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이야기

보트선장 2007. 2. 16. 12:11

선사시대의 동강 | 삼국시대의 동강 | 조선시대의 동강 | 근세의 동강 

 자료제공 : 진 용 선 소장   (정선아리랑연구소,강원도문화재전문위원장)  


 선사시대의 동강
동강 유역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 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
동강은 백두대간의 심산 계곡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면서 곳곳에 퇴적지형을 형성해 놓았다.
강변으로 드리워진 넓은 충적 지대인 모래언덕과 낮은 구릉지대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지리적인 요건을 통해 보더라도 한반도 동북지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이동해온 선사인들이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어와 내륙으로 향하면서 마주한 동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지류가 잘 발달되어 유역에서 살기에 좋은 자연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동강 유역에서 약 2백만년전인 구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는지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결과는 아직까지 없다.
다만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동강의 줄기인 남한강 유역의 충북 단양군 애곡리 수양개와 도담리 금굴, 상시리 등지와 한강 중류 지역에서 수많은 구석기 유물들이 발굴된 것을 보더라도 동강 유역 또한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다.
특히 동강 유역의 영월 평창 지역에서 구석기 유적이 이미 발굴된 점과 동강 유역에 산재한 수많은 동굴들로 보아 구석기 유적의 발견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다.

동강 유역은 수량이 풍부한 물이 흐르고 크고 작은 지류가 발달해 정착생활을 시작했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알맞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7천 년 전부터 강 유역 곳곳에는 신석기인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으며, 이러한 흔적은 동강 중류지역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 석기 등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동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소골을 비롯하여 신동읍 고성리 고방마을, 신동읍 운치리 등에 있다.
덕천리 소골의 신석기유적은 1987년부터 이루어진 국민대 박물관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동강변의 넓은 충적지인 모래언덕에서 빗살무늬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었다.
고성리 고방마을의 신석기 유적은 고성분교 앞 고방정 서쪽으로 깍아지른 듯한 암벽 아래에 있다.
암벽 아래에 마치 작은 동굴과 같이 입구가 파인 곳이 바로 바위그늘 유적으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집터로 삼아 살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숫돌, 조개껍질, 뼈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운치리의 신석기 유적은 바위그늘 유적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납운돌 갈벌에 위치하고 있으며,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민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던 곳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고인돌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유적은 정선에서 영월로 흐르는 동강 주변지역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유적이다.
고인돌은 동강 상류인 조양강 유역의 정선읍 귤암리 귤하마을 3기가 위치하고 있고, 중류로 내려오면서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중바닥여울 옆 모래퇴적지에 덮개돌과 받침돌이 분리된채1기가 남아있다.

운치리 하류의 덕천리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선사인들이 대단위 집단 취락지를 이루며 살던 곳으로 소골마을 밤나무 아래에 1기의 고인돌이 있고 그 옆 밭머리에 3기의 훼손된 고인돌이 있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민무늬토기조각, 붉은간토기조각, 숫돌, 돌자귀, 흙그물추 등이 출토된바 있다. 또 소골마을 남쪽 강건너 마을인 제장에도 밭 한가운데에 고인돌 1기가 남아있고, 고성리 고성분교 뒤편에도 폭이 2m50cm가 넘고 덮개돌 위에 많은 성혈이 난 고인돌과 주변에 1기의 고인돌이 있어 이 일대가 청동기인들의 생활무대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동강 하류의 청동기 유적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삼옥2리 서낭당 뒤쪽에 흙에 묻힌 고인돌 1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아마도 수없이 반복된 홍수로 인해 동강 하류의 고인돌 등과같은 많은 유적들이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동강의 철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신석기, 청동기시대 유적지와 같은 곳에서 발견된다.
동강이 시작되는 정선읍 가수리 수미마을 강 건너편 북대 마을과 가수리 남서쪽의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수동마을, 덕천리 소골과 제장마을은 모두 충적평야 지대로 이곳에서 타날무늬토기조각과 민무늬토기조각 등 많은 철기시대 유물이 채집되었다.
이밖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바새마을 퇴적지와 제장마을에는 적석총(積石塚)으로 보이는 돌무지가 남아있기도 하다.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 수천년에 걸친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은 동강의 물굽이에 의해 형성된 모래언덕과 구릉에 고스란히 남아 퇴적층을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의 동강
청동기시대를 지나면서 사회구조 또한 무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점차 집단화되면서 이웃지역을 점령하고자하는 욕망이 나타났다.
초기형태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성읍국가(城邑國家)가 만들어지면서 무력을 갖춘 지배세력이 형성되어 성을 거점으로 주민들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 후 삼국시대에는 삼국이 서로 영토확장을 하는 가운데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삼국 가운데 한강 유역에 제일 먼저 도읍을 정한 국가는 백제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왕을 시조로하여 한강 북쪽의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세력을 넓혀갔다.
그 후 고이왕은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율령(律令)을 반포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잡았으며, 근초고왕(346-375년)은 마한을 통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살해하는 등 백제의 전성기를 맞았다.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이 고구려로부터 위협을 받기 시자한 때는 17대 아신왕 때인 396년 이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백제의 한성을 침략하고 한강까지 바짝 죄어들었다.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기 시작한 때는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부터다.
고구려가 남진을 계속하자 백제는 비류왕(427-455년)이 나서서 신라 눌지왕과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체결하고 고구려에 맞섰지만 힘에 부쳤다.

