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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 2016. 3. 2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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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의 망상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92. 힌두교 유아론의 선봉장 혜민과 진제
2016년 03월 21일 (월) 15:07:32강병균 교수(포항공대) cetana@gmail.com

데카르트의 환생 혜민

한창 나이의 혜민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을 통해서, 젊은이들의 감성을 파고드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현대적이고 세련되고 세밀한 필체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통속적인 불가법문의 오랜 전통인 ‘전설 따라 삼천리 귀신 따라 삼만리’식의 설법을 하지 않고도,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음을 증명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혜민 스님은 막행막식(莫行莫食)이 난무하고 권력투쟁과 정치놀음으로 난장판인 한국승가에 보석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문제는 혜민 스님의 핵심사상이 결코 불교사상이 아니라 힌두교 사상이라는 점이다.

혜민 스님은 다음과 같은 놀랄만한 발언을 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했다. “아무리 실체가 없다 생각해도 그 생각을 하는 ‘자신’이라는 실체는 항시 존재합니다.” 이것은 정확히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다: 현대 과학계와 철학계가 폐기처분한 지 오래된 이론이다. 혜민 스님의 전생이 데카르트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이다.

이 발언이 문제인 것은 이것이 전형적인 유아론(有我論)이라는 점이다. 현대 뇌과학에 의하면 보고 듣고 맡는 것은 빛·공기입자·물질입자와 감각기관과 뇌신경계의 상호작용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를 볼 때, 뇌 안에는 그 어디에도 우리가 보는 사과의 색깔과 모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뇌를 열고 살펴보아도 사과의 붉은색과 둥근 모양은 보이지 않는다. 색깔과 모양은 생체전기가 만들어내는 전기화학적인 신호일 뿐이다. 이는 DVD 안에는, 0과 1로 이루어진 암호만 있을 뿐이지, 색깔과 모양이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처럼 색깔과 모양이란, 따라서 보는 것이란 ‘감각대상과 감각기관과 뇌신경계’ 3자의 상호작용일 뿐이다. 심지어 ‘생각’조차도 그렇다.

(당신이 생각을 할 때, 1,000억 개 뇌신경세포들과 그 사이를 연결하는 1,000조 개 생체전선 위를 무수한 전자들이 떼를 지어 무서운 속도로 질주를 한다! 그게 바로 당신의 생각이다. 그걸 떠나서 따로 당신의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늙어 뇌세포가 죽으면 생각이 부실해지거나 생각을 할 수 없는 치매가 생기는 것이다. 한국의 대선사(大禪師)들이 주장하듯이, 만약 뇌가 아니라 참나(眞我 진아 true atman)가 생각을 하는 것이라면, 치매에 걸려 생각을 못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도 참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어떻게 치매환자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를까?)

소위 육식(六識)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는 다 물질과 감각기관과 뇌신경계의 연기작용(緣起作用)일 뿐이다. 이게 부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그 어디에도 생각을 하는 실체는 없다. 그런데 혜민 스님은 생각하는 작용을 절대화하였다. 생각의 배후에 ‘실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걸 ‘자신’이라고 했다. 소위 ‘참나’ 또는 ‘주인공’이다. 문제는 이런 혜민 스님의 발언이 돌출된 발언이거나 갑작스러운 발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청담 스님이 ‘생각을 하는 놈은 절대아인 참나(眞我)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으며, 근래에는 진제 종정스님이 앞장서서 촉발한, 참나(眞我 진아 true atman)를 선양하는, 힌두교적 유아론자(有我論者)들의 커밍아웃이 있었다.

진제 스님의 참나는 기계속의 유령
우파니샤드 요기의 환생 진제 스님


진제 스님의 발언을 보자. (다음은 2009.4.27일자 조선일보 진제스님 인터뷰 기사이다.)

"몸뚱이란 숨 한번 들이쉬지 못할 때 주인공이 딱 나가버리면, 사흘 이내 썩어 화장하고 묻어버려요. 뼈와 살은 흙으로, 대소변은 물로, 호흡은 바람으로,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갑니다. 본고향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거든.
하지만 주인공은 ‘참나’ 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멸한 후에도 항시 여여(如如)하게 있습니다. 이를 바로 보아야, 진리의 도가 그 가운데 다 있습니다."


진제 스님 식으로 보게 되면, 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와 족히 십만팔천리는 멀어진다. 진제 스님이 진화론과 우주론을 부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진제 스님의 사상은 세속적으로도 문제이고, 불교 핵심교리에 있어서도 문제이다. 진제 스님의 문제는 사실상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문제이다. 세속진리와 불교진리는 분리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사상이다.

위에 인용한 진제 스님의 주인공 사상을 아래 인용하는 우파니샤드 사상과 비교해 보라. 정확히 같은 사상임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사물을 인식하는 자아(atman 참나)는 결코 태어난 것이 아니며 결코 죽지 않는다. 그는 어떤 것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며 어떤 것도 그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그는 태어나지 않으며, 영원하며, 변치 않으며, 최초의 것이다. 그는 육신이 죽을 때에도 죽지 않는다. <카타 우파니샤드>

이 위험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곳(육신)으로 들어간 그 자아(atman 참나)를 발견하고 깨달은 모든 사람, 그는 이 우주를 만든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만든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이다. 실로 그는 세계 그 자체이다. <우파니샤드>

실로 이 자아는 모든 사물들의 주인이며 모든 존재들의 왕이다. 모든 바퀴살이 바퀴통과 바퀴테에 묶여 있는 것처럼, 실로 이 자아에 모여든 존재들, 모든 신들, 모든 세계들, 모든 숨쉬는 생명들, 이 모든 자아들이 묶여있다. <우파니샤드>

몸은 수레이고 자아(atman 참나)는 탑승자이다. 지성은 마부이고 마음은 고삐이다. 감각은 말이고 감각대상은 길이다. 자아와 감각과 마음의 합일로부터 형성된 자를 요자(樂者)라 부른다. <카타 우파니샤드>

Know that the Atman is the rider in the chariot,
and the body is the chariot,
Know that the Buddhi (intelligence, ability to reason) is the charioteer,
and Manas (mind) is the reins.

