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이야기

보트선장 2007. 2. 16. 12:13

 고인돌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돌은 동강 상류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있다.
현재 동강 유역에는 모두 10여기 정도의 고인돌이 남아 있으나, 대부분 훼손되었고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고성리, 덕천리에 각각 남아 있는 3기의 고인돌 만이 비교적 쉽게 형태를 알아볼 수 있다.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의 고인돌은 운치리에서 덕천리로 길게 흐르는 중바닥여울 옆 숲 속에 있다.
길이 230cm, 폭 1m, 두께 50cm 정도의 덮개돌이 받침돌로 추정되는 길이 87cm, 폭 110cm, 두께 32cm의 판석과 함께 방치되어 있다.
덕천리의 고인돌은 소골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밤나무 아래에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가 238cm, 폭 225cm, 두께가 30cm에 이르며, 위에는 10여 개의 성혈이 나 있다.
1989년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소골지역 발굴조사를 할 때 덮개돌을 들고 민무늬토기 조각 등을 발굴한 바 있다.
이 고인돌에서 강쪽으로 4m 쯤에는 심하게 훼손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고인돌 3기가 밭머리에 있다.
깨진 덮개돌을 쌓아 놓은 것으로 보아 밭에 있던 고인돌을 깨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동강 주변에 남아있는 고인돌 가운데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고성리의 고인돌을 꼽을 수 있다.
고성분교 뒤에 있는 이 고인돌은 상판이 둥그스레한 석회암을 덮개돌로 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20개가 넘는 성혈이 나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63cm, 폭 254cm, 두께 70cm로 동강 유역에 있는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덮개돌 동쪽은 주먹돌로 채워져 있지만,서쪽은 길이 163cm, 두께 32cm의 받침돌이 있다.
이 고인돌에서 남쪽으로 10여m 거리에는 길이 200cm, 폭 130cm에 이르는 고인돌이 동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상태로 있다.

 적석총
동강 유역에서 조사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바새(所沙)에 있는 적석총(積石塚)을 들 수 있다.
바새 북쪽 산자락으로 펼쳐진 솔밭과 사과나무 밭 사이에는 돌무지 무덤으로 보이는 유적 6곳이 확인 되었다.
이들 돌무지들을 적석총으로 보는 데는 바새 지역이 강물에 의해 형성된 퇴적 지형으로 초기 철기시대의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선사인들이 살기에 적합한 지형적 요건을 갖춘 이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북쪽에 무덤으로 돌을 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석총을 쌓은 돌은 모두 강돌로 높이가 모두 70cm에서부터 2m에 이르고, 직경이 2m에서 7m에 이른다.
바새에서 상류인 정동쪽 약 1km에는 제장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약 4백여m 떨어진 산자락에도 적석총으로 보이는 돌무지 1기가 있다.
강가에서 주워온 주먹돌을 쌓아 동서 방향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게 만들었으며, 직경 10m, 높이 2.2m에 이른다.

 고성리산성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68호로 고방마을 앞산에 있는 산성이다.
정확한 축성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가 남진을 하면서 전초기지나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요새로 추측된다.
5∼6세기 당시 고구려와 신라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밀고 밀리는 접전을 펼쳤는데, 고성리 산성을 끼고있는 지역은 영서지방으 평창군에서 영남 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한강 상류를 따라 남하하며서 충북 영춘에 온달산성을 전진기지로 삼고 영월 뱃나들이의 대야리산성, 정양리의 왕검성, 삼옥리의 완택산성, 신동읍의 고성리산성을 연결해 한수 유역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해발 425m가 되는 산을 띠를 두른 듯이 쌓은 테뫼형 산성인 고성리 산성은 북쪽과 동쪽을 향한 성곽이 원형에 가깝게 보수되었고, 남쪽과 남서쪽을 향한 성곽은 거의 무너지거나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다.
축조 방식은 장방형의 모가 난 큰 돌을 아래에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10∼15도 정도 기울여 쌓는 물림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성을 이어서 쌓지 않고 가파를 곳은 흙을 다져 지형지세를 이용했고 나머지 부분만 네곳으로 나눠 쌓은 것이 특징이다.
또 외벽이 무너져내린 남쪽 방향의 성 서쪽 끝에는 치성(雉城)으로 되어 있어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성 위에서 보면 동강의 상류가 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구레기 고개, 서쪽으로는 절벽 아래로 굽이돌아 내려가는 물줄기와 빼곡히 겹쳐진 산을 조망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지난 93년 부터는 고성리 주민들이 이웃하는 덕천리, 운치리 주민들과 힘을 모아 고성산성제를 열어 성곽 보존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완택산성
완택산성은 영월읍 삼옥리 작골 동쪽으로 솟아있는 해발 916.1m의 완택산 정상부에 있는 석축(石築) 산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완택산성에 대해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477척이다.
3면이 석벽으로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합단(合丹)이 쳐들어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서 보듯 완택산 정상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쌓은 이 성은 동쪽과 남쪽, 서쪽은 절벽으로 되어있고, 북쪽 또한 경사가 가파라 천험의 요새로 손색이 없다.

