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논설

마성 2012. 7. 26. 14:33

 

四十九齋와 薦度齋에 대한 私見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가미니여! 저 남녀들은 게을러 정진하지 않고 그러면서 악한 법을 행하며, 열 가지 선하지 않은 업도[十不善業道], 곧 생물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며,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나아가 삿된 견해를 성취했다. 그런데 만일 여러 사람이 합장하고 그들을 향해 칭찬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것을 인연으로 죽어서 좋은 곳에 가서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다.

 

가미니여! 그것은 마치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깊은 못이 있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큰 무거운 돌을 그 물 속에 던져 넣었다. 만일 여러 사람이 와서 저마다 합장하고 그것을 향해 칭찬하고 축원하면서 ‘제발 돌아 떠올라다오.’라고 말하였다. 가미니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무거운 돌이 어찌 여러 사람이 저마다 합장하고 축원한다고 해서 이 인연으로 돌이 물 위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

 

가미니여! 저 남녀들은 정진하여 부지런히 닦고 그러면서 묘한 법을 행하여, 열 가지 선한 업도[十善業道]를 성취하여 살생을 떠나고 살생을 끊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과 사음과 거짓말과 나아가 삿된 견해를 떠나고 삿된 견해를 끊어 바른 견해를 얻었다. 그런데 만일 여러 사람이 저마다 합장하고 그들을 향해 칭찬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것을 인연으로 죽어서 악한 곳으로 가서 지옥에 태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미니여! 이른바 이 열 가지 선한 업도는 깨끗하여 자연히 위로 올라가 반드시 좋은 곳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가미니여! 그것은 마치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못이 있는데, 거기서 어떤 사람이 타락기름병[酥油甁]을 물에 던져 부수면 병조각은 밑으로 가라앉고 타락기름은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다. (『中阿含經』제3권 제7 「가미니경」(T1, pp. 439c-440c)

 

위 내용은 『가미니경』에서 그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한때 부처님께서 나난다(那難陀)국의 장촌나(墻村那) 동산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그때 아사라천(阿私羅天)의 아들 가미니가 이른 아침에 부처님을 찾아뵙고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바라문은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을 섬기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자유롭게 좋은 곳으로 오가면서 천상에 난다고 합니다. 세존께서는 법의 주인이시니, 원컨대 중생으로 하여금 목숨을 마치거든 좋은 곳에 이르게 하거나 천상에 나게 해주십시오.”

 

이러한 가미니 청년의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위에서 인용한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이 가르침은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받는다는 자작자수(自作自受) 혹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만일 그가 선업을 쌓았다면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고, 악업을 지었다면 나쁜 곳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누가 대신해서 천상에 태어나도록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경전에 의하면, 현재 한국의 사찰에서 죽은 자를 위해 실시하고 있는 사십구재(四十九齋)나 천도재(薦度齋) 등은 성립되지 않는다. 천도재는 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행하는 의식이다. 이러한 의례들은 중국에서 도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부 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의례이다. 엄격히 사십구재나 천도재 등은 살아있는 자를 위한 교화의 방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의 업설(業說)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열 가지 악한 업[十惡業]을 지었다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열 가지 선한 업[十善業]을 지었다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 떨어질 자를 극락으로 보내달라고 하는 것은 물 속에 가라앉은 돌이 떠오르라고 밖에서 외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천상에 태어날 자를 지옥으로 보내달라고 하는 것은 물 위에 떠있는 기름을 가라앉으라고 밖에서 외치는 것과 같다. 둘 다 불가능한 일임은 말할 나위 없다.

 

만일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진다면, 불교의 업(業) 이론에 어긋난다. 자신이 지은 업은 반드시 자신이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가미니’라는 청년에게 설했던 것이다.