The senses are called the horses,
the objects of the senses are their paths,
Formed out of the union of the Atman, the senses and the mind,
him they call the "enjoyer". <Katha Upanishad, 1.3.3-1.3.4>

철저한 무아론자 나가세나
철저한 유아론자 혜민 진제


나가세나는, 밀린다팡하에서, 무아의 예로 수레를 든다. 나가세나는 수레는 각 부품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부품을 떠나 수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카타 우파니샤드는 수레 탑승자가 아트만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우파니샤드는 수레바퀴테를 아트만의 예로 든다. 불교와 베다교는 (수레라는) 같은 대상을, (무아론과 유아론이라는) 다른 사상의 예로 들고 있다. 같은 대상을 보는 눈이 이처럼 다르다. 극과 극이다. 그런데 진제, 송담, 혜민 등 불교승려라는 사람들이 힌두교 유아론인 참나(眞我 true atman)를 주장한다.

이 큰스님들과 유명스님들은 하나같이 ‘참나가 우주의 주인’이라고 주장한다. 위에 인용한 힌두교 경전과 똑같은 소리를 한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과대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힌두교는, 카타 우파니샤드와 리그베다에서, ‘아트만(我 眞我 참나)이 영원(常)하고 깨끗(淨)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불교는 ‘몸과 마음의 공(空)한 모습은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연기일 뿐 실체(아트만)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실체가 있다면 실체는 영원하고 깨끗하겠지만, 사실은 실체가 없으므로 즉 모두 연기이므로 즉 잠시 존재하는 존재이므로 영원한 실체는 없고, 더러울 것도 없다. 동시에 깨끗할 것도 없다. 모두, 연기에 의해 생성되고 연기에 의해 소멸하는, 일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 열반을 실체화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위에 인용한 카타 우파니샤드와 리그베다의 ‘아트만(我 眞我 참나)은 영원(常)하고 깨끗(淨)하다’는 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상이다. 한국선불교는 이 열반을 참나(眞我)로 간주하여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더 노골적으로 실체화한 것이다.

한국의 큰스님들은 거침없이 유아론(有我論)을 설법한다. 진제 종정스님을 필두로, 팔만대장경에 없는 신조어(新造語)인 참나(眞我 true atman)를 들고 나와 “참나를 찾읍시다” 하고 거침없이 외친다. 사방에 참나라는 말이 왁자지껄 떠다닌다. 경쟁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 대왕이 벌인 ‘불교계에 숨어든 유아론자 색출·축출’을 모면하고, ‘2,300년 동안 (환생에 환생을 거듭하며) 불교계에 숨어있던’ 힌두교적 유아론자들이 당당하게 자기들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아우팅(outing)을 모면한 자들이 커밍아웃(coming out)를 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 혜민 스님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명문 하버드대학을 다니고 미국에서 종교학과 교수를 했지만, 유아론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른 게 없다. 감성적인 언어로 젊은 사람들의 귀를 끌어당기지만, 큰스님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참나론적인 유아론(有我論)을 펼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 이유는 생각 외로 단순하다. 그냥 과학에 무지(無知)하기 때문이다. 진화론만 알아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진화론은, 생물체의 진화가 35억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기에, 100년을 살기 힘든 인간의 짧은 수명으로는 발견하기 거의 불가능한 이론이다. 현대과학은 인류에게 진화론이라는 축복을 내렸다. 무수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적은혜(知的恩惠)를 베풀었다. 시청료를 내고도 KBS를 시청하지 않으면 손해이듯이, 세금을 내고도 진화론을 모르는 것은 손해이다. 과학발전은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외국에서의 과학연구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아이폰·전투기·항공기·BMW·고속철·유럽책 등 매입에 우리가 지불하는 돈으로, 미국·유럽의 과학연구가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손해 보지 않으려면 열심히 진화론을 공부해야 한다.

진화론과 참나

당신은, 식물과 동물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즉 하나의 단세포로부터 출발한 형제지간이라고 하면 믿을 것인가? 진드기 같은 동물이 식물로부터 유전자를 훔쳐 광합성장치를 만들어 광합성을 할 수 있는 것은, 식물과 동물의 유전자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둘 다 4가지 염기인, A, G, C, T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유명한 이중 나선 모양이다. 그리고 식물의 유전자는 반 이상이 동물의 유전자와 일치한다. 식물이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는 점도 동물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동물의 윤회를 인정한다면 식물의 윤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 동물에게 참나가 있다면 식물에게도 참나가 없을 이유가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혜민 스님의 주장에 의하면 누구에게나 참나가 있다. 문제는 평소에 당신은 당신에게 ‘참나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점이다. 만약 당신이 서양인이라면, 참나라는 말조차 들어본 일이 없을 터이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도, 예를 들어 기절하거나 뇌진탕으로 의식이 없을 때도, 참나가 존재한다면, (설사 식물이 의식이 없을지라도) 식물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식물이 의식하건 말건, 알건 모르건, 식물의 참나는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참나론은 자체모순적인 이론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참나가 없든지 아니면 모든 생물이, 식물 이끼 아메바 에이즈균 콜레라균 할 것 없이, 모두 참나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정확히 힌두교 아트만 사상이 된다. 모든 생물에 심지어 정자(精子)에도 아트만이 있다는 힌두교사상 말이다. ‘이 모든 참나가 사실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라고 주장하면, 힌두교의 ‘브라흐만-아트만 동일체’ 사상이 된다. 즉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된다. 개별자인 아트만(atman 我)은 존재하지 않고 전체자인 브라흐만(brahman 梵)만 존재한다는 사상 말이다. 이런 사상은 연기법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사상이다.

