 존재 방식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그는 사진, 축음기, 전화기, 라디오,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 등 신호 기반 미디어를 ‘시간 결정적 미디어(time-critical media)’라 지칭하고, 이들 미디어가 말과 문자 등 기호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인간과 달리 어떻게 다른 신호 체계로 정보를 저장·처리·전달하고 고유한 시간성을 지니는지를 파헤쳤다.

에른스트는 과거 나치가 이념 선전을 위해 보급한 ‘국민 라디오(Volksempfanger)’를 예시로 든다. 독일의 문화사를 보여 주는 유물로서 박물관에 전시될 경우, 국민 라디오는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붙박여 있다. 하지만 이 기술 미디어가 여전히 작동 가능하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제작된 라디오에 전원을 연결할 수 있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히틀러의 목소리가 아니라 현재의 주파수를 통해 전달되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 라디오는 역사적 유물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주파수 방식의 라디오 방송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 차원에서 라디오의 소리 전달 및 전송 방식은 여전히 연속적 역사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라디오와 같은 신호 기반의 미디어는 기록된 시간 또는 제작된 시간에 고착돼 있지 않고, 역사의 법칙을 거스르며 언제나 현재라는 시간성을 표출한다.

이런 이유에서 에른스트는 기술 미디어가 인간과 단절된 독자적 역사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아날로그 라디오는 아무리 과거의 것일지라도 모든 라디오 방송이 디지털 송신과 수신 시스템으로 개편되기 전까지는 현재의 주파수 신호로 소리 정보를 만들며 현재라는 시간 안에 존재한다. 녹음된 음악과 실시간 생방송은 문화사적으로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하지만, 라디오 신호를 통하면 둘 다 동시대의 소리가 된다. 그래서 미디어 문화사와 달리 기술 미디어에서는 역사적 과거라는 시간적 개념이 드러나지 않는다. 라디오 신호가 선사하는 신비한 현재성은 오늘날 누군가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볼 때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에른스트에 따르면, 시간 결정적 미디어는 고유한 방식으로 시간을 나누고 기록하고 조작하며 각자의 시간성을 생산한다. 따라서 지구상에는 인간의 시간만이 아닌 미디어만의 시간으로도 가득하다. 일례로 기계적 저장 미디어인 사진, 축음기, 영화는 간헐적, 순간적, 반복적이라는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인 시간성을 문명에 선사했다.

반면에 전자 미디어인 라디오, 텔레비전, 비디오 등은 기계적 저장 미디어보다 더 짧은 시간 간격으로 신호를 처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지각 범위를 초월한다. 이는 인간 문명에 ‘실시간’이라는 새롭고도 비인간적인 시간성을 선사했다. 나아가 가장 짧은 시간 간격으로 작동하는 디지털 미디어는 미디어 역사에 혁신적 단절, 즉 간격 기반의 시간에서 계산 기반의 시간으로 대전환을 이뤄냈다. 디지털은 사용자 중심의 실시간 양방향 소통이라는 시간성을 제시함으로써 현실과 가상공간 사이의 공유와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새로운 기억 방식을 낳는가 

비인간적 시간성과 인간 문명의 충돌은 미디어 문화사에서 줄곧 다뤄 온 주제지만, 에른스트가 제시한 논의에서 새롭게 두드러지는 점은 각 미디어의 고유한 정보처리 방식이 문명의 기억 문화에 드러나는 특징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기술 미디어를 통해 역사 단위의 변화를 설명하려 한 데 반해, 에른스트는 더 나아가 미디어가 고유한 신호 체계로 정보를 저장하고 전송하는 과정 자체가 역사를 이끈다고 주장한다.  

에른스트는 특히 공유와 참여, 댓글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 인간의 기억 문화에 어떠한 특징이 나타나는지 묻는다. 21세기는 디지털 미디어의 미시적 시간성이 낳은 시대다. 과거의 물질적 기록은 안정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문화적 기억인 데 반해, 디지털 미디어로 기록하고 저장하는 텍스트와 영상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기억 방식이다.

디지털 자료는 스트리밍, 인코딩, 디코딩과 같은 방식을 따르므로 언제나 똑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코드에서 기호로 늘 새롭게 생성되며, 단순한 열람을 넘어서 사용자의 참여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된다. 디지털 저장 장치는 종이 문서와 달리 끊임없이 움직이고, 업데이트되고, 연결되고, 재구성된다. 이는 인류가 삶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아카이브의 토대, 즉 기억 문화가 고착된 물리적 공간에서 유동하는 가상공간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21세기 인류의 진화는 생물학적이라기보다 0과 1이라는 비인간적 DNA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미디어 이론은 하드웨어의 작동을 테스트할 때 비로소 실천된다.” 에른스트는 다른 미디어 고고학자들처럼 올드 미디어를 수집하는 방법론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미디어를 분해하고 미디어만이 이해하는 코드와 알고리즘을 분석해 미디어의 작동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른스트가 기술적 원리를 파악하는 데 이토록 몰두하는 이유는 특정한 기술 미디어와 문화가 얼마나 오래 유지되고 얼마나 빠르게 확산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미디어에 의한, 미디어를 위한, 미디어의 역사를 기술하고자 한다.

