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자료실/대승불교

마성 2012. 9. 7. 17:20

간화선의 수행체계로 본 조계종 간화선의 문제점

 

 

성본 스님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선학과

선문화연구원

 

 

이 글은 한일불교유학생교류회 주최로 지난 2012년 5월 19일(토) 템플스테이 통합정보센터 3층 문수실에서 「조계종 종지 · 종통의 근원적 재인식」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2012년도 한일불교유학생교류회 학술연찬회에서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선학과)이 발표한 발제문입니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간화선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지적한 근래에 보기 드문 매우 훌륭한 글입니다. 아직도 간화선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글을 읽고 나면 현재 한국의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 주)  

 

 

1. 불교는 법의 종교이다.

2. 불법의 대의.

3. 불법의 진실과 방편법문.

4. 간화선의 성립과 수행체계.

5. 조계종 간화선의 문제.

   1) 경전과 어록 등 수행교재의 문제.

   2) 간화선 지도자의 문제.

   3) 간화선의 목적은 見性인가?

   4) 조주의 無字 공안 참구의 문제.

   5) 공안 타파의 문제.

   6)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의미 -- 破病과 全提 --

   7) 이뭣고 ? 화두와 무자 화두 참구의 문제점.

   8) 이뭣고 와 한소식의 문제.

   9) 간화선의 의심이란?

   10) 看經, 看話 공부와 참선수행.

   11) 夢中一如의 화두참구 문제.

   12) 생사윤회와 생사해탈의 문제.

   13. 頓悟頓修와 頓悟漸修의 문제.

   14.) 참선수행과 사회성의 문제.

6. 조계종 간화선의 문제점을 재고한다.

 

 

 

 

1. 불교는 법의 종교이다.

 

    불교는 부처나 사람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일체 만물의 생명작용을 如法하고 如實하게 방편법문으로 설법하여 開示한 自然法爾의 종교이다. [법화경]에서 諸法實相의 법문을 설하는 것처럼, 일체 제법의 진실된 생명활동의 주체적인 실상인 眞如法을 깨달은 부처가 중생들에게 설하는 방편법문이다.

    말하자면 불교는 인간이 환경과 요청으로 만든 신 중심의 종교도 아니며, 부처나 조사가 자신이 깨달은 독특한 법이나 자기 사상을 주장하는 종교도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에도 여래가 자신이 깨달은 법을 주장하여 설한 법문이 없다고 한다.

    일체 만법의 진실된 실상을 여법하게 깨달아 일체 만법과 하나가 되어(不二), 부처의 지혜로 보살도를 실행하도록 방편법문을 설한 종교이다. 그래서 삼세의 일체 제불과 보살, 역대의 조사가 시간과 공간, 종파를 초월하여 똑같은 제법실상의 진여법을 깨달아 방편법문으로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法이란 일체의 제법은 각자 자체적인 진여 본성이 시절인연에 따라 생명활동하는 自然法爾의 眞如法을 말한다. 부처나 조사는 진여법을 如法하고 如實하게 깨달아 부처가 되고 여래가 되어 일체 중생들에게 진여법(불법)을 방편법문으로 開示하여 깨달아 체득 하도록 설법한 것이다.

    진여법의 생명활동은 마치 수학 공식과 같이 불변의 법칙에 의거하고 있다. 물이 위에서 밑으로 흐르는 것처럼, 태양과 달, 뜰 앞의 잣나무나 연꽃처럼 일체 제법(만물)이 정확한 법칙성에 의거하여 생명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如法, 如如, 如是, 如來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법을 法數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이다.

    불법의 진실은 진여본성이 시절인연에 따라서 여법하고 여실하게 깨달음의 지혜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여래란 諸法如義라고 설한 것처럼, 시방 삼세의 일체 제불이 모두 똑같은 진여법을 깨달아 불법을 설한 것이다.

 

    [유마경] 법공양품에 약왕보살이 일체의 제법에 如說修行을 설하면서 ' 불법의 뜻(義)에 의거하고, 말(語)에 의거하지 말며, 진여의 지혜(智)에 의거하고 중생의 인식(識)에 의거하지 말며, 了義經에 의거하고 不了義經에 의거하지 말며, 法에 의거하고 사람(人)에 의거하지 말라' 라고 강조하고 있다.

    [열반경] 6권 여래성품에 '依法 不依人, 依義 不依語, 依智 不依識, 依了義經 不依不了義經,' 이라고 설하며, [대지도론] 9권에는 이와 똑같은 법문이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고 할 때 여러 비구들에게 설한 법문이라고 전한다. 이 법문은 [아함경]에서 ‘자신을 등불로 삼고(自燈明), 불법을 등불로 삼아라(法燈明)’ 혹은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自洲) 법을 의지처로 삼아라(法洲)’ 라는 설법을 계승한 말이다.

 

    대승 경전에서 설법하는 법문은 중생들이 제법실상의 眞如法을 깨달아 부처가 되도록 설한 법문이기에 佛法이라고 한다. 진여 본성이 여법하게 지혜작용하는 불법을 설한 종교이다. 불법은 진여법이며, 진여법을 깨달아 여래가 되고 부처의 지혜를 구족하며, 또한 진여법을 설법하여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원력으로 上求菩提 下化衆生, 自利利他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종교이다.

    불법은 중생이 부처가 되는 법을 방편법문으로 설한 것이 경전이며 어록이다. 경전과 어록의 방편 법문을 여법하게 이해하고 여법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정법의 불법공부나 수행은 불가능 하다.

 

    대승불교의 경전에서 설한 불법의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空의 사상. 我空, 法空. 一切皆空.

       ([금강경]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2) 唯心의 실천철학. --- 法空의 실천.

       ([화엄경]의 一切唯心造. 萬法唯心. 萬法唯識.)

 

    3) 無生法忍. 眞空妙有(眞如三昧)의 반야지혜로 최상의 깨달음을 체득함.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금강경의 無法可說. 應無所住 而生其心.)

 

    4) 불법(眞如法)의 대의와 사상체계.

       진여법   空 -- 眞空 (體) -- 無實 -- 定(止) 眞如三昧

                不空 -- 妙有 (用) -- 無虛 -- 慧(觀)

 

    5) 諸法實相의 열반. 自然法爾의 세계. 處染常淨의 정토구현.

       ([반야심경]의 色卽是空, 空卽是色 )

 

    6) 시절인연의 자기 本分事. 諸佛의 本願力과 一大事 인연. 上求菩提 下化衆生.

       [법성게]의 不守自性隨緣成. 祖師西來意와 조주의 庭前栢樹子.

 

 

2. 불법의 대의

 

[육조단경]에 五祖 弘忍대사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내가 항상 그대들에게 중생들의 生死 윤회가 큰일(生死事大)이라고 설법하였는데, 그대들은 매일 공양과 복을 구하는 일만 하고 있다.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는 구법의 수행은 하지 않고 있다. 그대들의 자성이 미혹한데 복을 구한들 무엇 하겠는가? 그대들은 모두 자기 방으로 되돌아가 스스로 불법의 대의를 잘 살펴보도록 하라. 지혜가 있는 사람은 각자 진여본성의 반야 지혜로 하나의 게송을 지어 나에게 제시하도록 하라. 내가 그대들의 게송을 읽어 보고 만약 불법의 大意를 깨달은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불법을 부촉하고, 六代 조사의 법통을 품승하도록 하리라.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 체득하여 생사 윤회를 해탈한 사람은, 독자적인 진여 본성의 지혜작용인 반야의 지혜를 구족한 안목으로 하나의 게송을 짓도록 지시하고 있다. [육조단경]에는 전 대중을 대표하는 신수의 게송에 대하여 행자의 신분인 혜능이 게송을 제시하여 오조 홍인의 인가를 받는 구법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하나의 게송은 [금강경]에서 설하는 四句偈나, 一句, 一轉語와 같은 의미로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 독자적인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반야의 지혜를 시절인연의 본분사로서 활용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육조단경]과 [임제어록] 등 거의 모든 선어록에는 학인들에게 생사윤회를 해탈하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화두로 ‘如何是佛法大意’ 라는 문제를 제시하여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 체득하도록 설하고 있다.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 체득해야 정법의 안목을 구족 할 수가 있고, 중생심의 생사 윤회를 해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正法과 邪法을 구분 할 수 있는 안목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정법을 여법하게 수행 할 수도 없고, 중생의 心病을 진단하여 판단하고 치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육조단경] 19단에는 혜능이 ‘내가 설하는 법문은 頓漸을 모두 건립하며, 無念을 종지로 하고, 無相을 본체로 하며, 無住를 근본으로 한다(頓漸皆立 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라고 설한다. 선불교에서는 불법의 대의를 宗旨라고도 한다.

 

    無念, 無相, 無住는 [금강경]에서 설한 법문을 요약한 남종의 종지로서 번뇌 망념과 자아의식, 의식의 대상 경계가 없는 我空 法空의 경지인 진여 본성으로 지혜로운 삶을 실행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육조단경]의 一行三昧 법문에서도 설하는 것처럼, 번뇌 망념이 없는 無念은 진여 본성이며, [유마경]에서 설한 直心이다. 근원적인 진여 본심으로 언제 어디서나 항상 진여 본성(直心)의 一行三昧로 반야지혜를 실행하는 것이 남종선의 종지이다.

    말하자면 남종선에서 주장하는 불법의 대의나 종지는 無念의 진여 본성과 無相, 無住의 지혜작용으로 정리 할 수가 있다. 번뇌 망념이 없는 무념은 진여 본성이며, 無相과 無住는 [금강경]과 [유마경] 등 반야 경전에서 설하는 반야의 지혜작용을 설한 법문이다. 我空, 法空, 一切皆空의 경지에서 자아 의식과 의식의 대상 경계에 걸림 없는 반야의 지혜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無相, 無住이다.

    이러한 불법의 대의와 남종의 종지는 [금강경]에서 여래가 깨달아 체득한 법은 無實과 無虛라는 반야 사상의 법문을 토대로 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설하는 無實, 無虛는 眞空妙有의 반야 지혜를 이루는 방편 법문이다.

 

 

3. 불법(진여법)의 진실과 방편법문

 

    [대승기신론]에서 眞如 法身은 언어 문자의 방편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경지이기 때문에 이언진여(離言眞如)라고 한다. 不立文字 言語道斷, 心行處滅 등으로 표현하는 진여의 세계는 언어 문자로서는 설명할 수가 없음으로 선에서는 스스로 자각하여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冷暖自知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나 보살의 설법은 언어문자의 방편법문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불법의 진실을 깨달아 체득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의언진여(依言眞如)라고 설명한다.

    즉 불법의 진실은 諸法實相이며, 自然法爾로 진여 본성의 지혜작용이 지금 여기 자기 본분사의 생명활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상태(佛境界)이기 때문에 언어 문자로 설명이 불가능해서 不立文字, 言詮不及, 言語道斷이라고 하고, 중생심으로 사량분별하여 알 수가 없기에 心行處滅, 不可思議 解脫境界라고 한다.

    진여법은 일체의 모든 존재가 불성(진여본성)을 구족하고 있고, 진여 본성은 각기 시절인연에 따라 여법하게 지혜작용(생명활동)을 하고 있다. 이것이 진여의 본체(體)와 작용(用)이고 性相, 理事 등의 언어로 설법한다.

    중국 선불교에서는 불법을 佛道라고 하며, 法의 종교를 道의 종교로 바꾸고, 老莊 사상의 언어을 빌려 無爲, 自然, 幽玄, 微妙, 佛法幽玄, 玄旨, 大意 등으로 표현 하였다.

 

    [법화경]에서 부처가 출현하는 일대사의 인연은 일체중생들에게 불법을 여법하게 開示하여 깨달아 체득하도록 방편법문으로 설법하는 일이라고 설한다. 一大事는 시절인연에 따른(隨緣) 자기 본분사이며, 諸佛의 本願力이다.

[금강경]에도 ‘설법은 진여삼매의 경지에서 반야의 지혜로 설법해야 한다(說法者 無法可說)’ 라고 설하는 것처럼, 眞空妙有의 경지인 眞如三昧에서 진여의 지혜(여래)로 如法하고 如實하게 제법의 진실된 實相을 開示하는 설법이기 때문에 방편법문이 되는 것이다.

    진여의 지혜(여래)로 진여법을 開示한 如是說法이 방편법문이며, 또한 진여의 지혜로 如是我聞하여 언어 문자로 기록한 것이 경전과 어록이다.

 

    (* 참고로 다른 종교의 문헌이나 동서양의 모든 고전은 작가의 의도성과 목적 지향의 주장으로 만든 저술이기 때문에 선과 악, 범부와 성인, 지옥과 천당 등 二元的인 사고에서 탈피 할 수가 없다. 다른 종교의 경전과 고전을 읽으면 당연히 작가의 이원적인 사고와 목적지향적인 의지와 동행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중생심의 사량분별에서 탈피 할 수가 없다. 방편법문은 진여의 지혜로 불법의 진실을 곧바로 깨달아 체득 할 수 있는 不二法門이다.)

