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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장사 그만 합시다
[김광수] 다시 ‘깨달음’ (12)
2017년 08월 30일 (수) 10:43:20 김광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wonthong1@hanmail.net
   
 

우리나라 불교가 가장 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할 점이 기복성(祈福性)라고 한다. 어느 종교에나 기복성은 있지만 그것은 종교의 가치로 볼 때 가장 차원이 낮은 것이다. 기복성으로는 개인의 정신을 고양시켜 줄 수도 없고, 존재의 진리도 깨달을 수 없으며,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도 없고, 성불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기복성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사찰로 모으기 위해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이 윤회사상이다. 또한 이렇게 오도된 윤회, 악용된 윤회, 의존적 구복과 가피(加被)사상 이런 것들 때문에 한국불교가 더욱 기복성을 극복하기 힘들게 된다. 그러면 이제 윤회가 어떻게 오도되었는가를 살펴보자.

 

1. 사람은 죽고나서 어찌 되는가.

윤회는 불교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고 한다.(박경준, 불교사회경제사상, p 294) ① 당시 인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도 그냥 그것을 인정했다고도 하고, ② 브라마니즘이 워낙 강고히 그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기 힘들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윤회사상을 강조하는 행위는 아니라 불교가 가장 거부했던 힌두교, 혹은 브라마니즘의 행위가 되겠다. 실제로 윤회사상은 세계 어느 곳에나 미만해 있고,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또한 윤회라고 해도 그 내용은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윤회”라는 말은 같지만 그 내용은 서로가 많이 다른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가? 이런 것들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어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우선, 임사체험이란 죽음 가까이 갔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체험인데, 그것은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는 지의 체험은 아니다. 죽는 순간에 관한 체험이다. 또 그들이 겪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겪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실제로 사람은 죽고 나서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사람은 ① 육체와 정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② 몸과는 별도의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사람들은 느낀다. 그리고 ③ 정신의 힘이 육체의 힘보다 더욱 강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 나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가 힘들다.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저절로 없어진다고 생각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육체가 죽으면 정신은 나중에 서서히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정신(영혼, spirit)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있기는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차라리, 사람이 죽고 나서는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생각이 오히려 이상한 생각이고 소수의 생각일 수도 있다.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죽고 나서 천당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생각한다. 어쨎든 어디론가 간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이 지구로 다시 오지는 않지만 어디론가 간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를 믿었으니까, 그 사람들 대부분도 죽고 나서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기야 기독교를 믿었다고는 해도, “성경에서 그러니까, 목사님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고, 실제로 사람들은 그냥 막연히 모르는 채로 살기도 했을 것이다.

 

“모른다”고는 했지만, 실제로 그걸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문제에 관한 한 정답은 없다. 그저 막연히 생각하거나, 추측하거나, 서로 생각을 달리할 뿐이다. 이들을 대충 종류를 나누어 보면, ① 없어진다, ② 서서히 소멸한다, ③ 어디론가 간다, ④ 인간이나 축생을 다시 태어난다, 이 네 가지로 나뉠 수 있겠다. 다만, 인간이나 축생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윤회설은 불교 보다는 힌두교나 브라마니즘이 훨씬 강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불교는 온통 윤회만 강조하고 있으니, 그 점만 본다면 우리나라 불교는 불교라기 보다는 차라리 힌두교라고 해야 옳겠다.

 

2. 윤회의 부정

잘 아시다시피, 불교의 중심 교리는 공(空)사상, 연기사상, 유식 사상, 4제8정도, 6바라밀 이런 것들이다. 불교의 중심 교리인 무상, 공 무아에 “죽고나서 어떻게 된다”는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다. 내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불교인데, 지금의 나도 내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인데, “죽고나서”가 붙을 자리는 없다. 우선, 죽고나서 내가 어떻게 되고 안되고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은 바로 개아론(個我論), 즉 부파불교의 독자부(犢子部)가 주장했던 보특가라(pudgala)론으로서, 일찍이 불교에서 부정되었던 것이다. 불교가 깨달아야 하는 잘못된 견해, 즉 악견에는 다섯가지가 있는데(5하분결),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감각적 욕망, 악의(惡意)이다. 그 중 대표적인 유신견(有身見)이란 “자아가 있다는 견해. 오온(五蘊)이 나라는 것, 나의 것이라는 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는 삿된 견해”이다. 여기에는 윤회하는 주체인 “나”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조석으로 금강경에서 매일 외우는 것이다.