정찬철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볼프강 에른스트 

분야 : 청각 미디어 이론, 아카이브 이론, 박물관학, 미디어 물질성
사상 : 미디어 고고학 
주요 활동·사건 : 미디어 고고학 아카이브(Media-Archaeological Fundus) 설립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 미디어학 교수다. 1989년 역사주의와 박물관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1년 역사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기술 및 기표 체계에 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1990년대 중·후반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영향을 받아 미디어 연구로 학문적 방향을 선회했다.  

미디어는 기호(signs)가 아닌 신호(signals)를 처리하며 인간은 이를 지각할 수 없다는 고유의 미디어 중심적 테제를 강조한다. 미디어 내부를 구성하는 기술의 원리와 물질성, 다양한 신호처리 방식이 기억 문화의 변화와 역사의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헤쳐 인간의 과거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독특한 미디어 지향적 관점을 컴퓨터, 라디오, 마그네틱 녹음기 등 인간의 삶을 기록·전송·저장하는 아카이브 장치의 분석을 통해 펼쳐 보인다. 미셸 푸코가 아카이브를 문화사 자료의 보관소만이 아닌 인간의 사유, 행동, 표현의 방식을 통제하는 담론의 장치로 규정했던 것의 후속 작업으로서 미디어가 인간을 통제하는 실질적 아카이브임을 밝힌다. 

문화사를 기반으로 미디어의 내용을 분석하는 전통적 미디어 연구를 거부하며 실제 미디어가 어떻게 인간과 다양하게 연결돼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중대한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준다. 미디어의 물질성에 대한 미디어 고고학적 탐구를 통해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기원을 탐구하고, 기술과 문화를 하나의 연합체로 바라보는 인식론적 전환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형성에 디지털 미디어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노아 워드립프루인의 소프트웨어 연구, 닉 몽포르와 이언 보고스트의 플랫폼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 저작으로 ‘미.디엄 푸.코’(M.edium F.aucault, 2000), ‘동요하는 아카이브’(2002), ‘음향 시간 기계’(2015), ‘시간시학’, ‘디지털 기억과 아카이브’ 등이 있다.  



[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문화일보 : 2020년 01월 28일(火)

Q : 인간과 동물은 어떻게 함께 사유하는가?
▲  변영근 작가
A : 새들도 다양한 언어·유희 가져… 동물 입장에서 생각하라

■ 뱅시안 데스프레(Vinciane Despret, 1959~) 

인간만큼…동물도 사람 응시해 
철학, 동물의 응시에 답하려면 
동물의 사유방식 배워야 가능 

이스라엘 사막에 사는 조류 
이타성과 위계질서 등 지녀 
춤도 번식만을 위한 것 아냐 
동물 입장서 보기를 실천해야 

돼지열병탓 살상된 멧돼지 등 
많은 생명체에 책임감 가져야
 

◇동물을 향한 경이와 호기심 

동물은 이제 인간 사회 바깥의 존재가 아니다. 신문의 사회면에도 동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인해 야생 멧돼지 사냥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물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자로서 온기와 애정을 나누기도 하지만 가축 전염병의 매개체로서 위험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가축 살처분으로 인해 동물들이 무수히 죽어가는 모습은 집단적 트라우마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렇듯 동물들은 사회에서 다양한 지위, 역할, 정동을 통해 인간들과 다양한 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동물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의 문제가 인문학적으로 진지하게 성찰되고 있다. 

벨기에의 철학자이자 동물 행동학자인 뱅시안 데스프레는 인간과 동물이 맺는 다양한 관계를 철학과 동물 행동학의 서사로 직조한다. 그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설정하는 여러 정동 가운데서도 특히 경이와 호기심을 강조한다. 철학이 경이와 호기심에서 시작되듯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두 감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동물과 인간의 동질성보다 이질성과 차이를 찾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은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점에서 경이를 불러일으키며 이로써 인간과 흥미로운 동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데스프레는 프랑스 철학자 이사벨 스탕게르스가 이야기하는 ‘코스모폴리틱스’, 다시 말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가 공통으로 참여하는 생태적 집합체의 다양한 결합’을 추적하는 철학을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데스프레는 자크 데리다에 대한 도나 해러웨이의 비판을 인용하며 철학은 왜 동물이 부재한 상황에서 동물을 관념적으로 논하는지 질문한다. 인간이 동물을 응시하는 만큼 동물 역시 인간을 응시한다. 그럼에도 철학은 동물의 응시를 무시한다. 데스프레는 철학이 동물의 응시에 응답해야 하며 그러려면 철학자들이 동물로부터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로써 그는 동물을 이성과 계몽의 타자로 인식하는 기존의 철학 전통과 거리를 둔다. 



◇동물은 어떻게 연구에 참여하는가 

데스프레는 실험실 과학이 아니라 현장에서 동물을 직접 관찰하는 동물 행동학의 방법론을 통해 동물로부터 생각하는 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한다. 그는 동물을 연구하며 예의를 갖추는데, 이것은 윤리적 의무이자 일종의 방법론적 장치이기도 하다. 동물을 단순히 연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달리, 데스프레는 동물들도 앎의 과정에서 일종의 공동 작업을 함께 수행하고 훨씬 생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한다. 동물은 때로 데스프레의 연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도 한다. 데스프레는 동물을 하나의 대상이나 범주로 환원하지 않으며 각각의 동물은 모두 개별적 개체로 인식돼 저마다의 성격을 생생히 드러낸다. 

