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작품

여민류혜숙 2010. 12. 30. 17:48

조선후기의 서예

동국진풍(東國眞風)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사조는
서예에도 영향을 미쳐 제일 먼저 양송체(兩宋體)와 미수체(眉·體)를 출현시켰다.
양송(兩宋)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은 우암 송시열(1607~1689)와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웅대하고 힘차며 장엄하고 정중한 무게를 더하고 있다.
한편, 탈주자학파인 미수 허목(1595~1682)은 주자 이전의 유학을 지향한 것처럼
서법(書法) 또한 삼대(三代) 문자로의 복고를 신념으로 하여 진위를 가리지 않고
고전체(古篆體)의 특징을 취하여 기이하고 옛스러운 서체를 이룩하였다.
허목의 서체는 그에게 배운 옥동 이서(1662~1723)에게 영향을 미친 듯한데,
이서는 「필결」을 지어 조선서예사상 최초로 서론(書論)을 남긴 서예이론가로서
그의 서예이론은 서(書)의 본질을 철저하게 『주역(周易)』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서의 서체를 세상에서는 동국진체라 불렀는데
이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1668~1715)에게 전해졌고
다시 백하 윤순(1680~1741)에게 전해졌는데,
윤순은 이론적으로는 이서의 왕희지 유일주의의 논리를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이를 정비하고 서체 자체도 김생(711~791) 이래 우리나라의 대가들의 서체를 소화하여
왕희지체로 절충·흡수함으로써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동국진체는 백하 윤순의 제자인 원교 이광사(1705~1777)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는데,
위부인(衛夫人)과 왕희지의 글로 되어있는 「필진도(筆陣圖)」를 기본으로 삼고
옥동 이서의 「필결」을 본받아 훨씬 더 방대한 체제를 갖춘 「원교필결」전후 양편을 지어
동국진체의 이론적 체계를 발전적으로 정비하였다.
이에 뒤이어 표암 강세황(1712~1791) 같이 북학을 이해하는 학자들이
이광사 서론(書論)의 근거가 되는 「필진도(筆陣圖)」를 부정하여
동국진체에 대해 전면적인 부정을 하였다.
이 이후 북학파의 서체는 동국진체를 탈피하여 구양순체나 동기창체를 귀의처로 삼아
무징불신(無徵不信)의 고증적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이어서 추사 김정희(1786~1856)는 한예(漢隸)에 바탕을 두고
여러 필체의 특별히 뛰어난 장점을 겸비한 추사체를 이루어내었는데,
이는 중국의 청조고증학의 대가인 옹방강(1733~1818) 일파가 이상으로 하면서
이루어내지 못한 서예사상 이상적인 경지였다.
이러한 추사체는 중국 서예계에도 충격을 주어 추사보다 어린 중국 서예가들이 다투어
이를 추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자하 신위(1769~1845)·눌인 조광진(1772~1840)·이재 권돈인(1783~1859)·
이당 조면호(1803~1887)·위당 신헌(1810~1888)·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등
명문 출신들과 이상적(1804~1865)·오경석(1831~1879)·김준석(1831~1915) 등
중인인 헌역관(漢譯官)들이 추사체를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