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茶 이야기

여민류혜숙 2011. 4. 3. 14:59

 

다도 [茶道, teaism]


요약
찻잎 따기에서 달여 마시기까지 다사(茶事)로써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덕을 쌓는 행위. 

 
 본문

몸의 수련은 차의 효능으로 달성되며, 마음의 수련은 군자와 같고 사악함이 없는 차의 성미를 따름으로써 달성된다.

중국의 다도는 당나라의 육우(陸羽)가 《다경(茶經)》(760)을 짓고, 호주자사(湖州刺史)인 안진경(顔眞卿)이 삼계정(三癸亭)이라는 다정(茶亭)을 지어 육우에게 기증한 773년에 완성되었으며, 이념은 《다경》에 적혀 있는 중용검덕(中庸儉德)이다.

또, 일본의 다도는 선종(禪宗)의 헌다(獻茶) 의식이 발달된 심미적인 종교로서 무로마치[室町]시대(1336~1573)에 사카이[堺]의 무라다 슈코[村田珠光]에 의하여 형성되고, 그의 제자인 센노리큐[千利休]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일본의 다도 정신은 자득[自得]을 바탕으로 하여 깨우침[覺]의 종교차(宗敎茶)를 인연으로 한 현성(現成:?禪)으로 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신라의 화랑에 의하여 다도의 싹이 텄다고 할 수 있는데, 화랑도가 다도를 형성한 편모는 《삼국유사》의 <경덕왕 충담사> 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덕왕(재위 742∼765)이 어느 해 3월 3일, 궁성 서쪽의 귀정문(歸正門) 누(樓)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중을 한 사람 데려올 수 있겠느냐”고 하여 적임자로 불려 온 사람이 기파랑도(耆婆郞徒) 충담승이었다. 경주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차를 달여 공양한 후 벚나무통을 둘러메고 돌아오는 충담을 경덕왕은 반갑게 맞아들여 통을 열어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었다. 왕이 “과인에게도 그 차를 한 사발 나누어 주겠느냐”고 하자 충담은 곧 차를 달여 바쳤는데, 차맛이 특이하고 찻사발 속에서는 독특한 향기가 그윽하게 풍겼다. 또 왕은 “짐이 듣건대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는 뜻이 매우 높다던데, 과연 그러하냐”고 물으니 “그렇습니다”고 한 즉,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는 노래를 지어 달라”고 하여, 충담은 곧 칙명을 받들어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왕은 이것을 높이 평가하여 충담을 왕사(王師)로 봉하려 하였으나, 그는 재배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한다.

이것을 경덕왕의 의도적인 과거(科擧) 장면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흥왕 37년에 창제된 화랑은 관리의 기용을 목적으로 한 제도였다.

 

둘째, 원성왕 4년에 독서삼품(讀書三品)의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전에는 한때 활쏘기로도 관리를 발탁하였다고 하나, 충담이 치른 다도와 노래지어 부르기도 시험과목이 된 본보기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신라의 다도는 화랑의 수행요목인 도의연마(道義鍊磨)와 산수유오(山水遊娛)에 해당되며, 노래지어 부르기는 가락 즐기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도의연마를 위한 다도는 정신수양을 위한 것이고, 산수유오를 위한 다도는 차의 효능에 따른 신체단련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차의 맛과 향기를 감정함으로써 다도(도의연마)의 수련 정도를 측정할 수 있으며, 노래지어 부르기로써 가락 즐기기의 수련 정도를 판정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음력 3월 3일은 조선시대에도 절일제(節日製)의 과거날이었으며,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모자에 어사화(御賜花)를 꽂아 주는 화랑찾기[探花郞]라는 의식이 고려와 조선시대에 있었는데, 이것은 신라 화랑의 유습으로 보인다. 한편, 이것을 신라 다도의 형성으로 보는 것은 충담이 메고 다닌 다구가 담긴 벚나무통이 그 무렵 《다경》에 씌어 있는 당나라의 다구와 다를 뿐만 아니라, 화랑의 산수 유람에 편리하도록 고안된 고유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 차 가는 맷돌 /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 신안선에서 발견된 다도구는 승려를 비롯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의 일본에서는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이 차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보고싶어 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