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작품

여민류혜숙 2010. 12. 30. 18:00

전서(篆書)

전서는 진한 이전의 여러 서체를 통칭하는 말이다. 전서는 크게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나누고,
100년전에 발굴된 은상 시대의 복사문(卜辭文)도 대전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시기에는 거북, 동물의 뼈등에 새긴 복사문 이외에도 청동기에 새기기도 하였는데 이를 금문(金文) 또는 종정문(鐘鼎文)이라고 부른다. 또한 대전은 주문이라고도 하는데 주나라 때 사주(史주)가 문자의 짜임을 실용적으로 간소화시켰으므로 붙여졌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주대의 석고문(石鼓文)이 있다. 소전은 진시황(B.C. 246-210)이 중원을 통일하였을 때 승상 이사(李斯)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새로운 모양으로 정리한 것이다.
대전이 자연스럽고 질박하다면 소전은 반듯하고 중후한 감을 준다. 소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진시황의 공적을 기록한 태산각석, 낭야대각석, 역산비가 있다. 소전은 모두가 원필이며 자형이 아래위로 길다.

※ 갑골문(甲骨文)

갑골문은 귀갑수골(龜甲獸骨)의 준말이다. 갑골문은 은나라 때에 점을 치기 위한 정복문(貞卜文)과 그 당시 사실을 적은 기사문(記事文0이다. 곧 제사. 전쟁. 사냥. 농사. 질병에 대한 길흉을 판단하기 위한 것으로서 거북의 배 부분의 뼈나 소와 사슴의 어깨뼈에 정인(貞人)이나 제주(祭主)가 의문이나 해답 그리고 점친 후의 징험들을 새겼다. 갑골문은 상형문자에 가까우며, 예리한 공구로 새겨서 직선이 많으며 획의 끝이 뾰족한 것이 그 특징이다. 갑골문은 1899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 금문(金文)

금문은 청동기 시대의 산물로 그 대부분이 종정(種鼎) 곧 종이나 솥 따위에 주각(鑄刻)하였으므로 종정문이라고 부른다. 그릇, 무기, 거울, 도장, 돈 같은 것에서도 발견된다. 동기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은 상(商에서 한(漢)대에까지 이른다. 상대의 것은 그림문자도 많으며, 대개의 금문은 갑골문을 계승하고 진(秦)대의 소전(小篆)에 이어지는 대전(大篆)이다.

※석고문(石鼓文)

대전 자체(字體)의 가장 구체적인 작품이며,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각석으로 북모양으로 다듬은 돌에 세겨져 있다하여 석고문이라 부른다. 돌의 수는 10개이고 표면에 700여자가 실려 있으나, 판독이 가능한 글자 수는 270여자,현재 통용되고 있는 글자 수는 470여자 정도이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동주의 위열왕 4년(기원전 481)에 진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석고문은 4언구로 현재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전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냥을 하는 것과 영토의 개척으로 도읍을 세운 것, 제사에 관한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석고문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자체는 대체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예서(隸書)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뒤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공문서 등이 증가하면서 전서를 간략하게 만든 새로운 서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 만들어 진 것이 예서이다.
예서는 한나라로 그대로 이어지면서, 해서, 행서, 초서 등 여러 서체로 다시 분화 발전하였다.
예서는 1cm정도의 폭을 갖는 죽간(竹簡)에 쓰였던 초기에는 세로로 긴 형태였으나 목판과 비석으로 옮겨
가면서 점차 가로로 충분한 길이를 갖게 되었고, 이때 파책의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파책은 빈
공간을 조형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로써 예서는 나름대로 조형성을 갖게 되었고, 후
대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전서는 대칭을 맞추어야 하고 곡선이기 때문에 쓰기에 불편하다. 그리하여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고 원필
도 방필로 많이 바꾸고, 필획도 줄여서 쉽게 쓰게 한 것이 예서(隸書)이다.
기록에 보면 예서는 장막(程邈)이 만들었다. 그가 죄를 지어 감옥에 있을 때 십 년을 연구하여 예서 삼천자를 지어 진상하였는데 진시황이 좋게 여겨 어사를 시켰다. 예서란 말은 진대의 복역수를 도예(徒隸)라 하였는데 정막이 그러했으므로 예(隸)자를 따서 지었다. 예서에서 파책(波 )이 없는, 곧 전서와 근접한 것을 고예(古隸)라 하고 파책이 있는 것을 팔분(八分)이라 한다. 예서는 전한과 후한에 걸쳐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조전비와 예기비 같은 유려형(流麗型), 장천비 같은 방정형(方整型), 하승비(夏承碑)같은 기고형(奇古型)들로 분리되며, 그 수많은 서적(書蹟)은 이루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예서의 자형은 납작한 것이 보통이다.