연기론(緣起論)은, ‘일체의 실체가 없이 현상계가 벌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에 비해 범아일여사상은, 우주에는 우주의 본체인 브라흐만만 존재하고, 현상계는 환상일 뿐이어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현상계 자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상이다. 만일 현상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상계에서 벌어지는 고통도 환상(illusion)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성스러운 진리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현상계가 (연기로서) 존재해야 비로소 고집멸도라는 4성제가 설 수가 있다. 고(苦)는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기에, 즉 연기이기에, 지혜의 눈으로 고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혜가 실체인 것은 아니다. 만약 지혜가 실체라면 마찬가지 이유로 무명도 실체일 것이다.) 참나(眞我)에 대한 집착이 모든 고의 원인이므로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고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오해하듯이 혜민 스님의 주장처럼 참나라는 실체가 존재하고 그 참나가 불생불멸(不生不滅)·불구부정(不垢不淨)한 것이 아니라, ‘불생불멸·불구부정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당신이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순간, 참나 주인공 등 유아론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진화론을 공부할 자세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지적하였듯이,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은 지동설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창조론에 입각한 천동설이 무너지는 데 2,000년이 걸렸듯이, 불교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데는 앞으로 2,000년이 걸릴지 모른다. 더 걸릴지도 모른다. 제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불교는 무려 2,500년이나 앞서서, 진화론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무아론(無我論)을 주장했는데, 막상 2,500년 만에 과학의 힘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진화론이 증명된 마당에, 이를 거부하는 이율배반적인 코미디를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열반하신 부처님이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전(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당신의 사리들을 모아 색신을 복구하고, 벌떡 일어나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제 스님과 송담 스님은 “처음부터, 즉 시작이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소는 소, 말은 말, 개는 개, 사람은 사람이었다”고 하고, “원숭이가 변해서 사람이 되는 법은 없다”고 하지만, 일이 그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예를 들어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은 염색체가 24개이지만 인간은 23개로 하나가 적다. 가장 가까운 종이라는 유인원들과 인간의 ‘염색체 수 불일치’는 어떻게 된 일일까?

과학자들은 원래 24개이던 인간의 염색체 중 2개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달라붙은 것을 발견했다. 그 증거는 인간의 2번 염색체이다. 이놈이 다른 염색체들과 달리 염색체 끝부분에 있는 텔레미어가 중간에 하나 더 있다는 점과, 염색체 중간부분에 있는 센트로미어도 하나 더 있다는 점이다. 염색체는 양 끝에 텔레미어가 하나씩 그리고 가운데에 센트로미어가 하나 있는데, 한쪽 끝이 맞붙어 텔레미어와 센트로미어가 각각 하나씩 늘어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부처님과 용수보살 등 제자들이 위대한 이유는, 과학이 전무한 시대에, 진화론을 모르고도 진화론과 같은 맥락의 무아론을 발견하고 대를 이어가며 재확인했다는 점이다.

힌두교식 아트만 윤회를 주장하는 진제 종정스님

‘주인공 참나가 헌 몸뚱이를 버리고 새 몸뚱이에 들어가며 끝없이 윤회한다’는 이론은 정확히 힌두교 아트만 윤회론이다. 진제 스님 등 한국 큰스님들의 윤회론은 ‘참나’에 기초한 윤회론이다. ‘영원히 자기정체성을 유지하는 참나가 몸을 바꿔가며, 즉 몸을 들락날락거리며 우주를 영원히 떠돌아다닌다’는 이론이다. 즉 무형의 정신적인 영혼이 유형의 물질적인 세계를 여행한다는 이론이다. 정확히 데카르트 식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다. 뇌와 신경계의 구조와 작동을 모르던 시절에나 가능한 이론이다. 데카르트(1596~1650) 사후 3년인 1653년에야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가 심장의 기능과 혈액순환을 발견했다. 그러니 당시 어느 누구도 뇌와 신경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의식은 뇌가 아니라 심장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2,000년간 정설이었다. 그러니 심신이원론이 득세(得勢)할 만했다.

한국불교계가 아직도 이런 원시적인 사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큰스님들은 우리가 모르는 ‘생명과 우주의 비밀’을 알고 있을 거라는 대중의 신비주의적 지레짐작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은 이들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전혀 알지 못한다.

‘생명과 우주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이들 큰스님들의 주장은 ‘주장만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내용은 전혀 없다’.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할 뿐이지 실제로 알고 있는 내용은 없다. 인간의 삶을 개선할 실용적인 지식이 전무하다.

(인류과학사를 보라. 지금은 상식이 된 사실들도 그것들을 발견하는 데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백 년~수천 년에 걸쳐 세대에 세대를 이어가며 평생을 바쳐 연구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골방이나 기도실에 틀어박혀 명상이나 기도를 한다고, 우주와 생명의 비밀에 대한 지식이 얻어지는가? 부처와 신이 일러준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들에게 의사자격증이나 과학연구원자격증을 주지 않는가? 그들을 모아 연구소를 차리고 매년 획기적인 ‘과학적 계시’를 발표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전문학술지도 창간하면 더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적 계시 학술지: Journal of Scientific Revelation.’)

