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작품

여민류혜숙 2010. 12. 30. 17:51

천전리 각석에 대해서

                     (*천전리각석에 대해 간단히 소개 합니다)


천전리각석은 국보 제147호로 지정된 암각화(巖刻畵) 바위 위에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위 위나 큰 절벽, 동굴 안 벽면 등에 사물이나 기호를 쪼기, 새기기, 칠하기 등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바위그림, 혹은 암각화라고 한다. 바위그림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지만, 전형적인 사례들은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유적에서 주로 나타난다. 바위그림은 대개의 경우, 풍요, 다산 제의의 산물로 이해되고 있다.

 

천전리의 이 바위는 상부에 면쪼기로 나타낸 사슴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동물과 선쪼기로 나타낸 다양한 기하무늬가 있고, 하부에 여러 명문(銘文)과 가는선긋기에 의한 인물 및 동물상 등이 있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상부의 마름모꼴무늬, 굽은무늬, 둥근무늬, 우렁무늬, 사슴, 물고기, 새, 뱀, 사람얼굴상 등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당시의 풍요의식과 관련된 표현으로 해석된다. 하부의 기마행렬, 배의 항해 모습, 용, 말, 사슴그림, 300여 자의 명문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신라사람들이 삼국시대 이래 이곳을 성지(聖地)로 여겼음을 짐작하게 한다.

 

천전리각석 계곡은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계곡으로, 이곳을 흐르는 물은 맑고 깨끗하며, 사철 수량이 풍부하다.  가까운 곳에는 신라 공신 박제상의 유적지인 치산서원, 망부석, 은을암 등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간직한 채 찾아오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하계휴양과 더불어 자녀들의 산 교육장으로 가족 나들이에 적합한 곳이다.



            천전리 각석을 찾아서

           


천전리(川前里)각석(刻石)을 답사하기 전에 먼저 인터넷에 들어가 주소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울산시청과 울주군청에 전화를 해 가는 길과 또 천전리에 대해 문의해 보았다. 탁본은 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암각화와 가까운 반구대까지 알려 주었다. 울산과 언양 그리고 천전리까지 세 번 버스를 바꿔서 탄 후 약 30분을 걸어 암각화가 있는 곳까지 갔다. 그곳은 매우 조용한 곳으로 작은 산들이 첩첩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고, 기이한 색깔의 바위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큰 계곡이 병풍가운데를 지나가듯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우선 암각화 맞은편에 깍아 놓은 듯한 절벽이 눈길을 끌었다. 눈길이 가는 곳부터 찾아보았다. 공룡의 흔적이라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었고, 둥그런 모양의 큰 공룡발자국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물이 조금 고인 발자국화석도 있었는데 장난삼아 손을 대어보니 손바닥 보다 훨씬 큰 웅덩이 같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맞은편에 있는 각석으로 갔다.


1. 천전리 각석

천전리 각석은 국보 제147호이며 1973년 5월 4일 지정되었다. 각석이 있는 장소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70-8이다. 천전리각석은 1970년 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교유적조사단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이 암각화에는 세 가지의 다른 그림이나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기하문적도안(機何文的圖案)과 화랑(花郞)들의 국토순례장을 말하는 3백 여자의 명문이 그것이다. 이제 암각화의 내용과 제작과정을 알아보겠다.


천전리 서석(書石:문자가 새겨져 있는 바위돌이라서 서석이라고도 한다)에는 문자가 불규칙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너비 9.5m, 높이 약 2.7m정도의 넓은 자연석에 인공으로 다듬은 듯이 전면이 반듯하게 서 있으면서도 위쪽이 약 15도 정도 앞으로 숙여져 있다. 벽면의 그림은 전면에 걸쳐 마름모꼴 나선형 동심원(同心圓) 등이 중복적으로 얽혀져 있다. 따라서 천전리 각석은 우리 나라에서 기하학적인 도형에 인간 소망을 담은 최초의 원시화로 평가되고 있다. 벽면 위쪽 왼편에는 사슴, 호랑이, 물고기, 뱀 등이 있으며 사람머리를 가진 네발짐승도 보인다. 밑 부분에는 선각화(線刻畵)와 명문(銘文)이 뒤섞여 있는데 선각화는 인물, 기마, 행렬도를 비롯하여 말, 새 등의 동물 문양과 항해하는 배의 모습 등 다양하다. 글씨는 각석의 중앙에서 약간 우측편 하단에 새겨져 있으나 마멸되어 읽기 힘들다. 하지만 승주(僧柱), 호세(好世), 영(永), 문왕(文王), 로(露) 등 이런 글자들은 조금 커서 알아 볼 수 있었다. 각풍은 북위해서와 비슷하고 졸박한 느낌의 각이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하학적 도안 쪽을 보면 동심원, 삼각형, 능형 등의 기하 각문으로 새겨졌고, 그 수법을 보면 쪼은 것이 아니라 갈아서 패어지게 한 그림들이다. 또 그림 중에는 가는 선각의 배 그림도 있고, 문양 및 사슴 등의 동물화가 탁각된 것도 있어 반구대의 것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석각의 좌부 에는 문양 틈에 끼어 눈, 코, 입을 그린 사람 머리 같은 것이 있다. 그 위 일대에 희미한 그림들이 있어서 각화가 오랜 시기를 두고 반복하여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는 청동기시대 후기 이전의 것도 들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중좌부에는 희미한 문양 바탕 위에 뚜렷하게 동심원, 능형 등이 있는데 능문의 윤곽은 2내지 3線이고 이것들이 몇 개씩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풍요와 생산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석각에 나타나는 동심원은 구라파의 암각화나 일본의 승문식 토기에서 볼 수 있는 나선문과 마찬가지로 태양을 상징한 듯 하다. 이 밖에 다른 도안 무늬들도 동심과 비슷하게 어떤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러한 각도에서 보아 이 각석을 제천단(祭天壇)으로 보기도 한다.


