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잡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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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 배우

2021. 6. 18.

《잡문》 雜文 안도현 지음

              -세상의 중심에서 이탈한 모든 별똥별들에게 바친다-

 

 

             

 

 

오리교 아래서

 

* 저녁은 안으로 나를 접어 넣어야 하는 시간이다. 나무들이 그렇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뼛속까지 쉬는 하루였으면, 잎사귀 다 내려놓고 혼자 강변을 걸어가는 나무였으면.

*저녁이 되니까 바람은 내 겨드랑이를 만지고 나는 바람의 서늘한 머리카락을 만진다.

*바람이 참 좋다, 라는 생각이 들면 사랑하고 있다는 거다.

*바다가 잠잠한 것은 마당에 빨래를 널어도 좋다는 뜻인가. 궂은 마음을 널어 말라는 것인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시간들이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어릴 적 외갓집 마당가에 피어 있던 달리아를 오래 들여다보던 시간이 내게는 그렇다. 그 시간들이 여름이면 내 혈관 속을 쿵쾅거리며 뛰어노는 것이다.

 

*할머니 어디 가요?/ -예배당 간다// 근데 왜 울면서 가요?/-울려고 간다//왜 예배당 가서 울어요?/울 데가 없다

 김환영의 동시 <울 곳>이다. 짧은 시 한 편으로 먹먹해진다.

 

*매미는 한사코 울고, 가까스로 울고, 참았다가 울고 참지 못해 울고, 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운다. 어떤 매미는 여름여름 울고, 어떤 매미는 씨벌씨벌 울고, 어떤 매미는 짜리릿짜리랏 우는데, 내 귀는 매미 이름을 구별도 못하고 그냥 듣는다.

 

*꽃을 자주 들여다본다는 것은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이 짧기 때문인데 어쩌자고 나는 꽃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나.

*네가 보고 싶어서 오늘밤은 가르릉가르릉 비가 내린다. 이건 백석한테 배운 문장이다.*밥상을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밥상을 빼앗는 사람이 있다. 밥이 하늘이다. 밥을 퍼주는 사람은 하늘을 퍼주는 사람이지만 밥을 가로채는 사람은 하늘을 가로채는 사람이다

 

*낡아가는 것들이 아름다운 건 시간 때문이다. 시간을 획일화하는 모도니즘은 낡은 것들이 왜 사무치는지 알지 못한다.*나는 거대하고 높고 빛나는 것들보다 작고 나지막하고 안쓰러운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햇빛이 미끄러져 내리는 나무잎의 앞면보다는 뒷면이 흐릿한 그늘을 좋아하고 남들이 우러러보고 따르는 사람보다는 나 혼자 가만히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을 더 사랑한다.

 

*산길 걷다가 갑자기 맞는 소나기는 연애처럼 난데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저 좋아하였다. 점점이 옷자락에 묻은 빗방울이 마르지 않았으면 하였다

*비 그치면 고추밭 매러 가려고 큰맘 먹었더니 또 비가 오네. 호미야, 처마 밑에서 빗소리나 듣자.

*느티나무 겨드랑이에 스며든 그늘이 말했다. 새들아,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마시고 일해라

*이 좋은 가을볕 쓸어 모아 두었다가 지금보다 더 엄혹한 시절이 오면 시장에 나가 한 됫박씩 팔아나 볼까.

*가을이 쌀쌀하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가을밤이 쌉쌀하다고 엉뚱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엉뚱한 생각과 말이 세상의 혁명에 기여한다.

*아우슈비츠의 바퀴벌레는 그곳이 아우슈비츠인 줄 모른다.

*작년에 죽은 친구야, 벚나무 아래 놀던 사진 속에서는 빠져나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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