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칼럼

마성 2018. 8. 4. 19:06


  대승불교의 삼종삼보(三種三寶)

 

삼보는 불교를 형성하고 있는 세 가지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뼈대이다. 이것은 또한 종교의 기본적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이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비로소 불교도가 된다. 불교도란 삼보에 귀의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오직 삼보에 귀의할 뿐, 어떠한 외도(外道)의 가르침도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가장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삼귀의문(三歸依文)’이다. 그런데 상좌불교의 삼귀의문은 통일되어 있지만, 대승불교의 삼귀의문은 현재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이 유통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삼귀의문에 크게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삼보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이 달라졌다. 그 이유는 교리적으로 불신관(佛身觀)이 변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삼보의 실체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후세에 와서는 삼종삼보설(三種三寶說)로 종합 정리되었다. 《대승의장(大乘義章)》10에 의하면, 삼보는 일체삼보(一體三寶), 별상삼보(別相三寶), 주지삼보(住持三寶)로 구분된다.[慧遠撰, 《大乘義章》10(T44, p.654b)] 여기서는 편의상 주지삼보, 별상삼보, 일체삼보 순으로 살펴본다.

 

1) 주지삼보(住持三寶)

주지삼보란 불멸 후 불교가 유지되어 온 바탕이 되는 세 가지 보배, 곧 불상과 경전과 비구비구니의 교단을 말한다. 현재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적 삼보를 가리킨다. 《치문(緇門)》진흙으로 빗은 것이나 나무로 조성한 것을 불()이라 하고, 황권적축(黃卷赤軸: 서적을 말한다. 옛날의 책은 두루마기 형태로 만들어졌다. 가운데 붉은 막대기를 대고 그 위에 종이를 이어 붙여 감았다. ‘黃卷이란 말은 옛날에 책이 좀먹는 것을 막기 위해 黃蘗 나무의 內皮로 염색한 황색 종이를 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이라 하며, 머리를 깎고[削髮] 먹물 옷을 입은 자를 이라 한다. 이것을 주지삼보라고 한다.”(泥塑木造爲佛, 黃卷赤軸爲法, 削髮染衣爲僧, 是名住持三寶.)라고 定義하고 있다.

 

첫째, 주지불보(住持佛寶)란 금철이나 돌나무흙으로 조성한 등상불과 그림으로 그려서 모신 탱화나 괘불과 같은 화상불(畵像佛)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둘째, 주지법보(住持法寶)란 경론의 삼장과 십이부(十二部) 대소승 경전을 판으로 새기거나 인쇄하거나 글씨로 써서 모셔놓은 황권적축(黃卷赤軸)의 경전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이고득락(離苦得樂)하고 성불하여 끊어지지 않으므로 주지법보라 한다. 주지법보의 대표적인 예는 가야산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셋째, 주지승보(住持僧寶)란 머리를 깎고[削髮], 먹물 옷을 입고[染衣], 법을 연설하여 중생을 교화제도 하고, 부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므로 주지승보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승보는 비구비구니, 즉 출가자를 가리킨 것이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의 신앙 대상은 주지삼보였다. 현재의 상좌불교에서는 일단 형식적으로는 이 주지삼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주지삼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무너지고 마는 덧없는 것이다. 지어진 것은 모두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차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삼보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삼보의 개념은 보다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삼보의 개념이 바로 별상삼보와 일체삼보인 것이다.

 

2) 별상삼보(別相三寶)

별상삼보는 불보와 법보와 승보는 각각 특징이 다르다는 뜻이다. 이른바 삼보인 체상(體相)의 이름이 서로 달라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 별상(別相)이라고 한다.

 

첫째, 별상불보(別相佛寶)란 부처님의 몸[佛身]을 말한다. 불신(佛身)이 곧 별상불보인 것이다. 불신설(佛身說)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예를 들면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설(三身說)과 사신설(四身說), 십신설(十身說), 화엄종의 십불설(十佛說), 다불설(多佛說), 다불설에도 시간적 다불설, 공간적 다불설 등이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모든 불신(佛身)은 삼신설(三身說) 안에 다 포함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부처의 몸[佛身]은 본래 하나인 법신이지만, 사람들이 성질을 달리하기 때문에 그 나타내는 몸도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구하는 바와 그 과보에 의하여 불신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둘째, 별상법보(別相法寶)는 붓다께서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오시(五時: 붓다의 一代時敎를 분류한 것. 즉 화엄시아함시방등시반야시법화열반시)로 나누어 설교한 모든 경전, 즉 삼장 십이부소전교(三藏 十二部所詮敎)와 이()()()()()()()의 정도가 각각 같지 아니함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것은 종교적 수행과정을 말한 것으로 흔히 네 단계로 분류하여 敎法理法行法果法의 네 가지 법[四法]으로 설명한다. 敎法은 무명번뇌업을 쳐부수는 언어문구로 된 경론을 말한다. 理法이것은 함이 있는 세간 법이다. 이것은 함이 없는 세간을 벗어나는 법이다.’라고 진리를 뚜렷하게 밝힌 것을 말한다. 行法戒行定行慧行을 밝혀 놓은 것을 말한다. 果法은 번뇌가 꺼진 열반의 묘한 과보를 말한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법이 바로 별상법보이다. 이것은 다 나고 죽음의 고행을 벗어나게 하는 법으로서 중생을 인도하여 피안의 저쪽 언덕에 이르게 한다.