    경전과 어록은 부처나 보살, 조사들이 불법의 진실, 즉 진여법을 깨달아 진여삼매의 경지에서 설법한 방편법문을 언어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불법을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은 경전과 어록에서 설한 방편법문에 의거해야 진여삼매로 如法수행, 如實수행을 할 수가 있다. 경전과 어록은 참선 공부, 즉 불법을 깨달아 체득할 수 있는 사유의 도구이며, 여법한 참선수행을 위해서는 언어 문자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출현한 一大事 인연을 밝히고 있는데, 언어 문자의 방편법문으로 불법을 설하여 중생들이 불법의 진실을 깨달아 체득하도록(開示悟入) 하고 있다.

    부처나 보살, 선승들이 불법의 진실을 제시하는 설법으로 언어 문자를 활용하여 방편법문으로 수많은 설법을 하지만, 언어 문자는 실체가 없고(無自性), 임시 방편으로 제시한 의사전달의 도구이기 때문에 이 언어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언어 문자의 자취와 흔적을 떨쳐버리고(空), 불법의 진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因言遺言)이다. 중생심을 부처의 지혜로 전환하게 하는 사유의 도구인 언어 문자라는 방편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참선 수행도 불법의 진실도 깨달아 체득 할 수가 없다.

    참선수행은 경전과 어록에서 설한 방편법문의 언어 문자를 사용하여 불법(眞如法)의 진실된 의미와 사상을 깊이 사유하는 觀法 수행이다. 여법하고 여실하게 참선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도구인 언어 문자를 불법의 진실된 뜻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 사상, 지혜작용의 묘용 등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필자는 여법하고 여실한 참선수행의 기본 요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방편으로 제시한 언어, 문자, 圓相, 숫자, 기호 등은 참선 수행의 사유도구.

 

2. 언어 문자의 도구가 제시하고 있는 불법의 의미, 뜻, 내용, 진실. 사상을 정확하고 여법하게 이해해야 정법 사유의 수행이 가능하다.

불법. 진여법

(경전 어록)

3. 실천 수행 ; 見性成佛 방향과 방법.

방향 ; 중생심을 본래의 진여 본성으로 되돌아 감(歸家. 歸命, 歸依) 불법수행(bhavana) 숲(不安)에서 집(家:安樂)으로. 空. 定. 止

방법 ; 妄念의 自覺 -- 視覺과 聽覺. 自覺聖智 -- 不空. 慧. 觀.

眞如智 上求菩提 - 止惡門 - 殺人刀

不二 下化衆生 - 作善門, - 活人劍

 

4. 일상생활의 종교. 시절인연과 보살도의 실행. 원력행의 회향.

지금 여기 자기 본분사의 일. 원력의 일. 진여삼매. 自然智, 自然業.

 

    제불과 조사들의 설법과 대화(선문답)는 입을 통한 소리(音聲)이며, 설법을 언어 문자로 표기한 기록이 경전이며 어록이다. 부처의 설법은 진여삼매의 경지에서 제법의 실상(진실)을 如法하게 如是설법하기 때문에 法音, 圓音, 妙音, 梵音이라고 한다. 소리를 듣는 것은 귀(耳根)지만, 소리의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고 깨달아 아는 聽覺은 진여 본심이다.

    불교에서 진여 본심을 一心(마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마음이 일체 만법을 깨달아 알고 창조적인 지혜작용을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설법의 소리를 언어로 표기하는 것은 소리의 내용을 방편 언어로 개념 정리하고 명칭과 모양(名相)을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약속된 말로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과 언어를 문자화한 것이 문명이며 문화이다. 언어는 소리(音)의 내용을 자신과 남에게 전달하고 생각하게 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소통하게 하는 도구이다.

언어, 문자가 없으면 2500년 전에 설한 부처의 설법을 들을 수가 없어 불법을 사유를 할 수도 없고, 창조적인 인간 문명과 문화생활을 할 수가 없다.

    진여법신의 法音은 지혜와 자비의 힘이 실려 있으며, 부처의 지혜와 자비의 불가사의한 힘이 보살도 원력의 기운을 싣고 法音으로 중생들에게 전해진다.

 

    경전의 방편법문은 중생들이 불법의 진실을 지식으로 이해하도록 제시한 언어 문자이다.

    불법의 진실을 깨달아 체득 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법문의 언어 문자를 사유의 도구로 할용하지 않고서는 참선 수행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참선수행자는 수많은 대소승 경전과, 삼장의 논서, 선승들의 다양한 어록에서 설한 언어 문자들을 불법의 진실을 깨달아 체득 하는 사유의 도구로 활용할 수가 있어야 한다.

    필자는 참선공부 방법으로 넓고 깊은 T 字型의 사유 방법을 권한다.

    넓게는 대소승 경전과 삼장의 가르침을 설한 법문, 선승들의 어록 등 불법의 진실을 설한 일체의 모든 법문에서 제시한 언어이며, 불법의 가르침은 世間 出世間, 일체의 모든 존재와 중생들을 위한 법문이다. 소승경전과 아비달마 논서, 대승경전(반야, 화엄, 법화, 정토, 유식, 여래장, 열반, 밀교 등)과 수많은 불법사상을 논리적으로 제시한 논서, 선어록 등 실로 다양하다.

    깊게는 이 모든 경전과 어록은 불법의 진실을 설한 방편법문이기 때문에 불법의 大意(玄旨)를 진여삼매(眞如智)로 사유해야지만 如法수행, 如實수행이 된다는 사실이다.

    [유마경] 제자품에 유마거사가 가전연에게 ‘가전연이여! (중생의) 生滅心으로 實相法을 설하지 말라(無以生滅心行 說實相法)’라고 설한 것처럼, 불법의 진실을 중생심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불법의 가르침인 언어와 문자를 의식의 대상 경계인 知識으로 知解(知見解會)로 이해하는 것이다. 진여삼매의 경지에서 방편법문을 참구해야 如法수행, 如實수행이 되며, 實參 實修가 되는 참선수행이 된다.

    불교의 가르침은 일체 중생들에게 설한 법문이기 때문에 실로 다양한 방편법문이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참선수행은 [대승기신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眞如三昧를 통한 진여 본성의 지혜작용(여래)이 되도록 한다. 여래가 되고, 부처가 되는 眞空妙有의 지혜를 구족하게 하는 불보살의 행화는 眞如三昧를 통한 眞如智( 如來)이다.

 

    경전이나 선시에서 사용하는 방편의 언어를 불법사상으로 언어의 개념과 언어가 제시한 내용, 의미 등을 정확히 이해하고 파악해서 번역해야 한다. 방편의 언어를 통해서 정법의 안목으로 설한 경전의 설법과 선승의 불법사상을 올바르게 체득하여 경전과 어록의 방편법문을 읽는 그 순간 불법사상을 체득하여 여래가 되고 부처가 될 수가 있다. 看經 看話의 공부는 경전과 어록을 불법의 사상으로 여법하게 읽고 깨달음을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공부이다.

    靑梅印悟선사도 [靑梅集] 十無益에서 '일심으로 사유하여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지 않으면 경전을 읽는 수행은 이익이 없고, 正法을 확신하여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心不返照 看經無益, 不信正法 苦行無益)' 라고 주의주고 있다. 불법 수행은 정법을 바로 배우고 익히며 수행하여 자기의 지혜로 만드는 공부이다.

    자각의 종교인 선불교의 수행체계는 불법을 체득하고 보살행을 실현하기 위한 원력(信)을 철저히 세우고, 경전과 어록을 읽고 불법수행의 방향과 올바른 실천방법을 익히며(敎), 경전과 어록의 말씀을 좌선수행으로 사유하는 등 구체적인 참선수행(禪)으로 불법의 진실을 자신이 철저하고도 분명하게 확인하여 확신(證)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체험을 통하여 체득한 지혜를 지금 여기 자신의 일상생활을 하는 구체적인 일을 통해서 불법의 지혜와 보살도의 인격으로 실천하는 생활종교인 것이다.

 

4. 간화선의 성립과 수행체계

 

    선불교에서는 당대 선승들이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경전과 경전의 주석서(論書)들을 통해서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여 불교적인 언어를 중국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생활언어로 바꾸고, 중국인들의 풍토에 맞는 종교로 재정립 한 것이 조사선이다.

    인도 불교의 논리적인 사유체계로 이루어진 경전과 논서들의 언어를 중국 불교인들은 지금 여기서 시절인연에 따른 자기 본분사의 삶인 일상생활의 종교로 선불교를 건립한 것이다. 즉 불법의 사상을 스승과 제자간의 대화를 통해서 곧바로 체득하게 하는 방법(直指人心)으로 선문답이 개발되었고, 경전과 어록을 통해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좌선 사유와 공동노동을 통한 보살도의 실천 등이 생활종교로 전개되었다.

    (* 정성본 [간화선의 이론과 실제]에 수록된 조사선의 수행체계를 참조.)

 

    송대의 간화선은 당대 선승들이 방편법문으로 제시하여 대화로 나눈 선문답을 참구하여 불법의 참된 정신을 배우고 익히는 정법 수행의 공부 방법으로 새롭게 주장되었다.

    당대 선승들의 방편법문과 선문답을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는 화두(공안)로 제시하여 참구하도록 설법한 최초의 선승은 송대의 五祖法演 (? ~ 1104)선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주록]에 전하는 유명한 無字화두를 처음 상당법문으로 제시하여 설법하였으며, 그의 제자인 圜悟克勤(1063 ~ 1135)선사는 당대 선승들의 유명한 선문답 100칙의 공안을 제창한 [벽암록]을 편찬하면서 간화선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원오극근선사의 제자인 大慧宗杲(1089 ~ 1163)는 [정법안장] 3권에 661칙의 공안집을 편집하여 간화선 수행의 기본 교재를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송대 간화선은 오조법연과 그의 제자 圜悟克勤(1063 ~ 1135) -- 大慧宗杲(1089 ~ 1163) 등이 당시 수행자들과 사대부들에게 경전과 어록을 진여삼매의 지혜로 읽고 정법의 안목과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구족하게 하는 수행방법을 제시하면서 大成하게 되었다.

    송대의 간화선을 불법사상의 수행체계로 정립한 책은 無門慧開(1183 ~ 1260)선사가 편집한 [無門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오조법연 -- 원오극근 -- 대혜종고 등이 새롭게 제시한 송대 간화선의 수행체계를 [무문관]48칙의 공안집으로 정리하여 수행자들에게 간화선 수행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무문관] 48칙에서는 간화선의 수행체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제1칙은 조주의 無字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 언제 어디서나 수시로 조주의 무자 화두를 제기하여 자각(提撕擧覺)하고 중생심의 번뇌 망념에서 진여 본성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방편이다.

    참고로 [육조단경]에서는 頓悟見性과 見性成佛을 이루는 구체적인 방편으로 識心見性을 주장하며, 조사선에서는 ‘念起卽覺 覺之卽失’ 이라는 방편으로 망념을 자각하여 진여 본성을 깨닫도록 하고 있다.

    즉 見性이란 자아 의식의 중생심을 무자화두라는 방편을 실천함과 동시에 我空, 法空, 一切皆空(眞空)이 되며, 見性成佛, 自覺聖智를 이루도록 한다. 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우고 진여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선정(禪定)의 수행이다.

 

    제2칙 ~ 48칙은 당송 시대 선승들의 선문답을 제시하여 불법의 다양한 방편지를 체득하도록 하고 있다.

    즉 당송시대 선승들의 선문답을 불법의 대의로 如法하고 如實하게 참구하여 반야의 지혜와 정법의 안목으로 다양한 방편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看話禪의 화두(공안)이다.

    즉 당대 선승들의 선문답을 불법의 대의로 깊이 사유하고 참구하여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체득 하도록 한다. 모든 선문답은 진여삼매로 불법의 大意와 玄旨로 참구하도록 하는 화두(공안)이다. 따라서 다양한 화두(선문답 : 公案; 事例; 判例)를 통해서 수많은 方便智를 구족하도록 한다. [벽암록], [전등록], [종용록] 등 많은 선승들의 어록과 공안집은 모두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체득하도록 하는 간화 수행의 화두(공안)이다.

    대혜종고는 [정법안장] 3권을 편집하여 661칙의 공안(判例)을 간화선의 기본 교재로 제시하였다.

고려 혜심이 편집한 [禪門拈頌]에는 1125칙의 공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전등록] 30권에는 부처나 조사의 이름 1701명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1,700 공안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 만개의 선문답(화두)을 전하고 있다.

    간화선은 선정과 지혜라는 전통적인 불법수행의 두 가지 방법을 無字 화두참구와 선문답을 참구하는 看話공부의 방편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승기신론] 수행신심분에서 止觀일체의 수행으로 定慧一致, 止觀雙修를 실천하는 二重구조의 수행체계를 조주의 무자화두를 제시하여 번뇌 망념을 초월하는 선정의 수행과, 많은 선문답과 공안을 불법의 대의로 참구하여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구족하도록 한다.

    화두란 당대 선승들의 선문답으로 왜 당대 선승들의 선문답(화두)을 참구하는 수행(간화선)이 일반화 되었는가? 대체로 논리적인 사고가 빈약한 중국인들은 경전과 논서를 통하여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보다 당대 선승들의 선문답을 참구하여 구체적인 일상 생활에서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체득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호한 것이다.

    당대 선승들의 선문답은 대승경전의 다양한 법문을 체득한 정법의 안목으로 佛祖를 이룬 지혜의 대화이다. 즉 선문답은 중생심의 生死大事를 불법의 대의와 지혜로 해결한 事例이며, 判例(公案)이다.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된 선문답을 공안으로 참구하여 불조의 지혜를 체득하도록 한 것이다.