 

위 글은 필자가 직접 작성하여 팔리문헌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던 글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글을  강선희 지음, 『체험으로 읽는 티벳 사자의 서』, 서울: 불광출판사, 2008) 카페에 올려 카페지기로부터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남의 잔치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간혹 인터넷 상에는 나의 글을 가져가서 마치 자신이 쓴 것처럼 표절한 사람도 있고, 출처와 근거도 밝히지 않고 옮겨 놓은 사람들도 있다. 내 자신이 인터넷 상에 댓글을 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남의 글에 댓글을 달아 시비를 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십구재와 천도재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밝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불교경전에서는 천도재(薦度齋)를 인정하지 않는데, 제사나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사실 이 문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불교의 핵심교리와 관련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나의 개인적인 견해[私見]을 간단히 피력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래의 불교에는 조상에 대한 천도나 죽은 자를 극락에 보내 준다는 의미의 천도재라는 것은 없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조상천도나 제사 등의 풍습은 비불교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후 49재나 천도재 등은 중국에서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인도불교에는 없었던 영가(靈駕) 천도의식(薦度儀式)은 중국에서 중국인들의 필요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 중국에서 제정된 의식이 고스란히 한국에 전해졌다. 또한 이러한 의식들은 중국에서 편찬된 위경(僞經)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오늘날 학문의 발전과 경전성립사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에 따라 정확한 사실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의 승단에는 아직도 비불교적인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요소들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의식들이 사원경제(寺院經濟)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만해 한용운 스님을 비롯하여 근대의 봉암사 결사에서도 이러한 비불교적 요소를 청산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러한 비불교적 행위들이 한국의 불교교단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 몇 해 전 일부의 학자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아직 공론화시키지 못했다. 한국불교의 사원경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대안도 없이 이 문제를 제기할 경우, 한국불교의 몰락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혹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질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정확히 일러준다. 다만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찰경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시킨다.

 

이 주제의 핵심은 “불교에서 ‘영혼(靈魂, soul)’의 존재를 인정하느냐?”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만일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조상의 천도나 49재 등이 성립된다. 그러나 반대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조상의 천도나 49재는 성립되지 않는다. 불교의 핵심교리는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연기법(緣起法) 등이다. 그 중에서 특히 삼법인(三法印)은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밝힌 것이다. 이른바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가 그것이다. 이 교설을 대승에서는 ‘진리의 도장’, 즉 ‘법인(法印)’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 교설에 합당하면 불설(佛說)이고, 이 교설에 위배되면 비불설(非佛說)이라고 판가름하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이 교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아(無我)라는 사실이다. 무아란 어떤 고정 불변하는 자아(自我, ātman)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무아설에 의하면 영원불변하는 자아나 영혼과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이미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붓다의 제자 중에서도 이 무아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정확히 이해했다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불멸 후 불교사는 한마디로 이 무아설에 대한 논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무아설을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부파가 생겨나게 되고, 대승불교흥기 이후에도 무아윤회와 관련하여 아트만(Ātama, 自我)과 유사한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나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 등을 인정함으로써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물론 이들도 불교의 무아설에 어긋나지 않게 자아에도 속하지 않고 물질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존재로서 ‘보특가라’나 ‘아뢰야식’을 들어 윤회의 주체를 설명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보특가라’나 ‘아뢰야식’이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주장하는 우빠니샤드(Upaniṣad, 奧義書)의 전통을 계승한 바라문교화(婆羅門敎化) 되어 버렸다. 오늘날의 힌두교는 이러한 바라문교의 전통을 종교화한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은 아트만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인도의 전통 바라문사상과 다른 점은 아트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무아설을 부정하고 아트만을 받아들임으로써 불교가 별도로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불교에서 무아설을 빼버리면 바라문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현재의 힌두교에서는 석가모니불을 힌두교의 스물네 번째 신(神)으로 받들고 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에도 눈 밝은 선지식들이 이 점을 지적했다. 특히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국사(國師)는 영혼의 영원불멸(永遠不滅)을 주장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현재 한국불교의 의식문 가운데 ‘다비편(茶毘篇)’에 남아 있는 ‘영식독로(靈識獨露)’ 혹은 ‘영광독요 형탈근진 체로진상 불구문자 진성무념 본자원성 단리망연 즉여여불(靈光獨曜 逈脫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眞性無念 本自圓成 但離忘緣 卽如如佛)’ 등은 완전히 힌두교의 사상이다.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다. 한국불교가 이러한 사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일찍이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의 옷을 입은 힌두교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49재나 천도재를 인정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 힌두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49재나 천도재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엄격히 말해서 49재나 천도재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 혹은 산 자와 산 자들과의 원결을 풀고 작별을 고하는 성스러운 종교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중아함경』의 「가미니경」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산 자들이 죽은 자를 위해 축원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선처(善處)나 악처(惡處)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사람이 대신 받을 수 있다면, 자작자수(自作自受) 혹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업설(業說)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그러면 티베트불교에서는 환생(還生)이나 천도재(薦度齋) 등을 인정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마쯔모토 시로(松本史朗) 지음, 이태승 등 옮김,  『티베트 불교철학』(서울: 불교시대사. 2008)에 의하면, 티베트불교의 본질은 밀교가 아니라 ‘공사상(空思想)’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티베트 불교의 특징을 대개 신비주의적인 밀교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온전히 밀교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티베트 불교의 신비주의적인 면이 과도하게 부각된 데는 1960년대 미국의 히피 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끈 <티베트 사자의 서>가 끼친 영향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한 <불교신문> 박부영 기자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은 티베트 불교의 본질은 밀교가 아니라 중관파의 공(空)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8세기 후반에 티베트에 들어가 불교철학의 기초를 닦은 샨타라크쉬타와 카말라쉴라 이래 티베트에서는 나가르주나의 <근본중송>이라는 논서에 의거한 중관파의 공사상이 불교철학의 모든 사상 중에서 최고의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철학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삼은 텍스트는 티베트의 대표적인 불교사상가 총카파다. 총카파 사상을 조명하기 위해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다양한 역사적 전개를 조망하고, 그 위에 총카파의 불교사상을 고찰한다.

