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장성 답사

북두 홍찬수 2014. 11. 2. 20:41

지난 9월 10월국경절에 2차례 청석관(靑石關)과 건안산성(建安山城)을 답사하였다.

이곳에 나오는 청석령(靑石嶺)은 이름은 같지만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나오는 사신단(使臣團)과 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나라로 연행(演行)되었던

초하구 연산관 청석령(草河口 連山關 靑石嶺)과 다른 곳이다.

 

645년 당태종 이세민(唐太宗李世民)은 5월 요동성(遼東城)을 정복(征服)하고

백암산성(白巖山城)에서 고구려군(高句麗軍)과 싸우지 않고 항복을 받아냈다.

이세민(李世民)은 동쪽 봉황성(鳳凰城)으로 진군(進軍)을 하지 않고 남쪽으로 말 머리를 돌려 안산(鞍山)의 천산(千山)에서 다음 공격(攻擊)을 할 목적지(目的地)를 놓고 고민을 한다.

당태종 이세민(唐太宗李世民)은 총대장 이세적(總大將 李世勣)을 불러 전력(戰力)이 강한

안시성(安市城)보다 전력이 약한 건안성(建安城)을 먼저 공격(攻擊하라 명령한다.

이에 이세적(李世勣)은 건안성(建安城)은 안시성(安市城) 남쪽에 있고 당(唐)나라군의

보급물자(補給物資)는 북쪽 요동성(遼東城)에 있는데 건안성(建安城)을 먼저 공격(攻擊)을

하게되면 안시성(安市城)에 있는 고구려군(高句麗軍)이 보급로(補給路)를 끊게되면

당(唐)나라군이 승라(勝利)를 한다는 보장(堡障)이 없으니 안시성(安市城)을

먼저 공격(攻擊)하는게 옳다고 주장을 한다.

이에 당태종 이세민(唐太宗李世民)은 건안성(建安城)을 포기하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攻擊)하기로 결정(決定)을 한다.

이무렵 요동반도(遼東半島) 남쪽 비사성(卑沙城)이 당(唐)나라 수군대장 장량(水軍大將 張亮)에 의해 함락(陷落)되고 장량(張亮)은  군선(軍船)을 이용하여  발해만(渤海灣)

현재의 요녕성 영구지역(遼寧省營口地域)에 도착(到着)을 한다.

또한 영주지방(지금의 요녕성 조양 (遼寧省 朝陽)을 관장하던 장검(張儉)에게

요하(遼河)의 늪(遼澤)을 건너서 장량의 군과(裝亮 軍) 합세(合勢)하여 건안성(建安城)을

공격(攻擊)하게 하여 수천(數千)의 고구려군(高句麗軍)을 죽였지만 건안성(建安城)을

정복(征服)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당(唐)나라 기록(記錄)에 의하면 무순의 신성(撫順 新城)과 안시성(安市城)의 주필산전투(駐蹕山戰鬪) 그리고 건안성 전투(建安城戰鬪)를 1차 고당전쟁(高唐戰爭)의 3대전투(3大戰鬪)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춘추필법(春秋筆法) 이것은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기록은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는것을 말하는데 대부분 고구려역사(高句麗歷史)에 대한 기록아 남아있지 않아 중국의 수서(隋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당서(唐書) 우리나라의 삼국사기(三國史記) 단재 신채호(丹齋申采浩)의 고려상고사(高麗上古史) 등에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대련(大連)에서 심양방향(瀋陽方向)으로 고속도로(高速道路) 약150km 지점에

개주시(蓋州市)로 빠져 나오는 톨게이트가 있다.

개주시(蓋州市)는 전해저 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이곳을 관리(管理)하였다고 하며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개자(蓋字)를 써서 개주(蓋州) 개평(蓋平) 개현(蓋縣)이라고

불리운다고 하는데 확인된 것은 아니고 이곳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톨게이틀를 빠져 나와 좌측으로 20여분 가다보면 개주시내(蓋州市內)가 나온다.

 개주시내(蓋州市內)에는 대청하(大靑河)라는 커다란 물 줄기가 동에서 서쪽 발해만(渤海灣)으로 흐른다.

 

 

고청석관(古靑石關)이라는 표지석(標識石)이 세워져있다

이곳은 고구려(高句麗)때 세워졌던 청석관(靑石關)이라는 성문(城門)이 있었던 곳인데

대련(大連)에서 하얼빈(哈尔濱)으로 국도(國道)가 생기면서 철거(撤去)되고

그곳에 고청석관(古靑石關)이라는 표지석(標識石) 세워 놓았다고 전한다.

 

청석령(靑石嶺)을 넘어 약2km 지점에 작은 다리가 나온다 .