    선문답을 기록한 어록과 공안집은 사바세계 중생병원의 병상일지와 같다. 다양한 중생들의 번뇌 망념과 心病, 불법수행자의 禪病과 空病 등을 정법의 안목으로 진단하고 처방하고 치료한 기록이다. 중생의 심병을 경험하고 치료한 사람은 그러한 중생의 심병과 선병에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체험자의 지혜를 방편으로 제시하여 수행자 자신도 치료하고, 많은 중생들을 치료 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족하도록 하는 수행방법이다.

    이러한 병상일지를 참조하여 각자 자신의 심병을 진단, 처방, 치료하고 재발하는 부작용을 방지하는 다양한 지혜를 체득하고 활용 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족하는 수행이다. 심병의 환자를 치료한 경험자만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자신있게 환자들을 치료 할 수 있다.

    간화선의 공안(화두) 역시 다양한 중생들의 심병을 진단, 처방, 치료한 정법의 안목을 기록한 방편법문이기 때문에 다양한 병상일지의 사례를 보면서 배우고 익혀 다양한 중생들의 심병과 선병, 공병을 치료 할 수 있는 방편의 지혜와 능력을 구족할 수 있는 수행방법이다.

    경전과 어록의 기록은 부처나 조사가 불법(진여법)을 깨달아 체득한 다양한 체험의 지혜를 방편법문으로 설하여 開示한 것이다.

    경전과 어록의 법문을 불법의 대의로 사유하고 참구하는 참선수행은 제불 조사가 불법(진여법)을 진여삼매로 여법하게 설법한 법문을 여법하고 여실하게 聞法, 聽法하는 일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제불 조사와 자기가 法界一相인 眞如法身의 지혜작용으로 동참하는 일이다. 제불조사와 자기가 진여법계인 불법의 大海에서 不二의 지혜로 자연법이의 생명활동을 동행하는 일이다.

    그래서 [무문과]1칙에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은 조주를 친견하는 일 뿐만아니라 역대의 조사와 손을 맞잡고 동행하며, 정법의 안목을 같이하여 동일한 눈으로 보고, 동일한 귀로서 들을 수 있으니 어찌 경쾌한 일이 아닌가? 라고 설한다.

 

 

5. 조계종 간화선의 문제

 

1) 경전과 어록 등 수행 교재의 문제

 

    경전과 어록에 의거한 불법의 기본 교육이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경전과 어록의 방편법문을 여법하고 여실하게 실행 할 수 있도록 眞如法(佛法)에 의거하여 정확하게 번역해야 한다. 현재 한글로 번역된 거의 모든 경전과 어록은 불법에 의거한 번역이 아니고, 한자를 한글로 바꾼 정도의 번역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과 어록을 읽고 여법하고 여실하게 정법으로 불법을 수행하는 방편법문이 아니라, 중생심의 생사망념에 떨어지는 邪法이나 外道가 되고 만다.

    예를 들어 [금강경]의 '不能見如來' 를 '여래를 볼 수가 없다' 라고 번역 한다면 여래를 대상으로 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불법 수행의 방편법문이 될 수가 없다. 또 [화엄경]의 '信爲道元 功德母' 의 信을 믿음으로, 母를 어머니로 번역하면 邪道가 되고, 外道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승 경전의 방편법문 가운데, 佛, 如來, 正覺, 涅槃, 眞如自性, 佛性, 如來藏, 淨土, 入定, 入不二法門, 見性, 往生, 得道, 得法, 傳法 등의 언어를 실재하는 존재(唯物論)나 대상 경계로 이해하여 번역한다면 邪道가 되고 外道가 된다.

    모든 경전의 처음에 如是我聞이라고 하는 것처럼, 부처가 眞如三昧의 경지에서 진여의 지혜로 설법한 법문을 진여의 지혜를 여법하게 듣고 깨달아 진여의 지혜로 이와 같이 여법하게 전하고 있는 말이다. 如是는 진여의 지혜로 여래와 같은 말이며, 여시아문으로 전한 방편법문을 여법하게 진여의 지혜로 깨달아 부처가 되고 여래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여래의 如是 설법을 중생심으로 듣고, 자기 주관적인 사고로 전달하여 二元的인 분별심과 차별적인 사고가 되도록 전하거나 기록한 말을 경전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경전과 어록을 불법(진여법)의 방편법문으로 여법하고 정확하게 번역해야 정법을 수행할 수 있는 교재가 될 수 있다.

 

2) 간화선 지도자의 문제

 

    [법화경]에서 선지식은 인연을 맺어주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선지식은 중생을 부처나 보살이 되도록 정법의 안목으로 지도하는 人天의 스승이며, 삼계의 대도사이다.

    선지식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자기 본분사의 원력행으로 보살도를 실행하는 지도자이다. 정법의 안목이 없는 사람은 선지식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경전과 어록은 불법의 진실을 깨달아 체득하도록 기록한 방편법문이다. 방편법문을 수행하지 않고서는 불법의 진실을 깨달아 체득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간혹 조계종의 선지식들은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강조하면서 경전과 어록, 언어 문자를 읽지도 말라고 주장한다. 경전이나 어록을 읽는 사람을 학인이나, 지해종사, 강사라고 폄하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법구경]과 [육조단경] 등에 남의 허물과 잘못을 보지 말라고 설하고 있다. 남의 허물이나 과오를 대상 경계로 보는 것은 자신이 중생심의 번뇌 망념에 떨어져 업을 짓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남을 욕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생사에 윤회하는 업장만 만든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폄하하는 것처럼, 자가 당착에 떨어져 자기 본분까지 상실하고, 我慢, 增上慢의 중생으로 살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이 번뇌 망념에 떨어져 생사윤회하고 있는 입장인 사실조차 모르는 무명불각의 중생심으로 마치 불법을 깨달아 체득 한 것처럼, 자기 개인 주장의 간화선을 말하고 있다.

    불법의 대의를 구족한 정법의 안목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중생심의 편견과 차별심으로 邪法을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불법에 의거한 여법하고 여실한 정법의 수행을 실행하지 못한 선지식이 불교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는 것은 통탄 할 일이다.

    경전과 어록에 의거하여 불법공부를 철저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법 사상과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불교 지도자가 없는 것이다. 또한 제불의 본원력과 구도심과 지혜와 자비행을 실행 할 수가 없다. 능력이 없으면 당연히 보살행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의사는 중생의 병을 정확하게 진단, 처방, 치료하여 재발하지 않도록 병을 고쳐주는 전문가이다. 중생들의 心病을 진단하고 처방하고 치료하는 일이 쉬운 일인가? 자기 자신도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구제 할 수가 있겠는가?

 

    송구스럽지만, 조계종 승려들의 현주소를 지적하면, 정법을 설하는 지도자는 드물고, 또 지도자 양성으로 불법 공부나 참선수행을 체계적인 교육과정으로 정립하지도 못하고 있다. 임의대로 주지나 하고, 사회사업이나 하며, 세속적인 가치관에 전도된 불교인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또한 정법의 안목이 없어 불법을 방편법문으로 여법하게 설법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무책임하게 외도가 되고, 사도가 되는 말을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만으로 마음대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적인 인격이나 지혜는 물론 자기 자신도 바로 보지 못하는 아류의 승려로 무위도식하면서 안이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불교 조계종은 소위 말하는 큰스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불법과는 전혀 관계없고, 정법의 안목도 없는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간화선과 참선수행법을 감히 주장하고 있다. 초발심 수행자들을 모두 평생 고칠 수도 없는 禪病의 중환자로 만들고 있다.

    현재 한국 조계종에서 주장하는 간화선은 불법을 깨달아 체득하는 방편법문도 아니며, 송대 대혜종고의 간화선과도 전혀 다른 看話邪禪이며, 선병의 중환자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이나, '이뭣고'라는 화두를 의심하여 참구하라는 것은 간화선과는 전혀 관계없는 한국선승들만이 주장하는 간화사선이다.

    '이뭣고'를 의심하고 참구하여, 한소식을 얻도록 하는 것이 불법 수행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이 공안을 타파하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이룬다는 목적의식과 깨달음을 기대하는 환상의 참선수행에 빠져있다.

    또, 화두를 참구하는 일에 몰입하라는 의미로 夢中一如, 寤寐一如를 주장하고 있는 말이나,

    육체적인 생사해탈을 목적으로 참선 수행하도록 지도 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父母未生以前의 本來面目을 부모로부터 육체의 몸을 받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깨닫도록 지도하는 한국의 간화선은 眞如法의 불교를 외도로 만들고 있다.

    불법의 근본 대의를 모르는 무지 무명 때문에 心法의 생사해탈을 육체로 오해하고, 불성과 영혼을 착각하고 있다. 불법과 사법, 외도법도 구분하지 못하고, 방편의 언어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참선 수행을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이러한 조계종 간화선의 문제점을 불법사상에 의거하여 진단하고 지적하는 것은 禪病의 문제를 여법하게 진단하여 看話邪禪을 치료하고, 또 정법 수행의 방향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는 바램 때문이다.

 

    아함경전의 이야기로 조계종의 간화선을 비유해 보자.

    토끼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망고나무에서 망고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갑자기 듣고, 천지가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아서 놀라서 도망쳐 달려 갔다. 토끼가 놀라서 앞을 향해 막 달려 가니, 사슴이 따라서 달려가고, 다람쥐가 따라가고, 원숭이, 많은 새들도 따라가고, 산중의 모든 짐승들이 우루루 어디론가 무작정 뒤따라서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던 사자가 물었다. 달려가는 짐승들에게 무슨 일로 이렇게 급히 달려가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 모든 짐승들이 한결같이 모른다고 대답하고 그냥 무조건 뒤 따라가고 있다.

    지금 여기 자신이 하는 일을 불법의 대의로 확인하지도 않고, 앞에 가는 사람이 하는 모습만 보고 무작정 흉내 내면서 같이 따라가고 있다. 무조건 따라가는 맹종자인 것이다.

     * 현재 한국에는 간화선 수행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또한 간화선 지도자들이 법문집으로 편찬한 책도 많다. 여기에 제시하는 책은 조계종 간화선의 현주소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두 책을 참고하면서 이 글을 진행한다.

    * 동화사 담선법회 자료집 [참선(간화선)수행 어떻게 할 것인가?] (불기 2548년, 9월)

    *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조계종 수행의 길. 간화선] (2005년 5월)

 

3) 간화선의 목적은 見性인가?

 

    조계종 교육원에서 발행한 [간화선]에서 제시한 간화선의 「화두참구법」은 대승불교의 보살도 사상(근본정신)에서 볼 때나 송대 大慧宗杲나 無門慧開 등이 주장한 간화선과 간화선의 수행구조와 수행방법과는 전혀 다른 看話邪禪이 되는 말이다. 간화선을 주장하며 간행한 거의 모든 책도 이 책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선원에서는 수행자가 선지식에게 견성 할 수 있는 화두를 받아서 참구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한국의 간화선에서만 볼 수 있을 뿐 간화선의 역사에서 이러한 주장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견성할 수 있는 화두란 어떤 것인가? 견성의 참된 의미와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 화두참구의 목적이 見性成佛이라는 사실로 제시한 한국선의 문제점이 여기서도 보인다.

    견성성불을 목적으로 내세운 것은 중생심으로 대상 경계를 제시하여 상대적인 차별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견성과 성불을 위한 참선이 되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기대하는 목적의식에 사로잡히는 선병(待悟禪病)의 수행자가 되고 있다.

    마조가 좌선수행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 조작심(목적의식과 작위성)을 지적한 회양선사의 선문답은 이러한 선병을 극복하게 하기 위한 화두(判例)로서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는 磨塼作鏡과 같은 어리석은 모습이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待悟心이 그대로 迷惑(중생심)이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참구하면 영원히 佛心(見性)을 체득 할 수가 없다.

    [임제록]에도 '한 생각도 佛果를 希求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옛사람도 말했다. 만약 마음으로 業을 지어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구하는 그 마음이 바로 생사망념이 되는 조짐이기 때문이다' 라고 설하고 있다.

 

4) 조주 무자공안의 참구 문제

 

     최근 많은 선승들의 설법집에는 '화두 드는 법' 이라는 제목으로 조주의 무자화두 참구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스님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이 無字에 대하여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없다. 虛無다. 이와 같이 이리 저리 두 갈래로 분별하지 말고, 能所가 끊어지고 상대도 없이 다만 홑으로 “ 어째서 無라고 했는고?” 하고만 생각해라. 조주스님이 無라고 하신 뜻을 바로 보아야 생사해탈을 하는 법이다.

     무자 화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無라는 말을 천착하지 말고, 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조주화상의 「板齒生毛」라는 화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의심을 참구하도록 설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조주의 無字 公案을 “어째서 無라고 했는고?” “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의 의지를 참구하라” 하는데, 이렇게 화두를 의심으로 참구하도록 한다면 대혜종고가 제시하고 있는 간화선의 올바른 실천수행이 된다고 할 수 없다.

    오로지 의심을 참구하는 것은 간화선이 아니다. 또한 “어째서 無라고 했는고?” “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의 의지를 참구하라”고 했는데, 이러한 방법으로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엉터리 간화사선이 된다.