정상 남쪽 8부 능선에서 보면 거운리, 삼옥리 등 동강 하류 유역은 물론 영월읍 연하리 꽃밭머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서 서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흙을 다져 쌓은 토성의 흔적도 남아있고 경사지 아래에는 분지가 있다.
분지 곳곳에는 둥그스레한 강돌이 넓게 분포되어 있어 본영지로 추측되는 곳이다.
완택산성은 성 주위 곳곳에 돌로 쌓거나 흙으로 다진 요새가 있어 동강 유역의 중요성을 무언의 역사가 말해주는 곳이다.

 금강정
봉래산 자락 강변 기암절벽 위에 있는 금강정(錦江亭)은 조선시대의 정자로 강원도 문화재자료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 10년(1428년) 군수 김복항(金福恒)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군수 이자삼(李子三)이 절벽 아래로 흐르는 금장강(錦障江)의 아름다움에 반해 자기 돈을 들여 정자를 짓고 금강정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정면 3간, 측면 3간의 익공(翼工)양식 건물로 바닥을 마루로 깔았고, 처마는 겹처마에 팔작지붕이고 부재의 끝 부분에만 여러 무늬를 놓아 갖가지 색으로 그린 모로(毛老)단청을 하였다. 금강정 주위로는 봄철이면 벚꽃이 만발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낙화암과 민충사
금강정에서 동쪽에 있는 절벽이 낙화암이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관풍헌(관풍헌)에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궁녀 자개(者介), 궁비 불덕(佛德), 관비 아가지(阿加之), 무녀 용안(龍眼), 내은덕(內隱德), 덕비(德非) 등 6명과 시종 1명이 이곳에서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이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고 하여 낙화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녀와 시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영조 13년(1742년)에 홍영보가 금강정 바로 뒤 언덕에 민충사를 창건했으며, 정조 15년(1791년) 부사 박기정이 개축하였다.
민충사는 강원도 지방문화재 자료 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기 경춘순절비
낙화암 위쪽에는 '越妓瓊春殉節之處(월기경춘순절지처)'라고 새겨진 빛바랜 비석이 하나 서있다.
약 200여년 전 영월부사 신광수(申光洙)의 수청을 거절하고 낙화암에 몸을 던져 순절한 기생 경춘(瓊春)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경춘의 본명은 노옥(魯玉)으로 평소 단종을 추모하며 자식을 얻고자했던 아버지 고순익(高舜益)이 단종 사후 300년이 되던 해 기일(1757년 10월 4일)에 딸을 얻게 되자 '노산군(魯山君)이 점지해준 옥(玉)같이 귀한 자식'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선비 집안에서 글을 배우며 성장하던 노옥은 다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 뒤에는 아버지 마저 돌아가시자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살길이 막막했다. 의지할 데가 없는 노옥은 이웃에 사는 추월(秋月)이라는 늙은 기생의 수양딸이 되었다. 그러나 양모 조차 나이가 들어 생활이 넉넉치 않아 노옥은 어쩔 수 없이 경춘(瓊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고 말았다. 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경춘은 장릉에서 영월부사 이만회(李萬恢)의 아들인 이수학(李秀鶴)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영월 부사인 아버지가 한양으로 영전하자 이수학은 3년 후 과거에 급제를하고 나서 백년가약을 맺겠다는 약속을 하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새로 부임한 부사가 병으로 죽고 후임으로 문장가인 신광수(申光秀)가 영월에 부임하여 경춘에게 수청 들기를 강요했다. 경춘은 전임 부사의 아들인 이수학과의 관계를 말하고 거절을 하였으나, 부사는 이를 허락치 않고 볼기를 때리는 등의 벌을 내렸다. 또한 계속 수청을 들지 않을 경우 죽이겠다고까지 하자 경춘은 부모님의 산소에 가 하직인사를 한 후 동생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빗겨준 다음 이수학이 한양으로 가며 준 사랑의 증표를 몸에 지닌 채 낙화암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이 때가 경춘의 나이 16세인 1722년(임진년) 10월 이었다.

경춘이 순절한지 24년이 지난 정조 19년(1795년)에 순찰사 손암(遜岩) 이공(李公)이 영월을 지나는 길에 경춘의 절개를 듣고 "미천한 신분인데도 이는 진실된 열녀라 할것이니 옳은 풍속을 세우는데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비석을 세워 후세에 귀감이 되게끔 했다. 이에따라 평창 부사 남의로(南義老)가 글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써서 경춘이 투신한 낙화암에다 '越妓瓊春殉節之處'라는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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