그나마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도, 알고 보면 대부분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진제 종정은 ‘생명과 우주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근본적으로 전혀 변함이 없다’고 주장한다: ‘태초에도 인간은 인간으로 개는 개로 소는 소로 말은 말로 존재했고, 우주 역시 지금 이 모습으로 존재했다’고 하며 정면으로 진화론과 우주론을 부인한다. 한국불교계에 온갖 비리가 난무하는 이유도 이런 미개한 종교관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합리적인 사고를 못하니 비합리에 매몰(埋沒)되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다가는 배달민족은, 선진국들을 따라잡기는커녕 오히려 후진하여, 선진국들의 문화적·경제적·정치적 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진제 스님이 찾자는 참나(true atman)는 힌두교 아트만(atman)이다. 그러므로 진제 스님은 앞으로는 정직하게 “아트만을 찾읍시다”라고 하는 것이 옳다.

혜민의 노골적인 유아론적 발언: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뭔가가 살아 존재한다
그게 바로 주인공이다

모든 것은 무아이지만, 무아가 아닌 게 하나 있다
바로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을 아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무아가 아니다

혜민 스님의 발언도 진제 스님의 발언과 다르지 않으며, 아래는 2012년 미디어붓다에 실린 혜민 스님의 글이다.

< 텅 빈 것이 살아 있다. 우리의 불성(佛性)은 텅 빈 채로 있다. 즉, 아무것도 없는 채로 살아있다. 그런데 이것을 경험하지 않고 관념으로,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마치 텅 빈 무언가가 따로 있다고 상(相)으로써 잡는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無我)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착각한다. 심지어는 있다, 살아있다는 말에 끄달려 힌두교의 범아론적 가르침과 뭐가 다르냐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래서 본래청정, 본래면목, 주인공을 말하는 선불교를 포함한 대승불교 전체가 다 부처님 초기 근본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없다는 것은 중생들이 몸을, 생각을, 느낌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그 착각을 부처님께서 쳐 내신 것이다. 오온이 홀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연기되어서 아주 잠시 머무러 있는 것이지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따로 존재하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중생들이 나라고 집착하는 몸과 느낌과 생각의 관점에서 보면 틀림없이 무자성이고 무아다.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무자성이고 무아인 것을 깨닫고 난 후엔 어떻게 될까? 그 후의 일을 누군가가 진작에 소상히 일러 주었더라면 오랜 시간동안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고 고생도 덜 했을 텐 데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무자성이고 무아이구나 하는 것을 무언가가 살아서 안다는 사실이다. 내가 무아임으로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뭔가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살아서 안다. 이것이 가장 큰 신비이다.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그 무엇도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혜민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모든 것은 무아이지만, 무아가 아닌 게 하나 있다. 바로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을 아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무아가 아니다.’

평: 혜민의 주장은 망상이다. 이런 주장이라면 힌두교 주장과 다를 게 없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원인‘인 '부동의 원동자'(unmovable mover)와 같은 사상이며, 유일신교의 하나님 논증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안다는 것을 아는 또 다른 것‘이 있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끝없이 계속되어 ‘무한소급(infinite regression)' 모순에 빠진다. 이것이 모순인 이유는 ’만약 무한히 내려가야 한다면 본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두 개의 거울을 마주보게 놓는다. 밖에서 거울 A에 빛을 비추면 그 빛이 반사되어 거울 B에 비칠 것이고, 이 빛은 거울 B를 떠나 A에 비치고, 다시 빛은 A를 떠나 B로 향하고..., 이런 식으로 무한 번 반복될 것이다. 이 과정 어디에도 본체는 없다. 거울 A도 본체가 아니고, 거울 B도 본체가 아니다. 그러나 비추는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즉 본체가 없어도 앎의 과정은 가능하다. 혜민이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무아이구나 하고 아는 놈‘이 본체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앞의 예에서 두 개의 거울의 비추는 작용은 상호 연기적으로 일어난다. 그 어디에도 본체는 없다. 거울 A가 거울 B의 본체도 아니고, 거울 B가 거울 A의 본체도 아니다. 좀 더 극적으로는 서로 비추는 거울 1,000억 개를 상상해보라.

사람의 마음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한 사람의 마음을 구성하는, 일부 마음이 다른 마음을 보는 것뿐이다. 뇌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뇌의 한 부분이 뇌의 다른 부분을 보는 것’뿐이다. 혜민 스님이 말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신비로운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불생불멸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혜민 스님은 이미 2,500년에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발견한 ’우리 마음이 무아(無我)라는 진리‘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문명은 반드시 발달만 하는 것이 아니다. 퇴보할 수도 있다. 발달한 문명을 잃어버리고 미개한 문명으로 퇴보할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가 그 꼴이다.

세속학문은 어지러울 정도로 눈부시게 발달하는데, 거꾸로 불교는 퇴보하고 있다. 문명세계와 유리된 것은 반드시 퇴보한다. 35,000년 전경에 호주에서 육로를 통해 태즈메이니아로 들어간 사람들은, 그 후 해수면이 높아져 태즈메이니아가 섬으로 변하면서 본토와의 연락이 끊김으로써, 퇴보에 퇴보를 거듭해 본토에서 가져온 문화를 다 잃어버렸다. 바늘, 송곳, 방한복, 낚싯바늘, 미늘창, 통발, 투창기 등의 제작기술을 모두 상실했다. 과학과 유리된 종교의 운명도 이 태즈메이니아 인들과 다를 게 없다. 유리되면 유리될수록 더 처참한 운명이 기다린다.

