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작품

여민류혜숙 2010. 12. 30. 17:59


 중국 문자의 발생에 대하여 역사상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귀납적으로 말하면 기호나 도화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주역(周易)>계사에 보면 상고시대에는 줄을 묶어 다스렸다고 하였다. 따라서 결승이 최초의 간단한 기호로 큰 일은 줄의 매듭을 굵게 하고, 작은 일은 줄의 매듭을 가늘게 하였다. 도화는 그림을 그려 자연을 표현하였으니, 예를 들면 '虎'자는 호랑이의그림, '馬'자는 말의 그림을 그려 나타내는 방법이다. 이후 사회의 발전에 따라 이러한 것들 이 수요에 충족할 수 없게 되자 문자와 도화는 점점 분리되어 거리가 생겨 문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할 수 없게 되었다.


  문자란 번작하고 자세하게 그리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단지 특징만을 나타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인식시키면 그만이다. 물론 인류가 문자를 창조함에 반드시 민족언어와 서로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영원히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노신은 일찍이< 학문학사강요(學文學史綱要)>에서 "말이란 풍파와 같다. 출렁거리던 파도소리가 오래 지나가면 그 자취도 아득해져 단지 귀와 입으로만 전해질 따름이다. 단지 부족한 것은 멀리 전달되고 후세에 이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 사물에 감동을 받아 이를 펴내면 노래가 된다. 노래는 감동을 주지만 그 일은 잊게 되는 것이다. 언행을 기록하는 것은 일들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다. 언어만 믿으면 일들이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줄을 묶어 다스렸고, 뒤에 가서는 성인이 주역의 서결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비록 문자가 많지 않더라도 설명은 반드시 문자에 의지하여야만 비로소 사람들의 사상이나 감정과 언행을 전달하여 사회의 수요에 적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문자는 성 음·형체·훈고의 세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성음과 형태 그리고 의의가 있어 문자의 발생과 법칙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자가 문자의 초보적인 역할을 하려면 먼저 형태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글자의 뜻을 해석하려면 먼저 문자의 구조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되기 때문이다. 문자의 형태는 체계가 있기 때문에 비교적 탐색이 용이하다. 만약 형태가 없다면 문자는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다.


  한나라 허신은 <설문해사(說文解字)>의 서문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형태를 그린 것을 '文'이라 하고, 그후에 형태와 소리가 서로 도와주는 것을 '字'라 한다.



  '文'이라는 것은 만물의 근본이고, '字'라는 것은 말이 불어나 점점 많아지는 것을 뜻한다. "라고 하였다. 허신의 이러한 견해를 살펴보면 문자는 사물의 유형으로써 형상의 제작을 취 하는 것을 말한다. '文'의 본래 의미는 실이 섞여져서 나타는 무늬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에도 이러한 상형의 흔적이 남아 있다. '字'는 '文'에서부터 발전하여 한편으로는 그 형태를 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소리를 첨가하여 형태와 소리를 갖추어 사물의 발전에 따라 점점 그 수효가 증가하여 형성자가 더욱 많아졌다.



  상형자를 보면 어떤 것은 자연계의 형상과 어떤 것은 기물의 형상을 취하였고, 어떤 것은 거북이의 무늬나 새의 발자국 등의 형상을 취하여 누구나 한 번 보면 금방 어떤 물체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형성자를 보면 대부분 한쪽의 형태로 의미를 나타내고, 한쪽은 소리로써 음을 나타낸다. 이외에 지사(指事), 회의(會意), 가차(假借), 전주(轉注) 등을 합하여 육서(六書)라고 한다.



  그러면 문자의 시작은 언제쯤일까? 이것은 매우 단정하기가 어려운 문제다. 어떤 학자는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甲骨)에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을 최초의 문자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을 부정하여 말하길 갑골문은 이미 성숙된 문자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반드시 문자의 발달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자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갑골문 이전부터 문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최근 중국 서안(西安) 반 파(半坡)에서 출토된 임동채도기(臨潼寨陶器) 위에 새겨진 문자와 청해락도현(靑海樂都縣) 유만(柳 ) 문자의 부호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정식으로 문자가 창제되기 이전에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으로는 실물(實物)·서결(書결)·도형(圖形)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실물은 가장 간단히 일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그중에서 가장 유행하였던 방법 이 앞에서 말한 결승(結繩)이다. 결승 이후에 부결(符결)의 방법이 생겨났으니, 목판이나 혹 은 목판 위의 한구석을 흠을 내거나 기타의 부호를 남겨 증거로 삼는 방법이다.


  '결'은 즉 새긴다는 의미다. 따라서 서결(書결)이란 그림이나 문자를 새긴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당시의 문자가 대부분 기물 위에 그림을 새긴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종류의 방법은 단지 사람들이 도형을 통하여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어서 진정한 문자라고 볼 수는 없다. 진정한 문자는 도화성이 강한 부호로 언어를 제대로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도화는 실물과 비교할 때 매우 진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을 기록하는 도화는 한자의 전신이라 할 수 있으며, 많은 발전을 거쳐 번잡한 것을 간단히 하고 정리하여서 구체적인 언어 성분을 대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음과 형태를 첨가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문자는 탄생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 강조할 것은 문자의 창제에 관한 문제다. 옛사람들의 논문에서는 대부분 문자의 창제를 모인(某人)의 공로로 귀속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부당한 것이다. 노신(魯迅)은 <문외문답(門外問答)>에서 "당시 사회상으로 불 때 창힐 혼자서 문자를 만들 수는 없었다. 때로는 칼과 자루에 새겨진 한 점의 그림, 또는 문설주에 새겨진 그림 등이 마음과 입으로 서로 전해져 문자가 많아지자 사관(史官)이 이를 채집하여 일을 기록하였다. 중국 문자의 유래는 아마도 이러한 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자란 백성들 사이에서 싹이 터서 뒤에 어떤 특권자가 이를 모아서 정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국 고대의 유명한 사상가인 순자(筍子)도 <석폐(釋蔽)>에서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 지만 창힐만이 유독 전해지는 것은 그가 일찍 태어났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많지 만 후직(後稷)만이 유독 전해지는 것은 그가 뛰어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문자가 결코 성인이나 천재에 의하여 창제되는 것이 아니라 고대 백성들의 실제생활 중에서 이루어진 지혜요, 결정체라는 것을 설명한 말이다. 문자란 무에서 유가 탄생되는 것이 아니다. 적은데서부터 출발하여 점점 많아지자 오랜 기간 동안의 선별을 거쳐 마침내 약속들을 정하고 풍속으로 이루어져서 문자로 탄생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