    즉 대혜가 [大慧書] 答富樞密第一書에서 ‘이 無를 체득하려면 有無의 상대적인 의식을 일으켜서 알려고 해도 안 되며, 도리로서 無를 알려고 해서도 안 되며, 의식으로 사량분별해서 의미를 추구해서도 안 된다(不得作有無會, 不得作道理會, 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라고 설한 것처럼, 소위 看話禪病에 떨어지는 수행이 되고 만다.

    이러한 방법으로 조주의 무자화두를 들고 “ 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의 의지를 참구 하라” 는 참선을 한다면 世世生生을 참구한다고 할지라도 조주의 의지는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선문답에서 제시된 조주의 법문은 불법의 대의와 정신을 토대로 한 논리적인 사유를 통해서만이 파악할 수 있다.

무자공안을 참구하는 의미는 조주의 의지를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심의 사량 분별을 텅 비우고 진여 본성을 깨달아 체득하는 見性成佛의 방편으로 활용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많은 선사들의 설법에서 萬法歸一 一歸何處나 庭前栢樹子, 麻三斤, 板齒生毛 등의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러한 공안 역시 조주의 無字 공안처럼 진여 본성을 깨닫도록 참구하는 공안이 아니라, 불법의 대의로 참구하여 방편의 지혜를 체득하고 正法의 眼目을 구족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공안(화두)인 것이다.

    대혜도 [大慧書] 증시랑의 답서와 장제형의 답서에 須彌山, 放下着, 狗子無佛性, 竹篦子, 一口吸盡西江水, 麻三斤, 간시궐, 東山水上行 등과 같은 화두를 불법의 대의로 참구하도록 언급하고 있다. (* 정성본 [간화선의 이론과 실제] 314쪽 이하 참조)

 

     「板齒生毛」라는 공안은 [조주어록] 中卷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학인이 질문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 입니까?’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앞 이빨에 곰팡이가 생겼다(板齒生毛)’

 

     板齒는 앞 이빨이라는 뜻이다. [벽암록] 67칙에도 달마대사를 傅大士와 더불어 「앞 이빨이 없는 노인(沒板齒老漢)」 이라고 하고 있다. [벽암록] 제27칙에 설두는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소림에 오래 앉아 돌아가지 않은 길손이, 웅이산(熊耳山) 한 모퉁이 숲에 고요히 기대어 있는 것을.(君不見, 小林久坐未歸客, 靜依熊耳一叢叢)' 이라고 게송으로 읊고 있는데, 원오극근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눈을 떠도 집착이며, 눈을 감아도 집착이다. 귀신의 소굴에서 살림살이를 하는군! 눈 멀고 귀 먹었으니 누가 이 경계에 이르렀을까? 그대의 앞 이빨이 부러지는 것을 모면하기 어렵다.(不免打折爾版齒)

 

    달마가 중국에 왔을때 대승선법을 시기 질투하는 무리들의 독약을 마신 이야기를 전한다. 그래서 이빨이 모두 빠지고 머리가 벗겨진 것이라고 하여 缺齒道士라고도 하고, [무문관] 41칙에서는 缺齒老胡라고 한다. 혹은 이교도의 박해로 앞 이빨이 부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生毛는 곰팡이라는 의미이다. 즉 너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 이빨에 곰팡이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조주는 달마가 9년동안 面壁하면서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좌선수행하고 있는 모습을 板齒生毛 라고 평하고 있다.

    [虛堂錄] 제2권에는 묵묵히 앉아서 좌선하는 모습을 ‘입가에 곰팡이가 생겼다(口邊生白醭)’라고 표현한다. 입가에 흰 곰팡이가 생길 정도로 말을 하지 않고 좌선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같이 板齒生毛는 ‘입을 열수가 없다’ ,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의미로서 침묵의 입장, 깨달음의 경지인 不立文字의 세계를 말한다.

    선문답은 사람과 사람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경지에서 일상생활이 지혜로운 선의 생활이 되도록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경지를 나누고 확인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반드시 선문답의 대화를 불법의 대의로 정확하게 이해해야 선승들의 선사상과 깨달음의 경지를 파악 할 수가 있는 정법의 안목이 생긴다. 선문답을 통해서 자신이 불법의 대의와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며, 이러한 공안공부를 看話, 또는 看話禪이라고 한다.

    조주의 무자 화두 이외의 모든 화두(공안)는 사유하여 불법의 대의를 참구하고 지혜를 체득하도록 하는 공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공안을 그냥 앉아서 무자화두를 참구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선지식의 지도 방법은 간화선을 看話邪禪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스님은 조주 무자 공안을 다음과 같이 참구하도록 하고 있다.

 

    어떤 학인이 조주종심(趙州從諗 : 778~897)스님께 물었다.

    “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 없느니라(無).”

 

    그리고, 운문의 마른 똥막대기(乾屎橛)공안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답은 보통 대답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고나 논리를 거부하는 말로서 일상적인 격을 벗어난 절대적인 대답으로 격외어(格外語)라고 한다. 상근기는 이 말을 듣자 마자 바로 깨칠 수 있다. 화두는 대단한 법문이라 삼세제불의 안목이 드러나고 천하 선지식의 견처를 나타낸 법문중의 법문이다. 이 법문을 깨치면 바로 부처의 경지이다.

    그러나 깨치지 못하니 부득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무(無) 라고 했을까? 어째서 건시궐(乾屎橛)이라 했을까?” 하고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의정을 일으키는 이유는 깨치기 위해서다.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 그 의심이 간절하게 하고 순숙하게 하여 마음속에 가득하여 나와 화두와 세계가 온통 의심덩어리가 되게하여 궁극에는 그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게 하기 위해서다.

 

    운문의 乾屎橛은 조주의 무자화두와 같이 번뇌 망념을 초월하여 참구하는 화두가 아니라 사유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화두라는 사실을 󰡔무문관󰡕에서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왜 無라고 했을까? 어째서 乾屎橛이라 했을까?’라는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 뭣꼬?’,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인가?’라고 의심을 지어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심, 의정은 불법의 지혜를 활용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求道적인 문제인데, 억지로 의심과 의정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나 지어간다고 하는 것도 조작이요, 작위성(분별심 :중생심)에 떨어진 것이다.

    중생심으로 의심을 지어서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은 올바른 간화선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왜 無라고 했을까?’ 라고 의정을 일으켜 간화선을 참구하라고 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의 수행 의미를 완전히 잘 못 알고 있다. 또한 대혜의 [서장] 등 看話禪에서 주의하고 있는 것처럼, ‘ 의식이나 意旨로 참구하지 말라(不得向意根下卜度思量)’ 는 주의도 무시하고, 그러한 禪病을 만드는 수행자가 되도록 가르치고 있다.

 

 5) 공안타파의 문제

 

    공안을 참구하여 의심을 타파하면 부처를 이룬다고 하는 허망한 사고는 한국 간화선의 큰 병폐중에 병폐이다. 공안 타파로 부처를 이루는 목적 달성이나 환상, 헛된 공상으로 삿된 간화선의 수행자가 되도록 하고 있다.

    과연 공안 타파란 어떠한 것인가? 간화선의 역사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하여 공안타파로 부처가 된 사람이 있는가? 부처란 어떤 존재인가? 부처란 무엇인가? 어떻게 부처를 목적으로 두고 부처를 대상화 하여 공안 참구와 연결하여 주장하고 있는가?

    아마 見性成佛이라는 말을 자기 생각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리라. 불성은 번뇌 망념을 초월한 불심을 말하며, 見性成佛은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고 「無!」를 참구하여 「無!」라는 마음의 소리를 또렷하게 듣는 聽覺(自覺)이며, 자신의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 불심의 지혜작용이 중생심을 초월한 見性成佛인 것이다.

    [수능엄경]에서 설한 耳根圓通을 이루는 反聞聞自性과 같이 眞如三昧를 이루도록 하는 방편이 무자화두이다. [대승기신론]의 眞如自體相熏習에서 境界之性이라고 하는 것은 진여가 진여의 지혜로 無 라는 소리의 법음(法音)을 듣는 자각의 지혜로 진여삼매를 이루는 수행방법이다.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방편법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아 의식의 중생심과 생사윤회를 해탈하여 진여 본성을 자각하도록 하는 방편인 것이다.

 

    간화선에서 조주의 무자화두를 의심하며 참구하는 것이 아니다. 방편법문으로 제시한 선문답의 공안을 의심하는 것은 단순한 중생심의 분별심과 미혹의 의심이 아니다. 불법의 대의로 참구하여 확신을 체득하기위한 자신에게 던지는 구법문제인 것이다.

    불법의 대의로 선승들의 선문답을 참구하는 自問 自答이 의심이며, 불법의 대의에 의거하여 진여삼매의 지혜로 다양한 선문답의 공안을 自問 自答으로 참구하여 불법의 현지를 깨달아 확신을 갖도록 하는 문제제기의 의심이다. 의심의 문제가 해소될 때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이 구족되는 것이다.

 

6) 조주의 無字화두를 참구하는 의미. -- 全提와 破病 --

 

    조주의 無字 화두는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 언제 어디서나 無字 화두를 제시하고, 진여 본성을 자각(提撕擧覺)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중생심의 번뇌 망념으로 죽어 있는 각자의 본래면목을 지혜작용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번뇌 망념을 초월하여 견성성불을 이루는 수행 방편이다.

    오조법연과 원오극근이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으로 小艶의 詩 두 구절을 제시하고 있다. 즉 양귀비가 자주 시녀 소옥이를 부르지만, 원래 시녀 소옥이에게 시킬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시녀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단지 담장 밖에 있는 낭군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자신이 ‘無’라고 제시한 소리를 진여 자성이 듣고 자각하도록 하는 방편의 언어 문자이다. 진여 본성이 무자의 소리를 듣고 자각함으로 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초월하게 함과 동시에 진여 본성(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이 완전히 작용 하는, 즉 見性成佛이 되도록 제시한 방편이다.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방편의 의미는 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모두 함께 차단하는 破病의 작용과 진여본성(본래면목)이 온전하게 지혜작용 하는 全提(全分提起)이다. 즉 殺人刀와 活人劍을 함께 실행하는 방편이다.

 

    破病이란 무자 화두를 참구함과 동시에 번뇌 망념의 生死心, 차별, 분별심, 迷惑으로 생사윤회 하는 중생심을 일시에 차단하는 破病이 된다. 즉 無明 不覺의 중생심으로 생사에 윤회하고 있을 때, 수시로 조주의 무자 화두를 제시하고 ‘無!’라는 자신의 소리를 진여본성이 또렷하게 듣고 자각(擧覺)하도록 하는 것이다. 망념을 자각하는 본래면목의 지혜작용으로 일체의 사량 분별, 번뇌 妄念과 중생의 心病, 禪病을 일시에 타파하게 된다.

    그래서 조주의 ‘無’자를 無明, 無知, 無記와 知解를 쳐부수는 지혜의 칼이며 몽둥이(지팡이)라고 하는 것이다.

 

    全提(全分提起)란 無! 라고 제시(提撕)하고, 無 라는 소리를 듣고 자각(擧覺)하는 방편의 수행은 중생심의 번뇌 망념으로 죽어 있는 각자의 진여본성의 본래면목을 지혜작용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조주의 무자화두를 본래면목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기와조각(敲門瓦子)이라고 한다. [법화경]의 窮子의 비유처럼, 중생심의 번뇌 망념으로 객지에서 거지행각 하다가 진여본성의 집으로 되돌아가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을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혜의 간화선에서 歸家穩坐는 安身立命이다.

    깨달음(覺)이란 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불법의 대의로 자각하는 것이며, 자각의 경지는 진여자성의 지혜작용으로 定慧가 圓明한 法身의 智慧光明이 되는 것이다.

    조주의 無字 화두를 ‘無!’라는 一音으로 제시하여 법신의 法音을 듣고 자각(聽覺)하게 하는 수행이다. 간화선의 대성자인 대혜종고는 [大慧普說] 제4권 등에서 '始覺이 本覺에 합치는 이것이 부처라고 한다' 라고 하면서 간화선은 시각문적인 수행이라고 [대승기신론]의 논리적인 수행구조를 빌려서 설명하고 있다. 즉 始覺은 無字 화두라는 방편을 제시하는 것이며, ‘無’라고 하는 진여 본성의 소리(法音)를 듣고 자각하는 깨달음이 始覺이 本覺에 합치되는 것이며, 진여 본성의 지혜작용이다. 無字는 시각의 방편이며, 그 소리를 듣고 자각하는 것이 진여 본성의 지혜작용인 眞實된 깨달음이다.

(* 정성본 [간화선의 이론과 실제] 197쪽 참조)

 

    이러한 조주의 무자 화두를 '없느니라' 라고 번역하고, ‘있다(有), 없다(無)’라는 차별적인 말로 제시하여 참구하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차별과 분별에 떨어진 중생심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7) 이뭣고? 화두와 無字 화두 참구의 문제점

 

   한국불교에서 ‘이뭣고?’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 간화선에서 주장하는 이뭣고? 와 조주의 無字화두 참구의 문제점을 정리해 보자.

    간화선 수행의 역사에서 ‘이뭣고?’라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는 곳은 유일하게 한국 뿐이며, 또한 근대(일제침략 이후)에 처음 주장하고 있는 화두라는 점이다. 선불교의 역사상 중국, 일본 등에서 ‘이뭣고?’라는 화두를 참구하여 간화선을 수행한 사례가 없다.