데스프레는 동물의 생각을 알아내고 동물과 함께 사유를 발전시키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다. ‘양에게도 의견이 있다’ ‘생태학과 이데올로기’ ‘동물 세계의 주체성 형성’ ‘우리가 제대로 질문한다면 동물은 뭐라고 답할까?’ ‘공감, 관점, 입장들 사이의 동물 행동학’ 등 논문 제목만 살펴보더라도 연구 주제의 다채로움이 드러난다. 이뿐만 아니라 현장 연구(남부얼룩무늬꼬리치레, 양, 늑대), 유튜브 비디오(고양이, 까마귀, 사자), 과학 실험실(카푸친 원숭이, 쥐), 동물원(오랑우탄, 개코원숭이), 농장(돼지, 염소, 소), 영화(앵무새), 문학(말, 호랑이), 철학 및 역사(문어, 진드기, 갈까마귀) 등 다양한 종과 매체를 넘나들며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공존하고 결합하고 얽히는지 설명하기도 한다.

그중 대표적 사례가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서식하는 조류종인 남부얼룩무늬꼬리치레와 이 종을 연구한 동물 행동학자 아모츠 자하비에 대한 연구다. 자하비는 관찰을 통해 이 새들이 복잡한 상호작용, 이타성, 관계성을 형성하고 자기들만의 다양한 언어와 위계 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데스프레는 자하비가 새들과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살펴보며 자연 과학자들의 작업이 이데올로기와 정치성으로 오염되어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찰스 다윈과 표트르 크로포트킨을 예로 들자면 동일한 동물의 행위를 관찰하더라도 다윈은 경쟁을 중시한 데 반해 크로포트킨은 이타성과 연대를 강조했다. 새들의 행위를 경쟁 중심적으로 설명하는 다른 동물학자들과 달리, 자하비는 이타성, 유희 등 다양한 상호작용과 사회적 관계성을 탐구했다.

데스프레는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인간의 탐구 방식 자체를 의문시한다. 생물학적 연구에서는 새의 모든 행동을 단순히 진화와 번식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기존의 행동학을 비롯한 분야에서는 새의 행위를 진화 등의 목적에 따른 행위로 설명하지만, 새의 춤을 그 자체의 유희로서 볼 수는 없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새의 춤은 번식만을 위한 행위인가 아니면 유희인가? 새에게도 놀이가 있느냐는 질문은 새가 진화의 법칙에 의해서만 생존하고 번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름의 미학, 유희, 놀이를 갖춘 유기체임을 생각해 보게 한다. 

데스프레는 자하비를 관찰하며 알게 된 내용을 토대로 동물 행동학이 단순히 과학적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생산한다고 말했다. 과학 지식의 생산은 언제나 어떤 구체적인 존재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과학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과 분석이 아니라 암묵적 서사에 기초해 있으며 동물은 인간과 함께 그 서사를 형성하는 데 개입한다. 그래서 데스프레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로 구성할 때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실천한다. 그러려면 연구자가 던지는 질문이 인간만이 갖는 관심에 의해 제시된 것인지 동물도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인지 되물어야 한다. 데스프레가 보기에 재미있는 연구란 모든 존재를 흥미롭게 보이게 하는 연구다. 경험과 의미를 강조하는 이유는 동물을 도구로 볼 것인가 생명으로 볼 것인가의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함이다. 경험과 의미를 통해 과학 기술에 잠재돼 있는 서사를 드러내고 이로써 새로운 과학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동물 공존을 위한 현실적 해결책과 책임감

데스프레의 철학은 실용주의에 근간한다고 볼 수 있다. 데스프레는 스탕게르스가 언급한 낙타 열한 마리의 유산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산으로 남겨진 낙타 열한 마리를 세 아들이 나누어 가져야 한다. 아버지는 낙타 열한 마리 가운데 절반을 첫째에게, 4분의 1을 둘째에게, 6분의 1을 막내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기로 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어떻게 실행할지 논의하다가 현자를 찾아갔다. 현자는 세 아들에게 낙타를 한 마리 빌려주고는 이 낙타를 각각의 몫에 맞게 나눠 보라고 제안했다. 아들들은 셈을 해 본 뒤 낙타를 현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이야기는 유산과 전통의 역설을 잘 보여 준다. 역사적으로 과학, 철학 등 여러 학문적 전통에서는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동물 관계를 이해해 왔다. 각각의 관점은 상충하기도 하지만 데스프레는 이를 정합적으로 통합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낙타 이야기를 통해 실용주의적 태도로 실제 문제에 접근해야 함을 주장한다. 인간은 전통에 긴박돼 있는 존재다. 유산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연원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열한 마리 낙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유산은 파괴하지 않으면 나눌 수도 없다. 그래서 데스프레는 철학의 전통에서 사유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동물로부터도 사유함으로써 두 가지 철학적 충돌 지점을 나름대로 절충한다. 그는 관념적 유토피아나 이상향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 방안, 인간이 동물과 공존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임감 등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인간-동물의 만남과 관계에 대해 실천적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다.

