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칼럼

마성 2019. 2. 25. 00:02


    붓다의 어투에서 묻어나는 연륜

   

빨리어로 전승되어 온 율장과 경장을 읽다보면 살아있는 붓다의 생생한 육성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니까야를 접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율장과 경장에 서술된 붓다의 어투(語套)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율장에서 계를 제정하게 된 제계(制戒)의 인연을 살펴보면, 붓다의 어투는 매우 단엄하고 엄중하다.

 

어떤 제자가 출가 사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위를 저질러 붓다와 승가대중 앞에 불려왔을 때, 먼저 붓다는 그에게 그러한 행위를 저지른 것이 사실인가를 확인한다. 그런 다음 그가 그것이 사실이라고 시인하면, 붓다는 어리석은 사람아, 어떻게 사문이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매우 심하게 꾸짖는다. 그때 상기된 붓다의 모습과 찬물을 끼얹은 것과 같은 엄숙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어렵게 출가를 허락받았던 수딘나 깔란다까뿟따(Sudinna Kālandakaputta)가 예전의 아내와 성적 교섭을 행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그때 붓다는 그에게 이렇게 질책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아, 그것은 적합하지 않고, 적당하지 않으며, 적절하지 않고, 사문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며, 합법적이지 않다. 어리석은 사람아, 어떻게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하여 평생을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으로 인도할 수가 없다.”[Vin., p.20]

 

위 인용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사람[愚人]’은 빨리어 모가뿌리사(moghapurisa)’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를 호너(Horner)‘foolish man(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영역했다. 이와 같이 율장에 나타난 붓다의 어투는 찬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단엄하고 엄중하다.

 

율장에 의하면, 웨란자(Verañja)라는 바라문이 붓다께 고따마시여, 늙고 노쇠하고 고령인데다가 만년에 이른 바라문들에게 절하지도 않고 일어나 맞이하지도 않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는다면 고따마시여,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힐책했다. 그러자 붓다는 웨란자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라문이여, 나는 범천들과 악마들과 신들의 세계에서 사문과 바라문은 물론 신들과 인간들을 포함하여 내가 먼저 인사를 하거나 일어서서 맞이하거나 자리를 권할만한 자를 보지 못했다. 바라문이여, 그러므로 여래가 먼저 인사를 하거나 일어서서 맞이하거나 자리를 권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의 머리가 찢어질 것이다.”[Vin., p.2]

 

여기서 그의 머리가 찢어질 것이다(muddhāpi tassa vipateyya)’는 구절을 붓다고사는 율장의 주석서에서 그 사람의 목이 잘려 머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대목만 보면 상대방에게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저주와 악담에 가까운 어법이다. 과연 붓다가 동시대의 종교인인 바라문에게 이런 말을 구사했을까 의문스럽다. 혹시 후대의 율장이나 경장의 편찬자들이 삽입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디가 니까야<꾸따단따-숫따(Kūṭadanta-sutta)>(DN., p.143)에 같은 구절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꾸따단따 바라문이 붓다를 비방하면 그렇게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니까야 중에서도 세존께서 깨달음을 이룬 직후에 설한 경의 어투와 입멸 직전에 설한 경의 어투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붓다의 성도 직후 설한 대표적인 경은 <전법륜경><무아상경><빠사-숫따(Pāsa-sutta, 올가미경)> 등이다. 그 중에서 전도선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빠사-숫따>에 나오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한길로 가지 마라.”[SN., pp.105-106; Vin., pp.20-21]

 

위 경문에 나오는 길을 떠나라.(caratha)”거나 “둘이서 한길로 가지 마라.(Mā ekena dve agamettha.)”는 문장은 명령문이다. 이런 명령문은 수행자가 자주 사용하는 어법이 아니다. 이 '전도선언'에는 30대 중반이었던 붓다의 당당하고 강한 의지가 묻어난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훈시하는 지휘관의 모습이 연상된다. 반면 붓다의 만년에 설한 <마하빠리닙바나-숫따(대반열반경)>에 나타난 어투는 매우 부드럽고 자비스럽다. 그 중에서 한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붓다의 입멸 직전에 수밧다(Subhadda)라는 유행자가 찾아와 붓다께 여쭈어 볼 것이 있다고 붓다를 친견하고자 했을 때, 시자 아난다 존다는 외도의 유행자가 붓다를 성가시게 한다고 그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붓다는 그에게 친견할 기회를 주었다. 유행자 수밧다는 당대의 여섯 종교지도자들이 각자 자신이 최상의 지혜를 가졌다고 하는데, 어떤 자가 최상의 지혜를 가졌고 어떤 자가 최상의 지혜를 가지지 못했는가를 여쭈었다. 그때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支聖道]’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 수밧다여, 이 법과 율에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 ……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수밧다여, 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DN., p.151]

 

위 경문을 통해 외도 수밧다에 대한 붓다의 연민을 느낄 수 있다. 예전에 붓다가 외도를 대한 태도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외도 수밧다가 다른 종교지도자들이 최상의 지혜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붓다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돌려서 답변한다. 다만 우회적으로 외도의 주장은 진실이 아니고 자신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붓다의 어법이나 어투가 너무나 겸손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진은 스리랑카 폴론나루워 갈위하라의 선정에 든 좌불상이다. 사진은 글의 내용과 관련이 없다.  

 

위 경문에 나오는 여기에만(idheva)’이란 오로지 이 교법(sāsana, 붓다의 가르침)에만 성스러운 사문이 있다고 천명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첫 번째 사문이란 예류자(預流者), 두 번째 사문이란 일래자(一來者), 세 번째 사문이란 불환자(不還者), 네 번째 사문이란 아라한(阿羅漢)을 말한다. 이러한 네 부류의 성자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비구승가에서만 나올 수 있고, 다른 외도들의 교설(parappavāda)에서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도 유행자들은 62() 가운데 상견(常見, sassatavāda)을 주장하는 네 가지 사견(邪見)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아(自我, ātman)와 세계(世界, loka)가 영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결코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붓다는 이것을 분명히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투는 매우 부드럽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범부도 연륜에 따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타인에 대한 연민의 정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나 자신의 체험을 통해 실감하고 있다. 나도 예전에는 직설법을 많이 사용하여 불필요한 반감을 갖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직설법보다는 은유법이나 비유법을 많이 사용한다. 그만큼 나 자신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모두 나이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번뇌 다한 아라한도 연륜에 따라 어투에 차이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한 유행자 수밧다는 제1결집의 동기가 되었던 늦깎이(buḍḍhapabbajita) 수밧다(Subhadda)’와는 다른 인물이다. 빨리 문헌에는 수밧다라는 이름을 가진 일곱 명의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나타난다. 어느 수밧다인지는 역사를 통해 구분할 수밖에 없다.

 

2019. 2. 24.

마성 이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