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철미의 이야기 /Letters from Korea

최철미 2018. 12. 26. 15:46


아픈 이야기

30년 만에 귀국하는 친구를 만났다. 내가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관악 캠퍼스다. 새로운 세상에서 날개를 펼치고 여기 찝쩍 저기 찝쩍 날아다니던 그 시절에, 툭 튀어나온 훤한 이마에 투박한 뿔테 너머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그녀를 만났다. 언제나 웃고 있었고 우리는 항상 즐거웠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큰소리로 깔깔 웃어주는 게 참 좋았다.

그해 겨울 미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공항에서 배웅을 하는 그 순간까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영문학과 재학생인지라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라고만 알았다.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와 이혼한 친어머니를 찾아 삼남매가 미국을 향한다는 이야기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어머니의 집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와 막내 동생이 사고로 죽었다는 이야기 등 무겁고 힘든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마침내 어렵게 공부해서 공인회계사가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그리고 연락이 끊어졌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의 스토리로만 기억하고 나는 육아와 일로 고된 30~40대의 삶을 살았다,

이 친구가 <우리 가족 문집>을 들고 나타났다. 정말 성공한 모양이다. 이런 문집까지 만들고 출판기념회를 한다니 말이다.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나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돕고 싶었다. 아가씨가 아줌마가 되는 긴 시간을 공유하지는 못했지만 한여름 땡볕 같은 젊은 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친구를 소중히 만나고 싶었다. 30년의 시간을 뚝 떼어버리고 공항에서 떠나는 그날을 오늘에 당겨와 붙이고 우리의 만남에는 전혀 변한 게 없다고 우기고 싶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문집의 출판기념회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30년 아니 40년 50년 전 사람들의 만남의 자리가 되었고, 성황리에 끝났다. 나도 한권 받았다. 글이란 참 좋은 것이다. 내가 뚝 떼어버린 30년 시간 속의 친구의 삶과 생각을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집 속의 글이 솔직해서 너무 투명해서 다가가기 보다는 오히려 한발 물러났다. 아무 일 아닌 듯 담백하게 그려낸 아픔 시간의 상처가 내 가슴을 시리게 했다.

아버지의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실패, 친어머니와의 부적응, 동생의 죽음, 한국에 남겨진 배다른 동생에 대한 연민, 새어머니의 신병, 어머니가 같은 오빠와의 만남, 계부, 우울증…. 부모님들의 방황으로 시작된 어긋남, 스스로 빚어낸 내적 갈등은 시청률을 의식하는 시나리오 작가가 마구 만들어내는 스토리의 릴레이 같았다.

희망 이야기

320페이지짜리 책의 308페이지에 ‘감사의 이유’라는 글이 나온다. 마흔에 기도로 얻은 아들 여호수아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폐 성향을 동반한 소아발달장애 진단은 오진이 아니었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는 표현은 표현일 뿐 그 마음을 어찌 글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싶다. 나 역시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 아닌가. 자식의 아픔은 우주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이니 말이다. 친구로서 독자로서 앞에서 보아온 그 어떤 슬픔보다 더 큰 슬픔으로 받아들여졌다. 엄청난 노력 끝에 이제는 특수반에서 일반 학급으로 옮길 수 있게 된 10살 아들이 대견하다는 희망의 글, 그리고 아들을 보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겠다는 글이 책 마지막을 장식한다.

친구는 지금도 무슨 말만 하면 큰소리로 깔깔 웃는다. 거짓이 아니다. 슬픔의 그림자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신앙과 문학과 아버지의 사랑으로 무장된 책 속으로 슬픔이 사라진 모양이다. 아니, 미국땅에서의 사회적 성공이 갈등을 이겨낸 것이다. 아니, 동생들이 훌륭하게 자라서 누나가 마련한 기념회 자리를 빛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 아니다. 친구의 모든 아픈 시간은 열 살 아들을 이야기할 때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다. 여호수아를 이야기하는 친구의 얼굴에는 힘찬 새로운 에너지가 솟고 있다. 행복해 보인다. 자식은 그런 거다. 다시 시작되는 나의 삶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고 엄마가 되는 순간 내가 가진 모든 아픔은 포맷이 된다. 내가 살아온 아픈 이야기는 내 아들이 살아갈 희망의 이야기로 충분히 덮고도 남는다. 나도 그랬다. 내 친구 역시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