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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이 들었던 12.12 군사 반란군의 M48AK5탱크 부대 기동 굉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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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2018. 1. 6.



석방된 후 강원 원주 집 앞에서의 시인 김지하 - 1981년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 ~ )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며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대하소설 토지로 잘 알려진 소설가 박경리의 사위이고 

1970년대 유신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다. 

김지하는 1980년부터는 동서양의 철학과 대한민국의 전통 사상을 아우르는 

‘생명 사상’을 제창하였으며, 시집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시삼백] 등이 있고

 회고록 [흰 그늘의 길]과 저서 [김지하 사상전집]이 있다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서울로 유학, 중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진학하여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4·19혁명과 5·16 군사 정변을 겪었고, 

6·3사태 등을 접하면서 그는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66년 서울대 졸업 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 동참하였다.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필명은 '지하'(地下)였는데 이것이 굳어져 이름처럼 사용되면서

 이름을 지하(芝河)라 하게 되었다.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1970년 정치인과 재벌, 관계의 부패와 비리를 질타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를 오적 필화 사건이라 한다. 

1973년 4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였고, 

아들 김원보, 김세희 형제가 태어났다. 

그러나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 체포되고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해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김지하의 구명을 위해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미국의 노엄 촘스키 등 

해외 문인 및 지식인들과 연대해 김지하 시인에 대한 

'사법 살인'을 막자고 나섰고 그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가 같은 해 3월 13일 

서울에서 원주 집으로 가려고 나오다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다시 구속되었다.

이후 재판을 받고 다시 무기징역에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79년 10.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후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날 

중앙청에 진주한 계엄군의 M48A2C형 탱크 - 1979년 12월 27일 





12.12 사태  군사반란 당시 중앙청을 점거한 반란군의 M48AK5 탱크 - 1979년 12월 12일 


1979년 10.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후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날 

중앙청에 진주한 계엄군의 전차대는 차체 측면에 사이드 스커트가 없는 

90mm M41 전차포를 장비한 구형 M48A2C 탱크 부대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달 보름후 군사반란을 획책한 

육군내 육사 11기가 주축으로 만든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주도의 군사반란 12.12 사태  당시에

계엄군이 아닌 반란군으로서 다시 중앙청을 점거했을때는 

차체 측면에 사이드 스커트 장갑을 붙이고 

105mm M 68 강선포를 장비한 신형 M48AK5 탱크 부대였다.





서울구치소 2층 맨 끝 한 귀퉁이에 김지하의 방이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면 인왕산과 무악재가 훤히 보였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얼마 후 김지하는 김재규의 부관이었던 

박선호(중정 의전과장)를 교도소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김지하는 “그와 운동시간에 만나 몇 마디 인사를 했는데 딱 한마디만 기억에 남는다. ‘

(김재규) 부장님이 그(10·26) 며칠 전 미 중앙정보국장을 만났습니다. 

반드시 어떤 조치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어떠한 조치’란 것은 없었고 얼마 후 김재규의 사형 집행 소식만 들려온다.

    1979년 겨울 서울구치소는 들떠 있었다. 

함께 복역 중이던 민주화 인사들은 통방을 하면서 

“곧 전격적인 사태 변화가 온다더라. 

내각 명단까지 다 짜고 있다더라. 

우리는 곧 석방된다”는 기대감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지하의 머리와 마음속은 편치 않았다. 

앞으로 이 정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김지하는 지축을 울리는 굉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나중에 소식을 듣고 ‘12·12’(전두환 노태우 등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정말 복잡한 시절이 왔구나. 

앞으로는 진정 근본적인 데에 토대를 두고 일을 해야 한다. 

전략을 바꿔야 한다.

 내가 언제 감옥을 나갈지 알 수 없으나 이제 

사상과 이념에서부터 전략까지 전체를 수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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