 

밀교와 선정의 사상적 기반은 실재론(저자는 이를 ‘여래장사상’이라 부른다)이지만 총카파는 이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다. 공사상은 “일체의 법(法, dharma)은 공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대립하는 것이 유가행파 또는 유식파로, 그들은 중관파가 주장하는 ‘일체법의 공’을 ‘악취공(惡取空; 잘못 이해된 공성)’으로서 배척하고 “인식(식)만이 실재한다”라는 ‘유식사상’을 설했다. 유식사상의 근저에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 여래장 사상은 불성사상(佛性思想)을 말한다. <열반경(涅槃經)>의 “일체중생은 불성을 가진다”라는 설에 근거한다. 이 불성사상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불성을 가진다’는, 불교를 가장 혁명적이며 평등사상의 대표로 각광받는데, 이 책의 저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를 비판하고 있다. 그 둘은 모두 인도의 토착사상인 힌두교가 관여돼 있다고 본다. 먼저 “일체중생은 불성을 가진다”라는 내용 뒤에는 반드시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를 제외한다.”라는 말이 붙어 “일천제라 불리는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다.”라고 하는 차별적인 입장이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일반적인 통념과는 반대로 여래장 사상을 차별(差別)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티베트 불교사가 중요한 의의를 차지하는 것을 불교사가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과의 싸움, 즉 불교와 힌두교와의 싸움의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원시불교가 아트만을 부정하지만 이후 부파에서 이를 인정하며 다시 반야에서 공(空)을 내세우며 다시 아트만을 극복한다. 하지만 이후 전개되는 대승불교는 이 아트만을 받아들이는데 여래장 사상이 대표적이다. 이후 전개과정은 완전한 힌두화인 밀교로 막을 내린다. 저자는 중국불교가 공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장 사상이 아트만 적이라는 점을 알지 못한체 이를 받아들여 오늘날 대승불교권에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따라서 공사상을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서는 티베트 불교철학을 배워야한다고 본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겔룩파(Gelukpa)의 창시자 쫑카파(Tsongkhapa)는 실재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공사상은 초기불교에서 말한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를 공(空, śūnya) 혹은 공성(空性, śūnyat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정통 티베트불교는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티베트불교에서는 종교의식으로서 천도재와 같은 것을 봉행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나의 견해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토속종교인 뵌교가 있었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뵌교와 심한 갈등을 겪었으나 뵌교는 불교 속에 습합되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윤회와 영혼의 존재 등을 인정하는 환생제도는 뵌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티베트불교를 일명 ‘라마교(Lama)’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현재의 달라이 라마(Dalai Lama)를 비롯한 정통 티베트불교에서는 ‘라마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현재 티베트불교 속에는 티베트의 토속종교였던 뵌교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달라이 라마도 이러한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초기불교의 전공자들이 외형적인 티베트불교의 모습을 보고, ‘불교가 아니다’라고 지적하는 것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달라이 라마나 많은 린포체들은 초기불교의 교설을 적극 수용하여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설법 중 절반 이상이 초기 붓다의 가르침이다. 그러면서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불교의 전통을 부정하지 않는다. 비록 불교의례(佛敎儀禮) 속에 비불교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교화될 수 있는 자도 있기 때문에 묵인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많은 린포체들과의 대화를 통해 느낀 점이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나 린포체들은 ‘설법과 의례’ 둘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법회이든 설법 전후에 의례가 장엄하게 집행된다. 설법 전의 의례는 ‘앞풀이’에 해당되고, 설법 후의 의례는 ‘뒤풀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설법에서는 오직 붓다의 바른 가르침만 설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서양의 많은 사람들은 티베트불교의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다. 이러한 티베트불교에 대한 신비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티베트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티베트불교에 입문하게 되면 심오한 불교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친다. 티베트불교의 핵심 수행은 ‘차제법(次第法)’이다. 산티데바(Ṥantideva, 寂天)가 지은 티베트불교의 대표적인 저술인 『입보리행론(入菩堤行論, Bodhicaryāvatāra)』과 까말라쉴라(Kamalaśīla)의 『수습차제(修習次第, Bhāvanākrama)』, 아띠샤(Atīśa)의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 Bodhipathapradīpa)』, 쫑카빠(Tsongkhapa)의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 Byan-chub lam-gyi rimpa, 흔히 람림(Lam-rim)이라 칭함)』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행법에는 그 어떠한 신비적인 요소도 찾아볼 수 없다. 고도로 체계화된 수행법일 뿐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티베트불교의 신비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저술이 바로 『티베트 사자의 서』이다. 그리고 밀라레빠에 대한 전기 등이 외부 세계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티베트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책들은 티베트불교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기여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티베트 사자의 서』와 같은 것은 정통 티베트불교의 측면에서 보면 변방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전혀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러한 책은 바른 수행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책에 너무 매달려도 티베트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티베트의 성자가 왜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지 그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을 놓쳐버리고 지엽적인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은 붓다나 성자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이 책에 담겨져 있는 본래 의미만 정확히 파악하고, 원래 붓다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한마디로 『티베트 사자의 서』는 버려야 할 뗏목과 같은 것이다. 