이곳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고려성촌(高麗城村)이라고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9월 추석에 이곳을 답사를 했을때 표지석을 발견하지 못하고 마을 안쪽으로 그냥 지나쳤었다.

 

마을입구로 들어가니 건물 담장밑에 고려성산성(高慮城山城)이라고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중국정부(中國政府)에서 이곳을 국가급 문화재(國家級文化財)로 지정되었다 했는데

실제로 와서보니 요녕성 문화재(遼寧省文化財)로 기록을 해 초라하게 세워놓았다.

 

 

 

 

 마을로 들어서니 이곳에도 산성(山城)에 사용하였던 돌들을 옮겨다 담장을 쌓았다.

 마을입구에서 북쪽 산으로 올라가는데 노부부(老夫婦)가 사과를 수확하고 있었다.

산성(山城)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등성이가 전체 산성이라고

말 하며 커다란 사과 2개를 주셨다.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올라가니 남쪽 금전산(金殿山)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요동평원(遼東平原)이 한눈에 들어온다.

발해만(渤海灣)에서 영구(營口) 대석교(大石橋)에서부터

요하(遼河)의 늪으로 불리우는 요택(遼澤)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이다.

 

 

 

 

 

 

 

 

1400년 전에 쌓아놓은 산성(山城) 돌에 이끼가 덮여있다.

   북쪽 산은 마치 지붕에 용마루를 만들어 덮어 놓은 듯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으로 되어 있으며 외부 쪽으로 나무가 자라고

마을 안쪽으로는 나무가 없었다.

 마지막 사진은 지나온 산성길을 뒤돌아 보았다.

앞이 시원하게 트여 있었는데 발해만(渤海灣)으로 연결되는 요동평원(遼東平原)이다.

 

 

동문(東門)으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왼편으로 뻗어있는 산 등성이가 치성(雉城)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동문(東門)을 나서면 넓은 요동평원(遼東平原)이 나온다.

 

 

 

 

인공으로 쌓은 토성(土城)으로 흙을 다져 쌓았는데

1400년이 지난 지금도 딱딱하게 굳어 무너지지 않았다.

이러한 축성법(築城法)을 판축기법(板築技法)이라 하는데 고구려산성(高句麗山城)

중에 토성(土城)을 쌓을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동문(東門)으로 나와 남쪽에 있는 금전산(金殿山)이며 산 전체가 돌로 형성되있다. 

 아래 사진은 동쪽으로 치성(雉城)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요동평원(遼東平原)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남쪽 산에서 바라본 북쪽 산 등성이며 산 줄기를 안쪽으로 연결하는 토성(土城)을 쌓았다

 이 토성(土城)은 판축기법(板築技法)으로 튼튼하게 흙을 다져 쌓아 흙으로 덮어 놓은

토성(土城)으로 남쪽 산과 북쪽 산을 이용하여 작은 협곡(峽谷)을 만들어

옹성(甕城)으로 사용했던 것 같았다.

 

 

남쪽 산에는 돌을 이용하여 취약지역(脆弱地域)에 보루(堡壘)를 쌓아 놓았다.

 

 

 

 

금전산(金殿山) 북쪽 산 정상에는 넓은 평지(平地)가 있으며 깊게 고랑이 파여 있었는데

이것은 1400년전 것이 아닌듯 하며 이곳에 봉화대(烽火臺)나 점장대(點將臺)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推定)을 해 본다.

 

 

 

금전산 능선(金殿山 稜線)은 적의 공격(敵 攻擊)을 자연적으로 막아주는

산성(山城)역할을 했으며 취약지역(脆弱地域)에 보(堡壘루를 쌓아

적의 공격에 대비(對備) 했음 을 알 수 있었다.

 

 

 

건안성(建安城) 답사중 가장 높은 산 정상이며 이것을 넘으면 산을 깍아

풍력발전기(風力發電機)를 설치 했으며 그곳부터 청석관 표지석(淸石關標識石)이 있는 곳으로 연결되며 이곳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2곳의 저수지(貯水池)가 눈에 들어온다.

 

이번 청석관(靑石關) 건안산성 답사(建安山城 踏査)는 

북쪽 산 능선을 따라 남쪽 능선으로

약6시간 산행(山行)을 하면서 답사(踏査)를 했다.

 

다음 천리장성 답사(千里長城 踏査)는

 612년 수양제(隋煬帝)와 645년 당태종 이세민(唐太宗李世民)이 수 백만데군(數百萬大軍)을 이끌고 고구려(高句麗)를 침략했을 때 건너 온 요하(遼河)의 늪 요택(遼澤)을 계획해 본다.

 

 

 

 

 

요동반도 부근은 고대의 왜국으로서 고구려 땅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