본체가 없이도 훌륭한 설계가 일어나는 것이 진화론이다. 특히 식물을 보라. 불교는 “식물에게는 식(識 의식)이 없다” 하지만, ‘식이 없는’ 이 생물이 누군가가 이 생물을 기가 막히게 설계를 한 것처럼, 마치 (식물의) 배후에 본체(참나 주인공)가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진화론은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유일신교도(唯一神敎徒)들의 혐오의 대상이다. 불교도 진화론을 혐오하는가? 혜민 스님은 주인공 참나(眞我 true atman)를 주장한다. 만물의 배후에 있는, 연기를 초월한, ‘참나’라는 존재를 상정한다. 연기를 초월한 하나님을 상정하는, 유일신교도(唯一神敎徒)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선사(禪師)인 혜국 스님은 ‘각 사람의 개별 의식은 각자 의식의 담만 헐면 모두 하나의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다. 한국 선불교 큰스님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주장한다. 아마 혜민은 이런 큰스님들의 적자(嫡子)일 것이다.

진제 스님의 발언을 보라. "몸뚱이란 숨 한번 들이쉬지 못할 때 주인공이 딱 나가버리면, 사흘 이내 썩어 화장하고 묻어버려요. 뼈와 살은 흙으로, 대소변은 물로, 호흡은 바람으로,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갑니다. 본고향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거든. 하지만 주인공은 "참나"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멸한 후에도 항시 여여(如如)하게 있습니다. 이를 바로 보아야, 진리의 도가 그 가운데 다 있습니다." 하지만 진제 스님 식으로 보게 되면, 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와 족히 수백억 광년(光年)은 멀어진다.

끝없는 혜민의 망상:
배고플 때 아! 배고프구나 하는 것을 생각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 즉시 알 수 있듯
그냥 뭔가가 바로 안다

교정:
배고픔은 자율신경의 작용으로 아는 것이지 신비한 작용이 아니다
주인공의 작용이 아니다
즉시 아는 뭔가는 바로 자율신경의 작용이다


<그런데, 분명 생각이 완전히 끊어지고 난 후에도 무언가가 살아서 텅 빈 가운데에서도 무아, 무자성이구나 하는 것을 즉시 안다. 지금 바로 텅 비여서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말하듯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고로 (이무소득고 以無所得故)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절대로 개념으로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배고플 때, 아! 배고프구나 하는 것을 생각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 즉시 알 수 있듯, 그냥 뭔가가 바로 안다.>

평: 혜민의 망상은 끝이 없다. 배고픔은 위와 뇌를 연결하는, 우리의 표면의식과 관계없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자율신경(自律神經)의 작용으로 아는 것이지 신비한 작용이 아니다. 자율신경이 망가지면 배고픔을 알 수 없다. 신경계가 망가지면 폭식증 거식증 등 정신질환이 발생한다. 이때 참나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마 혜민은 ‘배고프다는 것을 아는 앎’에는 문자 그대로 시간이 전혀 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전혀 그렇지 않다. 몸에서 뇌로 신경회로를 따라 정보를 보내고 뇌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정보를 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뇌신경세포들 사이의 회로에 생체전기가 흐름으로써 정보교환·정보전달이 일어나며, 전기를 구성하는 전자는 빛의 속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뇌신경세포는 1,000억 개나 되고 그들 사이의 신경회로는 1,000조 개나 된다.

달라이라마는 1981년 하버드대학 연속강연에서 환생 시 중음신의 이동 속도는 빛보다 빠르다고 주장했는데(중음신이 우주의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으로 윤회를 할 때 빛의 속도를 넘지 못하면 어마어마하게 시간이 걸린다. 예를 들어 지구에서 우리 태양계에 가장 가까운 태양계인 센타우리(Centauri)까지도 빛의 속도로 4.3년이나 걸린다. 그러면 49재가 아니라 1,570재를 지내야 한다! 이로부터 역산을 하면 중음신의 속도는 최소한 빛의 속도의 49/1570인 초당 9,363km이다), 그런 식이라면 생각도 빛의 속도보다 빨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빛보다 어마어마하게 느리다: 초당 10m 정도로서, 이는 빛의 속도의 3,000만 분의 1이다.

혜민의 모순적인 발언: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음에 지성이 있다
비판: 그럼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성이 있다
혜민: 텅 빈 마음은 자성(自性)이 없으며 스스로 살아있다
비판: 스스로 살아있다는 그게 바로 자성이다, 아트만의 특징이다

총평: 결국 혜민의 주장은 ‘마음에는 지성이라는 자성과 스스로 살아있다는 자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마음에 아무것도 없거나 자성이 없는 게 아니다.

< “나”라고 했던 것이 그리고 무자성인 세상이 둘 다 텅 비였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세상을 둘로 나눈 것은 오직 생각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여기까지 오게 되면 텅 빈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잘 찾을 수가 없다. 왜냐면 그 텅 빈 것을 아는 것이 따로 어떤 형상이나 자성(自性)을 가지고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텅 빈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앎과 텅 빔이 둘이 아니고, 텅 빈 채로 있는 것이 살아서 안다. 즉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이 살아 있고 그것이 엄청난 지성(知性)을 가지고 있다.>

평: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이 말이 옳다면 지렁이나 아메바도 ‘텅 빈 채로 아는’ 지성(知性)이 있어야 한다. 당신은 이걸 인정하겠는가? 그리고 혜민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이 지성이라는 자성(自性: 다른 것들과 연기(緣起)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닌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성질, 불교 무아론은 이런 자성을 부인한다, 즉 일체는 연기이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둑놈이 자기 손에 든 훔친 물건을 훔친 게 아니라고 부인한다고 해서, 훔친 물건이 자기 물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혜민은 정확히 이런 오류에 빠져있다. 혜민이 말하는 ‘텅 빈 마음의 지성’은 자성이다. 불생불멸 불구부정의 자성이다! 말로만 ‘텅 빈 마음의 지성은 자성이 아니라고 부인하면’, 멀쩡한 자성이 비자성으로 변신하는가? 혜민 당신은 텅 빈 마음이 ‘살아있다는 자성’과 ‘안다는 자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는가? 도둑이 자기가 도둑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도둑이 아닌가? 당신은 분명히 텅 빈 마음의 ‘산다는 자성’과 ‘안다는 자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말로만 자성이 없다고 주장하면 정말로 자성이 없어지는 것인가?

