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곡,아리아,민요 (동영상) ☆

朴泳柱 2019. 8. 24. 15:54

새야새야 파랑새야       부산시립소년소녀합창단

35th International children of the Festival Halle

                게시일 : 2014. 6. 1.        부산시립소년소녀합창단 2014 독일 공연

불후의 명곡 광복절 특집, 김소현 - 새야 새야 파랑새야               

            

게시일 : 2019. 8. 10.      김소현(1975.11.12 ~ )은 뮤지컬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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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총리의 고조 할아버지, 알고 보면 조선의 철천지 원수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고조부가 누리꾼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일본이 삼성 등 한국기업에 대한 수출 규제를 단행한 뒤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 고조부의 이름은 오시마 요시마사(1850~1926년).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군 8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상륙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인물. 당시 일본군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명분으로 청군과 함께 파병됐지만

농민군이 조선조정과 全州和約을 체결해 주둔할 명분이 사라졌다.

그러자 오시마 요시마사는 경복궁을 습격해 국왕인 고종을 인질로 삼아 주둔 명분을 만들려는

작전을 세운다. 당시 한양에 주둔한 일본군 혼성여단장이었던 오시마 요시마사는 1894년

경복궁을 무단 침입해 고종을 겁박하고 대신들을 대거 친일인사로 교체해 친일 내각을 세우는

방법으로 갑오개혁(일본의 강제적인 내정개혁)을 강요했다.

또 관동도독(만주총독)으로 안중근 의사를 사형대에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오시마 요시마사가 가장 존경한 인물은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한

스승 요시다 쇼인이다. 평생 우익 정치가와 지도자를 지도한 요시다 쇼인은 일본 우익의 뿌리를

이루는 인물로서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베 총리가 “안중근은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이다”라고 말한데는 이런 배경이 있는 셈이다. 

한편 아베 총리의 외조부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그는 1950년대에 자민당을 만들 때 우익의 대변자로서 조선을 괴롭히는데 크게 일조한

요시다 쇼인의 정신을 구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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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새야새야 녹두장군

새야 새야 파랑새야... 이 노래가 만가였네... 

동학농민군 아내들이 죽은 남편 영혼 달래며 불러

오마이뉴스  2013.03.11 11:50    정만진(daeguedu)기자

전봉준의 잡혀가는 모습.<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된 것을 재촬영하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만가(輓歌)였다. 만가는 죽은이를 애도하는(輓) 노래(歌)로,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나아가면서 부르는 구슬픈 소리를 말한다.

동학농민군의 아내들이 전사한 남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울부짖으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인 것이다.

전봉준(全琫準, 1854년 ~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은 조선의 농민 운동가이자

동학의 종교 지도자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남접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이며 호는 해몽(海夢)이다.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키가 작아 붙여진 별명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중들은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 불렀다.

전봉준은 어린 시절 키가 녹두콩만큼 작아서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동학군의 대장이

됐을 때도 '녹두장군'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러므로 노래에 나오는 '녹두밭'은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을, '파랑새'는 농민군의 적인 외국 군대, '청포 장수'는 동학군이 이기기를

소망하는 당시 민중들을 가리킨다.
"가보세 가보세... 병신 되면 못하리"

전봉준 선생의 옛집이 복원되어 있지만, 초라할 뿐만 아니라 주변도 어수선하여

'국가 사적'이라는 안내판이 어쩐지 생뚱맞게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동학군들은 진군할 때 아래의 노래를 불렀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
갑오년(1894년)에 모든 것을 해치우자는 외침이다.

미적이다가 때를 놓쳐 을미년(1895년)을 흘려보면 병신년(1896년)이 돼 혁명이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을미년 이후 신식 무기를 앞세워 개입한 일본군에

밀려 농민군이 패배하고 만 게 못내 안타까워 농민들은

그렇게 "가보세(甲午歲·갑오세)"를 외쳤던 것이다. 

전봉준 선생 묘역. 옛집 사립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얕은 언덕 뒤편에 있다.