※ 예 기 비(禮 器 碑)

예기비가 새겨진 것은 약 1800여 년전 후한의 환제 영수(永壽) 2년의 일이며, 한래비 라고도 부른다.
이비문의 내용은 노나라의 제상이던 한래의 공적을 칭송한 글인데, 그는 공자를 존중해 그 자손 일족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 징병이나 노역을 면해 주는 등, 진심어린 예우를 다했다. 또 그는 진시황제의 폭거 이후 산뚱성 취무에 있던 허물어진 공자묘(이곳은 한이후 역대의 비가 많아 곡장비림(曲章碑林) 이라 불린다.)를 수리하고 제사에 쓰이는 가장 중요한 기구류, 즉 예기를 정비하고 또 공자의 생가를 수복하고, 묘 주변의 배수 사업 등도 했다. 이와 같은 한래의 작업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높은 덕을 기리고자 돌에 새긴 것이 바로 이 예기비이다. 한비는 중후한 것과 연미(硏美)한 것이 있는데 이 비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지키고 있다. 문자의 구성이 알맞고 운필이 정교하여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는 비로서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 수도 많아 예서를 익히는데 적당하다.
그리고 예기비의 선조(線條)에 관하여서는 유(여윔),경(단단함),청(맑음),정(곧음)이 언급되어진다.

해서(楷書)

해서는 문자의 부호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쓴 형태를 말하며, 이런 까닭에 정서(正書)라고도 불린다.
예서가 더 실용적으로 변모하면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와서 해서의 특유한 풍격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볼때 동한 말에 이르러 해서보다는 행초서가 널리 유행하였다. 그러나 행초서가 다시 해서화를 추구하게 되는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기에 만들어진 이른바 북위(北魏)의 해서와 이를 더욱 단아하게 만든 수당(隋唐)시기의 해서가 그것이다. 북위의 해서는 예각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날카로운 획과 비대칭의 조형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수당의 해서는 직각을 사용하여 대칭의 안정된 조형을 추구한다. 수당 초기의 구양순 등이 북위에서 수당으로 옮겨오는 역할을 하였다면, 뒤에 오는 안진경은 대칭의 미학을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종요와 왕희지를 거쳐 초당의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이 북위서를 계승하고 왕희지법을 더하여 방필에
원필을 가미한 완미(完美)에 가까운 체계를 이루었고 그 후 안진경이 출현하여 거의 원필을 이용하여 웅장
한 남성적인 해서를 완성하였다. 해서의 자형은 정방형에 가깝다.

※ 안근례비(顔勤禮碑)

안씨가묘비와 더불어 안진경 해서의 2대 역작 중의 하나이다.
비가 세워진 연도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비문 중에 기재된 사실을 감안해 입비(立碑)는 안진경의 말기의 글씨로 추정되어 진다. 비는 사면각이나 셋째 면은 갈아 없어졌고, 약 1천 6백 여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안근례비는 비의 자획이 온전하며 특히 삼면의 글씨는 원필이며 강,유가 잘 조화되어 있다.
또한, 장봉의 표현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의 해서 중에서 가장 우수한 기교 표현 작품이라 한다.