혜민의 말은 장황하지만 모두 모두(冒頭)에 소개한 발언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실체가 없다 생각해도 그 생각을 하는 "자신"이라는 실체는 항시 존재합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모든 것은 무아이지만, 무아가 아닌 게 하나 있다. 바로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을 아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무아가 아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평: 놀랍다. 진정 놀랍다. 혜민의 발언이 놀랍다. 부처님과 정반대로 주장하는 혜민의 발언이 놀랍다. 그 용기가 가상하고 놀랍다. 그리고 그런 엉터리 발언을 진리라고 추켜세우는 한국불교계가 더 놀랍다.

< 이 앎은 허공과 같이 텅 비였기 때문에 더럽혀 질 수가 없다. 허공에다 아무리 똥칠을 해 봐야 더럽혀 질 수가 없는 이유와 같다.>

평: 혜민은, <반야심경>의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이 더럽혀질 수 없다’는 구절을, ‘혜민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인식기능인 앎이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오독하고 있고 있다. 모든 법이 공(空)한 것은 연기법을 따르기 때문이지, 영원히 살아있어 영원히 죽지 않는 그리고 조금도 더럽혀질 수 없는 지극히 깨끗한 ‘앎’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무결한’ 앎을 주장하는 만용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신비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혜민은 공(空)이라는 개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연기(緣起)라는 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중론(中論)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버드 졸업장과 종교학 교수라는 타이틀을 벗기면 과연 혜민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반(反)불교사상만 남을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적그리스도(anti-christ)이다. 불교에서, 오직 불교에만 있는 사상인, 무아(無我)를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예수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동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 또한 이 앎은 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 몸 안팎 따로 없이 안다.>

평: 이건 범(梵 Brahman)이론이다. 브라흐만 이론이다. 혜민은 자기 몸 밖의 무엇을 아는가? 가깝게는 화성을 알 수 있으며, 멀게는 마두상은하를 아는가? 신비주의자들의 앎은, 안다는 느낌만 있지, 아는 내용이 없다. 즉, 환망공상(幻妄空想)만 있지 진실은 없다. 현대한국불교의 최대 신비주의자 대행스님은 수성·금성·화성·목성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큰소리쳤다. 우주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망상은 끝이 없다. 소설가 이외수는 달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중국인구만큼이나 산다고 했다. 소설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했다. 대행 금타 등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은 이외수 같은 소설가들의 주장과 도대체 뭐가 얼마나 다를까? 하지만 이들이 끼치는 해(害)는 훨씬 더 크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사람들이 소설가들의 말은 “에이, 소설 쓰고 있네” 하고 잘 믿지 않지만, 이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의 말에는 곧잘 넘어가기 때문이다. 대중이,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이 삶과 죽음의 신비와 우주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론과 우주론에 무지한 그들이 뭘 알고 있겠는가? 이미 밝혀진 진리를 외면하고 환망공상을 좇아 칠흑 같은 어둠속으로 질주하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몽매주의(蒙昧主義 obscurantism)의 전형이다.

< 앎의 관점에서 보면 내 어깨가 결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새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하등의 차이가 없다. 정말로 똑같은 앎이다. 즉 나무를 보면 바로 그 앎이 나무에 있다. 산을 보면 그 앎이 산에 있다.>

평: 앎이라는 것은 신비주의적으로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물자체(物自體 ding-an-sich)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칸트는 모든 것이 우리 감각이라는 색유리를 통과하므로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안이비설신의’의 의(意)에는 ‘비물질적인 감각(기관)’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의(意)도 물자체를 알 수 없다. 의(意)도 색유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물자체도 없다. 모두 연기현상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상호)관계가 있을 뿐이다.

나무를 보면 그 앎이 나무에 있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앎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나무는 우리 마음 밖에도 없고 우리 마음 안에도 없다. 나무라는 앎은 나무와 마음 사이의 연기작용(緣起作用)일 뿐이다. 나무가 저기 있다는 것을 아는 작용은, 태양빛이 나무를 때리고 그 빛이 나무표면에서 반사되어 우리 망막을 때리면 빛에너지가 생체전기를 발생시켜 그 생체전기가 신경을 따라 뇌에 있는 시각중추로 전달되면 뇌에 저장되어있는 기존의 나무에 대한 정보와 비교하여 그것이 나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 무척 복합적인 연기작용이다. (물론 장님이라면 거기 나무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의식이 없는 컴퓨터도 이와 동일한 과정을 거쳐서 대상이 나무인지 동물인지 식별하고 판단할 수 있다. 화성탐사로봇 등이 바로 이런 인지활동을 한다. 그러므로 앎이란 혜민이 주장하듯이 신비로운 주인공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할 필요도 없다. 이런 생각은 원시시대의 망상인 ‘천둥·번개·우박·바람·지진·비 등 자연현상의 배후에는 그 현상을 일으키는 의지를 지닌 존재가 있다’는 망상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망상이다.