구전되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오선지에 처음 옮겨진 것은 1934년 무렵이었다.

채보자는 당시 연희전문 졸업반이던 김성태였다.

김성태는 뒷날 정인보 작사 <개천절 노래>를 작곡한 사람이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김성태가 작곡한 노래 중에는 '해방의 감격을 진정으로 뒤흔든' 작품도 있다.

이는 <노래 1>(실천문학사·1984)에 발표된 박윤우의 논문 '해방 후 대중가요의

사회사'에 나오는 표현이다. 박태원 작사의 이 노래는 본래 제목이 <독립 행진곡>이었지만,

그 무렵 거리에서는 보통 <해방가>로 불렸다.

묘역에서 보는 전봉준 선생의 초상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무야 자리 차고 이러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넘어
아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한숨아 너 가거라 현해탄 건너
설움아 눈물아 너와도 하직
동무야 두 손 들어 만세 부르자
아득한 시베리아 넓은 벌판에
아아 해방의 해방의 깃빨 날닌다

유구한 오천년 조국의 력사
앞으로 억만 년이 더욱 빛나리
동무야 발맞추어 함께 나가자
우리의 앞길이 양양하고나
아아 청운의 청운의 피가 끓는다

초라하고 어수선한 선생의 '옛집'

전봉준 선생의 옛집을 찾아본다. 흔히 '상화 고택' '인촌 고택' 등의 표현을 쓰고, 선생의

집앞 안내판도 '전봉준 선생 고택지'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나는 전봉준 선생의 경우는 그저 '옛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쩐지 고택은 어감이

으리으리한 와가를 가리키는 듯한데 선생의 집은 그저 그런 시골 초가일 뿐이다.

게다가 안내판이 '고택지'라고 해설한 것을 보면 우리가 오늘날 보는 이 집은 선생이

실제로 기거했던 초가도 아니다. '지(址)'는 우리말 '터'를 굳이 한자로 나타낸 것이니

지금의 집은 복원물에 지나지 않는다.(덧붙이자면 '고택지'는 당연히 '옛집터'로

바꿔야 옳다.

물론 '미륵사지' '황룡사지' 등도 '미륵사터' '황룡사터' 등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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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을 읽어본다. 안내판은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는

'전봉준 선생 고택지'가 '사적 293호'라는 사실부터 알려준다. 

이어 '남향으로 터를 잡은 이 초가집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1854∼1895)이

살던 곳으로, 조선 고종 15년(1878)에 지어졌다'고 안내돼 있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농사일과 동네 서당의 훈장 등을 지내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는데,

고병군수 조병갑이 만세보를 설치하고 과중한 물세를 거두는 등, 농민에게 각종 수탈을

자행하자 고종 31년(1894) 분노에 찬 1000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공격,

조병갑의 잘못을 응징했다. 이 사건은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을 당기는 서막이 됐다.

        

선생의 옛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다.

선생의 옛집과 묘역을 둘러보는 전후에 꼭 이 곳을 찾아야 한다.

당시에 쓰였던 우물도 집 앞에 있다.

그러나 덮개가 얹혀 있어 실제로 마셔도 되는 물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주변에 마을 사람이 보이면 물어보고 싶지만 마침 인기척도 없다. 

복원된 옛집도 덮힌 우물도 한결같이 초라한 선생의 사적지에서 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목청껏 불러본다. 그러나 아무리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노래는

여전히 슬프다. 애잔하다. 눈물겹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선생의 옛집터 사립문 등진 채 앞을 바라보니 스레트집 한 채와 작은 채마밭 너머로

얕은 언덕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전 이리로 들어올 때 그 언덕 뒤편 비탈에 장군의

묘소가 있다는 이정표를 봤다. 여기서 대략 100미터 거리밖에 안 된다.

참배하러 갈 시각이다. 소주 한 잔 붓고, 신발을 벗은 채 잔디밭에 올라 절을 올릴 일이다.

기분이 어떨까.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본 장군의 눈빛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