안진경의 필법은 구양순의 경우와 다른 바 없으나 구법(歐法)보다도 약간 붓을 세우며, 안서(顔書)의 가로
획은 우상향세(右上向勢:손에 쥔 붓을 그대로 댄 후 일단 조금 띄웠다 오른 쪽으로 그음)의 수법을 사용한
다. 구(歐)의 배세(背勢), 안(顔)의 향세(向勢)라고 부르는 이 상대적인 조형수법은 해서 기법의 양극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의 내용은 안진경이 그의 증조부인 안근례의 일대기를 써 놓은 것이다

※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天銘)

이 비는 당태종 6년(632)에 당태종이 수나라의 인수궁을 수리하면서 만든 구성궁에 샘물이 뿜어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여 만든 비이다. 문장은 위징이 쓰고 글씨는 황제의 명에 따라 구양순이 특별히 정성들여 썼다. 구양순의 나이 75세때의 서(書)로 구양순이 왕희지의 필법을 배웠으나, 이미 글씨는 구양순 자신의
자체였다. 그리고 해서의 필법이 극에 달했다고 평가된다.
전각은 양문으로 되어 있고 구성궁예천명의 여섯 글자가 2행에 있고, 본문은 24행으로 되어 있다.

남북서풍을 융합한 수대의 서풍을 전,예서에 바탕을 둔 구성법으로 방향을 바꾸어 장방형의 형태로 씌어져있다. 내핍법(內逼法) 혹은 배세(背勢)에 따르고 있으므로 점,획이 중심에 모여 있으나, 비의 결체는 여유가있고 전절(轉折)과 구부러진 곳의 용필은 아주 훌륭하다.
구성구예천명비는 새 시대 감각을 불어 넣은 것으로 화도사비(化度寺碑)와 더불어 구양순의 대표작이다.
해서를 쓰는데 있어서 정통이라 할 수 있으나, 너무도 정제된 필획의 구성을 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형태만
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기 쉽다.

※ 장맹룡비(張孟龍碑)

육조 시대의 대표적인 해서이다. 서도에서의 힘은 적절한 조화가 따라야 한다. 결구법이 바로 그것인데,
장비액(張碑額)은 그런 것의 본보기라 하겠다.
본문도 점획의 배치에 따라 소박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지적으로 당대(唐代)의 서와 같은 정제미를 나타내고 있다. 경중의 배합, 각도의 변화, 그리고 글자의 흐름에 따라 그것들을 조절하는 의욕적인 필력, 이러한 모든 요소가 큰 비석에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흔적들을 표면에 나타나지 않게 할 것, 여기에 서도의 비결이 있다.

장맹룡비는 북위서 가 유행하던 때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용문(龍門)의 강함과 예리함, 정도소(鄭道昭)의 온화함, 고정비의 완성된 계획성 등이 함축되어 있는 훌륭한 유산으로 여겨진다.
비면은 해서로 26행,한 행에 24자씩 새겨져 있고, 비음은 이 비를 세움에 있어서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의 관위 성명을 연서한 것이 10여단 있다. 이 비의 비액에서 '청송(淸頌:덕을 칭송한다)'으로 표현 되는 바와 같이 송덕비이다. 장맹룡은 당시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지만,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깊이 믿는 유교를 선양하였다. 그 공적 이 컸기 때문에 향당(鄕黨)들이 이에 감탄하여서 장맹룡의 덕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고, 그의 일대기에 관한 것과 칭송이 그 내용이다.

행서(行書)

행서는 초서와 해서의 중간 형태로 아마 해서와 거의 동시에 생겨나서 발전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왕희지
의 난정서(蘭亭書)는 고금에 빛나며 그 후 당의 저수량과 안진경을 거쳐 청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달하
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해서, 행서, 초서가 널리 쓰이면서 당 이후에는 전서와 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청나라 초기와 중기에 비학의 풍토가 일어나면서 다시 문인 묵객의 작품에 전서와
예서가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작품에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 난정서(蘭亭敍)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1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和)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하에 성대하
고 풍아(風雅)로운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각지의 명사들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난정집을 엮었
다. 여기에 왕 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가 된 것이다.
즉석에서 시편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니라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 제일의 행"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홍복사(弘福寺)의 승려 회인(懷仁)이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끝에 집대성한 것이다.{감형 3년(672) 12월 8일 경성법려건립(京城法侶建立)}
집자성교서는 변이나 방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 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奬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을 이루고 있다.
30행에 각 행마다 80 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이 성교서는 당대(塘代)의 모본이기는 하나 왕희지 행서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와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뚤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 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 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의 시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이단본(已斷本) 이라 구분해 부른다.