 

다음은 빙의(憑依)에 대한 나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빙의는 정신병의 일종이다. 현대의 의학에서는 빙의를 정신착란, 혹은 뇌질환으로 보고 있다. 붓다의 무아설을 체득하면 그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잠깐 동안이나마 위빠사나를 수행해 보면 우리의 마음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자기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끊임없이 사라진다. 다시 말해서 오직 마음의 흐름만 있을 뿐, 그 마음의 주인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초기문헌에서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없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본질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곧 무아(無我)의 이치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것이다.

 

범부들이 생각하는 영혼이나 신(神) 혹은 귀신(鬼神) 따위는 자신이 인식한 ‘마음의 흐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을 착각하여 마치 영혼이나 귀신과 접속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자신의 의식의 반영일 뿐이다. 이러한 빙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마음의 실체를 꿰뚫어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스스로 그 실체를 파악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개의 경우는 심지(心地)가 약한 사람들이 그러한 현상에 잘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벗어나기 어렵다. 심령치료사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꿰뚫어 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해서 치유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마치 그 사람이 대단한 초능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원리도 매우 간단하다.

 

빙의에 대한 또 다른 해결 방법은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다. 귀신에 접신되었다고 하는 것도 그 사람의 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사람은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앞으로 뇌과학이 발전하면 그동안 신비로 쌓여있던 많은 부분들이 해명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귀신의 존재나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기 때문에 신비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다. 한 번 신비주의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위빠사나의 수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에 대해 올바로 관찰해 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 현상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금생에 해야 할 일은 정법을 만나 바르게 수행하여 현법(現法)에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다. 그 외의 이야기들은 모두 범부들로 하여금 불교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법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 “정법(正法)도 다 배우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법(邪法)을 배워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길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많은 칼럼과 논문을 쓰는 것도 무엇이 붓다의 본래 가르침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일러주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