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작품

여민류혜숙 2010. 12. 30. 17:49

ⓒ 전라도닷컴
약초를 캐러 다니면서 나뭇가지와 지팡이로 글씨를 썼던 사람. 그는 “세상에 글씨를 익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좋은 종이와 붓으로 늘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가난한 자로 말하면 애초에 마음을 내지 못할 것 아니겠는가”라고 염려했다.
그 사람은 창암 이삼만. 그는 쉽게 굴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종이나 붓을 살 형편이 안됐던 그이는 독창적인 갈필(葛筆),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을 만들어냈다.
갈필은 칡뿌리로 만든 붓, 죽필은 대나무를 잘게 쪼개 만든 붓, 앵우필은 꾀꼬리털로 만든 붓. 창암의 글씨가 마음에 더욱 사무치는 이유다.

두 대가 글씨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희귀본
최준호 옥과미술관장이 펴낸 《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를 본다. 원교와 창암의 유묵첩을 40년간 소장해 온 한국화가 아산 조방원 선생이 “완상과 농첩의 즐거움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뜻을 비친 것이 이 책이 독자들을 만나게 된 배경이다.
아산 선생은 이 오래된 서첩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글자 따라 지두필(指頭筆)을 쓰곤 했다 한다. 아산 선생 옆에서 십수 년 동안 원교와 창암의 유묵을 만나온 최준호 관장이 유묵을 탈초하고 해제했다. 시간을 뛰어넘어 글씨가 맺어낸 인연들이 향기롭다.

▲ 창암이 쓴 ‘축해이산 번도파악’(바다를 발로 차서 파도를 일으키고 산을 들어옮겨 봉우리를
깨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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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첩은 두 대가의 글씨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희귀본.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1777)와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듯 서첩의 앞뒷면을 나누어 채우고 있다. 독창적 서체를 일궈냈음에도 우리 서예사에서 늘 추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두 명필의 진면모를 만날 수 있다.
최준호 관장은 “두 선생 모두 독특한 필법과 장법으로 물 흐르듯이 서첩을 채우고 있다. 원교 선생의 글씨는 자획이 건강하고 훌륭하며 기상이 웅장하고 빼어나다. 그리고 창암 선생의 글씨는 붓놀림이 신묘하여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이다. 교(巧)함과 졸(拙)함이 함께 있다”고 말한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를 증거하는 생애
두 사람의 서예는 불우하고 궁핍한 생애 속에서 꽃핀 것이기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옥동 이서-공재 윤두서-백하 윤순을 이어 조선 고유의 서체인 이른바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는 당쟁 와중에 역적으로 몰려 전라도의 진도, 신지도 등에 23년간 유폐돼 살다가 생을 마쳤다.
창암은 모진 가난과 고독 속에서 서예 재료의 민중적·자주적 혁신을 이루어 냈다. 갈필·죽필 같은 조선식 필기구 개발과 한지의 재질 탐구, 전통에서 벗어난 ‘고구마 도장식’ 낙관처리법 등이 그러하다.

▲ 원교가 쓴 구풍우모 심린통각(입으로 소털같이 많은 것을 외우고 마음으로 성인의 학문과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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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첩에 씌인 ‘蹴海移山 飜濤破嶽(축해이산 번도파악)’을 두고 최준호 관장은 “이 글씨는 ‘꾀꼬리털 붓’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운필력을 지니고 있다”며 “마치 숨이 넘어갈듯 말듯이 ‘으어허히이이이…’ 가슴 속 깊은 응어리를 뽑아내는 명창의 쉰 목소리 같다”고 평한다.
창암에 얽힌 일화는 또 있다. 하루 1000자의 글씨를 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병중에 있을 때도 이를 실천해 여러 개의 벼루가 닳아 구멍이 났다는 것.
두 명필의 생애와 글씨는 불광불급(不狂不及), 즉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를 증거한다 할 것이다.
 
덤: 책에는 원교와 창암, 추사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소개돼 있다. 해남 대흥사는 이 세 사람의 글씨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 원교가 쓴 ‘大雄寶殿’ ‘千佛殿’ ‘解脫門’ ‘枕溪樓’, 창암이 쓴 ‘駕虛樓’, 추사가 쓴 ‘無量壽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