    ‘이뭣고?’를 是甚麽 라고도 표기하고 있는데, [오등회원] 제3권 백장회해장에 다음과 같은 일단이 보인다. 백장선사가 어느 날 설법을 마치고 대중이 모두 법당에서 내려가자, 백장선사는 대중을 불렀다. 대중이 모두 고개를 돌리자, 백장선사는 ‘이것이 무엇인고(是甚麽)?’라고 말했다.

    불법은 말로서만 설법이 끝나지 않는다. 지금 여기 자기가 생명활동하며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실 그 자체인 것이다. 멍청하게 설법을 듣고 그것으로 불법을 납득했다고 생각한 대중들을 다시 불러서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는 그대들 각자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진여자성의 지혜작용으로 전개하는 본래면목을 깨달아 체득하라는 친절한 설법이다.

    [조주록]에도 ‘이것은 무슨 말인가(是什麽語話)’ 라는 말처럼, 선어록에 ‘是甚麽’ ‘是什麽’ 라는 말은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의 하는 말이나 지혜로운 삶을 전개하는 자각의 주체를 철저히 자각하라는 경고의 법문이지 단순한 의심을 참구하는 말은 아니다.

    선불교에서는 육조혜능이 본래면목을 ‘一物’이라고 하고, ‘本來無一物’이라고도 하며,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什麽物 恁麽來)?’라고 표현하고 있다.

     [선가귀감]에는 본래면목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여기 한 물건(一物)이 있으니 본래부터 지금까지 지혜작용이 분명하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번뇌 망념이 生한 적도 없고, 번뇌 망념이 滅한 적도 없다. 이에 대하여 이름을 갖다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려 볼 수도 없다.

    이 한 물건은 어떤 물건인가? ( 一圓相 )

    옛 사람이 게송으로 읊었다.

 

    古佛未生前 고불이 출현하기 전,

    凝然一圓相, 응연한 일원상이네.

    釋迦猶未會 석가도 대상으로 이해하지 않았는데,

    迦葉豈能傳 가섭에게 어떻게 전할 수가 있는가?

 

    이 게송에서 古佛未生前은 원래 父母未生前이라고 해야 한다. 古佛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古佛 이전이란 맞지 않는 말이다. 즉 진여법신의 지혜작용은 부모라는 상대적인 차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이다. 진여는 法界一相이기에 진여 본성의 지혜작용을 시방 삼세 일체 법계에 두루 하는 一圓相으로 표시하였다.

    석가도 진여 본성의 지혜작용으로 자기 분분사의 일을 하였기 때문에 의식의 대상 경계로 불법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未會는 不會, 不識과 같은 의미이다. 가섭에게 어찌 전 할 수 있는 법이 있을 수가 있는가? 불법은 진여법이며, 각자가 깨달아 체득하지 않으면 안되는 법을 어떻게 전할 수가 있고, 얻을 수가 있는가? 傳法과 得法이란 있을 수가 없다.

    * 이 게송은 원래 [종용록]77칙 仰山圓相의 본칙 평창에 '慈覺 勸孝文 首篇 頌云, 父母未生前, 凝然一圓相,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이라고 전한다. 송대 慈覺宗賾(1040 ~ 1109)는 [선원청규]를 지은 선승으로 최근 그의 어록도 발견되었으나 勸孝文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이 勸孝文의 首篇에 읊은 게송이 [종용록] 77칙에 인용되어 전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慧諶(1178 ~ 1234)의 제자인 覺雲이 [선문염송설화]제2권, (49칙, 不見)에 '又有 古佛未生前, 云云' 이라고 인용하면서, 父母未生前을 古佛未生前으로 바뀌고 있다. 涵虛得通(1376 ~ 1433)의 [금강경 오가해] 冶父序 圓相의 說誼에도 각운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西山休靜(1520 ~ 1604)이 [선가구감]에 인용한 자료도 각운과 함허의 자료에 의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 한국의 고승인 만공선사 법어집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보인다.

 

     我不離汝, 나는 그대(진여법신)를 여의지 않고,

     汝不離我. 그대 또한 나를 여의지 않았네.

     汝我未生前, 그대와 나라는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에,

     未審 是甚麽. 알 수 없어라. 이것이 무엇인가?

 

    게송의 마지막에 하나의 원상을 그려 놓고 있다. 나와 그대는 자기와 자신의 주인공을 말한다. 나와 그대라는 차별심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 主客이라는 상대적인 차별심이 일어나기 以前, 父母未生前, 天地未分前, 渾沌未分前의 본래면목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是甚麽는 단순한 참된 자아의 본래면목을 자각하고 성찰하도록 제시한 것이다. 본래면목이나 주인공, 불성, 진여자성 등 다양하게 표현하는 방편의 언어는 참된 자아의 주체인 진여본성의 지혜작용인 본래면목를 깨달아 자각하도록 지시한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인간은 이러한 문제를 항상 사유하며 불법의 대의로 망념을 자각하여 본래면목을 회복하고 지금 여기 자기 본분사의 일에서 向上一路의 창조적인 삶을 창조하고 건립하는 보살도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체적인 자아의 존재근거와 향상일로의 창조적인 사유의 문제를 단순히 앉아서 ‘이뭣고?’라고 참구한다고 무슨 해결이 나겠는가? 평생 귀중한 인생의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8) 이뭣고? 와 한소식의 문제

 

    ‘이뭣고?’ 라는 공안을 참구하여 한 소식 얻으려고 수행하는 사람이 많다.

    도대체 한소식이란 무슨 소식인가? 어떤 소식인가? 어디서 나는 소식인가? 누가 어디서 얻어야 하는 소식인가? 부처나 여래, 조사에게서 나오는 소식인가?

    의식의 대상 경계에서 추구하면 主客 自他의 대립과 차별에 떨어지며 중생심으로 전락되어 생사윤회하게 된다.

    한소식이 깨달음인가? 한소식이나 깨달음이 이뭣고? 를 참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일까?

    그러한 역대조사와 선지식이 있었는가? 한소식을 얻었다고 하지만, 얻을 것이 있다면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하는 외도가 되며, 대상 경계에 집착하는 중생이 된다.

    [반야심경]에 (깨달음의 경지인 공의 세계는) 지혜라는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왜냐하면 본래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라는 말씀을 음미해 봐야 한다. [반야경]을 비롯하여 많은 대승 경전에서 설하는 無所求, 無所有, 無所得, 無住, 無相, 無法, 無生 등의 방편법문은 일체개공의 경지인 진여법신을 깨달아 체득하는 것이다.

    한소식이라는 환상적인 깨달음을 추구하고 기대하는 것을 간화선에서 待悟禪病으로 지적하고 있다. 참선수행자가 불법의 대의를 모르고 참구하는 禪病은 중생의 心病으로 고치기 어려운 난치병이라고 [임제록]에서는 ‘고황의 병은 의사도 치료 할 수가 없다(膏肓之病 不堪醫)’라고 하고 있다. 心病이 난치병이라는 말을 [조주록]과 [임제록] 등 선의 어록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한국선원에서는 선지식이 ‘이뭣고?’라는 화두를 수행자나 사람들에게 공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뭣고?’라는 화두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주장되어 한국 선원의 수행자들이 많이 참구하는 화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간화선의 수행에서 볼 때 ‘이뭣고?’화두는 올바른 간화선 수행을 할 수 있는 방편의 공안(화두)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뭣고? 라고 단순하게 의심하는 것이 방편의 공안(화두)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간화선의 올바른 수행구조와 실천정신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간화선의 수행구조는 ‘始覺이 本覺에 합치도록 한다’라는 대혜종고의 주장처럼, 번뇌 망념의 중생심(不覺)에서 방편으로 제시한 조주의 無字공안을 참구하여(始覺) 본래의 진여 본성이 無라는 진여 본성의 법음(소리)을 자각하여 본각(本覺)을 이루도록 하는 수행구조이다. 간화선에서 제시하는 무자화두는 시각에서 본래의 본각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방편인 것이다.

    대혜의 간화선에서 주장하는 歸家穩坐는 歸依, 歸命 등과 같은 의미로 본래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불교의 수행(bhavana) 구조이다. [화엄경]에서 설하는 初發心時 便成正覺과 같이 초발심이 곧 정각이기 때문에 본래의 초발심이 구경의 깨달음이 되는 內向性이며, 還元性의 종교이다.

 

9) 간화선의 의심 

 

    간화선에서 말하는 의심은 방편으로 제시한 방편법문을 불법의 대의와 제법의 진실을 깨달아 체득하지 못한 수행자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구도적인 문제이다.

    불법을 대의를 깨달아 체득하여 부처나 여래의 지혜를 구족하고, 시절인연에 따라서 보살도의 삶을 실행하고자 하는 구도적인 문제의식 없는 참선수행에 몰입 할 수가 없다. 경전과 어록의 방편법문을 여법하고 여실하게 참구하는 참선수행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본원력을 실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구법정신이 의심인 것이다.

    경전과 어록에서 제시한 방편법문은 불법의 대의에 의거하여 진여삼매로 참구해야 如法수행이며, 如實수행이 된다. 如法과 如實은 진여삼매로서 참구하는 實參, 實究이다. 대승불교의 모든 수행은 眞空妙有의 지혜작용에서 참구하는 진여삼매가 되어야 한다.

 

    불법의 대의와 진여삼매를 실천하는 방편의 수행을 하지 않고 중생심으로 이뭣고나 조주 무자를 의심하는 것은 간화선의 올바른 수행이 안된다. 그냥 단순하게 이뭣고? 라는 의심을 일으키고, 의심을 지어 가면 중생심으로 의심속에 빠져서 사량분별하게 되고, 번뇌 망상에서 생사에 윤회하게 될 뿐이다.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 체득하는 진여삼매의 지혜작용도 없는 중생심의 사량분별인 의심을 어떻게 불법의 수행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또한 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차단하는 방편도, 진여 본성의 집으로 되돌아 가는 방편의 지혜작용도 없고, 본래면목을 깨달아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도를 실행하는 安身立命의 선의 생활도 될 수가 없다.

    원오극근선사가 조주의 無字 화두를 남의 집 대문 두드리는 기와조각(敲門瓦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자를 제시(提撕)하는 것은 중생심의 번뇌 망념의 길에서 진여 본성의 집의 대문을 두드리는 기와조각이며, ‘無’라는 소리의 법음(法音)을 듣고 자각하는 것은 진여본성의 집에 歸家하여 安身立命의 삶인 것이다.

 

    기와조각은 무자 화두와 같이 진여본성의 대문을 두드리는 始覺의 방편이며, 기와조각으로 진여 본성의 대문을 두드리는 그 방편의 소리를 듣고 자각하는 것이 시각이 본각에 합쳐지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一念相應이라고 하며, 남종선에서는 頓悟見性이라고 한다.

    ‘無’라고 하는 각자의 본심의 법음(소리)은 대문을 두드리는 기와조각과 같은 방편(小玉!)인 것이며, 無 라는 각자 진여본심의 소리를 또렷하게 자각(認得聲)하여 본성을 깨닫는 불성의 지혜작용이 見性成佛이다. 진여본성의 집에서 安身立命의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의 無字 화두를 참구하는 일은 진여 본심의 본래면목을 깨닫는 일과 동시에 일체의 知見解會(알음알이)와, 分別心과 차별심, 疑心, 중생의 번뇌 망념을 끊는 지혜의 칼이라고 말한다.

    선지식은 수행자의 선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올바른 처방을 내려서 치료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즉 선수행의 올바른 방향과 방법을 분명히 제시하고 점검하여 정법의 안목을 체득할 수 있는 지도교육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도 무책임하게 불법수행과는 전혀 관계없이 ‘이뭣고?’라는 화두를 누구에게나 주면서 ‘어떻게 참구하는지?, 왜 이 공안을 참구해야 하는지?’ 공안을 참구하는 의미나 방법을 구체적으로 여법하게 지도하는 선지식은 없다.

 

10) 看經과 看話의 공부와 참선수행

 

    조계종의 전국 강원에서 실행하는 불법교육의 기본 교재는 초발심자경문, 치문, 서장, 도서, 절요, 선요, 대승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화엄경 등으로 되어 있다. 물로 기타의 교재와 교과목이 추가로 제정되었지만, 경전과 논서 선문헌의 교재는 이상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교재 편성과 불법교육이 대승불교 전체사상과 역사성에 의거한 체계있는 교육이 될 수가 있을까? 대승불교를 이해하는 기본 경전이 반야경, 법화경, 유마경, 정토삼부경 등이며, 유식사상과 여래장 사상을 종합한 능가경과 불성사상으로 대승불교를 종합한 열반경도 강원교재에는 없다.

    또한 불교 교육은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과 함께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다시 중국불교로, 선불교로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서 발전하게 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강원의 교재 편성은 제일 먼저 초발심자경문, 서장 등 선불교 문헌에서 출발하여, 논서, 대승 경전 순으로 배치되고 있다. 이러한 교재 편성과 교육은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과 완전히 반대로 시대적인 역행의 교육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토막 상식이나 지식을 익히는 공부도 아니고, 의식의 질서를 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교재 편성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육은 역사이다. 불교의 역사와 사상사를 통해서 의식의 질서를 확립하도록 해야 역사적으로 발전되는 지혜를 실행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도 모두 이러한 인간의 역사, 불교의 역사적인 토대위에서 역사를 창조하며 살고 있다. 

