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 시_빨랫줄 외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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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 배우

2021. 9. 15.

박철 시집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창비시선420

 

 

              박철

              서울 강서구(구 김포)에서 태어나 단국대 국문과 졸업, 시집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 을》 외 다수

              천상시문학상, 백석문학상 수상

 

 

빨랫줄

 

건너 아파트에 불빛이 하나 남아 있다

하늘도 잠시 쉬는 시간,

예서 제로 마음의 빨랫줄 늘이니

누구든 날아와

쉬었다 가라

 

 

약속

 

첫눈 오면 대한문에서 만나자는 약속으로

눈 오는 날 덕수궁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다

여긴 눈이 오는데 거긴 오지 않는 탓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둠은 내리고

사람들은 고무줄처럼 제 집으로 간다

그래도 무언가 남아 서성이는 것들이 있고

또 언젠가 저 곱상한 어둠처럼 어김없이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죽은 뒤라도 어디에서 만나자고 당신과 쪽지 나누고 싶다

, 그러면 어디가 좋을까

나는 지금은 사라진, 김포 개화산 너머 보물웅덩이

그 깊은 낚시터에서 만나자 전하고 싶다

퇴각하는 몽골군이 보물을 잔뜩 버리고 갔다는

그 소연한 웅덩이에 앉아

이승에서 못다 건져올린 금은보화를 끄집어내며

말없이 당신과 나란히 앉아 창포잎이나 되고 싶다

지금처럼 어둠이 내려

내남없이 세상 온통 한통속이라 하여도

내가 기다리던 이가 맞는지조차 분별이 필요없는

잠시 그런 행복에 젖어

다시 헤어질 날이 오늘인지 내일인지

이게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는 당최 관심도 없어

 

 

일출

 

새벽에 일어나 원고를 보는데

아내의 얼굴이 어둡다

 

이 시집 상 받으면 장모 줌세

아내의 얼굴이 환해지며

뷬으로 간다

 

 

첫눈

 

등 굽은 한 늙수그레가

지퍼를 닫듯

쓸며 가는 외진 길

 

한때 그가 문을 열고

쏟아낸 말들 지우며

 

자귀숲은 등 뒤에서 그 구부정을 바라보다

더 말없이

첫눈처럼 보내주네

 

무명이란 가장 마즈막에 펴오르는 불꽃, 놀이

멀리 기러기 셋

하늘 열며 날아간다

 

 

 

그 향기 아직 뜨거운

저 꽃의 마음을 안다

순대며 명자빛 떡볶이 성김을 뒤로 하고

구석에 등 돌려 오뎅 꼬치를 삼키는 목맨 외로움,

 

그 소태로움 혹여 세상이 알아챌까

유리창 밖으로 얼굴 들지 못하고

없는 고향 흰눈이나 뿌리며

행여 누군가 알아볼까 숨죽여 뜨건 국물 넘기는

병든 노구에 기울지 않은 향기,

 

그게 꽃이 아니고 무에냐

 

화학반응

 

딱히 말할 곳이 없어서

그래도 꼭 한마디 하고 싶어서,

지나가는 아이 반짝이는 뒤통수에다

사랑해ㅡ 속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쓱쓱 자라며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용각산

 

  기침보다 용각산 먹기가 힘들다던 해병 2기의 5촌 당숙이 힘차게 세상을 뜨시던 날 둬달 전까지만 해도 국산 코란도를 몰고 휙 들어서며 안 돼, 안 돼 이장은 안 된다던 그 양반의 무거운 속을 알게 되던 날 해가 맑고 날은 가벼웠다 입에 털어넣기도 전에  턱밑에 날려 영 면이 안 선다던 용각산 같은 생이 한번은 이 지구의 기침을 멈추게도 했을까 암, 했을 꺼야 그렇지 그랬을 꺼야 허우대 좋고 심성 좋고 한번 인간은 영원한 인간일지도 모를 해병2기의 당숙은 이 맑은 날 참  화하게도 날리며, 가셨다 가버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