초서(草書)

한나라 때 예서가 주로 쓰였지만 초서의 기원이라 볼 수 있는 특유한 서체가 대나무나 나무조각에 쓴 편지글 등에서 나타났는데 그것이 곧 장초(章草)이다. 장초는 획이 예서와 비슷하나 글씨의 짜임은 초서에 가깝다. 장초의 장(章)은 사유(史游)가 지은 급취장(急就章)의 서체에서 이름 붙여졌다. 장초는 그 뒤에도 계속 발달하여 왕희지에 이르러 초서의 완전한 체계를 굳히게 되었다.

※ 행초서(行草書)

행서는 문자의 부호를 있는 그대로 갖추고 있으면서 동적인 형태로 만든 서체이다. 초서는 부호를 생략하여 동적인 형태로 만든 것이다. 이 둘은 동적인 흐름을 같이 보여주기 때문에 서로 어울려 많이 쓰이고 있다.
획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형태를 만들어내는 행초서는 쓰는 이의 감정을 있는 그애로 드러내어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수많은 자연스런 형상은 서예를 문자의 기록보다는 회회로 까지 인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런 이유로 행초서는 서예가 뿐만 아니라 화가들도 반드시 익혀야되는 필수과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글 서체

1)고체(古體)
고체는 한글이 처음 반포되었을 때의 옛 서체를 말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처음 만들었을 때 를 둥근 점모양 그대로 쓴 [훈민정음해례본]과 를 짧은 방형으로 바꾸어 쓴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등 두 가지 서체가 있었다. 고체는 방형의 모양으로 썼기 때문에 대칭의 조형성을 갖는 장엄한 성격을 가졌다.
고체는 선조 때까지 이어졌지만 새로운 서체를 예견하는 점진적인 변화도 갖게 되었다.

2) 한글의 판각화(板刻化)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글을 보급시키기 위하여 한글로 된 책들을 많이 만들게 하
였다. 한글이 널리 보급되면서 더욱 많은 책들이 필요해졌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목판본이 만들어지
기 시작하였다. 여러 곳에서 만들어진 목판본의 서체는 단아한 맛을 지니거나 조형적 완성에는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지방마다 또는 판각자 개인의 성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한글의 판각화는 고체가 이미 퇴화한 뒤 나왔으므로 한글의 변화된 여러 서체를 목판의 제작에 잘 어울릴
수 있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필사형태와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재료의 변화에 따른 글씨체의 발굴에 더욱 관심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3) 궁체(宮體)정자
궁체는 대궐의 글씨라는 뜻이다. 궁체를 궁녀들이 쓴 글씨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궁녀들이 많이썼기 때문에 잘못 알려진 것일 뿐 여러 왕과 대신들도 궁체를 썼다.
한글이 만들어진 뒤 왕실에서는 철저히 한글을 지켜왔다. 특히 왕후를 중심으로 이 전통을 지켜왔고, 따라서 한글은 내전을 중심으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발전하였다. 궁체라고 불리는 한글서체는 선조 이후에
나타났으며, 크게 정자와 흘림으로 나뉜다.
정자는 한자의 당해와 흐름을 같이 한다. 이 글씨는 장중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절제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창제 당시의 고체가 모든 글자의 길이를 같은 크기로 구속하였다면 궁체는 그 길이를 글자의 모양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조형적인 자유로움을 얻게 하였다. 이점이 바로 궁체의 조형적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이라고 하겠다.

4) 궁체(宮體)흘림
궁체흘림은 한문의 행서에 비유된다. 선조전후 한글이 널리 보급되면서 한글은 기호의 틀에서 벗어나 새
로운 조형을 찾기 시작하였다. 글자 크기의 구속을 벗어나며 자유로움을 얻은 한글은 붓의 역동적인 흐름
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서체를 요구하였고, 이 요구가 바로 궁체 흘림의 출발이 된다. 흘림은 처음 비교적 자유로운 모양이었으나 점차 정제과정을 거치며 정형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글은 부호가 단순하여 한자의 초서와 같이 생략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생략의 길보다는 도리어 정형화의 길을 선택하여 지금 우리가 쓰는 흘림의 모양으로 정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