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강습·시범/이론과 생각들

樵夫 2007. 12. 30. 19:19

"20년 억울한 옥살이 견디게 한 것은 검(劒)과 붓"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통혁당 무기수 오병철 관장

[ 2007-04-07 16:49:41 ]

정갈하게 입은 도복,죽도를 들고 호기 있게 서 있는 단단한 모습, 검도를 하면 정신이 집중된다는 얘기를 듣고 고3 때 시작한 검도.

민족이 무얼까, 가난이 무얼까 고민한 탓에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서른 살 청년 검객은 오십 대 장년이 넘어서야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년 감옥 생활을 지탱해준 것은 서예와 검도였습니다. 약해지는 자신과 수없이 싸워가면서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그것이 어쩌면 그를 진정 검의 고수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잘 다스린다는 뜻의 '제심관'이라는 대한 검도회 산하 검도장의 관장을 맡고 있는 오병철 관장의 얘기다.

마음을 다스리는 도, 남을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서 오늘도 붓을 들고 칼을 쥐고 계신 오병철 관장을 4월 7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났다.

◇ 4단까지 보통 7년~10년, 10단은 완성된 신의 경지

▶ 굉장히 건강하게 보이시는데, 검도가 몇 단이세요?

대한검도회 공인 4단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최고 단이 9단인데 한 분이 계시고 그다음이 8단을 최고 단으로 꼽지요. 10단은 검성이라고 해서 완성된 ‘신의 경지’인데요, 예전에는 일본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초단부터 1단, 2단, 3단....이렇게 나가는 거죠. 그런데 왜 4단까지만 하셨어요?

검도장을 운영하는 사범이 되려면 4단은 되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땄지요. 62년도 학생 시절에 3단을 따고 도장을 하기 위해서 30년 만에 4단 승단만 한 거죠. 4단도 사실은 거추장스러워서 더 이상 욕심은 없습니다.

▶ 그러면 운영하시는 도장에는 관장님보다 더 단이 높은 분들이 계신가요?

우리 도장에서 배운 제자 중에 5단 된 분들이 있고 다른 후배들 중에는 6단, 7단, 8단도 있습니다. 제대로 쉬지 않고 한다면 4단까지 보통 7년~10년은 걸려야 딸 수 있어요.

▶ 지금 수련하시는 회원이 얼마나 있나요?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달에 등록한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60~70명 정도가 되고 계절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는데 저희 도장 소속감을 갖고 있는 회원은 약 1천여 명이 됩니다.

▶ 검도란 무엇인가요?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이 쉽게 말하면 ‘칼싸움’인데 서양의 펜싱과는 달리 동양의 전통에서 내려온 칼싸움이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갑옷이라 할 수 있는 호구를 입고 대나무로 만든 죽도를 가지고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합니다. 목도나 진검을 가지고 수련하는 것을 검도라고 하고요. 진검은 기본을 연습할 때 사용합니다.

▶ 검도의 유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칼을 쓴다는 것은 인류 전체의 공통부분인데 원시시대부터 자신을 지키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쓰인 무기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돌칼도 있고 나무칼도 있고 철제 검까지 나와서 정복과 투쟁의 무기로 사용되었죠. 어느 나라에나 있던 것이 우리나라 고대로부터 특히 발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 ‘주몽’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수입은 중국에서 했어도 우리나라가 더 발달해서 삼국시대 검술이 상당히 발달한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삼국시대를 거쳐서 일본으로 칼을 비롯한 칼 만드는 기술, 사용법, 병법, 그리고 사범까지 전파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 때 문을 숭상하고 무를 경시하는 풍조 때문에 쇠약해지고 대신 일본은 내전 상태에서 계속 사용되는 바람에 칼 문화가 굉장히 발달을 하게 된 거죠. 성능과 기술이 발달해서 이후에 스포츠화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무사계급이 없어지고 그 대용으로 개발된 것이 죽도 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검도라고 하면 좁은 의미에서 죽도 검도라고 하는 겁니다.현대검도는 우리가 전해 준 칼과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더욱 개발되고 발전되어서 체계화 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혼탁한 세상, 유일한 정신통일의 길 ‘검도’

▶ 그래서 일반인들은 ‘검도’ 하면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검도라는 것이 상대방과의 칼싸움인데, 싸움이라면 이겨야 되잖아요. 나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닌가요?