 

    한국의 제방선원에서 선지식이 수행자들에게 불법의 대의나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게 하는 간경과 간화의 참선수행을 어떻게 지도하고 있는가?

    화두참구나 간화공부는 어떠한 방편으로 제시하고 지도하고 있는가?

    [벽암록]이나 [무문관], [임제록] 등 당대 선승들의 유명한 어록이나 선문답을 提唱(강의)하여 정법의 안목과 다양한 방편지혜를 구족하도록 하는 참선 교육은 실행되고 있는가?

    대승불교 경전과 논서는 물론, 대혜가 간화선의 교재로 제시한 [정법안장] 661칙과 [선문염송], [전등록] [조당집] [무문관] 등, 많은 선승들의 어록을 간화수행을 통해서 불법의 대의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는 참선교육이 진정한 간화선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 수행신심분에 불법수행은 止觀雙修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고, [육조단경]에서도 定慧一致를 강조하고 있다. 좌선의 선정은 지혜를 체득하는 불법수행이 진여삼매로 실행되어야 한다.

    간화선에서도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여 진여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선정의 수행과 불법의 대의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는 많은 선승들의 공안 공부를 병행하여 참선수행을 하도록 지도하지 않으면 안목없는 수행자가 되고 만다.

    불법의 지혜를 자유롭게 활용 할 수 있는 능력과 정법의 안목이 없는 수행자는 지혜와 인격을 구족하지 못하고 시절인연에 따라서 부처의 지혜와 자비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도를 실행 할 수가 없는 것이다.

 

11) 動靜一如와 夢中一如의 문제

 

    간화선을 강조하는 어떤 스님의 말이다.

 

    화두는 깨칠때 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화두에 진의(眞疑)가 나서 분명하고 힘차게 들려서 動靜에도 한결같이 들리고 꿈속에서도 변함없이 들리고, 깊은 잠에서도 여여하게 들려서 깨칠때 까지 한 순간도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화두가 惺惺하고 적적하게 들리면 몸은 가볍고 편안하며 거뜬해지며, 지혜가 생긴다. 이전에 이해가 안 되던 경전이 이해가 되고 어록을 보니 몇 구절 내려가니, 어떤 사람은 ‘나는 깨쳤다. 나는 다 해 마쳤다.’하며 아는 소리를 하고, 어디를 가면 법문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 근질하기도 하고, 일을 마친 도인이 되었다고 하며 周遊天下 하는 사람도 있다.

    화두가 夢中一如의 경계가 지나면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안목이 트이고 힘이 난다. 아무리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는 느낌이 있더라도 절대 즐기거나 집착하지 말고, 그럴 수록 더 열심히 하고 애써야 한다.

 

    화두참구로 깨치면 지혜와 신통묘용이 생기고 경전도 이해되고 어록도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고 하고 있다. 과연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을까? 이러한 경지를 발휘한 인물이 있는가? 간화선의 수행을 신통과 신비화하고 있다. 불법 수행은 경전과 어록을 읽고, 지식을 지혜로 전환하게 하는 轉識得智의 공부를 해야 한다.

    조사선과 간화선에서 좌선 사유는 경전과 어록, 그리고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공부이며, 화두 하나 하나를 철저하게 사유하고 참구하여 불법의 지혜를 체득해야 한다. 一事 一智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動靜一如나 夢中一如(夢覺一如라고 해야 맞다)에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動靜一如, 寤寐一如, 夢覺一如, 動靜無間 은 화두참구를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불교에서 夢中事를 비유로 설하는 법문이 많다. [금강경]에서 설하는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은 꿈은 환화와 같이 실재하지 않는 비현실의 사례로 열거하고 있다. 자신의 일상적인 의식도 아닌데, 어떻게 성성하게 화두가 참구 된다고 하는가? 진여의 지혜, 진여삼매가 되어야 정법수행, 여법수행, 실참실수가 되는데, 비현실의 꿈속에서 어떻게 화두 참구가 될 수가 있겠는가?

    왜 꿈속에서까지 참구해야 하는가? 꿈속에서 성성하게 화두를 참구해야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불법사상과 방편수행과 진여삼매와 정법안목과 전혀 관계없는 것을 간화선의 정법 수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교의 경전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설한 방편의 언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一如는 不二와 不異, 如是, 如如, 如來의 경지로서 근원적인 진여본성의 지혜작용을 말한다. 즉 動과 靜, 寤와 寐, 夢과 覺, 父와 母, 天과 地라는 상대적인 차별심,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인 진여본성, 즉 本來面目의 지혜작용이다.

    대승불교에서 다양하게 주장하는 三昧와 같이 조사선의 사상에서는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이 하는 일과 하나가 되는 打成一片(三昧)의 경지를 말한다. 잠잘 때는 잠자는 일에 몰입(삼매)하고, 일 할 때는 자신의 일에, 책 볼 때는 책 보는 일에 몰입(讀書三昧)해야 하는데, 화두를 들어야 한다면 어떻게 우리들의 좋은 삶이 만들어 질 수 있단 말인가? 평상적으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상생활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벽암록] 제6칙에 운문이 말한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 의 법문을 불법의 대의로 참구하여 깨달아 체득해야 이러한 환상의 간화선에서 벗어 날 수가 있을까?

    지금 한국 선불교의 수행은 動靜一如, 寤寐一如 라는 경전과 어록에서 제시한 방편 언어의 참된 의미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법수행은 방편법문을 수행해야 하는데 방편의 언어의 의미도 불법의 대의로 여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방편의 언어로 사유하는 참선수행이 가능할까?

    선승들의 법문에 '父母未生以前의 本來面目' 을 영혼으로 이해하고, 佛性과 識神을 판단하지 못하는 안목 없는 주장도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불법과 외도의 가르침을 판단하지 못하는 지혜의 안목이 없는 사람이다.

    정법과 사법, 외도법을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이 없는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사람들에게 불법이나 간화선을 주장하며 수행자들에게 참선지도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12) 生死輪廻와 생사해탈의 문제

 

    또 어떤 스님은 화두 참구는 업장을 소멸시키는 수행이며, 그리고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길과 극락정토로 가는 첩경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두야 말로 다겁생(多劫生)을 살아오면서 쌓은 無明과 業識을 소멸하여 과거생의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룰 수 있는 길이 아닌가? 또 기나긴 생사의 윤회를 끊고 極樂淨土로 가는 첩경이 아닌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인가? 신체가 강건하고 나이가 젊을 때 이 일을 분명히 해 마쳐라. 홀연히 죽음이 닥쳐오면 무엇으로 대적할 것인가? 사지가 싸늘하고 혀가 굳어지며 정신이 혼미해 지는데 무슨 힘으로 화두를 챙길 것인가?

 

    생사를 해탈하는 길, 극락정토에 가는 첩경은 무엇인가? 生死輪廻와 '죽음이 닥치면 무엇으로 대적할 것인가?' 라고 하는데, 선불교는 잘 죽기 위한 수행인가? 극락에 가는 첩경을 구하는 수행이며, 불교는 미래와 來世의 안락을 추구하는 종교인가?

    [좌선의]에 ‘선정의 수행은 수행자에게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다. 만약 좌선하여 사유하지 않는다면, 지금 여기, 자기 본분사의 일상생활을 실행하는 가운데서 본래면목(진여)의 지혜작용없이 번뇌 망념의 중생심으로 멍청하게 살게 된다(到這裏總須茫然)’라고 설한다. 또 ‘坐脫立亡은 모두 선정의 힘에 의거한다. 만약 선정으로 지혜작용의 힘이 없으면, 중생심의 門(生滅門)으로 떨어져 진여의 지혜작용이 죽게 되어(若無定力 甘伏死門) 정법의 안목 없이 한 평생 헛되이 보내고, 생사 망념에 윤회하게 될 것이다(宛然流浪)’라고 설한다.

    [좌선의]를 번역한 거의 모든 책에서 이 문장을 잘 못 이해하고 번역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수행을 잘하면 앉은채로 입적(坐脫)하기도 하고, 선채로 죽는다(立亡)고 하며, 마치 육체적인 생사해탈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선불교는 죽음을 위한 종교, 혹은 잘 죽을 수 있는 수행이 참선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누워서 평안하게 임종을 맞이했다. 坐脫은 육체적인 임종을 앉아서 좌선하는 그대로 시절인연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잘 죽기 위한 참선수행이 아니다. 죽음이란 끊임없는 시간과 공간의 변화속에 살고 있는 중생의 사바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시절인연에 따른 隨緣行을 하는 것이다.

    불법은 육체의 생사문제를 초월하고 해결하기 위한 종교가 아니다. 불법은 眞如法이며, 心法이다. [육조단경]과 [조당집]에도 生死事大, 無常迅速 이라는 말로 수행자들을 각성시키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生死는 마음으로 일어나는 번뇌 망념을 生이라고 하고 일어난 번뇌 망념이 없어지는 것을 死라고 한다. 生死는 마음속에서 생기고 없어지는 生死心이며, 중생심을 말한다. 生死輪廻를 해탈한다는 것도 心法을 말하는 것이지, 육체의 생사 해탈이 아니다. 그래서 선불교를 心地法門이라고 한다. 唯心의 종교를 唯物論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箭喩經]의 비유처럼, 불교는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자기 본분사의 긴요하고 중요한 시절인연의 일을 진여의 지혜로 실행하는 현실성의 종교이다. 불법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고 위대한 보살도의 실천으로 제불의 본원력을 실현하는 자각의 종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조사선의 정신을 마조는 ‘평상심이 도’라고 하고, 임제는 ‘隨處作主’라고 설한다. 항상 ‘지금 여기서 자기본분사의 일(삶)을 불법의 지혜와 인격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운문이 설한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로 살아가는 깨달음의 생활이며, 현실성의 종교인 것이다.

    당대 선승들이 선문답으로 제시한 수많은 공안(화두)을 참구하는 의미는 다양하고 많은 불법의 지혜로운 사건(事例 : 判例)을 지혜의 눈으로 사유(看話)하여 자기 자신의 지혜로 만드는 공부이다. 불법의 수많은 지혜는 경전과 어록을 통한 看經 看話의 공부를 사유하여 체득해야 한다.

    한국 간화선에서 ‘이뭣고’나 조주의 無字 화두 하나를 오래 참구하여 깨달음을 체득하면 불법의 많은 지혜를 전부 구족하게 된다는 허황된 생각과 착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막연하고 애매하게 깨달음이라는 목적과 기대에 집착하고 편견에 빠져있는 看話禪病의 수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깨달음이란 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불법의 대의로 자각하는 것이다. 진여 본성의 지혜작용인 정법의 안목으로 중생심의 번뇌 망념의 심병을 여법하고 여실하게 진단하는 지혜 작용이다. [금강경]에 진여자성의 지혜작용인 여래는 중생심의 번뇌 망념과 심병을 모두 여법하게 다 알고 여실하게 모두 다 볼 수 있다는 의미로 悉知 悉見이라고 하며, [법화경]에는 佛知見이라고 한다. 즉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 반야의 지혜로 활용 할 수 있는 정법의 안목이 구족되어야 마음속에 일어난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진단하고 자각할 수 있다. 중생심으로는 중생의 번뇌 망심을 볼 수가 없다.

    불법의 대의를 모르는 중생은 번뇌 망념을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번뇌 망념을 자각 할 수가 없고, 깨달음을 실행 할 수가 없다. 중생심으로는 영원히 불법을 깨달아 체득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생활의 매사를 불법의 지혜로 깨달음의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 선불교이며, 지금 여기 자기 일을 지혜롭게 보살도로 전개하는 자각적인 생활이 되어야 한다.

    경전과 어록을 읽고 看經 看話의 수행으로 많은 불법의 지혜(84,000 지혜)를 체득해야 지금 여기 자기의 수많은 일(삶)을 불법의 지혜로 보살도를 실천 할 수가 있으며 수많은 중생들의 병을 치료 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족할 수 있게 된다.

불법의 안목과 지혜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보살행을 할 수가 없으며, 많은 중생들에게 잘못된 방향제시와 방법으로 고통에 빠지게 한다. 보살은 정법의 안목으로 여법하게 불법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족하여 시절인연의 자기 본분사의 일을 보살도로 실행 해야 한다.

 

13) 頓悟의 문제 -- 깨달음의 내용과 구조--

 

    [육조단경]에 혜능이 ‘나의 법문은 돈점으로 모두 건립 한다(頓漸皆立)’ 라고 설한다. 돈오점수의 입장임을 밝히고 있다. 頓은 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불법의 지혜로 여법하고 여실하게 판단하여 진여 본성을 깨닫는 頓悟見性이며, 漸은 지금(時), 여기(處), 자기(人), 본분사( 事)의 시절인연에 따른 매사의 문제 하나 하나를 방편의 지혜로 판단하여 身口意 三業을 청정하게 하며, 업장을 소멸하도록 하는 것이다.