그 후 장수왕은 475년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킨 후 개로왕을 패사시키고 한강 유역은 물론 금강 상류까지 차지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뜻을 이룬 듯 했으나 551년 나제동맹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다시 빼앗겼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의 실지회복을 위해 영양왕(590-618년) 초기에 죽령 서북지역까지 진출했다.
고구려는 남하를 하면서 강 유역 곳곳에 성을 쌓았다.
한강 상류인 영춘에 온달산성을 쌓아 전초기지로 삼고, 조양강 유역인 정선읍 애산리에는 애산성을 쌓았고, 동강 물줄기인 정선과 영월지역에는 고성리산성과 완택산성을 쌓아 남진의 후방 기지로 삼았다.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고방마을 남쪽 해발 425m의 산에 있는 고성리 산성은 테뫼형 산성으로 대부분 돌로 쌓았으나, 경사가 가파른 부분은 흙을 다져 쌓았다.
지형지세의 이점을 최대한도로 살린 고성리산성은 동강 상류와 하류로 흘러가는 물줄기는 물론 남쪽의 고개길과 북쪽의 백운산의 가파른 언덕을 굽어볼 수 있는 천연요새이다.
고성리 산성에서 남서쪽으로 15km정도 떨어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의 완택산성은 해발 916m의 완택산 정상의 능선으로 길게 쌓은 성으로 동강 하류의 물굽이와 남쪽 연하리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북쪽으로 만주땅은 물론 한강 유역까지 지배하였던 고구려는 보장왕 27년(668년)에 나당(羅唐)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망하고 한강 유역은 신라의 땅이 되었다.
신라가 한강 상류인 동강 유역까지 지배하게 된 것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때 부터이다.
동강을 끼고있는 영월 평창 정선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완성된 경덕왕 때 9주 5소경의 하나인 명주군에 속하게 되면서 지명 또한 신라식으로 대부분 바뀌게 되었다.
동강 주변의 마을인 수며(水 ), 갈며(葛 ), 하며(下 ) 등은 모두 이 때 생겨난 지명이다. 935년 신라의 경순왕이 신라 땅을 고려에 넘기면서 천년을 넘게 이어 온 삼국시대가 막을 내렸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한강 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는 한강 유역이 단순히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적, 군사적인 면에서 모두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돌아가면서 한강 유역을 지배하는 동안 동강은 한강 유역의 변방으로 흥망성쇄를 같이했다.
한강 유역을 다스린 나라는 흥했지만, 상실한 나라는 급격히 쇠퇴해갔다.
신라가 사라지고 한강 유역을 고려가 지배하게 되었지만, 개경을 수도로한 고려는 아무래도 한강 유역을 이전보다는 등한시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동강
아득한 역사 속에서 동강이 본격적으로 수운(水運) 기능을 하기 시작한 때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부터다.
태조는 즉위 후 3년이 지나 도읍지를 옮길 생각으로 신하들과 함께 한양을 직접 둘러보았다.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길을 직접 보고서 "조운(漕運)이 가능하고 사방의 이수(里數)가 고르니 백성들도 편리할 것"이라고 했다.
한양천도를 염두에 둔 이 말에 동행했던 좌정승과 우정승등의 신하들은 개경으로 돌아가 풍토와 수륙 교통의 편리함을 들어 왕에게 천도의 타당성을 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태조가 한양천도를 결심하게 된데에는 정치·군사적인 이점 이외에도 수운의 편리함과 풍수지리적인 영향이 컸다.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긴 태조는 전국에서 조세로 징수한 미곡(米穀)과 포백(布帛)을 강을 통해 운송하는 등 조운의 편리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경국대전」에는 조선시대에 전국에 9곳의 조창(漕倉)을 두었는데, 가흥창(可興倉)을 충주에 두고, 수곡 구역이 영월·평창·정선인 흥원창(興原倉)을 원주에 두어 한강 물길을 통해 세곡을 한양으로 옮겼다.
또 조선시대 초기부터 번창하기 시작한 경강(京江) 상인들이 짐배를 이용해 한강 상류인 영월까지 거슬러 올라와 어물이나 소금을 파는 일이 잦아지면서 한강은 서서히 강변 경제권을 이루기 시작했다.
특히 새 궁궐인 경복궁 등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으면서 많은 물량의 원목이 필요하게되자 강 상류에서 벌목된 나무를 서울까지 실어 나르는 수단으로 뗏목을 이용하게 되었다.