다른 경기도 마찬가지겠지만, 옛날 정복이나 투기에서 발전하여 문화로 내면화된 것입니다. 검도 역시 칼을 가지고 상대방을 살상하는 무기였던 것이 교육용과 스포츠로 바뀌면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로 성립이 된 거예요. 거기에 룰이 생기면서 특히 검도는 예법을 굉장히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검도는 동양문화의 도교, 불교, 유교 등 정신적인 문화유산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검도를 할 때는 지극한 목표를 가지고 ‘검선일치’라고 해서 선에 가까이 가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상대방을 ‘예’에서 시작해서 ‘예’로 끝나는 예법으로서 검도문화가 정착되었습니다. 그래서 검술이라고 하지 않고 검도라고 하는 겁니다.

▶ 검도를 시작하신 계기가 궁금한데요, 그 당시에 검도가 유행이었나요?

경북고등학교 2학년 때인 54년도에 검도를 시작했습니다.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사회적인 고민도 많았어요. 53년도에 휴전이 되었으니까 바로 종전 직후였죠. 사회적인 혼란으로 안정이 안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민생이 피폐했던 시절이었어요. 거의 검도를 하는 곳이 없었고 대구 시내에서 딱 한 곳, 시청에서 운영하는 도장이 있었어요. 고향이 합천군인데 집안의 종손인 관계로 특별히 초등학교 5학년 때 해방 직후에 고모부가 계신 대구로 유학을 나왔어요. 특별대우를 받은 건데 그래서 문중과 관련해서 책임도 더 느낍니다.

고향의 선량한 사람들이 기근으로 길거리에 쓰러지고 제대로 된 약이 없어 병에 걸려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들을 보면서 인생에 대한 고민, 또 좌우대립으로 인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모습들에 대한 고민들을 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완전히 학과공부에는 흥미를 잃어버렸어요. 그야말로 그로기(groggy)상태였는데 우연히 어떤 책에서, 아마 버트런트 러셀의 책으로 기억하는데, 검도를 하면 정신이 통일되고 맑아진다는 글을 읽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우연찮게 도장 옆을 지나가다가 가입을 하고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학생이라고는 한 후배와 저뿐이었고 전부 경찰관 아니면 교도관들이었죠. 사범들이 경찰들이 많았어요.

▶ 검도를 하시면서 안정을 찾게 되신 건가요?

그 당시에는 검도가 일제의 전쟁준비를 위해 강제한 전투적인 풍조가 많이 남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호구를 빼앗고 걸어 넘어뜨리고 죽도로 찌르는 지금과는 다른 무지막지한 운동이었죠. 고등학교 3학년 때 수험준비도 안 하고 이걸로 올 인을 했어요. 몇 개월을 해 보니까 정신이 맑아지면서 지금부터는 내가 뭘 해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내성적인 성격에서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골목을 다녀도 겁도 안 났죠.(웃음)

▶ 형제분은 어떻게 되세요?

5남매 중에 위로 누님이 계시는데 제가 장남이에요. 아버지는 필체도 좋으시고 동네 이장도 하시고 면의 유지로 생활을 하셨어요. 서울에 올라오시고 나서는 ‘자력갱생’이라는 사회단체의 난민 주택 건설 사업에 봉사도 하시고 만년에는 연희동에서 복덕방을 하시다가 제가 출소 후 1년 뒤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분이세요. 어릴 적에 장에서 장화홍련 등의 소설책을 사 오셔서 아주 구성지게 읽어주시던 기억이 있어요. 저 때문에 등짐장사도 하시고 많이 고생하셨어요. 누님 집에 계시다가 제가 출소 후에 2000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 그렇게 검도에만 빠져 계셨는데 어떻게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후배들의 입주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서울대학교를 치를 무렵 대구에서 경제 파동이 있었습니다. 소위 ‘계’라고 하는 것이 깨져버려서 대구경제가 휘청할 때가 있었어요. 저희 집도 연계가 돼서 그 때문에 완전히 망해서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어졌죠. 그래서 부모님은 서울로 가시고 저는 입주 가정교사로 정착하게 되었고 그때 검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들어가셨는데 그곳에서도 검도 반을 만드셨다고요.