최근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주 전염원으로 지목돼 수많은 돼지가 살처분되고 멧돼지들은 무차별하게 살상되었다. 인간은 이 돼지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농민, 살처분 노동자뿐만 아니라 죽음을 맞은 돼지들의 입장을 헤아려야 한다. 나아가 공장식 출산에 의존해 육식을 하며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본원적 한계를 인정하되 모든 종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동물과 더 책임감 있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덜 사악하면서도 덜 인간 중심적으로 동물을 대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숙고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에서 상호 의존적으로 얽혀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  

주윤정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선임연구원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뱅시안 데스프레 

분야 : 철학, 동물 행동학, 사회 심리학 
사상 : 실용주의, 포스트 휴머니즘, 인간-동물 관계
주요 활동·사건 : ‘동물과 인간’ 전시 기획 

동물 행동학과 과학 철학을 융합한 철학자로, 리에주대 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97년에는 ‘열정의 지식, 지식의 열정’이라는 논문으로 감정 이론을 분석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 심리학 연구에서 동물 행동학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2008년에는 파리정치대에서 과학인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수많은 동물 행동학적 관찰을 통해 동물의 다양성에 대한 논의를 확장하며 동물 행동학을 성찰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사상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스탕게르스, 라투르, 해러웨이 등과 공동으로 연구하며 지적 영향을 주고받았다.

‘늑대가 양과 함께 살게 될 때’(2002), ‘동물과 인간’(2007) 등 초기 저작에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문제시하며 동물의 관점을 과학 철학에 도입하고자 했다.

스탕게르스와 함께 쓴 ‘소란 떠는 여자들’(2014)에서는 여성 학자들의 이력과 지적 유산을 검토하며 부정의, 잔인함, 무지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제대로 질문한다면 동물은 뭐라고 답할까?’(2016), ‘양과 함께 일하기’(2016), ‘새와 함께 살기’(2019)에서는 동물이 인간과 적극적으로 맺는 관계를 논했다.

양은 양치기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양치기는 양에게 무엇을 배우는지, 새들은 영토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새가 노래를 통해 어떤 말을 하는지 등을 기술함으로써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고 얽혀 있는 다양한 방식을 가시화하고자 했다. ‘죽음의 행복’(2015)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현존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존재인 망자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의 문제를 다뤘다.  

동물과의 관계에 이어서 죽은 자와의 관계라는 문제를 탐구함으로써 철학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문화일보 : 2020년 01월 14일(火)
Q : 포스트 휴먼은 단지 과학 기술의 세례를 받은 슈퍼히어로인가?
▲  변영근 작가

A : 인간 생명 넘어선 생성력으로 지구의 새로운 유대 만들어야

(19)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1954~) 

‘아이언맨’은 진보된 인간 ?  
인간 신체 강화라는 점에서  
휴머니즘 계몽적 유산 계승  

게놈·바이오 하이브리드 등  
자본주의 시장서 신체는 상품  
포스트 휴먼 轉回 장소이기도  

다양한 타자와 긍정적 연대  
인류를 긍정적으로 재발명할  
포스트 휴먼 선취 필요성 주장
 

영화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 신체 일부를 기계화해 초인적 힘을 발휘한다.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포스트 휴먼’은 이렇듯 과학 기술의 세례를 받은 슈퍼히어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포스트 휴먼으로서 슈퍼히어로는 신체 개조와 지능 증강으로 인간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지적·물리적 능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보통 인간의 신체로는 불가능한 영속적 자기 보존을 실현한다.

오늘날 크게 유행하는 슈퍼히어로 장르는 포스트 휴먼을 질병, 노화, 죽음마저 뛰어넘는 존재이자 ‘인간 이상의 인간’으로 새롭게 창조된 존재로 여기게 한다. 역사적으로 한계 없는 인간에 대한 갈망은 1818년 영국에서 출간된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죽음을 극복한 존재를 끝내 탄생시켰다. 하지만 정말로 포스트 휴먼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보다 진보한 인간을 의미하는가? 

◇인간 실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포스트 휴먼

이탈리아 출신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대표작 ‘포스트 휴먼’에서 인간의 능력을 강화해 인간 중심주의의 패권을 강화하는 시도가 포스트 휴먼적이라기보다 실은 휴머니즘(humanism)의 이상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근대적 패러다임의 근간을 이루는 휴머니즘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를 인간(human)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근대적 인간이라는 개념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자유 의지의 실천 행위자, 기독교 문화권의 백인 남성 이성애자, 사유 재산을 소유하는 시민을 지시할 뿐이다. 휴머니즘은 자기 규율의 주체이자 심신이 일치하는 개인을 모든 가치 판단의 척도로 삼는다는 점에서 철저히 인간 중심적 체계다. 휴머니즘은 또한 동일성과 타자성의 이분법, 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희구하는 계몽주의를 함의한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휴머니즘이 전제하는 ‘인간’이 유럽이라는 특정한 지정학적 위치와 근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본격적으로 전개됐다는 점에서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개념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브라이도티는 푸코의 지적에 동의하며 휴머니즘이 일종의 역사적 구성물로서 다양한 우발적 가치와 지역성을 지닌다고 이해한다. 또한 새 천 년이 시작된 이래 포스트 휴먼으로의 전환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이런 현상을 근대적 패러다임이 전제하는 인간 정체성과 실존에 관한 근본적 문제 제기로 이해한다. 