<뒤집어 말하면 나무가 있다는 것을, 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텅 빔 그 자체다. 그리고 그 텅 빈 앎은 어느 한 곳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고 안팎을 다 투과한다.>

평: 아메바 지렁이의 앎도 천지를 투과하는가? 아니면 그런 앎은 인간에게만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모든 생물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과 어긋나지 않는가? 혜민 당신의 앎은 당신의 앎일 뿐이다. 혜민은 ‘참선 중에 나타나는 앎’을 마치 우주를 관통하는 천지를 다 품는 존재로 묘사하지만, 이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육조혜능 스님 시대의 남양혜충 스님이 준엄하게 비판한 남방의 ‘소소영령한 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류의 망상은 자신의 의식의 장난에 속아 넘어간 것에 불과하다. 
 
혜민의 천지여아동근적인 범아일여
天地與我同根的 梵我一如

<천지가 그냥 텅 비어 있고 그러기에 주와 객, 나와 세상을 동시에 포섭한다.>

평: 오척단신(五尺短身)의 몸 안에 있는 앎이 남과 천지를 다 포섭한다니, 과대망상도 이런 과대망상이 없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가르치신 부처님이 언제 이런 과대망상을 가르치셨다는 말인가? 혜민, 그대는 육식을 하는가? 아니 하는가? 만약 육식을 한다면 당신이 잡아먹는 동물에게는 앎이 없는가? ‘혜민과 그 동물과 우주를 다 포섭하는’ 앎을 지닌 그 동물을 잡아먹는가? 겸손하시라. 인간종(種)쇼비니즘을 행하지 말라. 무슨 천지와 우주를 포섭하는가? 멸치 한 마리도 제도하기는커녕 잡아먹는 주제에 무슨 천지와 우주를 다 포섭하는가? 히틀러가 인류를 다 포섭한다고 주장하면 당신은 그 말을 받아들이겠는가? 최소한 전(全)세계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날 것 아닌가? 인간이 가진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시라. 인간이 고(苦)를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신비로운 앎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연기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고정된 채로 머물러 있다면 고도 영원히 고정되어 탈출할 길이 없을 것이다. 세상이 연기이기에 그 틈을 벌리고 그 틈으로 마음을 내밀어 고를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신랄(辛辣)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인간의, 그중에서도 특히 종교인들의 지적인(대뇌신피질적인) 위선에 분개(憤慨)하기 때문이다. 지적인 위선은 정신적인 자위행위(mental masturbation)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 눈에는 인간이 마치 히틀러처럼 보인다. 인간 이외의 종(種 species)을 다 잡아먹고 사냥하고 우리에 가두고 눈요기로 삼고 실험용동물로 만들어 온갖 흉측한 짓을 다 하면서도, ‘천지를 관통하여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과대망상적인 위선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세렝게티 초원의 사자나 하이에나처럼 그냥 말없이 잡아먹고 살면 되지 왜 자신을 마치 자비의 화신인 양, 우주의 비밀을 다 아는 깨달은 자인 양, 위선을 떠는가?

냉정하게 보자면 범아일여(梵我一如)적 참나론자 스님들은 피해자이다. 한국불교문화의 피해자.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마음의 중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자신의 명상체험을 우주적인 사건으로 과대포장하게 된 피해자이다. 그냥 소박하게 살면 뭐가 문제인가? 당신이 언제 우주적으로 살았고 또 살고 있다는 말인가? 아침에 변을 보면 우주적으로 변을 보는가? 우주가 당신과 더불어 변을 보는가? 밥을 맛있게 먹고 트림을 하면 우주적으로 트림을 하는가? 우주가 당신과 더불어 트림을 하는가? 저녁에 잠에 들면 우주적으로 잠에 드는가? 우주가 당신과 더불어 잠에 드는가? 그리고 아침이면 우주가 당신과 더불어 깨어나는가? 인류역사상 우주적으로 산 사람이 있는가? 마두상은하 어느 행성에 일어나는 전쟁과 학살과 자연재해의 참극에 밤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하며 산 자가 있는가? 인류역사상 누가 우주와 더불어 고통과 기쁨을 나눴다는 말인가? 정직하게 답해보시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학살을 당할 때, 지구반대편 골방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서 자기가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혜민: 생각이 완전히 끊어지면 주인공이 나타난다
비판: 이는 힌두교 망상이다


<분명 여기까지 읽고 나면 어떤 이는 또 관념으로 머리로 이해해서 나에게 따질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 없다고 하셨는데 어찌해서 있다고 하냐고. 없는 채로, 텅 빈 채로 있는 것도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반대로 텅 빈 것이라는 것을 또 다른 상으로 붙잡고 나서 노력해서 얻어야하는 어떤 대상, 목표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둘 다 문제이다. 생각 속에 갇혀서 이해의 수준에서 바라보면 이처럼 항상 텅 빈 마음과 그 텅 빈 마음을 경험하는 뭔가가 따로 있다고 자꾸 이분화(二分化)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텅 빈 마음을 관념으로 “내”가 얻으려고 하거나, 텅 빈 마음을 경험하고 나서도 “내”가 남아 있다고 생각으로 오해한다. 왜 이렇게 질문이나 오해를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후, 의식이 다시 깨어나 주객을 포섭하는 앎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으로, 상으로 자꾸 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평: ‘주객을 포섭하는 앎’이라는 것은 당신의 환상이자 망상이다. ‘주객을 포섭하는 앎’이라는 ‘단어’만이 어지러이 날아다닐 뿐이다. 당신이 하는 말은 모두 생각의 소산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메바나 지렁이도 ‘당신이 말하는 그런 앎’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메바와 지렁이가 정말 그러한 앎을 지니고 있는가? 당신이 포섭한 것은 당신의 환망공상(幻想·妄想·空想·想像)뿐이다.

