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_나로 말미암아 외 4 편

댓글 5

관객과 배우

2022. 2. 17.

유안진 시집 《터무니》

 

나로 말미암아             

 

하느님 아버지!

저는요 오래전에 무용지물無用之物 되었는데

왜 아직 살아있나요?

 

너는 쓸모 계산해서

자식 낳아 키웠느냐?

 

나도 그렇다

잘못 뭉치라서 너는 늘 내 근심

너로 말미암아 제대로 웃고 싶구나.

파안대소破顔大笑도 누려보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해                

 

뭐 하세요? 전화에

암 것도 안 해요, TV봐요

무슨 프로인데?

글쎄 뭣이더라?

얼버무리다가 버럭 화가 났다

왜 꼭 뭐를 해야 하나?

너무 많이 해버려서

안했어야 좋았을 것을

저지레만 해서

밥보다 약을 더 먹어야 하는

참회만 해야 하는 까닭인데.

 

 

 터무니                     

 

80년,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나그네였을까?

80년, 풍찬노숙의 순례자였을까?

서러움과 고마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모르게 나를

잠시도 떠난 적 없었다는 시간時間이 

제 이름을 세월歲月로 바꿨다고

머지않아 세기世紀로 또 바꿀 거라는데

옛날과 예상은

있든 없든 터무니ㅢ 증거들

오늘도 혼신魂身에서 시끄럽다마다

더러는 비명悲鳴같기도

더러는 찬미讚美같기도.

 

 

맨 정신으로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로

하나만 청합니다

 

"제 입에는 그저 아멘만 담으소서."

 

 

밤참                    

 

ㅡ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ㅡ

시편127편2절을 붙잡는 밤마다

기동하 알약이 밤참이다

 

기도는 짧아지고

알약은 더해지며

체력이 되나 체중이 되나

아무려면 어때 잠만 자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