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작품

여민류혜숙 2010. 12. 30. 17:58

한문과 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

1. 정보화시대 의 필수품, 한글의 우수성

21세기의 벽 두, 우리나라는 정보화시대의 선진국 지위를 자리매김 했습니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정보화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다름 아닌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글의 우수성 때문이지요. 컴퓨터 자판을 보시면 왼손은 자음 오른손은 모음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타이핑이 가능합니다. 세상에 이런 문자는 없습니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우리 한글을 가르치면 불과 40분만에 한글로 표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학창시절 영어 알파벳 다 배우는데 며칠 걸렸죠? 또 휴대폰을 보면 천지인 삼재를 형상한 ㆍ ㅡ ㅣ 세 개면 모든 모음을 표기할 수 있지요? 세상에 이런 문자가 있나요? 없습니다. 한민족 고유종교인 증산도의 경전인 『도전』에는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말과 글을 세계인들이 배워간다고 예고되어 있습니다.
일본을 봐요. 히라까나 가타카나를 쓰는데 이걸 외워서 타이핑하려면 골치 좀 썩을 겁니다. 중국을 봐요. 한자를 컴퓨터로 입력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여러분 다 아실 겁니다.
삼재(三才)와 오행(五行)의 우주원리가 담긴 한글, 정말 대단한 문자입니다. 알파벳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단연 세계 최고의 문자입니다.

2.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신하들의 창작품일까?




2년 전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한글과 관련된 특집방송을 한 적이 있지요. 한글은 집현전 학사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도리어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들이 알면 모화사대(慕華事大)에 어긋난다고 반대할까봐 아예 비밀리에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창제하시는데 뭘 갖고 작업을 하셨을까요?
조선시대 어떤 학자는 몽골 글자(蒙字)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원나라 때 라마승 파스파가 만든 파스파문자란 뜻이죠. 그런데 그것을 한글과 비교해보면 한두 글자 빼고는 닮은데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또 범자(梵字, 산스크리트 문자)를 모방한 거 아닐까? 라고 했는데 역시 한두 글자 빼고는 전혀 안 닮았습니다.
정인지가 쓴 서문에는 옛 전(篆)자를 모방했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 같군요. ^^;

3. 한글은 고조선문자



옛 전자(篆字)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다른 나라 문자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문자를 개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는 고조선 3세 단군이신 가륵 임금 때입니다. 단군께서 신하인 삼랑(관직명) 을보륵에게 명하셔서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드셨다고 합니다.(『환단고기』)

이게 한글의 첫 작품입니다. 이것은 고조선 후기까지 사용되다가 사용빈도가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4. 일본열도로 건너간 한글



가림토 문자는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 초기에 한민족이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건너갔습니다. 일본 역사의 초창기를 『일본서기』에서는 신대(神代)라고 부르는데요. 이 무렵에 일본으로 유입된 문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 부르지요.

일본의 수많은 신사(神社)에는 신대문자가 새겨진 명문과 비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의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는 『고사기(古事記)』는 백제인 태안만려(太安麻呂)가 완성했는데요. 원래는 위의 사진처럼 신대문자로 표기되었습니다.
 
5. 인도로 간 한글

가림 토 문자는 기원전 21세기경에 인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송호수 교수님이
인도 구자라트 지방(인도 서북부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한글과 거의 흡사
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국내에 보고했지요.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습니다. 구자라트에는 주로 드라비다인(후술)들이 거주하고 있는데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우리와 흡사
하다고 하지요.

가림토 문자가 건너간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환단고기』「단군 세기」에 의하면 5세 단군 구을 임금 때 신독(身毒: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당시 인도에는 게르만계 백인인 아리안족이 아닌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었는데요. 이들은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아닌 희안한 인종이라고 하지요. 최근의 연구결과 한국인과 드라비다인은 공통의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하는군요. 언어 비슷해서 무려 6백 개가 넘는 단어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 아빠, 오빠, 다리, 벼, 메뚜기(드라비다어 메디), 쌀 등등.... ^^;
여기서 쌀과 메디, 벼 등을 통해 농업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 년경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경기도 일산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따라서 쌀과 메디, 벼는 우리말이 인도로 건너간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서는요. 아낙네들이 빨래 방망이로 세탁을 하는 모습,
조랑말 같은 조그만한 말들이 보인다는 군요. 고조선의 과하마가 건너간 모양입니다.
이처럼 고조선시대에 인도와 우리나라는 엄청난 교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조선시대는 팍스 코리아시대였어요.(멋지다 ^^)

우리나라는 4천 년 전부터 국제화, 세계화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가림토문자은 공용문자로 사용되었겠지요.
인도 구자라트문자는 훗날 산스크리트 문자로 변형되었고 이것은 다시 티벳문자가 된 뒤 원나라 승려 파스파에 의해 몽골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몇몇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범자(梵字)나 몽자(蒙字)라 오해한 것이지요.
충청도 제천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드라비다인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가야 김수로왕의 왕후인 허왕옥도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하지요.

6. 한문의 기원은 배달국의 녹도문

다음은 한문에 대 해 알아보지요.
일반적으로 표의문자인 한문의 기원을 은나라의 갑골문자에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골문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이전시대의 중국에는 창힐문자가 있었습니다. 중국문자의 시초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창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과 동시대(B.C.28세기∼B.C.27세기)의 인물이었습니다. 창일의 고향 산동반도 지역에서는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아~ 그림을 보세요. 중간에 있는 비석(倉聖鳥跡書碑)문이 창힐문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있습니다. 그 왼쪽에 보이는 신지문자 이른 바 녹도문입니다.

『환단고기』「태백 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지요.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를 소개해 놓았습니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 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습니다.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입니다. 『환단고기』에 인용된『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 문자는 5세 환웅이신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께서 육서(六書)의 원리로서 개량하게 됩니다. 그래서 좀더 세련된 형태가 되었지요. 이것을 용서(龍書)라고 하며 이것이 널리 통용되던 신지문자입니다. 주로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창힐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배워 중국에 널리 보급했습니다. 그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죠. 결승문자는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 통용된 것입니다.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신지문자는 훗날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들에 의해 한문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 개량되었습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왜냐면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뒤죽박죽 섞이다보니 머릿수 많은 중국인들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지요.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은나라 유민을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합니다. 당연히 갑골문자를 들고 왔다고 봐야겠죠. 신지문자보다 더 진보된 형태라고 할 수 있겠구요. 그가 정착한 지역은 현재 유물, 유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금의 발해 북안, 요하 서쪽입니다. 은나라 계통 유물인 네모진 솥이 출토되었는데요. 거기에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고조선의 국경선이 그 지역(요서)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지요. 하나는 가림토문 하나는 신지문자입니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신지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위의 그림 오른쪽 위)

거기에다 중국에서 사용된 갑골문자(한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무려 3가지의 문자가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한자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습니다.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된 것이지요.

[역사스페셜] - 5분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