혜민: 무아임을 아는 앎은 연기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비판: 그렇지 않다, 앎이라는 현상은 연기이다
     연기법 자체는 연기가 아니지만, 연기법을 아는 것은 연기이다
     즉, ‘연기법이라는 대상’과 ‘그것을 아는 인식 주체’ 사이의 연기이다

     혜민이 비연기적인 것으로 절대화하는 ‘앎’은,
     하나님에 대한 표현인 기독교 요한복음의 ‘로고스(Logos)’와 유사한 존재이다.

<크게 보기 무자성, 무아임을 바로 아는 앎은 연기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연기해서 일어났다고 하면 그 앎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 깨달음은 변하지 않는다.>

평: 이런 말은 진화론에 무지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눈이 점진적인 진화를 거쳤고, 빛을 겨우 감지하는 원시적인 눈에서부터 시작해서 암실 수준의 눈을 거쳐 인간의 눈에 이르기까지, 10여 개 중간단계의 눈이 자연계에 존재하듯이, 보느냐 마느냐 두 개의 흑백논리적인 시력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의식도 ‘의식하느냐 마느냐’는 단 두 개의 흑백논리적인 의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중간 단계의 무수한 의식이 존재한다. 자연계의 생물들의 지성에도 진화의 정도에 따라 무수한 단계가 있으며, 지성적인 의문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의식이 낮은 자에게는 ‘의식이 높은 자에게 일어나는’ 의문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 의식은 일종의 장막과 같다. 자기의식에 일어나지 않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위의 혜민 스님의 견해는 현대뇌과학과 진화론에 무지해서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미 폐기처분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부활시켜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텅 빈 앎은 세상에 자기 혼자 밖에 없다는 것을 또 스스로 안다. 텅 빈 마음이 깨어나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한다.>

평: 여기서 ‘텅 빈 마음’이란 이 글 모두(冒頭)에 인용한 혜민의 발언 “아무리 실체가 없다 생각해도 그 생각을 하는 ‘자신’이라는 실체는 항시 존재합니다”에 등장하는 생각하는 자신으로서의 실체이다. 혜민은 유아론적 실체론자이다. 다른 선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진제, 서암, 청담, 혜국 스님은 모두 ‘우주와 생명의 실체’인 주인공 참나를 믿는 유아론적 실체론자들이다.

텅 빈 마음이 ‘스스로’ 안다면, 이런 앎은 왜 지렁이에게는 없는가? 텅 빈 마음이 깨어나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한다면, 왜 이런 일이 지렁이에게는 일어나지 않는가? 당신의 텅 빈 마음이 ‘스스로’ 안다면, 지렁이의 텅 빈 마음도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이다. 텅 빈 마음이 누구에게나 ‘본래’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지렁이에게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즉 텅 빈 마음은, ‘있던 것을 모두 비워서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텅 비어 있는 것’이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처음부터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수행을 하건 안 하건 처음부터 있어야 하고 ‘스스로’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럼 당신은 수행을 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텅 빈 마음이 ‘스스로’ 깨어나고 ‘스스로’ 안다면 당신이 수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수행을 하건 말건 텅 빈 마음은 ‘스스로’ 깨어나 ‘스스로’ 알 것 아닌가? 혜민 스님의 이런 유의 사유는 소위 희론(戱論)이다. ‘참나’ ‘텅 빈 마음’ 등 형이상학적인 단어만 어지러이 날아다닐 뿐이지 그 내용이 없다.

< 이것이 수행의 엄청난 묘미이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앎은, 그 텅 빈 마음은 부처도 알 수 없다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또 있다. 부처가 몸을 구중궁궐(九重宮闕)속에 숨겼다는 도리도 여기에 있다. 이 자리를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으므로 시자에게 빗장 문을 잠그라는 도리도 여기에 있다. 선불교의 선(禪)자를 파자해 보면 왼쪽에 볼 시示와 오른쪽에 홀로 단單으로 이루어졌다. 즉, 선은 혼자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삼계(三界) 안에 그 텅 빈 앎만 홀로 가득 있다.>

평: 그런데 혜민 스님은 ‘부처도 알 수 없다는 그 앎, 즉 텅 빈 마음을’ 자신은 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비주의자들 발언의 공통점이다. 이들은 ‘아무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신만은 안다’고 주장한다, 이 말에 대중은 ‘저이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혼자만 알고 있구나’ 하고 무한한 흠모를 바친다. 이것은 정확히 한국선사들의 전형적인 신비주의적인 유아론이다.

기독교 회교 등 다른 종교수행자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수행의 묘미를 느낀다. 그런데 한 종교는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므로, 많아야 한 종교만 참이고 나머지는 다 헛소리이다. 모두 다 헛소리일 가능성도 무척 크다(마지막 하나까지도 헛소리일 가능성이 엄청나게 큰 것은, 모두 과학에 무지하고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종교수행자들이 느끼는 수행의 묘미는 환망공상에 기초한 묘미이다. 즉 환망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수행자들은, 혜민 말 맞다나, 엄청난 묘미를 느낀다. 혜민의 수행상의 묘미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설·영화·드라마 등의 픽션에서 즐거움을 느끼므로, 종교적인 픽션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존재 자체가 환망공상이다. 과학적 발견을 거부하는 인간은 순도 100% 환망공상이다.

겨자씨같이 작은 지구표면에 붙어사는 주제에, ‘삼계 안에 텅 빈 앎이 가득하다’며 삼계를 들먹이다니 중증 과대망상증이다. 사실은, 삼계 안에 가득한 것은 ‘속이 꽉 찬’ ‘우주 크기의 초대형’ 환망공상이다. 이런 환망공상은 많은 경우에 난치병(難治病)이거나 불치병(不治病)이다. 종교를 잘못 믿으면 깨달음이 아니라 망상을 얻는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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