 

실상, “사람이 죽고나서는 어디로 가는가”하는 문제는 불교의 중심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부처님은 거기에 대해서 요즘 말로 NCND 하셨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셨다는 거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제자 말룽기야뿟다(만동자)가 부처님께 어쭈었을때, 부처님은 “씰데없는 질문” 이라고 그를 꾸짓으셨다. 화살의 비유라고 해서 전유경이라고도 한다. 또 부처님은 다제경(茶諦經)에서 다제 비구가 “식(識)이 있어서 변함없이 유전하고, 윤회한다” 라고하는 다제비구의 생각이 잘못이라고 다제비구를 꾸짖으셨다, (다제경, T:1, 767a)

 

3. 잘못된 윤회이론 (개아적 윤회)

반면에 불교에서 윤회를 주장하는 이론을 두가지만 들자. 우선 첫째는 경전에는 분명히 윤회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가장 뚜렷한 것으로, 중아함의 앵무경이 있는데 (T1:704b), 앵무마납의 아버지인 도제는 지나친 교만심 때문에 죽어서 흰 개로 태어나서 자기집 즉 아들 집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경준 교수는 이것을 그저 고대의 단순소박한 영혼관이 불교경전에 끼어들었을 뿐이라고 본다. 진정한 불교의 교리와는 매우 어긋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교의 경전에는 단순한 설화나 소박한 민중신앙이 많이 끼어들어와 있다.

 

둘째는 인과업보사상인데, 윤회 문제에 있어서는 쉽지 않은 것이 인과업보사상이다. 왜냐하면 인과업보 사상을 불교에서는 전생과 후생의 윤회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일견, 무아사상과 인과업보 사상은 정면적으로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인과업보 사상은 불교의 교리로는 차원 낮은 사상이다. 대승에서는 그것을 소승으로 폄하했고, 천태종에서는 장교(藏敎)라고 해서 가장 첫단계의 단순한 가르침이라고 했으며, 선종에서도 흔히 인천교(人天敎)라고 해서 세간에서 알기쉽게 사람들을 순치(順治)시키는 교리이며 진정한 깨달음에 관한 가르침은 아니라고도 했다. 인과업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방편설이라는 것이다.

 

4. 연기적 윤회 (부처님의 윤회)

이야기가 좀 복잡해 졌는데, 한가지만 더 짚자면, 부처님도 윤회를 인정하셨고, 경전에도 윤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윤회의 경우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 길을 가다가 돌무더기 무덤을 보고 극진히 절을 하셨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쭈었더니, “이 무덤은 오래전 나의 부모님의 무덤이었느니라” 라고 대답하셨다.

 

우리는 세세생생 수백억 나유타 겁(劫)동안 윤회를 한다. 그리고 수백억 나유타겁 수만큼의 어머니를 가진다. 그러므로, 세상의 중생 중에서 언젠가 한번이라도 나의 어머니가 되지 않았던 중생은 없다. 그러니, 전생의 나의 어머니를 위한다면 세상 모든 중생을 어머니로 모셔야 한다. 적어도 윤회를 이야기하려면 이정도 얘기는 해야하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이를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키는 방편“으로 설명한다.

 

나는 이를 연기적 윤회라고 이름 붙인다. 혹은 이를 “개아적 윤회”의 반대말로 “통아적 윤회”라고 해도 되겠다. 유심히 경전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실 때는 거의 이 “연기적 윤회”를 말씀하셨다. 세상 만물, 모든 유정물이 모두 나의 어머니라고 하는 이 사상은 “나”라는 한 개인이 죽어서 어디로 가고 안가고 라는, “나”라는 “아상(我相)”에 묶인 개아적 윤회가 아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윤회 개념을 개아적 윤회와 혼동하면 안된다. 힌두교가 주장하는 개인, 자아에 대한 집착을 죽어서도 버리지 못하는 그런 저열한 수준의 윤회와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 불교는 개아적 윤회를 자꾸 강조하여 윤회 장사를 하고 있다. 돈벌이가 문제가 아니라, 입으로는 금강경을 말하면서도 “개아윤회”를 강조하여서 죽어서도 버리지 못하는 개아에 대한 집착을 자꾸 강화시켜 주고, 아상을 강화시켜 준다는 것이 잘못이다.

