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논설

마성 2018. 1. 22. 16:30


<불교란 무엇인가>

 

1강 믿음과 수행의 종교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불교(佛敎)붓다의 가르침이다. 빨리어 붓다-사사나(Buddha-sāsana)’붓다의 가르침’(the teaching of the Buddha)이라는 뜻이다.(Vin., p.12; DN., p.110; DN., p.206; AN., p.294; Dh. 381; Sn. 482 etc.; J., p.116.) 붓다(Buddha)깨달은 자[覺者]’라는 뜻이고, 사사나(sāsana)는 명령(order), 메시지(message), 가르침(teaching)이라는 뜻이다.

붓다시대 붓다의 가르침은 붓다-와짜나(Buddha-vacana, 붓다의 말씀), 붓다-사사나(Buddha-sāsana, 붓다의 가르침), 삿투-사사나(Satthu-sāsana, 스승의 가르침), 사사나(Sāsana, 메시지 혹은 가르침), 담마(Dhamma, , 진리) 등으로 알려져 있었다.


불교를 영어로 부디즘(Buddhism)이라고 부르지만, 동남아시아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디즘이라는 영어 대신에 붓다-사사나(Buddha-sāsana)’라는 빨리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붓다는 무슨 주의를 제창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고 말한다. ‘불교가 과학이다고 표현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구의 불교학자들이 이미 100년 전에 사용했던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불교의 어느 한 부분적 특성을 드러낸 것 일뿐, 불교의 본질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단정적 표현은 자칫 불교의 본질을 왜곡시킬 염려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스리랑카 출신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1909-1997) 스님은 진리에는 표식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불교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이 없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명명(命名)하든 불교의 본질은 그대로다. 명칭은 대수롭지 않다.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부여한 불교라는 명칭조차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부여한 이름은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름 속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에, 다른 이름을 부여하더라도 냄새는 향기로울 것이다.”(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Gordon Fraser, 1959, p.5)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불교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불교는 불교일 뿐이다. 불교 이상도, 불교 이하도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정치, 경제, 사회, 윤리 등 제반 분야에 해당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느 한 가지 측면에서만 불교를 바라보고, ‘불교는 철학이다, 심리학이다, 과학이다등으로 규정짓는 것은 부분적인 진리일 뿐이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붓다의 가르침 속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모든 학문의 영역이 다 용해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서구의 학자들은 불교가 합리성, 논리성, 과학적 실증주의 등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불교는 과학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불교에 대해 호감을 갖는 이유도 이러한 불교의 특성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교의 본질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불교는 인간형성의 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붓다가 일생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 바로 인간형성의 길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먼저 가르침의 진수를 정확히 이해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난 뒤 바르게 이해한 것을 수행함으로써 열반의 경지를 실현하도록 인도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형성의 길이다.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AN4:36)에서 붓다는 도나(Doṇa)라는 바라문이 존자께서는 신()이 되실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자신은 데와(deva, )도 아니고, 간답바(gandhabba, Sk. gandharva, 乾達婆)도 아니며, 야카(yakkha, Sk. yakṣa, 夜叉)도 아니고, 마눗사(manussa, Sk. manuṣya, 人間)도 아니며, 오직 붓다(Buddha, 佛陀)일 뿐이라고 답변했다.(AN., pp.37-39)


그러나 후대 인도에서 붓다를 신격화시킴으로써 불교가 힌두교 속에 습합되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를 신과 같이 섬기면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 위배된다. 불교는 붓다를 신으로 믿고 받드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믿음과 수행[信行]의 종교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맹목적인 믿음[信仰]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믿음과 더불어 수행을 강조하지 않는다. 수행을 통해 인격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는 인간형성의 길이다.

또한 불교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곧 남을 보호하는 것’[自護護他]임을 일깨워주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위로 깨달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붓다의 제자인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는 수행과 교화를 위해 살아야 한다. 수행과 교화는 불교도의 본분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수행이란 고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고행이란 스스로 육체적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자이나교(Jainism)에서는 수행이 곧 고행을 의미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억지로 육체를 괴롭힐 필요가 없다. 불교에서의 수행이란 탐()()() 삼독(三毒)에 토대를 둔 잘못된 생활습관을 올바른 생활습관으로 바꾸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근기(根機: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지적 능력을 말함)에 따라 다양한 수행법이 제시되었다. 이를테면 오정심관(五停心觀)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 속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모든 학문의 영역이 다 용해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진은 마투라 불상