포스트 휴먼을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둘로 나뉜다. 기술의 개입 때문에 인간적 가치와 위상이 상실될 것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있는 반면, 포스트 휴먼을 의학과 과학의 진보로 이해하는 낙관적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두 관점 모두 포스트 휴먼을 근대적 인간과 구별되는 새로운 존재 조건으로 규명하지는 않는다. 특히 이른바 ‘트랜스 휴머니즘’이라 불리는 후자의 입장은 인간이 기술과 함께 진화하며 인간을 더 강한 존재로 발전시킨다고 이해한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자기 개선을 정언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신체를 정신의 불완전한 감옥으로 여긴다. 따라서 트랜스 휴머니즘은 기술 또는 기계와의 결합을 휴머니즘의 진보로 간주하며 이로써 인간 신체를 강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의 계몽적 유산을 계승한다. 또한 휴머니즘의 전제를 굳건히 할 뿐만 아니라 확장된 기술의 도움을 받아 ‘슈퍼 휴먼’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 휴머니즘의 특성을 확대하기도 한다.

◇포스트 휴먼 전회가 일어나는 장소, 신체 

생명 공학의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HGP)는 휴머니즘의 전제를 탈피하는 전환점이 됐다. HGP가 제시한 유전자 지도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종 사이의 연결 관계를 드러낸다. 생명 공학은 개인의 유전 및 신경 정보를 세포 단위로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유전자를 공학적으로 재구축하고 기술적으로 발명한다. 인간 신체가 인공적 기관으로 대체되거나 그것과 합체되면서 신체와 기술이 상호 연계되고 합성되는 인터페이스가 본격적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일례로 ‘바이오 하이브리드’라고 알려진 새로운 생명 공학 기술은 안경을 전자 망막으로 대체해 시력을 교정하려 한다. 나아가 심장 박동기를 생체 공학적 심장으로, 손상된 췌장을 인공 췌장으로 바꾸려는 구상을 실현 중이다. 기술과 매개된 신체는 이미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엄연한 상품으로 자리 잡으며 보편화되고 있다. 상품이 된 신체는 보디빌딩, 컬러 콘택트렌즈, 지방 흡입술 등 비교적 단순한 단계의 신체 향상부터 성형 수술, 인공 관절, 인공 치아 등 인공 기관의 직접적 체내 삽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형태로 사회에 수용된다. 이렇듯 기술과 신체가 연동되고 상품화될수록 ‘자연적인 몸’의 범위와 표지는 더욱 모호해진다. 

브라이도티는 오늘날 인간 신체에서 일어나는 포스트 휴먼적 상황을 이해하려면 신체와 정신을 분리하는 데카르트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신체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신체와 기술의 매개는 근대적 의미의 신체 능력의 향상으로 보기 어렵다. 극단적으로 보자면, 기술과 매개된 신체는 인공적 확장과 대체의 과정이 거듭되는 구성체일 뿐이고 의식은 현상에 불과하다. 오늘날 신체가 처한 상황은 신체에 대한 기존의 정의 자체를 의문시하며 휴머니즘의 가정을 파기한다. 신체는 이로써 포스트 휴먼으로의 전회가 일어나는 현장으로 작동한다. 

브라이도티는 스피노자의 내재론과 들뢰즈의 존재론을 통과한 신유물론의 입장에서 포스트 휴먼을 설명한다. 브라이도티에 따르면, 포스트 휴먼으로의 전회가 벌어지는 장소인 신체는 다른 인공물과 결합하거나 해체되며 그 과정에서 이질성과 계속 상호 작용하며 변화한다. 신체의 이와 같은 특성을 이해하려면 문화가 물질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만큼 자연도 문화적으로 구성됐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자연과 문화는 상호 작용하며 신체는 자연-문화 연속체의 연장선 위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윤리적 유대를 마련하는 ‘긍정의 포스트 휴먼’

포스트 휴먼의 시대는 이미 본격화됐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인간에게 곤경의 풍경으로 등장한다. 과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지구화된 시장 경제는 불평등의 심화와 빈곤, 생태계 파괴 등을 야기한다. 특히 복잡한 국제 관계와 맞물린 각종 분쟁, 난민 양산, 기후 변화 등의 전 지구적 문제에 정치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은 휴머니즘으로 막아 낼 수 없는 임박한 파국의 징후처럼 여겨진다.

브라이도티는 이 파국적 국면을 타개하는 실마리를 포스트 휴먼에서 찾는다. 포스트 휴먼이 고전적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윤리적 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브라이도티가 제시하는 ‘긍정의 포스트 휴먼’은 페미니즘의 통찰을 적극 수용한다. 휴머니즘이 실은 ‘로고스-남근-서구-인간 중심주의’에 불과함을 폭로하고 젠더, 인종, 장애 유무 등에 따라 근대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못했던 ‘타자’의 존재에 주목한다. 이와 같은 반성적 시각은 지금껏 하등하다고 여겨진 생명체나 기계를 향한 성찰로 이어진다. 결국 새로운 존재 조건을 마련하는 일은 인간 중심주의를 해체하고 극복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 정치체의 역사적 존재론을 추적하고 지구 행성의 다른 거주자들과 맺는 관계를 기존과 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 공존, 공생, 공진화할 수 있는 윤리적 거주 방식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자리를 만들어 내는 일은 인간을 넘어선 비인간과 생명의 영역 모두가 인류세의 타자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려면 인류세의 생명 정치가 여성, 동물, 식물, 유전자, 세포에 이르는 생식력을 착취하는 통치에 기반한다는 점을 직면하고 비판해야 한다. 이를 위해 포스트 휴먼은 인간의 생명을 넘어선 생성력으로서의 생명을 강조하고 정신과 신체, 자연과 문화,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이분법을 넘어선 시각, 즉 신유물론과 결합한 탈인간 중심주의로부터 구축돼야 한다.
 

