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칼럼

마성 2019. 5. 13. 09:56

마성스님의 법담법화

1. 불교에서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붓다가 설한 법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교법으로서의 법(pariyatti-dhamma)이고, 다른 하나는 통찰로서의 법(paṭivedha-dhamma)이다. 전자를 교법(pariyatti)이라 하고, 후자를 수행(paṭipatti)이라 한다. 붓다시대부터 비구 승가는 교법을 중시하는 그룹과 수행을 중시하는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성향이 전혀 다른 두 그룹은 경쟁과 대립의 관계였으며, 간혹 서로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교법과 수행은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두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꼬살라국의 수도 사왓티에 귀족가문 출신의 절친한 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어느 날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의 원림(급고독원)을 방문하여 붓다의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함께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출가한 두 친구는 각자 스승을 정해 율장에 정해진 규율대로 5년 간 기초과정을 배우고 익혔다. 그런 다음 두 친구 비구는 서로 헤어졌다.

 

친구 사이였던 두 비구 중에서 나이가 적은 비구는 교법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법문(pariyāya)을 배워 교법에 통달한 법의 교사(dhamma-ānussāsaka)가 되었다. 그는 오백 명의 비구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올랐으며, 다른 열여덟 가지나 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면 나이가 많은 비구는 교법보다는 수행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붓다로부터 사념처(四念處) 수행법을 자세히 배웠다. 그는 사념처 수행법대로 열심히 정진한 결과 오래지 않아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 그때 한 무리의 비구들이 그에게로 와서 수행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는 그 비구들에게 수행법을 잘 지도하여 그들도 모두 아라한이 되게 하였다.

 

한편 헤어진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두 친구는 오랜만에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에서 만났다. 그때 교학에 전념한 비구는 수행에 전념한 비구가 아라한이 된 줄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이 높다는 것을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는 법과 율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친구 비구에게 던져서 그를 당황하게 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붓다는 천안으로 전후 사정을 살펴본 후, 나이가 적은 비구가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붓다는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두 비구에게 법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법문에 자신이 있었던 비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반면 아라한과를 증득한 비구는 정확하게 답변했다. 왜냐하면 나이가 적은 비구는 문자만으로 법문의 의미를 알았을 뿐, 수행의 체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붓다는 아라한이 된 나이가 많은 비구를 칭찬하였다. 그 때문에 나이가 적은 비구는 마음속으로 불만이었다. 자기와 같은 우수한 제자에 대해서는 칭찬해 주지 않고 아둔한 친구 비구만 칭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교법에 대해 공부하되 수행이 없는 사람은 마치 남의 소를 보살펴 주고 삯을 받는 목동과 같으며, 직접 수행을 하는 사람은 목장의 주인과 같다고 일러주었다. 자기가 목장의 주인이 되어야만 소가 생산해 내는 우유와 치즈 등을 마음대로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국 명상센터에서 45일간 수행 정진하는 모습

 

법의 교사는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에 빠져서 자칫 진실한 내적 경지를 등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문자적인 의미는 잘 모른다 할지라도 실제 수행을 통해 깨달은 수행자는 근본적인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였으므로 그런 사람이 오히려 올바른 붓다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수행자라야 올바른 수행의 힘으로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을 마음을 잘 제어하여 마음의 고요함을 성취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는 평화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윤회의 거센 파도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이 체득한 기쁨과 자유로움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게 된다. 이와 같이 설한 다음, 붓다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비록 많은 경을 독송할지라도,

게을러 수행하지 않으면,

마치 남의 목장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나니,

수행자로서 아무런 이익이 없다. <19>

 

비록 경을 적게 독송할지라도 법을 실천 수행하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을 없애고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여

번뇌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현재와 미래에 집착이 없어지면

이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참된 이익,

그는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 <20>

 

위 내용은 담마빠다(Dhammapada, 법구경)의 제1<대구(對句)의 장()>에 나오는 게송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이다. 또한 이 게송은 불교에서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를 비유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학문보다 수행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스스로 실천하여 얻는 바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치 종일토록 남의 돈을 세는 것과 같이 자신의 이익이 되지 못한다. 불교에서 일관되게 실천을 강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오직 자신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 열반을 증득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붓다의 열 가지 명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 vijjācaraṇasampanna)이란 이름이 있다. 빨리어 윗짜(vijjā)는 지혜[]이고, 짜라나(caraṇa)는 실천[]이며, 삼빤나(sampanna)는 갖춤[具足]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명행족은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분, 즉 앎과 실천을 두루 갖춘 분이라는 의미이다. 붓다는 언제나 언행(言行)이 일치했다. 그러므로 지혜의 눈과 실천하는 발[智目行足]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불교도가 되며, 크나큰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법보신문》제1489호, 2019년 5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