    [수능엄경] 10권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진여의 본성은 단번에 깨닫는 것이고, 진여 본성을 깨달으면 번뇌 망념이 모두 소멸한다. 그러나 시절인연에 따른 번뇌 망념의 모든 일은 단번에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방편의 지혜로 차례 차례 해결하여 일체의 업장을 모두 소멸하도록 하는 것이다. (理卽頓悟 乘悟倂銷, 事非頓除 因次第盡)

 

    시절인연에 따른 중생심의 매사는 一事 一智로 해결하는 것이 불법에 의거한 방편의 지혜이다. 부처나 보살은 중생들의 다양한 심병을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능력은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자유롭게 잘 활용 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두어록]4권에 ‘一事로 인하여 一智를 이룬다. 鍼筒과 약봉지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或云, 因一事 長一智, 鍼筒藥袋, 不得失脚.)’이라고 설한다. 침통과 약봉지는 의사가 환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치료 도구이다.

    看經, 看話의 참선수행도 불법의 다양한 법문과 선문답의 사례와 판례를 배우고 익혀서 84000 방편지혜를 구족한 정법의 안목으로 자유롭게 활용하여 중생구제와 심병을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수행이다.

    대승 불교를 수레(yana)로 비유한다. 큰 수레에 많은 84000의 방편법문을 싣고 중생의 사바세계에 나아가 중생들이 요청하는 많은 지혜와 자비를 보살도의 실행으로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보살이나 선지식이 큰 대승의 수레에 지혜와 자비의 능력과, 큰 수레를 운반하고 운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대승의 수레를 활용 할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혜와 자비를 실행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부처도 될 수가 없고, 대승의 보살행도 할 수가 없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頓悟頓修와 頓悟漸修에 대한 의미도 분명하게 파악해야 이러한 주장도 혼란이 없다. 頓悟의 의미와 수행 구조 실천방법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頓悟의 깨달음은 두 가지 내용으로 정리 할 수가 있다.

    頓悟見性은 見性成佛과 같은 말인데,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본래의 진여 자성으로 전향시키는 轉迷開悟이다. 回心作佛이나 卽得往生도 같은 말이며, 진여본성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歸家, 歸命, 歸依이다.

    남종선과 [육조단경]에서는 識心見性으로 제시하고, 조사선에서는 [좌선의]에 念起卽覺 覺之卽失, 간화선에서는 조주의 無字화두 등의 방편으로 제시한다.

    頓悟玄旨는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 체득하는 확실한 체험이다. 경전과 어록의 방편법문을 불법의 대의로 사유하며 참구하는 看經, 看話의 수행과, 선지식의 설법과 법문을 듣고 불법의 근본 대의(종지)를 확실히 체득하여 방편의 지혜를 구족하는 것이다. 즉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言下大悟 하는 聞法이며, 聽法이다.

    선불교에서 제시한 頓悟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깨달음의 논리적인 구조이며, 頓悟를 시간적으로 빨리 또는 느리게(천천히)라는 의미로 파악하면 안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 돈오의 깨달음이 실행되며,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는 것은 중생심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증도가]에서 읊은 '一超直入如來地' 라는 법문은 이러한 사실을 말한다.

    불법의 지혜는 초발심에서 정각으로 가는 시간적인 추이과정과 깨달음의 세계가 공간적인 이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초발심이 곧 바로 정각인 것처럼, 진여의 지혜는 不二법문으로 이루어진다.

    [화엄경]8권 범행품에서 설한 ‘初發心時 便成正覺’이나, [열반경]38권 가섭보살품에 ‘발심과 구경의 깨달음은 둘이 아니다. 발심과 구경의 깨달음, 이 두 마음작용 가운데 발심을 하기가 어렵다(發心畢竟二不別, 如是二心先心難)’이라고 읊고 있다.

    사실 頓悟頓修나 頓悟漸修를 [육조단경]과 화엄종의 澄觀이 [화엄경소], 종밀의 [도서] 등에서 깨달음의 구조적인 체계를 교학적인 차원에서 다각적으로 주장하였다.

    頓悟見性을 강조하는 선불교의 사상(입장)에서 보면 頓修는 문제점이 있다. 무엇을 頓修한다는 말인가? 본래 자성이 청정한 불성을 頓修한다하는 것은 불법사상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수능엄경]의 법문처럼, 불법의 대의에 의거하여 번뇌 망념을 자각하고 진여 자성을 깨닫는 것은 頓悟見性이지만, 시절인연에 따른 중생의 많은 번뇌 망념의 심병을 치료하는 일은 방편의 지혜이다. 방편의 지혜로 시절인연에 다른 매사의 일을 방편의 지혜로 보살도의 실천으로 해결하고 업장을 소멸하는 일은 점수이기 때문에 불교나 선불교에서는 頓悟漸修가 기본이다.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많은 선지식을 참문하여 불법의 지혜를 배우고 익히는 구법이야기도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 정성본 [조사선의 수행체계] 참조. )

 

14) 참선수행과 사회성의 문제

 

    한국선원의 선수행과 현실 사회에서 참선 수행의 사회적인 의미와 보살행의 문제도 함께 고민해 봐야 할 과제이다. 한국불교의 참선수행자는 평생토록 산중의 선원에 앉아서 좌선(참선)수행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마경]에 산중의 나무 밑에서 좌선하는 사리불을 비판한 유마거사의 정신을 재고해 봐야 할 일이다. 시중에서 산중으로, 시끄러운 곳에서 조용한 곳으로, 공간과 장소에 탐착하고 집착하는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소승적인 사고이다. 白居易나 王康琚의 시에 ' 산중에 은거하는 것은 小隱이고, 시중에 은거하는 것은 大隱' 이라고 읊고 있다.

    또한 좌선으로 참선수행을 하는 것은 신체적인 형체의 좌상에 집착한 중생이다. 선방수좌라는 수행자의 자아의식과 自慢은 강사다, 학인이다, 선승을 구별하는 분별적인 사고로 상대적인 차별심의 心病과 禪病에 떨어진 중생이 되고 만다.

    진정한 참선수행자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我相, 人相, 선원과 강원 등의 분별과 상대적 차별인 중생심을 초월한 경지(깨달음)에서 반야 지혜로 자기 본분사의 보살도를 실행해야 한다.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중생을 구제하고 보살도를 실천하는 종교이다. 선불교에서는 上求菩提를 向上一路라고 하고데, 자신이 세운 원력을 위대한 보살도의 삶으로 실현하는 불법수행이다. 위대한 보살도의 실현이란 불법의 지혜로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행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십우도]의 10번째 그림에 포대화상이 중생들이 필요한 많은 물건들을 포대에 가득 채워 어깨에 짊어지고 저자거리를 행보하고 있다. [법화경]에서 설하는 諸法實相의 涅槃이나, [유마경]의 處染常淨이나, 정토교에서 설하는 往相회향과 還相회향의 법문을 불법의 대의로 잘 음미해야 한다. 참선수행으로 본원력을 실행하는 부처나 보살은 사바세계의 중생과 함께 同事攝을 실천하는 보살행을 해야 不守自性隨緣成이 된다.

    불법을 체득한 수행자는 항상 지금 여기 자신의 구체적인 일(삶)을 통해서 지혜와 자비의 보살도가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지금 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을 떠나서는 자기 본분사의 원력행을 보살도로 실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5) 조계종 간화선의 문제점을 재고한다

 

    왜, 우리는 한국 조게종 간화선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잘못된 것은 바르게 지적하고, 올바른 수행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여 정법의 참선수행이 되도록 하지 못하는가?

    이러한 한국 간화선의 문제를 '지도자 不在' 와 '수행자의 安易' 라는 두 가지 문제로 지적해 본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지혜와 자비가 원만한 선지식이 많이 나와서 훌륭한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배출 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발원한다. 부디 이 글로 오늘날 한국 조계종 간화선의 여러 문제점들을 겸허하게 반성해보고 새롭게 발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첫째,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선지식이 간화선 수행을 지도하고 있는가?

 

    看話禪이란 당대 선승들의 어록과 선문답을 읽고 생활의 종교인 불법의 지혜와 인격을 배우고 익히는 수행이다. 경전과 어록의 방편법문을 진여의 지혜로 읽고 부처와 조사들과 같이 정법안목의 지혜와 인격을 체득하는 불법공부이다.

    먼저 간화선이라는 언어부터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하여 眞如三昧로서 수행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불법의 모든 수행은 방편법문을 통해서 眞空妙有의 진여삼매가 되도록 해야 하며, 중생심으로는 불법이나 방편법문을 수행할 수는 없다. 진여삼매가 되어야 중생심을 초월하여 여래가 되고 부처가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계종의 선원에서는 不立文字 敎外別傳 이라는 선불교의 정신을 잘 못 이해하여 경전과 어록 등 책을 보지 말라고 하며, 또한 당대 선승들의 선문답인 화두를 불법의 대의로 방편을 참구하는 진정한 간화 간경의 참선수행을 막고 있다.

    더군다나 선문답의 화두를 불법의 대의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간화선의 참선지도자를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올바른 선지식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선어록은 당대 선승들이 깨달아 체득한 불법의 지혜를 언어문자와 행동으로 설한 방편법문의 기록이다. 경전과 어록에서 제시한 방편법문을 읽지 않고서는 아무리 수행해도 불법의 지혜와 선사상은 알 수 없다.

    [금강경], [법화경] 등 대승경전에서 모두 경전의 법문을 書寫 受持 讀誦 解說을 한다는 사실을 누누이 설하고 있음을 알고나 있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그리고 어록에서 선승들이 제시한 '父母未生以前 自己本來面目' 을 참구하라고 설한 방편법문의 언어를 불법의 대의로 여법하게 이해하고 참선 수행을 하고 있을까? 본래면목을 靈魂으로 오해 착각하여 주장하는 선승이 얼마나 많은가?

    뿐만 아니라 生死大事, 生死解脫을 육체적인 죽음으로 오해하고 육체적인 생사해탈을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육체적인 생사해탈의 자유자재한 경지를 참선수행으로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행자가 엉뚱한 길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가?

    조계종의 참선지도자 가운데 이러한 오해와 착각으로 간화선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조주의 무자화두 참구 방법도 잘 못 지도하고 있다. 간화선의 화두도 아닌 이뭣고? 를 의심을 지어 참구하게 하여, 수행자가 있지도 않는 의심을 조작하고 만들어 내게 하여 중생심이 되도록 하고 있다.

    진여 본성의 본래면목을 깨달아 체득하도록 하는 수행이 아니라 의심을 만드는 중생이 되도록 하여 영원히 불법의 신심을 체득하지 못하는 수행자가 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조주의 무자 화두는 중생심에서 불심으로 전환하여 돈오 견성을 하도록 하는 방편의 공안이고, 다른 선승들의 법문이나 선문답의 화두는 불법의 대의에 의거하여 사유하고 참구하여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한다. 이러한 간화선의 화두(공안)와 방편법문의 내용을 잘 못 이해하여 무조건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의심을 지어서 참구하라고 지도하는 것은 간화선의 수행구조와 정법의 수행 방향과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조주 無字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도 잘못 지도하고 있고, 有無의 차별심에 떨어지게 하고, 조주의 의지를 참구하도록 하고, 무조건 의심하라고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대혜종고선사가 간화선병에서 여러번 주의시키고 있는 점인데, 모두 이러한 간화선병에 떨어지는 중생이 되도록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看話邪禪이 되어 버린다.

    向上一路를 이루고, 불법의 지혜로 참구하는 구법문제를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의식의 대상 경계에 속박된 중생심이며, 생사윤회하는 업장을 만드는 것이다. 간화선에서 주장하는 疑心은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의심이 아니라, 선문답의 다양한 공안을 불법의 대의에 의거하여 여법하게 참구하여 向上一路의 정법안목을 체득하는 自問 自答의 참선이다.

    즉 선문답의 공안을 불법의 근본 사상으로 사유하고 반복 참구하여 여법하게 확인하고 확신하여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는 수행이다. 구도적인 문제의식과 분발심(憤心)의 정진 없이 수행에 몰입할 수가 없다.

    조사선의 [좌선의]에서 '망념이 일어나면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라.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면 망념은 없어지고 진여본성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頓悟見性의 방법을 간화선에서는 무자화두로 제시하였다.

 

    또한 화두를 의심(참구)하여 廓徹大悟하면 불법을 전부 깨달아 안다는 허황된 말을 믿고 있는 한국 간화선은 올바른 선지식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소식 얻기 위한 중생심의 목적의식으로 여법한 수행, 정법수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한소식과 깨달음을 기대하는 待悟禪 禪病의 중생이 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밖에서 깨달음, 한 소식을 얻어려고 하는 것은 외도이며, 또한 얻어야 할 불법이 있을까? 한 소식을 깨달아 구할 수 있는 법이 있는가? [금강경]에서 설하는 無有定法이나, 대승불교 경전에서 한결같이 강조하는 無所有, 無所求, 無所得, 無實體, 無自性, 空이라고 설하는 법문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참선 수행해야 한다.