둘째, 화랑들의 국토 순례장으로 보는 견해이다. 화랑도들은 통상 3년 동안을 서약, 수련, 의무 이행 기간으로 정하여 국토순례, 성산관람, 영악수험(靈岳修驗) 등을 통하여 도의를 연마하고 가악을 즐기며 산수를 유오(遊娛)하였다. 이러한 수련기간에는 산수가 좋은 두동면 천전리에도 찾아와서 그 이름을 새겨놓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즉 호세(好世)는 진평왕 때 화랑, 수품(水品)은 선덕여왕 때 화랑, 화랑성업(花郞成業)은 통일신라 직후 화랑인데 이러한 글을 보면 이곳이 화랑들의 국토 순례장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3백여자의 명문에 관한 것이다. 각석의 중하부에는 3백 여자의 명문이 새겨 져 있다. 이 명문은 원명(原名)과 추명(追名)으로 구성되어 있다. 原名은 법흥왕 12년(525)에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 가신을 거느리고 서석곡(書石谷)에 나들이 한 것을, 또 追名은 그의 아들 법흥왕이 동왕 26년(539)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놀던 것을 기념 삼아 새겨 둔 것이다.


넷째, 제작 방법은 면 쪼으기, 선 쪼으기, 날카로운 금속제 도구로 윤곽 면을 드러낸 가는 선긋기 등의 기법이 사용되어 있다. 암각화는 바위벽의 표면이나 지석묘의 개석 또는 평평한 바위 표면에 그리고자 하는 형상을 모두 떼기 하거나 선각으로 그린 바위 위에 새긴 그림을 일컫는 것이다.



2. 암각화

암각화나 암화의 기원은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라스코(lascaaux)동굴이나 스페인의 알타미라(Altamira)동굴 등에서 보듯이 늦어도 구석기시대 후기인 B.C 15000-10000년경에 인적이 드문 깊은 동굴의 바위 표면에 선각을 가하거나 채색을 하고 사냥하는 인물과 동물의 모습 등을  매우 수준 높은 동굴벽화로 제작하였던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일찍이 구석기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에는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과 시베리아 특히 극동 시베리아 아무르(Amur) 강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몇 몇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나 이곳의 암각화에는 붉은 광물질 안료나 혹은 붉은 황토로 칠하거나 찍었으며 초기에는 주로 동물을, 그리고 후기에는 사람의 상징과 형체를 그렸다. 특히 동물 중에는 야생동물, 畜牛, 새 그리고 여러 가지 모양들을 그렸던 것이다. 우리 나라 암각화 중 제작시기가 가장 오래되고 내용이 풍부한 것은 대곡리와 천전리이다. 

 

문명대 교수는 84년 천전리 암각화에 대한 종합보고서에서 그림 속에 등장하는 기하학적인 무늬들을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인들과 결부 지어 설명했다. 그러나 송하섭 교수는 이에 대해 “인간의 내면세계에 잠재한 신관념(神觀念)의 의식행위를 표현한 것으로 청동기시대의 농경생활과 관련된 태양, 곡물의 성장과 숙성, 여자의 성기 등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천전리 암각화에서 보이는 일부 면각 그림들은 반구대보다 사실주의적인 기법에 충실해 조성시기를 반구대에 앞선 신석기 말기까지 올려 잡아야 한다는 학자도 있다. 그것은 천전리 암각화의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오랜 기간을 두고 암각 되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화랑의 국토순례장 이었다고 추측되는 곳은 글씨가 이미 많이 마멸되어 읽을 수 없었지만, 그 당시 글씨의 졸박한 멋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고, 앞으로 이에 대해 많은 연구가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기하문, 기마, 행렬도, 항해도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자료로 찍은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아 많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곳의 기이한 풍경과 암각을 지키는 할아버지의 평온한 모습에서 우리의 서예유적을 지키는 지킴이로서의 자긍심을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