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장성 답사

북두 홍찬수 2014. 11. 2. 21:38

고구려(高句麗) 제27대 영류왕(榮留王)은 당(唐)나라와 싸우지 않고 외교적(外交的)으로

화친정책(和親政策)을 편다.

 고구려 국경지도(高句麗 國境地圖)인 봉역도(封域圖)까지 당(唐)나라에 바치면서

저자세 외교를 하여 강평파와 대립을 하게된다.

당태종 이세민(唐太宗李世民)은  당(唐)나라의 지리지도(地理地圖)를 관리하는

직방낭중 진대덕(職方郎中 陳大德)을 고구려 사신(高句麗 使臣)으로 파견한다.

진대덕(陳大德)은 고구려 산천(高句麗 山川)을 두루 다니며 고구려의 지리정보(高句麗 地理情報)를 입수하여 갔다.

이렇듯 당(唐)나라는 호시탐탐(虎視眈眈) 고구려를 정벌(高句麗征伐)을 할 계획을 세우고

명분을 찾던 중 642년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왕을 시해(榮留王 弑害)하고 대신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정변을 일으킨다.

당태종(唐太宗)은 이를 빌미로 645년에 친히 요하(遼河)의 늪을 건너 수십만 대군(數十萬 大軍)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高句麗 侵略)을 한다.

 

645년 5월 당태종 이세민(唐太宗李世民)은 요동성이 정복(遼東城征服)하고 동쪽에있는

백암산성(白巖山城, 燕州山城)으로 진군한다.

백암성주 손대음(白巖城主孫代音)은 요동평원에 집결(遼東平原 集結)한 당(唐)나라

수십만 대군9數十萬大軍)을 보고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당태종 이세민(唐太宗李世民)에게 항복(降伏)을 한다.

기록에 백암산성(白巖山城)의 군사는 대략 2,700명.

 성으로 피난을 온 백성이 약 1만여 명이라 한다.

 

2014년 8월과 9월에 백암 연주산성(白巖 燕州山城)을 2차례 답사(踏査)를 하였다.

 

 

 

마을 입구를 돌아 산성입구에 2개의 연주산성 표지석(燕州山城 標識石)을 세워놓았다.

백암산성(白巖山城)은 연주산성(燕州山城)이라고도 불리운다. 

 

산성에 오르기전에 마을길을 따라  보루성(堡壘城)터로 보이는곳을 답사를 해보았다

산성에서 북쪽 산밑으로 연결된 도로 옆으로 이러한 형태의 산성이 낮은 계곡을 따라서

곳곳에 세워져 있었으며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중앙에 아치형 문이있 막혀 있었고

주변이 보루산성(堡壘山城)이 무너져 있었다.

 

서쪽에서 바라본 백암산성(白巖山城)의 모습이다

산성 아래 지점이 무너져 있고 상단쪽은 원형그래로 보전되어 있다.

 

 

 

 

 

1차 8월 답사때 남쪽 태자강변(太子江邊)의 절벽성(絶壁城)터를 답사릏 못하였다

2번째 답사때 태자강(太子江)에서 나룻배를 타고 일행과 자연성벽(自然城壁)을 답사해본다.

대략70~100여m의 수직 천연절벽으로 형성되었고 중간에 동굴이있고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서쪽 성문입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이다

이곳이 산성 아래 지점이며 남쪽으로 태자강 절벽9太子江絶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백암산성(白巖山城)에는 현재 요녕성 정부 고고학회(遼寧省政府考古學會)에서

산성발굴(山城發掘)을 하고 있었다.

 

 

 

 

 

북쪽에 설치된 치성(雉城의 모습이다.

 밑 기단부(基壇部)에 커다란 돌을 다듬어 기초를 다져 안쪽으로 드려쌓아

산성이 외부로 밀리거나 무너지는 것을 방지해서 산성을 쌓았고 모서리도 굽을

돌려 쌓아 놓아 이것이 굽도리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의 사진은 셩벽 한면이 일정하게 무너진 모습이며 산성 전체를 쐐기돌을 끼워넣어

무너지지 않게 튼튼하게 산성을 쌓았고 아래 사진은 무너지지 않은 성벽의 사진이다.

 

 

 

 

 

산성에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바깥쪽으로 치성(雉城)을 쌓아 놓았으며

치성(雉城)간의 거리는 60m라고 하며 아래쪽 치성9雉城)은 무너저 있어 발굴을 하고 있었다.

 

산성 아래 지점에는 배수구(排水口)로 추정된 곳이 있었다.

 

일도양단(一刀兩斷) 칼로 베어 놓은 듯 흐트러짐 없이 돌을 깍아 산성을 쌓아 올렸다.

 

산성 정상에서 남쪽 태자강(太子江)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정상에서 바라본 주변의 모습은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커다란 산이 병풍처럼 펼처져 있고

남쪽으로 태작강(太子江)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점장대(點將臺) 였을까?

봉화대(烽火臺) 였을까?

이곳에서 백암성주 손대음(白巖城主 孫代音)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발 아래 요동평원(遼東平原)을 뒤 덮은 당(唐)나라 수십만 대군를 보고 어찌해야 하나????

백암성주(白巖城主)는 적어도 이곳에서 몇일간 시간을 벌어줬어야 했다.

성의 위치로 보아도 오르막 공격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이러한 철옹성(鐵甕城)에 군사 2,700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고구려 군대(高句麗 軍隊)라면 사필즉 생(死必卽生)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백암성주는 화살 몇 대 쏘아 보지않고 당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1400년 전 이곳에서 전투는 벌어지지않았다 .

그래서 이곳 백암산성은 1400여년이 흐른 지금도 원형에 가깝게 산성이 보전되어 있었다.

 

 

 

 돌아오는길에 마을 담장이 온통 백암산성의 돌을 옮겨다가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모서리에는 산성과 같아 둥굴게 굽도리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끝)

 

당태종이세민(唐太宗 李世民)은 어째서 동쪽으로 진군을 하지 않았을까?

동쪽으로 봉황산성(鳳凰山城) 박작산성(泊灼山城)을 함락(陷落)시키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고구려(高句麗)의 심장부 평양성(平壤城)인데..

이세민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안산천산(鞍山千山)을 거처 해성시(海城市)에 있는

양만춘 장군(楊萬春 將軍)이 기다리고 있는  안시성(安市城)으로 진군했다.

 

다음 답사지(踏査地)는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과 총대장 이세적(總大將 李世勣)

의견이 엇갈린 청석관(靑石關)과 건안산성(建安山城)을 답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