새로운 주체는 근대가 배제한 인간 타자뿐 아니라 환경적 타자들과 기술적 장치들을 포함하며, 인간 아닌 관계들의 연결망에 있는 다양한 타자와 상호 접속한다. 다시 말해 개인을 행위자 주체로 설정하는 휴머니즘과 달리, 포스트 휴먼 주체는 지정학적·생태학적으로 새로운 집단적 행위자다. 이들은 공동의 생활 공간에 공동체, 묶음, 집단, 무리로 거주하며 다수의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긍정의 연대(affirmative bond)를 촉진한다. 

브라이도티는 인류가 포스트 휴먼으로의 전회를 통해 자신들이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함께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류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재발명할 수 있는 실험으로서 포스트 휴먼을 용기 있게 선취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불신만으로는 포스트 휴먼의 조건을 결코 세울 수 없다. 브라이도티는 근대적 인간 개념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반휴머니즘적 통찰을 존중하지만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과 허무주의적 인간 혐오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포스트 휴먼은 존재론적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의심과 불신이라는 부정적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지구 공동체를 친화력과 윤리적 책임으로 결속하려는 시도다.

김은주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로지 브라이도티 

분야 - 서양 철학, 페미니즘 이론, 포스트 휴먼 이론 

사상 - 동시대 페미니즘, 포스트 휴먼 이론, 긍정의 윤리학
주요 활동·사건 - 유럽 학제 간 여성학 연구 네트워크(NOI&SE) 설립, 유럽인류연구소협회(ECHIC) 창립 멤버

페미니즘, 포스트 구조주의, 비판 이론, 정치 이론, 문화 연구, 과학 기술 연구 등을 넘나드는 철학자로, 현재 위트레흐트대 명예 교수로 있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철학, 포스트 모던 페미니즘 등을 결합해 유목적 주체, 긍정의 윤리학, 포스트 휴먼 이론을 제시한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호주에서 비주류 백인 이주민으로 자랐다. 호주국립대에서 스피노자 연구자이자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제너비브 로이드의 지도하에 철학을 공부했다. 그 후 프랑스 소르본으로 유학해 1981년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위트레흐트대 여성학 창립 교수로 부임했고, 1995∼2005년 네덜란드 여성학연구학교 설립 이사로 재직했다. 2002∼2003년 유럽대학연구소에서 진 모넷 교수직을 수행했고, 2005∼2006년 버크백대 방문 교수를 지냈다. 2007∼2016년에는 위트레흐트대 인문센터 설립 책임자를 역임했다. 

페미니스트 철학자로 성장하며 자기 자신을 다언어주의자이자 복수적 정체성의 집합으로 이해하게 됐다. 하나의 정체성에 뿌리를 둘 수 없고 유동적으로 흐르는 여러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정체화한 것이다. 누구든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의 기원을 상실하며 누군가의 정체성을 알려 주는 유일한 지표는 그 사람의 욕망에 흔적처럼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즉 정체성은 삶의 여정에서 생겨난 경험과 체험이 만든 자취의 지도다. 이는 후험적으로 구성되며 단일하고 통일적인 정체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이리가레와 들뢰즈의 통찰을 활용해 ‘집단적 행위자’를 새로운 윤리적 주체로 주목했다. 대표작 ‘포스트 휴먼’(2013)은 ‘유목적 주체’(1994), ‘변신’(2002), ‘트랜스포지션’(2006)에서 탐구한 새로운 주체화 이론의 선상에서 휴머니즘에 관한 다양한 담론과 현상의 지형도를 그려 내고 포스트 휴먼의 조건을 고찰한다.

    


[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문화일보 : 2020년 01월 07일(火)
Q : 컴퓨터 네트워크서 통제와 자유는 어떻게 공존하는가?
▲  이정호 작가

A : 사이버공간의 자유, 모니터 이면의 통제에 순응한 대가

(18) 웬디 희경 전(Wendy Hui Kyong Chun, 1969~)

빅데이터가 찾아낸 상관관계  
불평등 심화와 인종차별 유도  
뉴 미디어 기술 결정론 비판  
각종 매스미디어·문화 탐사  

컴퓨터 프로세싱 ‘未知 영역’  
전산과정 비가시적으로 은폐  
‘GUI=이데올로기 유사물’규정  

빅데이터의 사용자관리에 맞서  
‘잊어질·지워질’권리 실현하는  
네트워크 사용방향도 제안해
 

2009년, 미국의 컴퓨터 전문가 블랙 데시는 유튜브에 영상 하나를 업로드했다. 이 영상은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현재까지 3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해당 영상에서 데시는 휴렛팩커드 컴퓨터에 내장된 안면 인식 소프트웨어를 동료와 함께 시연해 보인다. 먼저 흑인 남성인 데시가 컴퓨터 웹캠 앞에 선다. 그는 좌우로 움직이지만 소프트웨어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화면도 그대로 멈춰 있다. 그러나 백인 여성 동료가 화면 앞에 서자 갑자기 웹캠이 그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데시는 이 모의실험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이것을 영상의 제목으로 붙였다. “휴렛팩커드 컴퓨터는 인종차별주의자다(HP computers are racist).” 