 

5. 49재

한편, 인과업보사상으로 보더라도, 후손이 망자(亡者)의 잘못을 덜어줄 수는 없다. 그럼에도 후손이 절에서 치성을 드리고 많은 돈을 들여서 49재를 하는 것은 일종의 부모를 위하는 마음, 즉 효(孝)사상일 것이다. 물론, 죄를 많이 지은 어머니를 목련이 지옥으로 가서 구출한다는 “목련경”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중국적 효사상에 의한 것이다. 부모를 위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그러나 불교의 교리로 보면 맞지 않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에는 맞지 않는, 차라리 힌두교적인 내용이다.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자식들이 재(齋)를 올리는 것을 탓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찰의 주 수입원이 되는 것은 곤란하다. 이렇게 스님들이 불교의 교리에 맞지 않는 개아적 윤회를 법회 때마다 강조하고, 정작 불교의 가르침은 멀리 하는 현실이 문제다. 그것이 자꾸 기복불교를 강화하는 것이다.

 

불교를 믿다가 부모님들이 타계하시면 절에서 49재를 지내야하는데, 49재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임종 시에는 부모님들 스스로 천주교로 개종을 한다고 한다. 혹은 자식들에 의해서 천주교로 개종되고, 기독교로 개종된다. 자식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재를 지내는 비용 때문에 불교를 버리시는 것이다. 49재 뿐만이 아니다. 해마다 백중날 절에 하얀 등이 줄줄이 걸리는 것도 윤회 장사이고, 생전예수재 따위도 윤회장사이다. 그러고 보면 부처님 오신날을 빼고는 절의 수입이 거의 대부분 조상의 죽음과 관계된 것이다. 그러니 절에서는 윤회를 강조할 만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윤회를 팔아서 절의 수입을 올리는 일은 옳지 않다.

 

우리나라 절들은 거의 대부분 (90%이상) 가난하다. 정말로 가난한 절들이 대부분인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프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이젠 더 이상 절이 부모님들의 죽음과 관련되는 일을 함으로써 명맥을 이어가는 일은 이제 끝내야 한다. 그것은 불교의 교리에도 맞지 않고, 동시에 신자들을 우민화, 바보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윤회 이야기하는 데에 어디 공사상, 반야사상, 연기와 진여사상이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절이 재(齋) 지내서 먹고 사는데, 재를 지내지 말라면 절은 뭘 먹고 살라는 말이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절은 재를 지내서 먹고사는 데는 아니다. 산중 수행처에서는 백장 스님처럼 자작농을 하고, 사찰공동체에서는 신도님들의 보시금과 탁발, 그리고 회원들의 회비로 사찰은 운영되어야 한다.

 

6.

그러나 신도들의 부모님들이 별세하셨을 때 장례 의례는 어쩔 것인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올바른 불교의 장례문화, 즉 “사찰장례 간소화”가 이룩되어야 한다. 그것이 짧은 동안에 정립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제안하건대 예를 들어 <전국 사찰에서 어느 절에서나 49재를 올리는 데는 초재와 말재만 가족들이 동참하고, 소요시간을 30분 이내로 하고, 비용을 100만원으로 통일한다>는 등이다. 원래 예전부터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허례허식의 풍습이 있어왔다. 그래서 장례간소화도 국가 차원에서 오래전부터 요구되어 왔던 것이다. 또 그래야지만 많은 가난한 사람들도 부담없이 절에서 부모님 상례를 치를 수 있다. 그것이 또한 국민에 대한 종교 서비스의 일종이다.

 

그러면 돈많은 부자가 부모님 49재를 성대히 치르고 싶어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자라면, 그리고 올바른 스님이라면 그 돈을 49재 치르는데 낭비하지 말고,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쓰도록 인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또한 망자를 위하는 길이다. 스님들은 공부하고 법문하는 일을 해야 한다. 돈많은 부자들을 위해서 매주일 몇시간씩 목탁 쳐 주는 일이 스님들이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런 기복행위를 위해서 “개아윤회”가 강조되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 김광수 한양여대 교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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