그때는 서울대뿐만 아니라 학생 검도가 없던 시절이었어요. 대구에 계신 사범님이 서울에 계신 사범님을 소개해주셔서 찾아갔는데 지금의 서울 경찰청인 서울 시경 검도부의 선수들이 모여서 운동을 하고 있더라고요. 저 혼자 학생이었는데 그곳에서 따라다니면서 배우고 한 학기 지나서 동아리 모집 광고를 붙였어요. 그랬더니 의과대, 법대, 문리대 등지에서 60~70명이 몰려왔었어요. 그러나 도장도 없고 정기적으로 지도해 줄 사범님도 없고 해서 중부경찰서 도장을 빌려서 제가 목도 가지고 휘두르면서 다 같이 연습들을 했죠.

◇ 시대유감에 부르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전국체전에서 1등도 하시고 하셨다면서요.

2~3년 사이에 학생검도가 굉장히 활성화가 되었어요. 제가 그 이듬해에는 경기고등학교와 서울고등학교에 검도부를 만들었고 그러면서 경남, 광주, 대전 등 명문 고등학교에서 검도 부를 만들었어요. 검도를 배우는 학생들을 보면 내성적이고 지적인 학생들이 많아요. 고등학교 검도부에 있던 학생들이 서울대학교에 다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 후배들과 같이 팀을 만드니까 대학에서는 막강한 실력이 된 거죠. 나가는 곳마다 우승하고 67년도 무렵에는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했죠. 서울대학교 총장실에 우승기를 갖다 놓은 종목은 아마도 검도밖에 없을 겁니다.(웃음)작년에 서울대학교 검도부가 만들어진지 50주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모임을 했는데 저도 참석하고 역대 사범님들도 참석한 아주 좋은 자리였습니다.

▶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과는 어떻게 연루가 되셨는지요? 잠깐 통혁당 사건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해방 후 특히 4.19혁명 후에 이승만 정권 시절까지는 바로 전쟁 직후라서 대학가가 아주 경직되어 있어서 토론이나 사회과학이 위축되는 아주 척박한 시절이었죠.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 국가들의 민족주의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분단된 우리나라가 어떻게 하면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이승만 독재 정권은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가 아니다, 학문의 전당인 학교에까지 침투한 정보원들을 보면서 참된 민주주의의 갈망과 그 당시의 암울했던 사회로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학생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몫이었죠.당시에는 농촌문제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어떻게 하면 농민이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농민문제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우리가 찾아야 할 이념에 대한 갈급함들이 지식인들의 토론이나 모임을 만들면서 4.19 혁명 후에는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면서 급격히 활발해졌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 당시의 경직된 당국으로서는 사건이나 사고로 본 거죠.

저는 64년도에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배후 주동자로 지목이 되었다가 공소취하로 풀려났는데 그 이후로 특별히 학생운동에 가담한 적이 없는데도 주동자로 지목되었어요. 68년도에 절친한 친구가 연루되었는데 그 친구와 가깝다는 이유로 그 이전에 밉보인 것까지 해서 덮어쓴 거죠. 신영복 교수도 이때 연루가 되었는데 나중에 징역을 받고 대전교도소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봤습니다. 그때 받은 형이 무기징역이었는데 감면되지 않고 계속 무기수로 있었죠.

▶ 결혼을 하신 후인가요?

들어가기 2년 전에 결혼을 하고 딸 아이 돌잔치 지나고 바로 들어갔습니다.

▶ 무기수였다고 하셨는데 듣기로는 독방에 안 계셨다고 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일단 정치범이 들어가면 특사라고 하는데 독방이든지 정치범들끼리의 합방이든지 어떤 형태로든 경계를 시킵니다. 전향서라고 있는데 그걸 쓰면 일반수들과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전향서를 썼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들의 접견이나 면회가 거의 통제되니까요. 6개월 후에 그 감옥소에서 나와서 일반수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해서 그들이 일하는 인쇄공장에서 일도 하고 책도 볼 수 있었죠. 그런데 며칠 후에는 옷 만드는 양재공장으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재봉틀도 돌리고 했는데 그 안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정이 들었어요. 나중에 다시 인쇄공장으로 가긴 했지만 교도관이 못살게 굴어서 칠을 하는 공장으로 옮겨갔어요. 칠 공장 구석에 구두를 깁는 양화 공장이 있었는데 신영복 교수가 그곳에 있더라고요. (웃음) 그곳에서 처음 만난 거예요.