오늘날 사람들은 자아를 표현하고 세계와 연결되기 위해 일상적으로 소셜미디어를 이용한다. 또한 인공지능(AI)과 빅 데이터는 삶의 영역 곳곳으로 급속히 확산되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페이스북과 구글은 사용자 권한과 정보 검색을 대가로 네트워크에서 사용자의 행위를 추적할 수 있는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데이터 수집은 사용자의 취향과 성향을 바꾸기보다 이를 강화한다. 사용자가 능동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추천 페이지, 추천 영상, 광고 사이트 등이 알고리듬에 따라 자동적으로 제시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금년 초 뉴욕대 AI나우연구소는 미국 13개 도시 경찰에서 운영하는 범죄 예측 시스템이 특정 인종에 대한 편견이 담긴 결론을 산출해 왔다고 발표했다. 이를테면 흑인과 소수 인종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에 더 많은 잠재적 범죄자가 있다고 예측한 것이다. 이렇듯 시민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더러운 데이터(dirty data)’의 활용은 비판적 디지털 미디어학자 웬디 희경 전이 빅 데이터에 대해 통찰한 바를 뒷받침한다. “빅 데이터는 언뜻 무관해 보이는 상관관계를 찾음으로써 기존의 불평등을 심화하고 인종주의적·차별적 실천을 유도한다.” 

웬디 전의 견해는 이른바 뉴 미디어에 대한 기술 결정론이나 사용자 우선적 낙관주의에 비판적으로 맞선다. 즉 디지털 미디어가 세계, 대상, 주체를 전례 없이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시각에도, 사용자의 자유와 사용 방식에 따라 디지털 미디어의 효과가 결정된다는 시각에도 공히 반대하는 것이다. 그는 첫 번째 저서 ‘통제와 자유’(2008)에서 인터넷이 다양한 기술적·정치적·문화적 통제를 수반함에도 왜 신문, 방송 등 기존의 매스미디어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의 도구로 도입되고 확산됐는지 묻는다. 그 이유는 네트워크가 통제와 자유를 불가분의 짝패로 마련하기 때문이다. 즉 사이버 공간의 사용자가 누리는 항해와 검색의 자유는 컴퓨터 모니터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통제에 은밀히 순응한 대가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인터넷을 이용하며 누리는 자유는 주체에게 프라이버시의 약화를 포함한 새로운 유형의 취약함을 수반하고 편집증적 불안을 야기한다.

웬디 전은 통제와 자유의 역설적 공존을 드러내고자 네트워크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그 밖에 네트워크를 재현하는 다양한 미디어 문화를 탐사한다. 그는 우선 하드웨어의 차원에서 인터넷의 TCP/IP(Transmission Control Protocol/Internet Protocol)를 분석한다. 이로써 네트워크가 신호의 전송과 수신을 동시에 수행하는 쌍방향의 창처럼 작동함을 드러내고 인간의 인식을 벗어나는 그 창의 이면에서 기술적 통제가 이루어짐을 밝힌다. 또한 네트워크의 표면에서는 인터넷 포르노 문화의 양가적 면모를 지적한다. 즉 사이버 공간에서 번성하는 각종 포르노 사이트는 미국의 헌법 정신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공히 천명하는 사상과 상업의 자유를 웅변하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규제는 자유와 더불어 부과되는 정보 통제의 존재를 입증한다. 통제와 자유의 갈등적 공존은 인터넷 문화를 재현한 광고,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 등에서도 확산돼 왔다. 기업들은 인종, 성별, 연령과 관계없이 사용자의 자유와 역량을 강화하는 공간으로 인터넷을 홍보해 왔지만, 유색 인종은 사이버 주체의 초월적 정체성을 체험함으로써 차별받는 신체라는 현실의 구속에서 벗어나 이상화된 백인 부르주아 주체와 동일시하게 된다.

통제와 자유의 역설적 공존이라는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존재론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역설적 공존으로 심화된다. 웬디 전은 두 번째 저서 ‘프로그래밍된 시각’(2011)에서 소프트웨어는 물리적 실체 없이 수많은 컴퓨터와 사용자 환경에서 널리 작동한다는 비물질성의 선입견에 도전한다. 그는 소프트웨어의 비물질성이라는 신화에 도전하면서도 소프트웨어의 역설적이고도 모호한(vapory) 특성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인간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소프트웨어를 알 수 있지만 이를 구동하는 컴퓨터의 프로세싱은 인간의 지각을 넘어서기 때문에 미지의 상태로 남는다. 소프트웨어를 구성하는 코드는 언어적으로 행동을 실행하지만, 전능한 프로그래머가 이 코드를 조직하고 개발한다는 신화는 코드의 기계적 자동성을 마법적인 것으로 은폐한다.

