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칼럼

마성 2021. 1. 28. 22:39

마성 스님의 법담법화(38)

 

38. 짐과 짐꾼의 비유

 

이번 주 법담법화에서는 좀 무거운 주제에 해당되는 윤회의 주체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를 논함에 있어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짐과 짐꾼에 대한 비유 설명이다. 여기서 짐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무아론과 유아론으로 갈라진다.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내부에서 뿍갈라(puggala)가 윤회의 주체 역할을 담당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부파불교 시대의 독자부(犢子部)에서 뿌드갈라(pudgala)가 윤회의 주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보특가라설(補特伽羅說)’이라고 한다.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독자부에서는 보특가라는 오온에 상즉하거나[卽蘊] 오온을 여읜 것[離卽]도 아니고, 오온십이처십팔계에 의해 임시로 시설한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보특가라는 오온에 즉한 것도 아니고, 오온에 즉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이 윤회의 주체라고 주장했다. 만약 오온을 윤회의 주체라고 하면 붓다의 무아설에 위배되기 때문에 보특가라는 오온도 아니고 오온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궤변이다.

 

이러한 독자부의 주장에 대해 다른 부파에서는 불설에 위배된다고 크게 반발했다. 특히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는 경량부(經量部)의 입장에서 보특가라설이 불설에 위배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가 아비달마구사론의 파집아품(破執我品)’을 저술한 목적도 바로 이 독자부의 보특가라설을 논파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독자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보특가라를 윤회의 주체로 인정하게 되면,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뜨만(ātman, 自我)과 조금도 차이가 없게 된다.

 

독자부에서는 바라 숫따(Bhāra-sutta, 짐경)’(SN22:22)에서 붓다가 직접 뿍갈라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면 붓다는 윤회의 주체라는 의미로 뿍갈라라는 용어를 사용했는가? 그렇지 않다. 붓다는 뿍갈라라는 용어를 윤회의 주체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바라-숫따에서 붓다는 오온에 대한 집착인 오취온(五取蘊)을 짐(bhāra), 짐꾼(bhārahāra), 짐을 짊어짐(bhāradāna), 짐을 내려놓음(bhāranikkhepana)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이 경과 대응하는 잡아함경 제3권 제73경에서는 무거운 짐[重擔], 짐을 짊어짐[取擔], 짐을 내려놓음[捨擔], 짐꾼[擔者] 순으로 되어 있다. 한역의 순서가 더 합리적이다.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청정도론󰡕(ⅩⅥ.87)에서 이 부분을 사성제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비유하면 고제(苦諦)는 짐(bhāra)처럼, 집제(集諦)는 짐을 지는 것처럼, 멸제(滅諦)는 짐을 내려놓는 것처럼, 도제(道諦)는 짐을 내려놓는 방법처럼 보아야 한다.”

 

바라-숫따에서 말하는 짐이란 오온에 대한 집착인 오취온이다. 짐을 짊어짐이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渴愛)이다. 짐을 내려놓음이란 갈애가 남김없이 떠나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짐꾼(bhārahāra)이란 무엇인가? ‘뿍갈라(puggala)’라고 말해야 한다. 이 존경받는 사람, 이와 같은 이름, 이와 같은 족성(族姓)을 가진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짐꾼이라고 한다.”(SN..25) 한역에서는 누가 짐꾼[擔者]인가? 이른바 사부(士夫)’가 그들이니, 사부란 이러이러한 이름으로 이러이러하게 태어난 이러이러한 족성(族姓)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먹으며, 이러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고 이러이러한 수명을 누리다가 이러이러하게 오래 머무르며, 이러이러한 수명의 제한을 받는 사람들이다.”(T2, p.19a)

 

바라-숫따중담경(重擔經)’에 나타나는 뿍갈라(puggala)’사부(士夫)’는 그냥 사람을 의미한다. 어떤 본질적인 실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뿍갈라, 개아(個我), 인간, 사람 등은 단지 오온에서 파생된 것으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인습적 표현이나 개념일 뿐, 그 자체로 본질적인 실체는 아니다.” 주석서에서도 짐꾼(bhārahāra)이라는 말은 사람(puggala)을 의미하는 인습적 표현일 뿐임을 보여준다. 이 사람이라 불리는 것은 재생의 순간에 오온이라는 짐(khandha-bhāra)을 짊어지고 이 오온이라는 짐을 목욕시키고 먹이는 등 일생동안 유지하다가 죽음의 순간에 그것을 버리고 다시 재생의 순간에 또 다른 오온이라는 짐을 짊어지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와 같이 짐꾼(bhārahāra)은 인습적으로 표현하는 어떤 사람(puggala)’을 지칭한다. 결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짐을 나르는 어떤 본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부에서는 이 보특가라를 윤회의 주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학자들 중에서도 짐꾼(보특가라)을 사람이 죽을 때 짐을 내려놓고 다시 태어날 때 짐을 짊어지고 가는 어떤 실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ra)가 지적했듯이, “오온 내에서 뿐만 아니라 오온 밖이나 오온에서 멀리 벗어난 곳 어디에도 자아나 아뜨만이 없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따라서 바라하라(bhārahāra)’짐을 나르는 자로 번역하면 어떤 실체를 운반하는 자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짐꾼이 가장 적합한 번역어라고 생각한다.

 

붓다의 무아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붓다는 윤회의 주체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윤회의 주체가 없다면, ‘누가 과보를 받으며 누가 열반을 성취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부파불교 시대의 논사들은 윤회의 주체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어떤 것을 고안해 내었다. 그것이 바로 설일체유부의 명근(命根), 대중부의 근본식(根本識), 독자부와 정량부의 보특가라(補特伽羅), 상좌부의 유분식(有分識, bhavaṅga), 경량부의 종자(種子, bīja), 화지부의 궁생사온(窮生死蘊) 등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업과 과보가 없다거나 윤회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윤회설이다. 무아와 윤회는 결코 모순적인 것이 아니다.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법보신문1565, 20201216, 13

 

 

인도의 웃따르 쁘라데쉬(Uttar Pradesh) ()의 사르나트(Sarnath)에 위치한 사슴 동산은 붓다께서 최초로 법을 설한 곳이며, 이곳에서 다섯 고행자들이 붓다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이룬 장소일 뿐만 아니라 최초로 불교승가가 탄생한 성스러운 곳이다. 이 성스러운 장소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 다메크 수뚜빠(Dhamekh Stupa)’이다. 이 장엄한 탑의 높이는 128피트이고, 지름은 93피트이다.