▶ 오 관장님이 그곳에 계신 동안에 부인은 아기와 함께 생활을 어떻게 하셨어요?

제가 잠시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64년도에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공소취하로 다시 나오니까 그때 아내가 출판사에 입사해 있더라고요. 공소취하되기 전에 편집장에게 쓴 옥중편지가 있었는데 편집실에서 낭독을 하는 바람에 집사람이 저란 사람을 알게 된 거죠. 석방되고 나와서 출판사에 가서 다시 일을 하는데 인연이 돼서 결혼을 했죠. 아내가 동화작가라서 동화도 쓰면서 출판사와 잡지사를 거쳐서 아예 출판사를 하나 차렸어요. 그렇게 딸을 키우면서 살아온 거죠.

▶ 20년 만에 감면이 되셔서 나오신 거예요?

6.29 대사면 때 그때 야당이었던 김영삼 총재와 각 재야단체 및 종교단체의 주선으로 가석방되어 나온 거죠.

◇ 검을 제어하는 ‘제검관’에서 마음을 제어하는 ‘제심관’으로

▶ 출소하시고 나서 제심관이라는 검도장을 만드신 건가요?

아내가 경제적인 토대는 마련해 놓은 덕분에 몸도 추스르면서 사회에 적응도 하고 그 사이에 서실에서 서예도 배웠습니다. 사실 서예는 감옥에 있을 때 배우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보이지 않는 감시 때문에 검도는 할 꿈도 못 꾸었고요.

▶ 20년 만에 나오시니까 세상이 어떻게 보이시던가요?

세상이 천지개벽을 한 것 같더라고요. 그 안에서 뉴스를 보지 못하다가 어쩌다가 보면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가 나오는데 상상이 안 되죠. 엘리베이터를 딱 한 번 타본 경험밖에 없어서 지금도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면 난감할 때가 있어요. 우선 생활풍속이 달라지고 서울의 방향감각을 모르겠고 해서 완전히 새로 배웠어요.

▶ 적응하는데 얼마나 걸리셨어요?

저는 비교적 열심히 적응하려고 했는데 버스를 탈 때도 창밖을 유심히 보면서 간판도 익히고 지도를 놓고 방향감각을 익히기도 하고 하는데 약 1년이 걸렸고 의식이 완전히 적응하는 데는 5년 정도가 걸린 것 같아요.

▶ 제심관은 어떤 뜻인가요?

처음에 나와서 서울대학교에서 후배들과 검도를 했어요. 이후에 YMCA에서 검도교실을 만들어서 하다가 신촌에서 제검관이라는 도장을 만들었어요. 그 당시에 아직 군사문화가 남아있어서 칼을 제어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고 아내가 하던 출판사의 창고건물을 도장으로 공사해서 옮기게 되었는데 그때 도장이름을 제심관으로 붙였어요. 그때는 이미 민주화가 되고 칼은 어느 정도 제어가 되었으니 이제는 사람이 문제다, 사람의 마음이 제대로 되어야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거죠.

▶ 장장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옥살이를 하셨는데 억울함을 생각하면 마음을 주체하기가 힘드실 것 같은데 그럴 때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시나요?

지금은 술을 안마시지만 나오고 나서 한동안 술 사주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술을 많이 마셨어요. 가끔 밑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이 있는데 그럴 때 가장 좋은 게 검도였어요. 죽도를 잡고 한참을 씨름하고 땀을 흘리면 싹 가셔버려요. 청정한 내 본심으로 돌아가더라고요.

▶ 잃어버린 20년은 더 사셔야 할 것 같은데 앞으로 뭘 하시고 싶으세요?

건강이 허락한다면 제대로 검도 수련하면서 사람다운 사람을 양성해 내는 전통 있는 명문도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