    [금강경]에 一切有爲法은 夢幻, 泡影과 같이 실체가 없고, 무자성이며, 空한 것이라고 비유하여 설하고 있다. 불도나 깨달음을 마음 밖에서 구하고 얻으려고 하는 것은 거북의 털, 토끼의 뿔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며, 허공의 꽃을 추구하는 것과 같이 허망하다고 비유한다. 중생은 전도몽상하여 허망한 망념의 대상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처럼, 一切皆空으로 無所有, 無所得의 경지를 설하는 불법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헛된 환상의 한소식이나 깨달음을 추구하도록 지도하는 사람을 과연 올바른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주의 무자 화두 참구하는 방법을 올바르게 제시한 선지식이 없었다는 사실도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선지식이 ‘조주는 왜 개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고? 조주의 의지를 참구하라’ 라고 지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간화선의 선병에 떨어지는 수행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無!’를 참구하라고 했는데, 無자 화두를 ‘없다’ 라고 번역하여 참구하도록 하는 것도 수행자들을 있다(有), 없다(無)라는 차별심의 선병에 떨어지도록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뭣고?’라는 화두를 참구하도록 지시하고 있는데, 단순한 의심은 중생심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번뇌 망념의 분별 의심으로 業障을 만들고 생사망념에 떨어지게 하며, 이에 따른 생사윤회의 과보를 초래하는 수행자로 만든다.

    뿐만 아니라 중생구제의 귀중한 보살도의 삶을 상실하게 하고, 인생의 귀중한 시간만 낭비시키고 허망한 결과만 갖게 된다.

 

    그리고 板齒生毛, 庭前柏樹子(뜰 앞의 잣나무), 麻三斤, 등의 화두를 주고 참구하라고 지시하면서 ‘왜 板齒生毛라고 했는고?‘ ’ 왜 「庭前柏樹子(뜰 앞의 잣나무)‘ 나 ’麻三斤 이라고 했는고?, ‘왜 無 라고 했는고?’ 라 하면서 無字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방법과 똑같이 지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선지식은 간화선의 수행구조와 화두(공안)의 역할과 기능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간화선에서 조주의 「無字」화두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에서 불심(불성)을 자각(見性)하도록 제시한 방편이며, 「板齒生毛」 「庭前柏樹子(뜰 앞의 잣나무)」 「麻三斤」 등 일체의 모든 화두(공안)은 반야사상과 불성 사상을 토대로 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제시하는 화두(공안)인 것이다.

(* 정성본 [무문관] 한국선문화연구원 간행 참고)

 

    또한 간화선의 화두 참구를 寤寐一如로 혹은 夢中一如(夢覺一如)로 화두를 들라고 지도하는데 과연 올바른 지도인가? 一如는 중생의 번뇌 망념과 차별심을 초월한 진여 본성의 지혜작용으로 中道의 실천이며, 茶禪一如, 身心一如, 萬法一如와 같이 不二法門이다.

    불법사상을 여법하게 모르는 중생의 無知 無明으로 이와 같은 선불교의 용어를 글자대로 해석하고 임의대로 생각하고 갖다 붙여서 간화선 수행의 비결인 것처럼 제시하기 때문에 많은 수행자들이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不立文字나 敎外別傳, 父母未生以前 本來面目, 佛性과 靈魂을 착각하여 불법의 기본 정신도 알지 못하고 있다.

 

    참선은 언제나 지금 여기 자기 일과 하나가 된(打成一片) 깨달음과 진여삼매(眞如三昧 : 一如)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잠잘 때는 잠을 자는 일과 하나가 되고, 운전 할 때는 운전하는 일에, 책을 읽을 때는 책을 읽는 자신(主)과 책(客)과 하나가 되는 독서삼매에 들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잠잘 때도 화두 참구, 꿈 속에서도 화두참구를 하는 일이 가능 할까? 이러한 화두참구를 한 사람이 있는가? 중국의 선불교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으며 이러한 주장을 한 선승은 한 사람도 없다.

    한마디로 선불교의 종지(근본정심)와 실천사상을 모르는 잘못된 지도이며, 또한 간화선의 수행구조와 실천 방향, 방법, 깨달음의 구조 등을 정확히 모르는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지식의 지도를 받고 간화선을 수행하는 사람은 看話邪禪에 떨어진 중생이며, 치료하기 어려운 禪病의 중환자이다.

 

    [법안어록]과 선승들의 선어록에 스승의 잘못된 불법교육으로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敎壞' 라는 말이 있다. [벽암록] 8칙에도 '저 노인이 잘못된 교육으로 좋은 사람을 못쓰게 했다(這老賊 敎壞 人家男女)' 라고 지적하고 있다.

    [대혜서]에도 대혜종고선사가 '언충(彦沖)은 이러한 묵조선 지도자의 잘못된 가르침(敎壞)을 받았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敎壞는 정법의 안목이 없는 사이비 선승이 초심자들에게 참선교육을 잘못 지도하여, 禪病과 중생을 心病의 환자로 만들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엉터리 사이비 野狐禪師를 비난한 말이다.

 

    간화선의 지도자는 경전과 어록을 읽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서 올바르게 후학들을 지도해야 한다. [벽암록]이나 [무문관] [임제어록] 등, 훌륭한 선지식의 설법을 기록한 선어록을 여법하고 여실하게 정법의 안목으로 提唱(강의)하여 초심 수행자들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으로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구족 할 수 있도록 자기 본분사의 원력행으로 지도해야 한다. 그래야지 삼세제불의 정법을 계승하는 전등의 조사가 되고, 佛慧命을 계승한 훌륭한 선지식이 될 수가 있다.

    두 번째는 수행자들의 안이함을 지적하고, 정법의 안목을 갖춘 수행자가 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출가 수행자는 대승불교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본분의 원력으로 자신의 원력을 실현하는 보살행이 되어야 한다. 다른 목적의식을 갖고 출가한 사람은 진정한 구도자가 될 수 없고 훌륭한 선지식이 될 수 없다.

    먼저 참선 수행자는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고 방편의 지혜와 인격을 구비한 선지식을 참문하여 정법 교육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먼저 대승경전과 선승들의 어록을 진여의 지혜로 읽고,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여 문수의 지혜와 보현의 자비을 구족해야 하며, 불법의 지혜와 자비심을 보살도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제불의 본원력을 실행 할 수가 없다.

    참선수행은 불법의 방편법문에 의거한 如法한 수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열반경]에 '法에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지 말라. 지혜에 의거하고 지식에 의거하지 말라.' 라는 법문과, '自燈明 法燈明' 이라고 입적때 석가불이 설하신 법문의 의미를 잘 음미해야 한다.

    참선 수행자가 불법의 대의도 모르고, 정법의 안목도 갖추지 못한 선지식의 말을 무조건 맹종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의 근본 사상은 물론 반야의 지혜나 보살도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원력도 부족하고, 또한 자기향상을 위한 자아비판과 분발심(憤心)이 없는 안이한 수행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자각하고 자각해야 할 일이다.

 

    참선수행은 방석에 앉아서 좌선 수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과 어록을 읽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참선은 일상생활 行住坐臥 語黙動靜이 모두 깨달음의 생활이 되도록 자각하고 참구하도록 하는 수행이다.

    당대 선승들의 생활은 대략 寅時(아침 5시경) 일어나 좌선 (40분 정도)하고 아침 죽을 먹고, 주지의 상당법문을 듣고 좌선(40분 정도)하고는 생산 노동을 했다. 점심(巳時)공양후에도 노동하고 5시 경에는 간단한 저녁(藥石), 초저녁에 좌선. 심야에 좌선 이렇게 하루 4번 좌선 시간 (四時坐禪)을 하였다.

    그리고 좌선시간에 조주의 ‘무자’ 화두나 ‘이뭣고’라는 의심하는 말만 붙잡고 시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경전과 어록을 읽고, 또한 선지식의 상당법문과 소참법문, 일상 수시로 지시하는 방편법문의 말씀을 듣고, 불법의 정신으로 自問 自答하며 깊이 참구(사유)하여 방편법문의 말씀을 완전히 자신의 지혜로 체득하도록 정진해야 한다.

    여러번 반복해서 말하지만, 참선수행은 방편법문을 불법의 지혜로 참구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방편을 수행하지 않고서는 정법수행과 진여삼매를 이룰 수가 없다.

 

    조주의 무자 화두나 이뭣고 라는 하나의 말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거나, 한소식이라는 환상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 한심한 수행자가 되고 만다.

    [무문관]의 禪箴에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는 일만 반복하면서 좌선 수행을 하는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놀고 있는놈(念起卽覺 弄精魂漢)' 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남종선에서 북종선의 좌선수행을 거울에 먼지가 낄 때마다 먼지를 털어버리(拂塵)는 반복된 일만 하고 있는 어리석은 수행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유마경]에 '禪味에 탐착하는 것은 보살의 속박이며, 방편지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보살의 해탈이다.' 라고 설하는 법문의 의미를 잘 사유해 봐야 한다.

 

    불법을 체득하여 중생구제 보살도를 실행하는 사람은 불법의 대의를 四句偈로 요약하여 설법할 수가 있어야 한다. [금강경]에 ‘이 경전의 법문을 四句偈로 요약하여 남에게 설법하면 그는 곧 여래가 된다’ 라고 설한다. 대승 불법의 가르침은 여래가 되고 부처가 되어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도의 원력을 회향하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이다.

    경전과 어록의 방편법문을 배우고 수행하여 불법의 대의를 통달(宗通)하고 불법을 자유자재로 설법(說通)할 수 있어야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참선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84000 方便의 지혜는 경전과 어록의 방편 법문을 읽고 통달하지 않고서는 체득 할 수가 없다.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고 불보살로서의 능력을 구족해야 많은 중생들에게 올바른 방향과 방법을 제시 할 수 있는 불교인이 될 수 있다. 불법의 근본사상과 정법의 안목이 구족되어 깊은 통찰력과 다양한 반야지혜를 구족한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불교 간화선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경전과 어록의 정확한 번역을 토대로 한 현대 언어로 경전과 어록을 배우는 교육이 실행되어야 한다.

    한자는 뜻 글자라 해석하고 이해하기 무척 어려워서 외국어보다 더 어려운 언어이다.

    선승들이 불법의 대의에 의거한 언어의 정확한 개념과 정신을 오해하고 무책임하게 주장한 말이 많아 이에 따른 부작용이 얼마나 많은 한국불교의 휴유증으로 남아 있는가?.

    예를 들면 寤寐一如나 夢中一如, 生死解脫과 生死大事, 生死自由 등의 언어이다.

    불법 사상에 의거한 방편법문의 언어를 불법의 뜻으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올바른 불법사상을 체득 할 수가 없고, 바른 사유(正思惟)로서 여법한 참선수행을 할 수가 없다. 한국불교인들은 천수경과 관음시식 등에 인용한 경전과 선어록의 언어를 불교의식으로 독송하고 있지만, 불법사상의 방편언어의 진실을 몰라 불법 사상과 반야지혜, 불교적인 인격을 형성하는 불교인이 드물다고 지적 할 수 있다.

    心法의 불교 사상에서 설한 방편법문을 유물론적인 존재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반야심경]의 '色卽是空 空卽是色' 을 비롯하여, 서방의 극락정토에 往生하는 법문, 中道, 空사상, 佛性, 見性成佛하면 법당의 등신불과 같이 되는 성불로 오해하고 있다. 또 生死大事, 生死解脫을 육체적인 生死로, 父母未生以前本來面目을 靈魂으로 착각하고, 鼻孔(본래면목)을 글자그대로 '콧구멍' 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 등이다.

 

    현대사회와 세계 인류의 지도자가 되는 불교인들을 양성하고 전문 지도자교육을 실행해야 하는 일은 시급하다.

    어느 단체나 회사, 기관의 발전은 인재양성과 인재확보에 있으며, 훌륭한 지도자와 수행자가 많아야 발전할 수 있다.

    선불교의 교육을 현대적인 교육기구와 연구기관으로 재편하고 선 센타를 곳곳에 많이 설립하여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통한 위대한 보살도를 실현할 수 있도록 지도 해야 한다.

    선불교의 교육도 전문 수행자, 일반 재가 불자, 전문 직장인, 학생, 어린이에게 맞는 경전과 어록의 번역으로 다양한 수행의 프로그램을 재편하고 수행 방법도 다양하게 제공해야 한다.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직업이나 일상생활 속에서 참선수행을 실행하여 정신적인 평안과 육체적인 건강으로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는 수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산중 사원에는 선 수련원을 설립하여 많은 도시인들이 수시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도심 사찰과 산중 사찰을 연결하여 신도 수련을 함께 지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바람직하다.

    현대와 미래는 선불교를 지도하는 많은 선지식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한국불교는 불교전문교육원을 발전시켜 시대를 이끌어 가는 선불교의 인재교육을 여법하고 체계 있게 추진해야 한다.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인류)들에게 선불교의 사상과 실천을 통해서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을 사회적인 건강으로 나누는 위대한 보살도 정신을 회향하도록 제시할 수 있는 선지식이 많이 배출 되어야 한다.

    선불교는 현대와 미래의 모든 인류에게 육체적 정신인 건강과 참선수행을 통한 창조적인 지혜로 독창적인 자신의 일을 할 수 있고, 자타가 모두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지혜를 법문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진장한 불법지혜의 보배(佛性)로 경전과 어록을 통해서 제불과 조사들이 제시한 방편법문을 참선수행으로 배우고 익혀서 각자가 무진장한 반야의 지혜를 구족하고, 시절인연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사용 할 수 있는 선지식이 되어야 한다.

    선불교를 지도하는 선지식은 현대의 모든 인류에게 불법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는 올바른 방향과 구체적인 방법을 다양한 방편지혜로서 확실하고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한다.

 

2012년 4월 30일

自安禪堂에서 鄭性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