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노래는 늘 뒤에 남았다_정두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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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 배우

2021. 12. 19.

나답게 사는 시 003

정두리 시집《그윽한 노래는 늘 뒤에 남았다》

 

희망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14살, 정동원이 부르는 노래

 

밉둥 부리고

꾀 부려도 될 네가

이 풍진 세상을 노래하다니

알고 불렀던 모르고 불렀대도

서러운 노래다

 

눈물이 키워주는 희망인가

허망을 희망으로 돌려세우며

노래하는 어린 너를 따라

나도 희망가를 불러본다

  

 

노화                             

 

 

맞은 편에 앉은 친구

적당한 나이듦의 얼굴을 보고

내 모습도 저러려니, 한다

 

아니, 저 보담이야 나을 테지

눙치듯 믿어본다

언뜻 옆 유리창에 비치는 

내 얼굴

 

나도 크게 다를 바 없구나

맞아, 늙음은

그렇게 편하게 와야 하는 것이더라

 

 

조금                                   

 

 

조금, 이라는 말

좋아하는 말이에요

 

어느 만큼 차지 않았어도

더 욕심내지 않는 

의연함이 느껴지는 말이라 그래요

 

조금만, 그냥 조금

그렇게 말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 말할 땐

목소리도 낮아져서

쪼끔, 쬐끔이라고 말하게 되겠지요?

 

만사에 그렇게

조금으로도 넉넉해지는 마음이 부러워요

그 조금은 크게 빛나는 말이고,

알고 보면 흘러넘치는 말이라 내가 좋아해요

 

 

아버지의 반바지                             

 

 

여름 옷감 중에

지지미라고 있어요

까슬하고

볼록거리는 촉감이

여름옷으로 아주 좋아요

 

지지미라는 이름으로 보아

아마도 일본식 옷감으로

전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 아버지,

지지미 통 넓은 반바지 입고

쥘부채 부치던 그해 여름

그 옷 아래로 부승부승 털이 보이던

아버지보다

내가 민망스럽던 걸 보면

그때 나이

늦은 사춘기였나 봐요

 

여름이면

부숭이던 종아리 내어놓던

아버지 반바지 생각나요

지지미라는 이름도 떠올라요 

                                정두리: 1979년 첫시집 《유리안나의 성장 》발간,방정환문학상, 가톨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녹색문학상 외 다수 수상, 시집《기억창고의 선물》외 다수, (사)새싹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