오정심관이란 다섯 가지 불건전한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법이라는 뜻이다. 첫째, 탐욕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부정관(不淨觀: 몸의 더러움을 관함)을 닦아야 한다. 둘째, 분노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비관(慈悲觀: 모든 생명체들의 행복의 염원함)을 닦아야 한다. 셋째,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관(因緣觀: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함)을 닦아야 한다. 넷째, 아집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무아를 통찰하는 계분별관(界分別觀: 오온십이처십팔계)을 닦아야 한다. 다섯째, 분별심이 강한 사람은 수식관(數息觀: 들숨과 날숨을 관함)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수행을 통해 지혜를 계발(啓發)하게 된다. 불교를 다른 말로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지혜의 가르침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지혜이다. 지혜 없이는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지혜는 지식을 바탕으로 얻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스님들의 법문 중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 그대로 유통되고 있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출처가 불명확한 정보들은 초심자들에게 오히려 불교를 잘못 인식시킬 염려가 있다. 예전에는 주로 스님들이 불교설화나 전설, 혹은 고승들의 일화를 들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내용으로는 도저히 대중들을 선도할 수가 없다. 단 한마디의 설법일지라도 근거와 출처가 명확한 내용일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전에 근거한 인용문과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구분하여 대중들에게 전달해 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어디까지가 불설(佛說)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견해인지를 다른 청중들이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전혀 숨기지 않았고, 결코 제자들로부터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맹목적이고 순종적인 믿음을 이끌어 내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붓다는 신중한 검토와 지적인 탐구를 역설했다. 붓다는 『깔라마 숫따(Kālāma-sutta)』에서 전거(典據)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제시해 놓았다. 붓다가 깔라마(Kālāma)들에게 들려준 유명한 권고는 불교학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의 시야를 넓히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 경전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이곳을 방문하는 몇몇 사문(沙門)들과 바라문(婆羅門)들은 저마다 오로지 자신들의 견해에 대해서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욕하고 멸시합니다. 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이곳에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의심스럽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렇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의심은 의심스러운 일에서 일어난다. 깔라마들이여, 풍문이나 전설이나 소문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경전의 내용으로, 단순한 논리나 추론 또는 상황을 두루 살핌으로, 어떤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숙고한 결과로,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고, 그대들의 스승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지 마시오.” (중략)

깔라마들이여,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대들에게 풍문이나 전설이나 소문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경전의 내용에도 이끌리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AN., pp.188-193)

 

붓다가 깔라마들에게 가르쳤던 핵심 요지는 누구든지 그것을 먼저 시험해 보지 않고, 믿을 만한 근거라는 이유로 어떤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진리와 관련된 진실임을 증명한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보아 진술의 결과를 테스트해야만 되며, 그리고 난 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깔라마들에게 들려 준 훈계에 따르면, 전적으로 권위를 배제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보고나 전통, 소문이나, 종교적 성전의 권위, 논리나 추론, 겉모양의 고려, 사변적 견해에 대한 기쁨, 외관상의 가능성, ‘이것이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관념 등에 이끌리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 진리에 접근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붓다는 『위맘사까 숫따(Vimamsaka-sutta, 思察經)』에서 제자는 붓다 자신조차 시험해 보아야만 그가 따르는 스승의 진정한 가치를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MN., p.317f.) 맹목적인 믿음으로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교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현명한 사람이 금의 순도를 측정하기 위해 그것을 태우고 잘라 보고 문질러 보듯이, 너희들도 단순히 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라 내 말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난 뒤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Jñānasāra-samuccaya, 31)고 했다.


불교는 강제나 강압과는 거리가 멀며 추종자들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면밀히 검토해 보라고 불교에서는 권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은 불교의 이러한 성격을 반길 것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눈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비록 어떤 교의(敎義)나 계율(戒律)에서 유래된 근거나 자료일지라도, 반드시 그 출처를 조사하고, 불교교리의 전체와 함께 비교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와 같이 했을 때, 어떤 교설이 경과 율을 벗어났다면, 경과 합치하는 것이 아니고, 율과 일치하지 않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분명히 세존의 말씀이 아니다. 그런 것은 과감히 거부되어야 한다.


요컨대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비록 붓다나 자신의 스승이 한 말일지라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먼저 의심해 보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확인해 보는 절차를 거친 뒤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는 누가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진리인가만을 문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자세야말로 진리에 접근하는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 《한국불교》제671호 2018년 1월 19일 21면에 게재 ―



마성 스님 약력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취득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마음 비움에 대한 사색> 외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