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작품

여민류혜숙 2010. 12. 30. 17:50

                                             임서가 살아야 창작이 산다 1



  

                                                               원광대  서예과   김 수 천 교수(철학박사)

  


 서예가 세상에 출현한 이후, 줄곧 이어진 전통은 고법(古法)을 근간으로 하여 창신(創新)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창작에 능한 서예가일수록 임서에 있어 예리한 관찰력을 발휘했고, 이를 통해 탄탄한 도야과정을 거쳤다.


  전통적인 의미의 임서는 모양만 베끼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서화사에서는 형태만 베끼는 것을 모(摹)라 하여 임(臨)과 구분하려 했다. 따라서 이들에 있어서 임서(臨書)와 임화(臨畵)는 단순한 베낌의 행위가 아니라, 형태 특성을 파악한 후, 내재된 정신을 간취해내어, 예술규율을 해독해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임서의 행위는 관찰력 ․ 사고력 ․ 해석력이 총동원된 창조행위인 것이다.


  오늘날의 서예와 옛 서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임서를 대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중국의 서예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근대이전까지의 중국서예사를 보면 대부분의 글씨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유추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아무리 독창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를 형성하게한 뿌리를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중국서예의 경향은 작가의 글씨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추론이 불가능한 글씨들이 많아졌다. 그 이유는 중국의 근현대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중국의 20세기는 정치적으로 대 혼란기를 거쳤다. 중일 전쟁 이후부터의 중국은 정치적 격동기로 들어섰고, 적지 않은 문화적 손실까지 감수해야했다.


  게다가, 60년대 이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문화예술은 큰 암흑기를 맞게 된다. 그 당시는 반자본주의 정치노선으로 인해 예술문화방면에 대한 규제가 심했다. 따라서 문필이나 예술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환경이었고, 서예에 있어서도 붓으로 휘호될 수 있는 것은 대자보에 혁명 구호를 쓰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투쟁을 위해 대자보에 글씨를 쓰는 것이 당시 문화로는 인정될 수 있으나 이를 예술적 창조로 승화시키기엔 부족함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정치상황과 역사과정으로 인해 오늘날의 중국의 서예작품은 새로운 것들이 많다. 지금 중국의 서예작품에 나타나는 현상은 아주 즐겁게 놀고 있는 어린이처럼 자유로운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어떤 작품은 너무 개성이 강조되어 필체의 뿌리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추측하기가 어렵다.


  중국에서 서예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리고 개혁개방의 바람이 분 이후, 즉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예학회가 만들어지고 국가 주도의 전시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지금 중국에서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활발한 서예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의 막대한 지원 하에 전시와 이론의 연구가 해가 다르게 우후죽순처럼 뻗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근 20년간 적극적인 서예의 발전이 있었다 하더라도 오랜동안의 서예학습의 공백기가 가져다준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중국의 서예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임서의 튼튼한 수련과정을 거칠 수 없었다. 오늘날의 중국서예가 이전의 서예와 비교할 때, 계보의 추적이 어렵고 옛 서예에 비해 깊이가 다른 것은 임서의 내공이 두텁게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개성과 자유의 표현을 지나치게 중시하는데 있다고 본다.


  임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상황은 중국과는 다소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임서의 환경에 큰 변화를 겪어야 했다. 일본의 서예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서구미술이었다. 20세기 서구미술에서 유행하던 일명 전위(前衛)와 다다로 불리워지는 급진적 개성주의는 일본의 서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전통적인 학서방법보다는 서구현대미술의 흐름에 편승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국은 또 다른 상황이다. 우리는 중국과 같은 심각한 정치적인 영향을 받지도 않았고, 일본과 같이 서구미술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지도 않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한국은 전통적인 학서기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한국이야말로 서예의 정통성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나라라고 추켜세우는 입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서예는 반성할 점들이 많다. 임서는 크게 형임과 의임으로 나뉘어진다. 형태를 모방하는 형임(形臨), 형태의 특징과 필의를 간취해내는 의임(意臨), 오늘날 국내의 임서 성향은 전자에 편중되어 있는 것 같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서예인들의 임서에 대한 수련기간은 그 어느나라보다도 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임서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전통을 잇고 있지 못하다. 전통적인 학서방법을 계승하고 있다면, 임서와 창작이 별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청말과 근대에 활동했던 서예가의 임서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하소기(何紹基 : 1799~1870)는 <장흑녀비>를 가장 많이 임서한 서예인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늘 주머니에 <장흑녀비>를 지참하고 다니면서 수시로 감상했다고 전한다. 하소기가 쓴 <장흑녀비> 임서는 원본의 형태인 해서풍을 따르지 않고 행서로 변형시켰다. 이렇게 서체를 달리했는데도 하소기가 쓴 <장흑녀비> 임서는 여전히 원본을 빼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화론에 “불사지사(不似之似 : 닮지 않은 닮음)”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하소기가 임서한 <장흑녀비>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외형으로 본 원본 <장흑녀비>와 하소기의 임서본은 하나는 해서이고 하나는 행서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미지상으로 본 두 작품은 의심할 여지없이 닮아있다. 


   “불사지사”의 임서법, 이것은 임서가 단순한 모방적 차원이 아니라, 창작의 진입임을 말해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예가들은 훌륭한 작품에 대하여 눈을 떼지 않고 재해석을 거듭하며 평생을 바쳐 임서에 혼신을 다했다. 예를들어, 오창석(吳昌碩 : 1844~1927)은 청년시절부터 80이 넘도록 평생동안 석고문을 임서했다. 청년시절에 외형을 베끼는 형태 모방의 단계를 지나 중년기에는 석고가 의임으로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고, 다시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또 다른 의임의 단계로 옮겨갔다. 오창석은 평생을 석고문 임서에 몰두하면서, 석고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도 살려내고, 자기의 주관적인 해석도 살려내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그의 석고문 임서는 머물러있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임서법은 제백석(齊白石 : 1875~1957)의 임서에도 잘 나타나있다. 그는 법서의 형태를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 갑갑하게 보이는 공간은 시원하게 틔워주고, 엉성하게 보이는 곳은 적당히 좁히면서 필획과 결구를 재구성하고 있다. 제백석에 있어서의 임서는 글씨를 그대로 옮기는 사진촬영식 임서가 아니라, 비문에서 느낀 이미지를 간취해내고, 원본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업그레이드 해나가는 창조적인 입서법을 택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임서라는 텍스트에 머물러있지 않다는 점이다. 임서의 대상이 되는 법첩의 특징을 파악하면서 적극적인 사고의 언어를 개입시키고 있다. 전통적 의미의 임서는 창작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임서는 창작으로 이어주는 건널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계속- 


            

                

권하고 싶은 책

<<歷代名家臨書集成>>, 일본 柳原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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