한강 상류인 동강 유역이 사람들로 붐비며 강변 경제권을 이루기 시작한 때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부터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273년 동안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고종 2년(1865년) 대원군이 국가 재정의 곤궁을 무릅쓰고 중수를 하기 시작했다.
중수 초기에는 농민들에게 결두전(結頭錢)이라는 특별세를 부과하고 신분의 차별이 없이 고른 원납전이라는 명목으로 금전을 바치게 해 공사 경비를 조달했다. 또 많은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어 원망을 샀지만 공사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공사 시작 이듬해 봄 재목장에 큰 불이 나면서 나무가 모두 불에 타 공사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대원군은 전국의 원목 산지에 재목을 급히 보낼 것을 명했고, 한강 상류인 정선과 인제에서 뗏목으로 엮은 원목의 수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영건일람」(營建日覽)에는 경복궁 중수 당시 정선과 인제 등지에서 대부분의 목재가 운송되었다는 사실과 대원군이 인부들을 위로할 겸 종종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강 상류인 태백산, 오대산, 노추산, 황병산 등지의 나무들과 동강 유역의 산에서 벌채된 나무들을 뗏목으로 엮어 한양으로 운송하면서 동강 유역 마을 곳곳에는 떼꾼들을 상대로하는 주막(酒幕)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경제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당시 동강 유역인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는 당시 평창군에 속해 있던 곳으로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 균세(均稅)를 징수하여 보관을 하던 동창(東倉)을 둘 정도로 가호(家戶) 수가 많은 곳이기도 했다. 


 근세의 동강
조선시대 후기부터 근세 까지 동강 유역에 이르는 도로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마을 사람들은 읍내로 가기위해 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정선군 정선읍 가수리 사람들은 마을 북쪽의 너툰이재를 넘어 정선 읍내를 다녔고, 영월로 가기 위해서는 가탄의 틀이재를 넘어 다녔다.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와 덕천리 사람들은 마을 남쪽의 말구리재와 미구재를 넘어 읍내와 영월로 다녔다.
영월읍 문산리와 거운리 사람들은 당목이재와 삼옥재를 지나 영월 읍내로 다녔다.
근세 까지 동강 유역 사람들이 읍내를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고개를 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굽이가 심하고 여울이 많아 배를 이용하기란 불가능했다.

동강의 수운 기능 가운데 뗏목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강 물길을 내려가던 뗏목은 대부분 골지천(骨只川)과 송천(松川)이 한데 어우러지는 정선군 북면 아우라지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상류인 태백산과 오대산 등지에 지천으로 널린 아름들이 통나무를 생장활동이 느린 늦가을부터 벌목을해 쌓아 두었다가 우수 경칩이 지나 강물이 불거나 큰 비가 내리면 떼로 엮어 출발하는 것이었다.
급류와 여울이 많은 동강 물길을 뗏목을 타고 내려가는 일이 위험했지만, '떼돈 벌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벌이가 괜찮자 떼를 타기위해 뒷돈까지 댈 정도였다.
뗏목도 정선읍 가수리나 정선 신동읍 운치리, 덕천리,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영월군 영월읍 문산리와 거운리, 삼옥리 등지 곳곳에서 원목을 베어내 엮었다.
뗏목을 엮는데는 길이가 12자에서 18자 정도가 되는 소나무를 15개 내지 20개 정도를 엮어 한 동(棟)으로 만들고, 5동 내지 6동을 서로 이어 한 바닥(한 판)으로 만들었다.
나무를 엮는데 칡줄기나 느릅나무 줄기가 많이 쓰이고, 굽은 못이 많이 쓰이자 이들 만을 전문적으로 대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뗏목이 출발하는 날이면 동강주변 마을은 술렁거렸다.
그러나 떼꾼의 아내는 물론 부녀자들은 부정을 탄다고 해 나루터에 접근할 수 없었다. 뗏목이 무사히 내려갈 것을 비는 고사를 지내고 목상으로부터 목재의 수가 기록된 '발기'와 여비를 받아 출발한다.
일제시대 전까지만해도 정선에서 영월까지 내려가는 뗏목을 '골안떼' 라고 했는데, 당시 떼꾼들을 상대로한 객주집들이 동강 유역 마을에 쉰곳이 넘게 들어서서 떼꾼들의 주머니를 빈털털이로 만들기 일쑤였다.
일제시대 동강 하류의 영월읍 거운리 섭새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물길을 막고 뗏목의 통과세를 받아 떼꾼들과 마찰을 자주 빚기도 했다.

뗏목이 한창 많이 내려갈 때 마치 '낙옆 뜬 것과 같았다'는 동강은 한국전쟁 이후 트럭이 운목의 역할을 대신하고 1960년대 들어서 태백선 열차가 들어오면서 서서히 수운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1970년 초까지 간헐적으로 내려가던 뗏목은 동강 유역 마을로 도로가 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