웬디 전은 소프트웨어의 이와 같은 역설이 사용자가 컴퓨터를 사용할 때 대면하는 인터페이스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raphical User Interface·GUI)는 컴퓨터 운영 체제 등에 적용됨으로써 사용자가 컴퓨터 하드웨어에 접속하고 이를 가시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GUI는 하드웨어 이면에서 작동하는 전산(computational) 과정을 비가시적인 상태로 은폐한다. GUI의 상호 작용성은 개인적 행위와 선택의 자유를 경제적 발전의 원천으로 상정하면서도 불안정한 세계에 계속 적응하기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체현한다. 웬디 전은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동원해, 사용자를 생산하고 하드웨어와 상상적 관계를 맺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GUI를 ‘이데올로기의 유사물’로 규정한다.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다면적으로 공존하는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가장 심오한 역설은 메모리(memory·기억)의 차원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영구적인 기억 기계가 될 것이며 네트워크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정보의 아카이브가 되리라 기대하곤 한다. 이런 믿음은 컴퓨터와 네트워크가 기억과 저장을 통합하며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재생하고 다시 읽어 낸다는 점 때문에 생겨났다. 정보는 영구적 기억을 구성하기 위해 사라지고 갱신되는데, 웬디 전은 이 같은 정보의 역설을 ‘오래가는 덧없음(enduring ephemeral)’이라고 일컫는다. 

컴퓨터와 네트워크에 내재된 ‘오래가는 덧없음’의 역설은 최근작 ‘동일 유지를 위한 업데이트’(2016)에서 소셜 미디어의 차원으로 연장된다. 웬디 전은 소셜 미디어의 본성과 소셜 미디어가 구축하는 ‘당신(들)(You)’이라는 정체성의 역설을 설명하고자 습관(habit)이라는 익숙한 철학적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는 습관을 둘러싼 사상적 계보, 즉 데이비드 흄, 존 듀이, 질 들뢰즈, 피에르 부르디외를 가로지르며 습관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내놓는다. 웬디 전에게 습관이란 과거를 반복함으로써 미래를 대비한다는 점에서 ‘창조적 기대’다. 습관의 이 역설적 특징은 오늘날 활발히 서비스되는 소셜 미디어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소셜 미디어 사용자들은 개별 사용자인 ‘당신’인 동시에 세계 곳곳의 다른 사용자와 연결되게끔 독려받는 ‘당신들’로 호명되고, 자신의 존재가 항상적임을 입증하도록 끊임없이 상태 업데이트를 권유받는다. 
 

습관은 업데이트를 촉발하는 기제임과 동시에 소셜 미디어를 순환하는 다양한 종류의 위기이기도 하다. 웬디 전은 이런 특성을 뉴 미디어의 결정적 차이, 네트워크의 시간성 등으로 규정하고 업데이트를 습관과 위기의 합(Habit + Crisis)으로 정식화한다. 소셜 미디어와의 습관적 연결은 업데이트를 촉진하면서 신자유주의의 동력인 불안정성과 변화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또한 빅 데이터를 비롯한 계량화된 데이터의 수집을 촉진하고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전통적 구별을 와해한다. 웬디 전은 소셜 미디어에서 벌어지는 친구 맺기나 사이버 폭력 등의 문제를 지적하지만 전통적 프라이버시를 옹호하거나 전통적 공동체의 소멸을 애도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소셜 미디어에서 사적이고 개별적인 중독으로 치부되는 습관을 타자와 공유해 공통의 경험으로 재구성하고, 사용자의 행위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저장하고 관리하는 빅 데이터의 정치에 저항해 ‘잊어질 권리’와 ‘지워질 권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네트워크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지훈 영화미디어학자, 중앙대 교수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웬디 희경 전 

분야 - 비판적 디지털 미디어 연구, 소프트웨어 연구, 컴퓨터 공학, 비판 이론

사상 - 디지털 유물론, 비판적 인종 연구
주요 활동·사건 - 사이먼프레이저대학교 디지털 민주주의 그룹 연구 주도

현재 사이먼프레이저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로 있다. 2000년대부터 영미권 학계에서 성장해 온 비판적 디지털 미디어 연구 분야를 알렉산더 갤러웨이, 리사 나카무라, 이언 보고스트, 매트 퓰러 등과 함께 선도하며 기술 연구와 비판 이론의 생산적 결합이라는 학제 간 연구의 탁월한 사례를 보여 줬다. 디지털 문학, 비디오 게임, 온라인 비디오·텍스트, 데이터 시각화 등 컴퓨터에 기반한 문화적 대상의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인터페이스에 주목해 이들의 기저에 작동하는 코드, 알고리듬, 프로그래밍의 기술적·물질적 차원을 상세히 분석한다. 또한 미셸 푸코, 질 들뢰즈, 프레드릭 제임슨, 조르조 아감벤 등의 비판 이론과 접속해 자신의 분석 작업을 디지털 미디어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활용에 대한 독해로 연장한다. 이로써 디지털 미디어가 비인간 행위자로서 기존의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동시에 인간의 주체성과 행위, 인간이 상정한 세계와 대상의 정의를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점을 입증한다. 

뉴미디어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전반을 작동시키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기술임을 깨달으려면 컴퓨터 스크린 너머의 기술적·이데올로기적 작용을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반면 디지털 인문학에서 주장하듯 모든 인문학자가 코딩을 배워야 한다는 식의 입장에는 비판적이다. 컴퓨터 하드웨어가 인간의 지각을 넘어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코딩 지식만으로 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거짓 환상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디지털 인문학이 기존 인문학에서 연구한 대상을 단순히 소프트웨어로 다루는 데 그쳐선 안 되며, 과학과 인문학이 결합된 비판적 사유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차기작 ‘차별하는 데이터’에서 입증될 것으로 보인다. ‘차별하는 데이터’는 빅 데이터를 활용한 네트워크 분석이 인종과 젠더 정치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