 

셋째, 별상승보(別相僧寶)는 수행의 단계를 말한 것으로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삼승(三乘)이 각각 수행방법과 증득의 과()가 다르므로 별상이라 한다. 삼승 중 성문은 사제법(四諦法)을 수행의 방법으로 삼고, 연각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수행의 방법으로 삼고, 보살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수행의 방법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소승인 성문과 연각보다는 대승인 보살의 수행을 더 중요시 한다. 그래서 보살수행의 계위(階位)52위로 나눈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의 지위에 있어야 별상승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주로 별상삼보를 그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삼보통청(三寶通請)의 삼보례(三寶禮)이다.

 

3) 일체삼보(一體三寶_

일체삼보를 동체삼보(同體三寶) 또는 동상삼보(同相三寶)라고도 한다. 일체삼보란 불보와 법보와 승보라고 하지만 그 본질은 같다는 뜻이다. 이것은 삼보의 본체인 진여법신(眞如法身)에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진여법신(眞如法身)에서 각조(覺照)를 부처라 부르고, 적멸(寂滅)을 법이라 부르며, 화합을 승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서 진여법신에 본래 갖추고 있는 완전 원만한 영각(靈覺)을 불보라 하고, 진여의 고요한 법성(法性)을 법보라 하며, 서로 다투는 허물이 없는 화합의 덕상(德相)을 승보라 한다. 이 삼보는 동일한 불체상(佛體相=眞如法身相)의 세 가지 덕[三德]을 세 가지 방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육조대사께서 마음을 깨달은 즉 부처요, 마음이 바른 즉 법이요, 마음이 깨끗한 것을 일러 승이다(心覺曰佛, 心正曰法, 心淸淨曰僧).”한 것도 이 일체삼보를 두고 한 말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재래의 삼보 해석과는 달리 완전히 파격적으로 삼보를 자성삼보(自性三寶)로 해석하였다.

선지식이여, 각각 스스로 살펴서 잘못 쓰지 말 것이니 經文에도 분명히 스스로의 부처[自佛]에 귀의하라하셨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하라는 말씀은 없으시니라.

제 부처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의지할 곳이 없나니 이제 이미 스스로 깨달았거든 각각 모름지기 제 마음의 삼보에 귀의하라. 안으로는 心性을 고르게 하고 밖으로는 남을 공경하는 것이 이 스스로 귀의함이니라.

선지식이여, 이미 스스로의 삼보[自三寶]에 귀의하였으니 다시 각각 마음을 가다듬으라. 내가 一體三身自性佛을 말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三身(=法身報身化身)을 분명히 보고 스스로 제 성품을 깨닫게 하리니 다 나를 따라서 이렇게 부르라.(한길로 번역, 육조단경(서울: 법보원, 1963), p.81)

 

위에서 인용한 이러한 해석이 바로 대표적인 일체삼보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화엄경의 삼보관, 즉 자귀의불 당원중생 , 자귀의법 당원중생 , 자귀의승 당원중생 등이 모두 일체삼보에 해당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승불교의 삼보관은 그 깊이가 각각 다르다. 그런데 실제로 대승불교에서는 거의 대부분 별상삼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현재 한국의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불교의례는 대부분 별상삼보에 관한 것이다. 주지삼보와 일체삼보를 신앙의 대상으로 한 의례는 극히 드물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실제의 신행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데, 굳이 등상불에 예배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하여 예배하지 않는다면 불교도로서의 신행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 삼보를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은 각기 다른 근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함이다. 상근기(上品)는 일체삼보에 귀의할 것이고, 중근기(中品)는 별상삼보에 귀의할 것이며, 하근기(下品)는 주지삼보에 귀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하근기가 주지삼보에만 집착하여 일체삼보의 참뜻을 모르면 삼보에 귀의하는 의의가 없게 된다. 반대로 상근기라고 해서 주지삼보를 너무 경시해서도 안 된다. 주지삼보가 없었더라면 불교는 지금까지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세 가지 종류의 삼보에 대한 해석은 김동화(金東華)가 지은 불교학개론(서울: 보련각, 1954, pp.445-447)에도 언급되어 있다. 요컨대 한글 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그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 삼보 중에서 가장 저급한 하품의 주지삼보를 믿는 사람들이다. 더욱이 이러한 삼보의 개념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포교한다고 설치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2018. 8. 2.

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